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주의의 기초/프롤레타리아 독재(2)

좌파도서관
Karl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23일 (일) 23:29 판


레닌주의의 기초
IV. 프롤레타리아 독재
2) ~ 3)

2)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이다


앞서 말한 것에서 명백해진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낡은 경제제도와 정치제도를 손대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둔 채 단순히 정부관리만 바꾸거나 “내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멘쉐비끼와 모든 나라의 기회주의자들은 독재를 열병처럼 무서워하며 깜짝 놀라 독재라는 개념을 “정권획득”이라는 개념으로 슬쩍 바꿔치기한다. “정권획득”은 “내각”의 교체, 즉 샤이데만, 노스케, 맥도날드와 헨더슨 같은 인물들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와 유사한 모든 내각교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실제적 권력을 장악하는 것과는 아무런 공통성이 없다. 맥도날드 족속들과 샤이데만 족속들이 낡은 부르주아제도를 그대로 두고 정권을 잡는 소위 정부들은 다름 아닌 부르주아지의 어용기관이며 제국주의 병폐의 방호물이다. 피억압 피착취 대중의 혁명운동을 반대하는 도구이다. 자본은 정부라는 방호물이 필요하다. 대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 불편하고 불리하며 어려워질 때 정부라는 방호물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러한 정부가 나타나는 것은 “그들에게는”(즉 자본가들에게는) 모든 것이 “시프카 고개”[1]와 같이 평온치 않다는 징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정부들은 여전히 어쩔 수 없는 분칠한 자본가 정부이다. 맥도날드나 샤이데만 정부는 프롤레타리아 정권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정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중앙과 지방 모두에 새로운 권력기관을 세우는 새로운 국가이다. 낡은 국가, 즉 부르주아지의 국가의 폐허 위에 세워진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부르주아 제도를 기초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타도 후에 부르주아 제도를 파괴하는 과정에서, 지주와 자본가을 수탈하는 과정에서, 기본 생산도구와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폭력혁명 과정에서 세워진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폭력에 의거하는 혁명적 정권이다.


국가는 지배계급이 적대계급의 반항을 진압하기 위해 장악하고 있는 기구이다. 이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다른 모든 계급 독재와 다르지 않다.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부르주아지를 억압하기 위한 기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지금까지 존재해 온 모든 계급국가는 착취당하는 다수에 대한 착취하는 소수의 독재였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착취하는 소수에 대한 착취당하는 다수의 독재하는 점이다.


요컨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법에 제한받지 않으며 무력에 의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지배이며, 착취당하는 노동대중의 공감과 지지를 받는 지배이다. (레닌, ≪국가와 혁명≫)[2]


이로부터 두가지 주된 결론이 나온다.


첫번째 결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완전한” 민주주의, 즉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일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국가(프롤레타리아와 무산자 대다수를 위한[3])여야 하며 새로운 유형의 독재국가(부르주아지에 대한[4])여야 한다.” (≪레닌 전집≫ 제21권, p. 393을 보라.) 전반적 평등이니 “순수한” 민주주의니 “완전한” 민주주의니 뭐니 하고 카우츠키와 그 동료들이 지껄이는 것은 착취당하는 자와 착취하는 자 사이에 평등이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에 대한 부르주아적 은폐이다. “순수한” 민주주의 이론은 제국주의 강도들이 길들이고 사육하는 노동계급 상층부의 이론이다. 이 이론은 자본주의의 병폐를 감싸기 위해, 제국주의를 미화하기 위해 그리고 제국주의가 피착취 대중을 향한 투쟁에 도덕적 정당성을 덧씌우기 위해 생겨났다. 자본주의 하에서 착취당하는 자를 위한 실제적인 “자유”란 없으며 또 있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자유”를 위해서는 적어도 집회장소, 인쇄소, 종이창고 기타 등등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본주의 하에서는 이것들을 착취자들이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착취당하는 대중이 국가를 관리하는 데 실제로 참여하지 못하며 또 참여할 수도 없다. 가장 민주적인 정부일지라도 자본주의 조건에서는 정부가 인민에 의해 수립되는 것이 아니라 로스차일드 가와 슈틴네스 가, 록펠러 가와 모건 가에 의해서 수립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이며, 착취하는 소수의 민주주의로, 착취당하는 다수의 권리를 제한하고 다수를 거역하는 데 기초하고 있다. 오직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만 착취당하는 자들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또 프롤레타리아와 농민들이 나라의 관리에 진정으로 참가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독재 하에서의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이며, 착취당하는 다수의 민주주의로, 착취자인 소수의 권리를 제한하고 소수를 거역하는 데 기초하고 있다.


두번째 결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부르주아 사회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평화적으로 성장한 결과로는 생겨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오직 부르주아 국가기구, 부르주아 군대. 부르주아 관료기구, 부르주아 경찰을 격파한 성과로만 출현할 수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의 서문에서 ‘노동계급은 기존 국가기구를 그대로 장악하여 그것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맑스는 1871년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 이전과 같이 관료군사기구를 한 사람의 수중에서 다른 사람의 수중으로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며 … 이렇게 하는 것이 대륙에서 모든 진정한 인민혁명의 선결조건’이라고 하였다.[5]


모든 나라의 기회주의자와 멘셰비키들은 맑스의 대륙에 관한 조건부 언급을 구실로 삼아 맑스가 최소한 유럽 대륙 밖에 있는 국가(영국, 미국)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평화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인정했다고 떠들어댔다. 사실 맑스는 그러한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1870년대의 영국과 미국에는 그러한 가능성을 인정할 만한 근거가 있었다. 이 두 나라는 아직 독점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없었으며 특수한 발전 조건으로 말미암아 발전된 군벌이나 관료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발전된 제국주의가 나타나기 이전의 상황이다. 그러나 그 후 30‒40년이 지나서 이 두 나라의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하였다. 제국주의가 발전하여 예외 없이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을 포괄하였고 군벌과 관료제가 영국과 미국에도 나타나서 평화적 발전의 특수한 조건들이 없어졌다. 그래서 이 나라들에 관한 조건은 더 이상 유효할 수가 없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17년 최초의 제국주의 대전 시기인 오늘날은 맑스가 말한 이러한 조건이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영국과 미국은 군벌과 관료가 없다는 의미에서 앵글로 색슨적 ‘자유’의 세계 최대이자 최후의 대표자이다. 이제 이 두 나라도 모든 것을 자신에게 복속시키고 모든 것을 발아래 짓밟아버리는 관료-군사적 제도라는 전유럽적 더러운 피비린내 나는 구렁텅이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 오늘날, 영국과 미국에서 (1914년과 1917년 사이에 ‘유럽의’ 일반 제국주의의 수준까지 완성된) ‘기존 국가기구’의 분쇄 파괴가 ‘모든 진정한 인민혁명의 선결조건’이다. (제21권, p. 375를 보라.)[6]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의 법칙,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파괴가 이런 혁명의 선결조건이라는 법칙은 세계 제국주의 국가들에 있어 혁명운동의 필연적 법칙이다.


물론, 먼 미래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주요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승리하게 되고 자본주의적 포위가 사회주의적 포위로 바뀌게 된다면, “평화적인” 발전의 길이 일정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있다. 이들 국가의 자본가들은 “불리한” 국제 정세로 인해 “자진하여”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근본적인 양보를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단지 가능한 한 먼 미래에 관한 것이다. 가까운 앞날에 관한 한 어떤 근거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레닌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올바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부르주아 국가기관을 폭력으로 파괴하고 새로운 기구로 바꾸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제23권, p. 342를 보라.)[7]

  1. 시프카 고개는 불가리아 중부 발칸산맥을 넘는 고개로 1877-1878년 러시아와 터키 전쟁 당시의 격전지이다. 러시아군은 여기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나 사령부는 “시프카 고개는 매우 평온하다”고 보고하였다 한다.
  2. 레닌, ≪국가와 혁명≫, 문성원ㆍ안규남 옮김, 돌베개, 1992, p. 52.
  3. 강조추가. -- 필자의 주
  4. 강조추가. -- 필자의 주
  5. 레닌, ≪국가와 혁명≫, p. 55.
  6. 같은 책, p. 56.
  7. 레닌, ≪프롤레타라아 혁명과 카우츠키≫ 레닌, pp. 21-2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