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주의의 기초/농민문제(2):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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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3) 프롤레타리아 혁명기의 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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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공업과 농업을 연결시키고, 사회주의 건설을 촉진시키며, 사회주의경제로의 이행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토대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제공하여야만 한다.}}
그래서 공업과 농업을 연결시키고, 사회주의 건설을 촉진시키며, 사회주의경제로의 이행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토대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제공하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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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 내 각주}}}}

2024년 6월 25일 (화) 22:08 기준 최신판


레닌주의의 기초
V. 농민문제
3절 ~ 4절

3) 프롤레타리아 혁명기의 농민


이 시기는 2월 혁명(1917년)에서 10월 혁명(1917년)까지이다. 이 시기는 불과 8개월로 비교적 짧다. 그러나 이 8개월은 대중의 정치적 계몽과 혁명적 훈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평상시 입헌적 발전의 수십 년과 같은 수준일 수 있다. 이 시기가 혁명의 8개월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 특징은 농민의 한층 더한 혁명화이다. 농민이 사회혁명당에 실망하고 이탈하여 나라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하게 철저한 혁명세력인 프롤레타리아트 주위에 분명히 뭉치는 방향으로 새롭게 전환한 점이다. 이 시기의 역사는 사회혁명당(소부르주아 민주주의)과 볼셰비키(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사이에 농민을 획득하기 위한, 농민의 다수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이 투쟁의 운명은 연립내각의 시기, 즉 케렌스키 집권기에 결정되었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지주의 토지 몰수를 거부한 것,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전쟁을 계속하려고 투쟁한 것, 전선에서의 6월 공세, 병사들에 대한 사형제, 코르닐로프 반란 등이 결정한 것이다.


지난 시기에는 짜르와 지주권력을 타도하는 것이 혁명의 기본문제였으나, 이미 짜르는 존재하지 않고 끝없는 전쟁이 농민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국가 경제를 고갈시킨 2월 혁명 이후 시기는 전쟁 종결이라는 문제가 혁명의 기본 문제로 되었다. 무게 중심은 순수한 국내 문제에서 기본 문제인 전쟁에 대한 문제로 명백히 옮아갔다. “전쟁을 끝내자”, “전쟁에서 빠져 나오자” ― 이것이 전쟁에 지칠 대로 지친 국민의, 주로는 농민의 일반적 부르짖음이었다. 그런데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임시정부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부르주아지 권력을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권력을 타도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왜냐하면 이들, 오직 이들만이 전쟁을 “최후의 승리”까지 끌고 가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전쟁을 끝내는 길은 사실 부르주아지를 타도하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이것은 새로운 혁명,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었다. 왜냐하면 이 혁명은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의 마지막 극좌분파인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권력에서 내쫓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권력, 쏘비에트 권력을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즉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고 민주적 평화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당인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기 때문이다. 농민 대다수가 평화와 소비에트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했다.


농민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으며 또 있을 수도 없었다.


따라서, 케렌스키 집권기는 근로농민대중에게 커다란 실물 경험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정권 하에서는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 농민은 토지와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점,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실제로 카데트 정책과 동일한 제국주의 정책을 추구하는 반면 단지 달콤한 말과 거짓 약속을 하는 데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점, 국가를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은 소비에트 정권 뿐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그 후에도 더 지속된 것은 이 교훈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혁명을 촉진하며 수백만 농민과 군인을 프롤레타리아혁명 주위로 곧바로 결집하게끔 추동하였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의 고립은 명백한 사실로 되었다. 연립내각 시기의 실물 경험의 교훈이 없었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부르주아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촉진시킨 상황이었다.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렇게 수립되었다.


4) 소비에트 권력이 공고화된 후의 농민


혁명의 첫 시기에는 주요 목표가 짜리즘 타도였고, 2월 혁명 이후에는 주요 목표가 부르주아지를 타도하여 제국주의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던 데 반해 내전이 끝나고 소비에트 권력이 공고화된 후인 지금은 경제건설의 문제가 전면에 대두되었다. 국영산업을 발전 강화시켜라; 이를 위해 국가의 통제를 받는 상업을 통해 공업과 농업경제를 연결시켜라; 곡물 징수제를 현물세로 대체하고, 그 후에는 점차로 현물세액을 낮추어 농산물과 공산품의 교류를 활성화시켜라; 상업을 부활시키고 협동조합을 발전시켜 광범한 농민대중을 끌어들여라. ― 이것이 바로 레닌이 사회주의 경제의 토대를 세우기 위한 과정에서 제기한 경제건설의 당면 과제의 개요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과업이 러시아와 같은 농업국으로서는 힘겨운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어떤 회의론자는 이 과업은 단순한 공상이며 실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농민은 어디까지나 농민일 뿐으로 소생산자인 농민을 사회주의적 생산의 토대를 조직하는 데 동원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회의론자들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이 이 경우에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몇 가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중 중요 사항을 살펴보자.


첫째. 소비에트 연방의 농민을 서구의 농민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세 번의 혁명 속에서 단련되었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나란히 또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하에 짜르와 부르주아권력에 맞서 투쟁했던 농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힘으로 토지와 평화를 얻었고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예비군이 된 농민 ― 이러한 농민은 부르주아 혁명기에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선두로 하여 투쟁했고 그 부르주아지에게서 토지를 받은 그래서 부르주아지의 예비군이 된 농민과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와의 정치적 친선과 협력의 중요성을 습득하였고 이 친선과 협력을 통해 자유를 얻은 쏘비에트 농민은 프롤레타리아트와의 경제적 협력을 위한 가장 우호적인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증명할 필요도 없다.


엥겔스는 “사회주의당의 권력 장악은 그리 멀지 않아 다가올 일이 되었다”고 말하고 또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먼저 도시에서 농촌으로 들어가야 하며 농촌에서 세력을 형성해야만 한다”(엥겔스의 ≪농민문제≫, 1922년판을 보라)[1]고 하였다. 엥겔스는 지난 세기의 90년대의 서유럽 농민을 염두에 두고 썼다.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은 세 번의 혁명 과정에서 이 분야에서 방대한 양의 사업을 해 놓았고 서구의 동지들은 꿈도 꾸지 못할 농촌에서의 세력과 거점을 이미 마련하였다. 이 점을 구태여 증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러한 상황이 러시아의 노동계급과 농민의 경제적 협력을 결정적으로 촉진할 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회의론자들은 소작농은 사회주의 건설과 양립할 수 없는 요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엥겔스가 서유럽의 소작농에 관해 이야기한 것을 들어보라.


우리는 단연코 소작농의 편에 서있다. 우리는 소작농의 운명이 보다 견딜 수 있도록 하는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것이며, 소작농들이 협동조합으로 이행하기로 결심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을 도울 것이며, 심지어 이런 결심을 아직 못하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 보도록 얼마간 자기 분할지에 남아 있을 수 있게 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비단 우리가 자기 노동으로 살아가는 소작농을 우리 편으로 삼을 수 있다고 볼 뿐만 아니라 당에도 직접적 이익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로 현실적으로 전락하는 농민을 우리가 구해내어 여전히 농민이지만 우리 편으로 획득할 수 있는 농민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의 이행은 더한층 빠르고 쉽게 달성될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도처에서 발전하여 그 극단의 결말에 이를 때까지, 즉 수공업자와 소작농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자본주의적 대규모 생산의 희생자가 될 때까지 이행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농민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 자산으로부터 지출되는 물질적 제물은 자본주의 경제의 관점에서는 단지 자금을 낭비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훌륭한 투자이다. 왜냐하면 대체로 사회개조에 드는 비용을 대략 십 배정도 절약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농민을 매우 관대하게 대할 수 있다. (같은 곳을 보라.)[2]


이것이 엥겔스가 서유럽 농민을 염두에 두며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엥겔스가 말한 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처럼 그렇게 쉽고 완전하게 실현될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명백하지 않는가? 오직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만이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소작농”을 우리 편으로 확보하고, 거기에 필요한 “물질적 제물”을 주고, 필수적인 “농민에게 관대하게 대하는” 것이 즉시, 또 가장 완전한 정도로 가능하다는 점이 명백하지 않는가? 이러한 것들과 이와 유사한 대책이 농민에게 유리하게 러시아에서 이미 실행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지 않는가? 따라서 이러한 상황이 소비에트 국가에서 경제건설 사업을 촉진시키고 진전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는가?


둘째. 러시아의 농업을 서구의 농업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서구의 농업은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길을 따라, 한쪽에서는 대지주계급과 사적 자본주의의 대소유지, 다른 쪽에서는 빈궁과 결핍, 임금노예 상태라는 농민층 내부의 격심한 분화라는 조건 아래서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길을 따라 발전하고 있다. 그러기에 거기에서는 붕괴와 몰락이 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그렇지 않다. 러시아의 농업은 소비에트 권력의 존재와 생산도구 및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서유럽의 길을 따라 발전할 수 없다. 러시아에서는 농업의 발전이 다른 길, 수백만 중소 농민의 협동화의 길, 국가가 저리 신용대출을 지원하는 대중적 협동조합이 발전되는 길을 통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레닌이 협동조합에 관한 여러 논문에서 올바르게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 나라의 농업을 반드시 새로운 길, 즉 협동조합을 통하여 농민 대다수를 사회주의 건설사업에 끌어 들이는 길, 집단주의 원칙을 처음에는 농업생산물의 시장영역에서 다음에는 생산영역으로 점차 도입하는 길을 따라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매우 흥미 있는 것은 농업협동조합 사업과 관련하여 농촌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새로운 현상이다. 알다시피 전러시아 농업협동조합연맹[3] 내에는 아마, 감자, 버터 등 농업 부문별로 새로운 대규모 조직체들이 생겼는데 전망이 매우 밝다. 그중에서 예컨대 아마 재배업자 전러시아 중앙연맹에는 아마를 재배하는 농민들의 생산협동조합들 전체가 망라되어 있다. 아마 재배업자 전러시아 중앙연맹은 농민들에게 종자와 생산도구를 공급한다. 그 후 이들 농민들이 생산한 아마 전체를 사들이고 이를 대량으로 시장에 판매하여 이익의 몫을 농민에게 배분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농민 경제를 전러시아 농업협동조합연맹을 통해 국영산업과 연결시킨다. 이러한 생산 조직형태를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내 생각에 이것은 농업부문에서의 대규모 국가-사회주의적 생산의 가내농업체계이다. 국가-사회주의적 생산의 가내농업체계라고 말하는 것은 예컨대 직물 생산부문에서의 자본주의의 가내농업체계에 비유해서 하는 말이다. 자본주의의 가내농업체계는 수공업자가 원료와 도구를 자본가로부터 받고 그들의 노동생산물을 자본가에게 넘겨주는 사실상 자기 집에서 노동하는 반半임금노동자이다. 이것은 우리의 농업이 발전해 나아가야할 길을 보여 주는 많은 지표들 중의 하나다. 여기서 농업의 다른 분야에 관한 유사한 지표들을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논증할 것도 없이 농민의 대다수는 사적 자본주의의 대소유와 임금노예의 길, 빈곤과 몰락의 길을 거부하고 이러한 발전의 새로운 길로 열렬히 나아갈 것이다.


레닌은 우리 농업발전의 길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대규모 생산수단을 장악한 국가권력,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있는 국가권력,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트와 수백만 소농 및 영세농과의 동맹,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농민의 확실한 지도 등등 ― 이것들은 협동조합으로부터, 협동조합만으로 완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전부가 아닌가? 물론 우리가 예전에 이 협동조합을 장사치라고 경멸했고 또 어떤 면에서 신경제정책 하의 오늘날도 당연히 경멸할 만하다. 그러나 협동조합이 바로 완전한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에 필요한 전부가 아니겠는가? 아직 사회주의 사회건설은 아니지만 그 건설을 위해 필요하고도 충분한 전부이다. (제27권, p. 392를 보라.)[4]


나아가, 레닌은 “주민 조직의 새로운 원칙”이자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의 새로운 “사회체계”와 같은 협동조합에 재정 및 기타 지원을 제공할 필요성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어떤 사회체계도 일정한 계급의 재정지원에 의해서만 발생한다. ‘자유’자본주의의 탄생에 드는 수억 루블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오늘날 특별히 지원해야 할 사회체계는 협동조합체계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실제 작업으로 구체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지원하여야 한다. 즉 지원이라는 말을 기준이나 원칙 없이 모든 협동조합 거래를 위한 지원으로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지원이라는 말을 진실로 광범위한 주민대중이 실제로 참여하는 협동조합 거래에 대한 지원의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같은 책, p. 393을 보라.)[5]


이 모든 사실은 무엇을 입증하는가?


회의론자가 틀렸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근로농민대중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예비군으로 보는 레닌주의가 옳다는 것을 말해 준다.


권력을 쥔 프롤레타리아트가 이 예비군을 동원할 수 있고 또 마땅히 동원하여야만 한다.


그래서 공업과 농업을 연결시키고, 사회주의 건설을 촉진시키며, 사회주의경제로의 이행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토대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제공하여야만 한다.


  1. ≪맑스 엥겔스 저작 선집≫ 제6권, 박종철출판사, p. 402.
  2. 같은 책, p. 419.
  3. 전러시아 농업협동조합연맹Selskosoyuz은 1921년 8월부터 1929년 6월까지 존속하였다.
  4. Lenin Collected Works, Volume 33, 1973, p. 468.
  5. 같은 책, p.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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