레닌주의의 기초/레닌주의의 역사적 근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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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레닌주의의 제국주의의 제조건 아래서, 즉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점에 다다르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당면한 실천적 문제로 되었을 때, 노동계급이 혁명을 준비하던 구시대가 새로운 시대, 즉 자본주의에 대한 직접적 공격의 시대에 접어들었던 때에 성장하고 구체화되었다.
|내용 = 레닌주의는 제국주의의 제 조건하에서 자라났고 실현되었다. 제국주의 시대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도에 달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직접적 실천의 문제로 대두된 시기이다. 혁명의 준비기가 절정에 이르고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에 전면적 공세를 취하는 새로운 시기로 들어선 시대이다.




레닌은 제국주의를 “사멸해가는 자본주의”라 불렀다. 왜냐하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최후의 한계로까지, 혁명이 시작되는 극한까지 이끌어갔기 때문이다.  
레닌은 제국주의를 “죽어가는 자본주의”라고 불렀다. 왜 그런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모순들을 마지막 한계까지 밀고 갔기 때문이다. 이 극단을 넘어서면 혁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모순들 중 다음의 세 가지 모순이 가장 중요하다.




제1의 모순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모순이다. 제국주의는 산업 국가에서 독점적인 트러스트와 신디케이트, 은행과 금융과두제를 지닌 전지전능의 권력이다. 이 전지전능한 권력에 대한 투쟁에서 노동계급이 지닌 일상적 방식−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의회정당과 의회투쟁−으로는 아주 불충분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자본의 처분에 자신을 맡기고 예전과 마찬가지로 비참한 생활을 계속하면서 밑바닥으로 영락해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무기를 채택할 것인가−이것이 제국주의가 거대한 프롤레타리아트 대중 앞에 제기한 양자택일이다. 제국주의는 노동계급을 혁명으로 이끌어간다.
첫째 모순은 노동과 자본 간의 모순이다. 제국주의는 산업 국가에 있어서 독점적 트러스트와 신디케이트, 은행과 금융과두제의 막대한 권력이다. 이 막대한 권력에 맞서는 투쟁에서 노동계급의 관습적 방법들인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원내정당과 의회투쟁은 이미 무력화되었다. 자본의 자비심에 매달려서 여전히 이럭저럭 살아가며 점점 나락으로 떨어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무기를 집어 들 것인가. 이것이 제국주의가 대다수 프롤레타리아 대중에게 제기한 양자택일이다. 제국주의는 노동계급이 혁명에 나서도록 하고 있다.




제2의 모순은 원료산지와 타국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금융세력들과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모순이다. 제국주의는 원료산지에 대한 자본의 수출이며, 원료산지의 독점적 소유를 위한 광적인 투쟁이자 이미 분할된 세계의 재분할을 위한 투쟁이며, 장악한 것을 완강히 고수하고 있는 구금융세력들과 열강에 대항하여 ‘태양이 뜨는 대지’를 노리는 신세력들과 열강에 의해 더욱 광폭하게 수행되는 투쟁이다. 자본가들의 여러 다양한 세력들 사이의 이러한 광폭한 투쟁은 제국주의 전쟁, 즉 타국의 영토를 강탈하기 위한 전쟁을 불가피한 요소로서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이러한 상황은 제국주의 상호간을 약화시키고 자본주의의 위치를 전반적으로 약화시키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도래를 가속화시키는 동시에 이 혁명이 실천적 필연성을 갖게 만든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둘째 모순은 각종 금융 패거리들 간이나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모순이다. 이들은 원료산지와 타국 영토를 약탈하기 위해 서로 싸운다. 제국주의는 원료산지에 자본을 수출한다. 원료산지를 독점하려고 광적으로 발버둥 친다. 이미 분할된 세계를 재분할하려고 발악한다. “태양이 비치는 찬란한 대지”를 찾는 신흥 금융 패거리와 열강은 이미 약탈한 것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는 기성 패거리와 열강에 대항하여 아주 맹렬히 싸운다. 자본가 패거리들 간의 이런 광적인 싸움은 제국주의 전쟁의 불가피한 원인이 된다. 제국주의 전쟁은 타국 영토를 약탈하는 전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주의자들은 서로를 약화시킨다. 일반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진지(陣地)가 약화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촉진되고 필연적인 실천적 문제가 된다.




제3의 모순은 한줌의 지배 ‘문명’ 민족과 수억에 달하는 세계의 식민지 및 종속국 인민 사이의 모순이다. 제국주의는 방대한 식민지 및 종속국에 살고 있는 수억의 인민에 대한 가장 파렴치한 착취이자 가장 비인간적인 압제이다. 이러한 착취와 입제의 목적은 초과이윤을 수탈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들 국가를 착취하면서 제국주의는 그곳에 철도와 공장, 제재소, 그리고 공업과 상업 중심지들을 건설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출현, 토착 인텔리겐치아의 등장, 민족의식의 각성, 해방운동의 성장-이러한 것들은 ‘정책’의 필연적 결과이다. 모든 식민지와 종속국에서 혁명운동의 성장은 예외 없이 이같은 사실을 분명히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식민지와 종속국들을 제국주의의 예비군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예비군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약화시키므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셋째 모순은 한 줌의 지배 “문명”민족과 수억에 달하는 세계의 식민지 및 종속국 인민 간의 모순이다. 제국주의는 광대한 식민지 및 종속국에 살고 있는 수억의 인민을 그야말로 파렴치하게 착취하고 그야말로 비인간적으로 억압한다. 이러한 착취와 억압의 목적은 초과이윤을 짜내는 것이다. 그러나 착취하기 위해서 제국주의는 철도, 공장, 제분소, 상공업 중심지를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정책”의 필연적 결과로 노동계급이 출현하고, 토착 인텔리가 등장하며, 민족의식이 깨어나 해방운동이 강화된다. 예외 없이 모든 식민지와 종속국에서 혁명운동이 강화되고 있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상황이 노동계급에게 중요한 것은 식민지 및 종속국을 제국주의의 예비군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예비군으로 전화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진지를 뿌리째 헐어 버리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것이 낡고 "번영하는" 자본주의를 죽어가는 자본주의로 전환시킨 제국주의의 주요 모순이다.
이것이 대체로 이전의 “꽃피우던” 자본주의를 죽어가는 자본주의로 전화시킨 제국주의의 주된 모순들이다.




10년 전에 발발했던 제국주의전쟁의 의의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 전쟁이 모든 모순을 한 덩어리로 모아 그것을 저울 위에 내던졌으며 그럼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투를 가속화하고 촉진시켰다는 사실에 있다.  
10년 전에 발발한 제국주의 전쟁<ref>제1차 세계대전 -- '''역자의 주'''</ref>은 무엇보다도 모든 모순을 한데 묶어 저울 한편에 올려놓음으로써 노동계급의 혁명적 전투를 가속화하고 쉽게 해 주었다.




다시 말해서, 제국주의는 혁명이 실천적 필연성을 갖게 하는데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요새에 대한 직접적 공격을 위해 호조건을 창출하는 유효한 수단이었다.  
달리 말해 제국주의 전쟁은 혁명을 필연적인 실천적 문제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본거지를 직접 공격하는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이것이 레닌주의를 탄생시켰던 국제적 상황이었다.
이것이 레닌주의가 태어난 국제정세이다.




많은 나라 가운데 왜 러시아가 레닌주의의 모국이 되었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과 전술의 탄생지가 되었는가?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건 모두 옳지만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도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던 러시아가 여기에 무슨 상관이 있는가? 무엇보다 주로 러시아에서, 러시아를 위해 활동한 레닌이 여기에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무슨 까닭에 다름 아닌 러시아가 레닌주의의 모국이 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과 전술의 발원지가 되었는가?




왜냐하면 러시아는 제국주의가 갖는 이 모든 모순들의 집합점이었으며,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혁명을 잉태했고, 따라서 러시아만이 이러한 모순을 혁명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러시아가 제국주의의 모든 모순의 중심 고리였기 때문이다.




먼저, 차르 러시아는 가장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형태로 가해지던 모든 종류의 억압(자본주의적⋅식민지적⋅군국주의적)의 본고장이었다. 러시아에서 자본이 가진 전지전능한 권력은 차리즘의 전제와 결합되었고, 러시아 민족주의의 공격성은 비러시아계 인민에 대한 사형집행자로서 차리즘의 역할과 결합되었고, 또 취약한 지역들(터키⋅페르시아⋅중국)에 대한 착취는 차리즘에 의한 이들 지역의 강탈이나 정복전쟁과 결합되었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는가? 레닌이 차리즘을 “군사적-봉건적 제국주의”였다고 말한 것은 정당했다. 차리즘은 제국주의의 가장 사악한 특징의 집약이었으며 그것을 고도로 끌어올렸다.
그것은 러시아가 다른 나라보다 혁명적 기운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었으며 오직 러시아만이 혁명적 방법으로 이 모순들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차르 러시아는, 연료와 야금산업과 같은 러시아 민족경제의 기본분야를 지배하고 있었던 그런 외국자본의 자유로운 참여를 허용했다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수백만의 군인들을 제공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도 서구 제국주의의 중요한 예비군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자본가들의 엄청난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제국주의전선에서 피를 흘렸던 1,400만의 러시아군대를 기억해 보라.
첫째로, 짜르 러시아는 가장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온갖 종류의 억압 즉 자본주의적, 식민지적 및 군사적 억압의 발원지였다. 알다시피, 러시아에서는 자본의 힘이 짜리즘의 폭정과 결합되어 있었다. 러시아 민족주의의 침략성은 비러시아 인민에 대한 짜리즘의 잔인무도한 정책과 결합되어있었다. 그리고 터키, 페르시아, 중국 등 광범한 지역에 대한 착취는 짜리즘의 강탈이나 정복전쟁과 결합되어 있었다. 레닌이 짜리즘을 “군사적-봉건적 제국주의”라고 한 것은 옳은 말이었다. 제국주의가 갖는 최악의 특징들이 짜리즘에 집중되었고, 짜리즘은 그것을 더욱 악화시켰다.




더 나아가, 차리즘은 유럽 동부에서 제국주의의 파수견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파리와 런던⋅베를린과 브뤼셀에서 제공된 차관에 대한 이자를 수억의 주민들에게서 갈취하려는 서구 제국주의의 대리인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차리즘은 터키⋅페르시아⋅중국 등을 분할할 때 서구 제국주의의 가장 충실한 동맹자였다.
다음으로 짜르 러시아는 서구 제국주의의 가장 큰 예비군이었다. 이것은 외국자본이 연료 및 금속공업과 같은 러시아 민족경제의 기본분야를 자유로이 통제하였다는 것에서뿐만이 아니다. 러시아가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수백만 병사를 제공하였던 의미에서도 그렇다. 영국과 프랑스 자본가들의 엄청난 이윤을 보호하기 위해 제국주의 전장에서 1,400만의 러시아 병사가 피 흘린 사실을 상기해 보라.




이것이 바로 짜르주의와 서구 제국주의의 이해관계가 서로 얽혀 궁극적으로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라는 단일한 타래로 합쳐진 이유이다.
그 다음으로 짜리즘은 동유럽에서 제국주의의 사냥개였을 뿐만 아니라 빠리와 런던, 베를린, 브뤼셀에서 제공된 차관에 대한 수백만금의 이자를 수억의 주민에게서 짜내는 서구 제국주의의 앞잡이였다.




서구 제국주의가 차리즘을 방어하고 유지하기 위해 러시아에서의 혁명에 대해 생사의 투쟁을 벌이는 데 전력을 다하지 않고서, 낡고 전제적이며 부르주아적인 러시아라는 동방의 강력한 예비대와 인력 및 자원의 풍부한 저장고의 손실을 체념할 수 있었을까? 물론 아니다.
마지막으로, 짜리즘은 터키, 페르시아, 중국 등을 분할하는 데 있어서 서구 제국주의의 가장 충실한 동맹자였다. 알다시피, 짜리즘은 협상국<ref>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중심의 동맹국의 반대 진영인 프랑스, 영국, 러시아 -- '''역자의 주'''</ref> 제국주의자들과 동맹하여 제국주의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중요 참전국이었다.




그러나 방금 말한 것으로부터, 차리즘을 공격하고자 했던 누구라도 반드시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손을 치켜들었고, 차리즘에 대항하여 일어섰던 그 누구라도 동시에 제국주의에 반항하여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차리즘을 타도하는 데 전념했던 누구든지 간에 만약 그가 진정으로 차리즘을 패퇴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완전히 일소하려고 했다면, 제국주의 역시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리즘에 대한 혁명은 제국주의에 대한 혁명,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에 가까웠으며 그것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짜리즘과 서구 제국주의의 이해관계가 서로 얽혀 마침내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라는 하나의 실타래를 이룬 이유이다.




한편으로, 러시아에서 거대한 인민혁명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지도되었으며, 그들은 러시아의 혁명적 농민층과 같은 중요한 동맹군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혁명이 중도에 멈춰질 수 없었다는 것, 그것이 성공했을 더욱 더 나아가야 했으며 제국주의에 대항해 반기를 들어야 했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는가?
이전의 전제적이고 부르주아적인 러시아는 서구 제국주의에게 동방의 강력한 기둥이고 병력과 자원의 풍부한 저수지였다. 이런 러시아를 잃어버리게 되었을 서구 제국주의가 러시아 혁명에 반대하고 짜리즘을 방어 보전하기 위한 결사적 투쟁을 단념하겠는가? 물론 아니다.




요컨대 이들 모순이 특히 역겨워 견디기 어려운 특징으로 인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곳이 바로 러시아였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또 러시아가 서구 금융자본을 동방의 식민지들과 연결시켜주는 서구 제국주의의 매우 중요한 후원자였기 때문일 뿐 아니라, 러시아가 제국주의의 모순을 혁명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 세력이 실재했던 유일한 국가였다는 이유에서도 러시아는 제국주의의 모순의 집합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짜리즘을 공격하려는 자는 누구나 불가피하게 제국주의를 공격하게 되고, 짜르에 대항하려는 자는 누구나 제국주의에 대항하게 된다. 짜리즘을 전복하려는 자가 참으로 짜리즘을 단지 패퇴시킬 뿐만 아니라 여지없이 소탕하려고 생각했다면 제국주의도 역시 전복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짜리즘에 반대하는 혁명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성장 전화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러시아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 시초부터 그것은 국제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 그러므로 그것은 세계 제국주의의 바로 그 기초를 흔들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도출된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위대한 인민혁명은 세계에서 가장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가 지도하였으며,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러시아의 혁명적 농민과 같은 소중한 동맹자가 있었다. 혁명은 중도에 멈추지 않았다. 혁명은 승리하여 마침내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봉기의 기치를 높이 들고 앞으로 더욱 전진하였다. 이것을 구태여 증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한 상황 아래서,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활동을 러시아혁명이라는 좁은 민족적 테두리 안에 가둬둘 있었겠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반대로, 국내적이고(심각한 혁명적 위기) 국외적인(전쟁) 상황 전체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활동에서 이러한 테두리를 뛰어넘게 만들었고, 투쟁을 국제적 영역으로 이전하게 만들었으며, 제국주의의 병폐를 폭로하고 자본주의의 붕괴가 필연적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사회배외주의와 사회평화주의를 타파하고, 마침내 그들 자신이 그 나라에서 자본주의를 타파케 만들었으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본주의 타도의 과업을 용이하게 해주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투쟁무기(프롤레타리아트의 이론과 전술)를 만들어내도록 하였다.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은 결코 달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오직 이 길만이 부르주아적 질서의 부활로부터 러시아를 수호할 수 있는 국제적 상황의 확실한 변화를 가져올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러시아는 제국주의의 모순들이 집중된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제국주의 모순의 중심 고리가 된 것은 모순들이 러시아에서 특히 추악하고 참을 없는 것이어서 쉽게 폭로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또 러시아가 서구 금융자본을 동방의 식민지와 연결시켜 주는 서구 제국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둥이였기 때문만도 아니다. 러시아가 제국주의 모순의 중심 고리가 된 것은 러시아가 제국주의 모순을 혁명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재적 세력이 존재했던 유일한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러시아는 레닌주의의 모국이 되었으며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 레닌은 그것의 창시자가 되었다.
바로 때문에 러시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되었으며 그 발전의 첫날부터 국제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세계 제국주의의 지반 그 자체를 뒤흔들어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세기의 40년대 독일, 마르크스, 엥겔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와 레닌의 경우에도 대략 동일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독일은 20세기 초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혁명을 잉태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당시 공산주의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런 상황하에서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 활동을 러시아 혁명이라는 좁은 민족적 범위 내에 제한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반대로 정세는 국내정세(심각한 혁명적 위기)나 국제정세(전쟁)나 모두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 활동의 범위를 국제적 무대로 옮아가게 만들었다.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은 제국주의의 병폐를 폭로하고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파멸을 증명하며 사회배외주의와 사회평화주의를 분쇄하였다. 결국 러시아에서 자본주의를 전복한 데 기초해서 노동계급을 위한 새로운 투쟁의 무기,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과 전술을 만들어내어 전 세계 노동계급이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활동을 촉진하였다.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은 달리 행동할 수 없었다. 오직 이 길만이 부르주아 질서의 복구로부터 러시아를 지킬 수 있는 국제정세의 일정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용문|공산주의자들은 주로 독일에 관심을 돌린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영국보다 훨씬 더 발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유럽 문명의 더 발전된 조건 하에서 수행될 부르주아 혁명의 직전에 있기 때문이다. 17세기, 18세기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부르주아 혁명은 바로 뒤따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서막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ref>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Selected Works, Vol. I, 제1권, 모스크바 1951, 61쪽).</ref>}}
이것이 바로 러시아가 레닌주의의 발원지가 되고 러시아 공산주의자의 지도자인 레닌이 레닌주의의 창시자가 된 이유이다.




20세기 초의 러시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러시아는 부르주아 혁명 직전이었다. 그녀는 유럽의 상황이 더 발전된 시기에, 그리고 1840년대 독일(영국과 프랑스는 물론이고)보다 더 발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이 혁명을 완수해야 했다. 더욱이 모든 증거는 이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조이자 발효물이 될 것임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혁명이 아직 초기 단계에 있던 1902년 초에 레닌이 자신의 팜플렛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예언적인 말을 쓴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
러시아와 레닌에게 “일어난 일”은 1840년대에 독일과 맑스, 엥겔스에게 일어난 일과 같다. 당시 독일은 20세기 초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혁명의 기운이 넘쳐나고 있었다. 맑스는 당시 “공산당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인용문|역사는 이제 모든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모든 당면 과제 중 가장 혁명적인 당면 과제로 우리<ref>,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 -- '''필자의 주'''</ref>에게 직면했다." ,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 반동의 가장 강력한 보루가 파괴되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국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가 될 것이다."(Vol. IV, p. 382 참조) .}}
{{인용문|공산주의자들이 독일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독일이 부르주아 혁명의 전야에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부르주아 혁명은 17세기 영국이나 18세기의 프랑스보다 더 발전된 유럽문명의 조건하에서, 그리고 더욱 발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수행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독일의 부르주아 혁명은 오직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직접적인 서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ref>맑스, “공산당 선언”, ≪카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박종철출판사, pp. 432-433. 여기에는 역자가 일부 수정한 번역을 실었다. -- '''역자의 주'''</ref>}}




혁명운동의 중심이 러시아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혁명운동의 중심이 독일로 이동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러시아 혁명의 과정은 레닌의 예측이 입증된 것 이상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맑스가 지적한 상황이 독일이 과학적 사회주의의 발원지가 된 바로 그 원인이며 독일 노동계급의 지도자인 맑스와 엥겔스가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가 된 의심할 바 없는 원인이다.




결국 그러한 혁명을 성취하고 그러한 프롤레타리아트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과 전술의 발상지였다는 것이 놀라운 일인가?
20세기 초의 러시아도 같은 상황이었다. 물론 그 정도는 훨씬 더 심하였다. 러시아는 당시 부르주아 혁명의 전야였다. 이 부르주아 혁명은 당연히 유럽의 상황이 더욱더 진전된 조건하에서, 그리고 1840년대 독일의 부르주아 혁명 때보다도(영국과 프랑스의 부르주아 혁명은 말할 것도 없고) 더욱 발전된 노동계급과 함께 수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사실은 부르주아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촉매이자 서곡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 레닌이 이 이론과 전술의 창시자이자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인가?
레닌은 러시아 혁명이 겨우 맹아적 시기였던 1902년에 일찍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예지적 발언을 하였다. 이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인용문|역사는 지금 우리 앞에<ref>즉 러시아 맑스주의자 앞에 -- '''필자의 주'''</ref> 긴급한 임무를 제기하였다. 그것은 어떤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모든 긴급한 임무보다도 가장 혁명적인 임무이다. … 이 업무의 실현, 즉 유럽의 반동뿐만 아니라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시아적 반동의 가장 강력한 방파제를 파괴하는 일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인 전위로 만들 것이다.<ref>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 저작선≫, 거름, p. 148.</ref>}}
 
달리 말해, 혁명운동의 중심이 러시아로 옮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러시아 혁명의 과정은 레닌의 예지적 발언을 확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성취하고 혁명을 성취한 노동계급을 가진 나라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과 전술의 발원지가 된 것이 어찌 놀랄 일이겠는가?
 
 
동시에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인 레닌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이론과 전술을 창시하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가 것이 어찌 놀랄 일이겠는가?
<hr>
<hr>
{{문단 내 각주}}
{{문단 내 각주}}

2024년 6월 23일 (일) 18:29 기준 최신판

레닌주의의 기초
I. 레닌주의의 역사적 근원

레닌주의는 제국주의의 제 조건하에서 자라났고 실현되었다. 제국주의 시대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도에 달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직접적 실천의 문제로 대두된 시기이다. 혁명의 준비기가 절정에 이르고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에 전면적 공세를 취하는 새로운 시기로 들어선 시대이다.


레닌은 제국주의를 “죽어가는 자본주의”라고 불렀다. 왜 그런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모순들을 그 마지막 한계까지 밀고 갔기 때문이다. 이 극단을 넘어서면 혁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모순들 중 다음의 세 가지 모순이 가장 중요하다.


첫째 모순은 노동과 자본 간의 모순이다. 제국주의는 산업 국가에 있어서 독점적 트러스트와 신디케이트, 은행과 금융과두제의 막대한 권력이다. 이 막대한 권력에 맞서는 투쟁에서 노동계급의 관습적 방법들인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원내정당과 의회투쟁은 이미 무력화되었다. 자본의 자비심에 매달려서 여전히 이럭저럭 살아가며 점점 나락으로 떨어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무기를 집어 들 것인가. 이것이 제국주의가 대다수 프롤레타리아 대중에게 제기한 양자택일이다. 제국주의는 노동계급이 혁명에 나서도록 하고 있다.


둘째 모순은 각종 금융 패거리들 간이나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모순이다. 이들은 원료산지와 타국 영토를 약탈하기 위해 서로 싸운다. 제국주의는 원료산지에 자본을 수출한다. 원료산지를 독점하려고 광적으로 발버둥 친다. 이미 분할된 세계를 재분할하려고 발악한다. “태양이 비치는 찬란한 대지”를 찾는 신흥 금융 패거리와 열강은 이미 약탈한 것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는 기성 패거리와 열강에 대항하여 아주 맹렬히 싸운다. 자본가 패거리들 간의 이런 광적인 싸움은 제국주의 전쟁의 불가피한 원인이 된다. 제국주의 전쟁은 타국 영토를 약탈하는 전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주의자들은 서로를 약화시킨다. 일반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진지(陣地)가 약화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촉진되고 필연적인 실천적 문제가 된다.


셋째 모순은 한 줌의 지배 “문명”민족과 수억에 달하는 세계의 식민지 및 종속국 인민 간의 모순이다. 제국주의는 광대한 식민지 및 종속국에 살고 있는 수억의 인민을 그야말로 파렴치하게 착취하고 그야말로 비인간적으로 억압한다. 이러한 착취와 억압의 목적은 초과이윤을 짜내는 것이다. 그러나 착취하기 위해서 제국주의는 철도, 공장, 제분소, 상공업 중심지를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정책”의 필연적 결과로 노동계급이 출현하고, 토착 인텔리가 등장하며, 민족의식이 깨어나 해방운동이 강화된다. 예외 없이 모든 식민지와 종속국에서 혁명운동이 강화되고 있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상황이 노동계급에게 중요한 것은 식민지 및 종속국을 제국주의의 예비군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예비군으로 전화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진지를 뿌리째 헐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체로 이전의 “꽃피우던” 자본주의를 죽어가는 자본주의로 전화시킨 제국주의의 주된 모순들이다.


10년 전에 발발한 제국주의 전쟁[1]은 무엇보다도 이 모든 모순을 한데 묶어 저울 한편에 올려놓음으로써 노동계급의 혁명적 전투를 가속화하고 쉽게 해 주었다.


달리 말해 제국주의 전쟁은 혁명을 필연적인 실천적 문제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본거지를 직접 공격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이것이 레닌주의가 태어난 국제정세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건 모두 옳지만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도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던 러시아가 여기에 무슨 상관이 있는가? 무엇보다 주로 러시아에서, 러시아를 위해 활동한 레닌이 여기에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무슨 까닭에 다름 아닌 러시아가 레닌주의의 모국이 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과 전술의 발원지가 되었는가?


그것은 러시아가 제국주의의 모든 모순의 중심 고리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러시아가 다른 나라보다 혁명적 기운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었으며 오직 러시아만이 혁명적 방법으로 이 모순들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로, 짜르 러시아는 가장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온갖 종류의 억압 즉 자본주의적, 식민지적 및 군사적 억압의 발원지였다. 알다시피, 러시아에서는 자본의 힘이 짜리즘의 폭정과 결합되어 있었다. 러시아 민족주의의 침략성은 비러시아 인민에 대한 짜리즘의 잔인무도한 정책과 결합되어있었다. 그리고 터키, 페르시아, 중국 등 광범한 지역에 대한 착취는 짜리즘의 강탈이나 정복전쟁과 결합되어 있었다. 레닌이 짜리즘을 “군사적-봉건적 제국주의”라고 한 것은 옳은 말이었다. 제국주의가 갖는 최악의 특징들이 짜리즘에 집중되었고, 짜리즘은 그것을 더욱 악화시켰다.


다음으로 짜르 러시아는 서구 제국주의의 가장 큰 예비군이었다. 이것은 외국자본이 연료 및 금속공업과 같은 러시아 민족경제의 기본분야를 자유로이 통제하였다는 것에서뿐만이 아니다. 러시아가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수백만 병사를 제공하였던 의미에서도 그렇다. 영국과 프랑스 자본가들의 엄청난 이윤을 보호하기 위해 제국주의 전장에서 1,400만의 러시아 병사가 피 흘린 사실을 상기해 보라.


그 다음으로 짜리즘은 동유럽에서 제국주의의 사냥개였을 뿐만 아니라 빠리와 런던, 베를린, 브뤼셀에서 제공된 차관에 대한 수백만금의 이자를 수억의 주민에게서 짜내는 서구 제국주의의 앞잡이였다.


마지막으로, 짜리즘은 터키, 페르시아, 중국 등을 분할하는 데 있어서 서구 제국주의의 가장 충실한 동맹자였다. 알다시피, 짜리즘은 협상국[2] 제국주의자들과 동맹하여 제국주의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중요 참전국이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짜리즘과 서구 제국주의의 이해관계가 서로 얽혀 마침내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라는 하나의 실타래를 이룬 이유이다.


이전의 전제적이고 부르주아적인 러시아는 서구 제국주의에게 동방의 강력한 기둥이고 병력과 자원의 풍부한 저수지였다. 이런 러시아를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서구 제국주의가 러시아 혁명에 반대하고 짜리즘을 방어 보전하기 위한 결사적 투쟁을 단념하겠는가? 물론 아니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짜리즘을 공격하려는 자는 누구나 불가피하게 제국주의를 공격하게 되고, 짜르에 대항하려는 자는 누구나 제국주의에 대항하게 된다. 짜리즘을 전복하려는 자가 참으로 짜리즘을 단지 패퇴시킬 뿐만 아니라 여지없이 소탕하려고 생각했다면 제국주의도 역시 전복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짜리즘에 반대하는 혁명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성장 전화해야만 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위대한 인민혁명은 세계에서 가장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가 지도하였으며,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러시아의 혁명적 농민과 같은 소중한 동맹자가 있었다. 혁명은 중도에 멈추지 않았다. 혁명은 승리하여 마침내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봉기의 기치를 높이 들고 앞으로 더욱 전진하였다. 이것을 구태여 증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러시아는 제국주의의 모순들이 집중된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제국주의 모순의 중심 고리가 된 것은 모순들이 러시아에서 특히 추악하고 참을 수 없는 것이어서 쉽게 폭로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또 러시아가 서구 금융자본을 동방의 식민지와 연결시켜 주는 서구 제국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둥이였기 때문만도 아니다. 러시아가 제국주의 모순의 중심 고리가 된 것은 러시아가 제국주의 모순을 혁명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재적 세력이 존재했던 유일한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러시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되었으며 그 발전의 첫날부터 국제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세계 제국주의의 지반 그 자체를 뒤흔들어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 활동을 러시아 혁명이라는 좁은 민족적 범위 내에 제한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반대로 정세는 국내정세(심각한 혁명적 위기)나 국제정세(전쟁)나 모두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 활동의 범위를 국제적 무대로 옮아가게 만들었다.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은 제국주의의 병폐를 폭로하고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파멸을 증명하며 사회배외주의와 사회평화주의를 분쇄하였다. 결국 러시아에서 자본주의를 전복한 데 기초해서 노동계급을 위한 새로운 투쟁의 무기,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과 전술을 만들어내어 전 세계 노동계급이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활동을 촉진하였다.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은 달리 행동할 수 없었다. 오직 이 길만이 부르주아 질서의 복구로부터 러시아를 지킬 수 있는 국제정세의 일정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가 레닌주의의 발원지가 되고 러시아 공산주의자의 지도자인 레닌이 레닌주의의 창시자가 된 이유이다.


러시아와 레닌에게 “일어난 일”은 1840년대에 독일과 맑스, 엥겔스에게 일어난 일과 같다. 당시 독일은 20세기 초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혁명의 기운이 넘쳐나고 있었다. 맑스는 당시 “공산당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공산주의자들이 독일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독일이 부르주아 혁명의 전야에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부르주아 혁명은 17세기 영국이나 18세기의 프랑스보다 더 발전된 유럽문명의 조건하에서, 그리고 더욱 발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수행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독일의 부르주아 혁명은 오직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직접적인 서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3]


다시 말해 혁명운동의 중심이 독일로 이동한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맑스가 지적한 상황이 독일이 과학적 사회주의의 발원지가 된 바로 그 원인이며 독일 노동계급의 지도자인 맑스와 엥겔스가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가 된 의심할 바 없는 원인이다.


20세기 초의 러시아도 같은 상황이었다. 물론 그 정도는 훨씬 더 심하였다. 러시아는 당시 부르주아 혁명의 전야였다. 이 부르주아 혁명은 당연히 유럽의 상황이 더욱더 진전된 조건하에서, 그리고 1840년대 독일의 부르주아 혁명 때보다도(영국과 프랑스의 부르주아 혁명은 말할 것도 없고) 더욱 발전된 노동계급과 함께 수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사실은 부르주아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촉매이자 서곡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이 겨우 맹아적 시기였던 1902년에 일찍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예지적 발언을 하였다. 이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역사는 지금 우리 앞에[4] 긴급한 임무를 제기하였다. 그것은 어떤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모든 긴급한 임무보다도 가장 혁명적인 임무이다. … 이 업무의 실현, 즉 유럽의 반동뿐만 아니라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시아적 반동의 가장 강력한 방파제를 파괴하는 일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인 전위로 만들 것이다.[5]


달리 말해, 혁명운동의 중심이 러시아로 옮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러시아 혁명의 과정은 레닌의 예지적 발언을 확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성취하고 혁명을 성취한 노동계급을 가진 나라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과 전술의 발원지가 된 것이 어찌 놀랄 일이겠는가?


동시에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인 레닌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이론과 전술을 창시하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가 된 것이 어찌 놀랄 일이겠는가?


  1. 제1차 세계대전 -- 역자의 주
  2.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중심의 동맹국의 반대 진영인 프랑스, 영국, 러시아 -- 역자의 주
  3. 맑스, “공산당 선언”, ≪카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박종철출판사, pp. 432-433. 여기에는 역자가 일부 수정한 번역을 실었다. -- 역자의 주
  4. 즉 러시아 맑스주의자 앞에 -- 필자의 주
  5.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 저작선≫, 거름, p.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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