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마르크스의 서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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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실로부터, 현재의 작품은 사건의 즉각적인 압력에 의해 형성되었고 그것의 역사적 자료는 1852년 2월 이후까지 확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그것의 출판은 부분적으로 독일에 있는 내 친구들의 긴급한 요청에 의한 책 거래의 요구 때문이다.
위의 사실로부터, 현재의 작품은 사건의 즉각적인 압력에 의해 형성되었고 그것의 역사적 자료는 1852년 2월 이후까지 확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그것의 출판은 부분적으로 독일에 있는 내 친구들의 긴급한 요청에 의한 책 거래의 요구 때문이다.


나와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주제를 다룬 글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단 둘 뿐이다. [[빅토르 위고]]의 나폴레옹 레 프티(Napoleon le Petit)와 프루동의 쿠데타(Coup d’Etat). 빅토르 위고는 쿠데타를 일으킨 자에게 신랄하고 재치 있는 독설을 퍼부었다. 그 사건 자체가 그의 작품에 청천벽력처럼 나타난다. 그는 그 안에서 오직 한 개인의 폭력적인 행동만을 본다. 그는 그가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독창성의 개인적 힘을 그에게 돌림으로써 작은 것이 아니라 이 개인을 위대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프루동은, 그의 입장에서, 이전의 역사적 발전의 결과로서 쿠데타를 대표하려고 한다. 그러나 무심코 쿠데타에 대한 그의 역사적인 건설은 쿠데타의 영웅에 대한 역사적인 사과가 된다. 그래서 그는 소위 객관적인 역사학자들의 잘못에 빠진다. 반대로, 나는 프랑스의 계급 투쟁이 어떻게 상황과 관계를 만들어냈는지 보여주며, 그로테스크한 평범함이 영웅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현재의 작품을 개정하였다면 그 자체만의 독특한 색채를 빼앗았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단순한 인쇄 오류의 수정과 이제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암시를 제거하는 일만 하였다.
"하지만 마침내 황제 맨틀이 루이 보나파르트의 어깨에 떨어지면, 나폴레옹의 청동상이 벤돔 기둥 꼭대기에서 무너져 내릴 것이다."라는 내 작품의 결론적인 말은 이미 이루어졌다. Charras 대령은 1815년 작전에서 나폴레옹 숭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그 후, 특히 지난 몇 년간 프랑스 문학은 역사 연구, 비평, 풍자, 위트의 무기로 나폴레옹의 전설을 종식시켰다. 프랑스 밖에서는, 전통적인 대중적 믿음, 이 엄청난 정신 혁명과 관련된 폭력적인 위반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여전히 덜 이해되었다.
마지막으로, 나의 연구가 현재(특히 독일에서) 소위 '시저주의'라고 불리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문구를 없애는 데 기여하길 바란다. 이 피상적인 역사적 비유에서, 고대 로마에서 계급 투쟁은 '자유 부자'와 '자유 빈자' 사이의 특권적인 소수 집단 내에서만 일어났고, 반면 인구의 거대한 생산 집단인 노예들은 이러한 전투원들을 위한 순수하게 수동적인 대좌를 형성했다. 사람들은 시스몬디<ref>프랑스의 경제, 역사학자. [https://en.wikipedia.org/wiki/Jean_Charles_L%C3%A9onard_de_Sismondi #]</ref>의 중요한 말을 잊는다. 로마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사회를 희생하며 살았고, 현대 사회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희생으로 살았다. 고대 계급 투쟁의 물질적, 경제적 조건, 그리고 현대 계급 투쟁의 완전한 차이 때문에,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적 인물들은 캔터베리 대주교<ref>영국 성공회의 최고위 성직자</ref>가 대제사장 사무엘<ref>구약 성경의 인물</ref>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공통점을 가질 수 없다.
칼 마르크스
1869년 6월 13일, 런던
===영문===
===영문===
My friend Joseph Weydemeyer, whose death was so untimely, intended to publish a political weekly in New York starting from January 1, 1852. He invited me to provide this weekly with a history of the coup d’etat. Down to the middle of February, I accordingly wrote him weekly articles under the title The Eighteenth Brumaire of Louis Bonaparte. Meanwhile, Weydemeyer’s original plan had fallen through. Instead, in the spring of 1852 he began to publish a monthly, Die Revolution, whose first number consists of my Eighteenth Brumaire. A few hundred copies of this found their way into Germany at that time, without, however, getting into the actual book market. A German bookseller of extremely radical pretensions to whom I offered the sale of my book was most virtuously horrified at a “presumption” so “contrary to the times.”
My friend Joseph Weydemeyer, whose death was so untimely, intended to publish a political weekly in New York starting from January 1, 1852. He invited me to provide this weekly with a history of the coup d’etat. Down to the middle of February, I accordingly wrote him weekly articles under the title The Eighteenth Brumaire of Louis Bonaparte. Meanwhile, Weydemeyer’s original plan had fallen through. Instead, in the spring of 1852 he began to publish a monthly, Die Revolution, whose first number consists of my Eighteenth Brumaire. A few hundred copies of this found their way into Germany at that time, without, however, getting into the actual book market. A German bookseller of extremely radical pretensions to whom I offered the sale of my book was most virtuously horrified at a “presumption” so “contrary to the times.”

2022년 5월 8일 (일) 15:11 기준 최신판

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
마르크스의 서문

국문

1852년 1월 1일부터 뉴욕에서 정치 주간지를 발행하려고 했던 내 친구 조셉 위디마이어(Joseph Weydemeyer)[1], 그의 죽음은 너무 일렀다. 그는 이번 주에 쿠데타의 역사를 알려달라고 나를 초대했다. 2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그의 말에 따르자면 나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세'라는 제목으로 그에게 주간 기사를 써 주었다. 한편, 위디마이어의 원래 계획은 무산되었다. 대신, 1852년 봄에 그는 월간 '혁명' 지를 출판하기 시작했고, 그의 첫 번째 번호는 나의 '브뤼메르 18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수백 부는 그 당시 독일로 유입되었지만 실제 책 시장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내가 내 책을 팔겠다고 제안한 극도로 급진적인 척하는 독일 의 서점 가는 "시대와 반대되는" "추측"에 가장 크게 겁을 먹었다.

위의 사실로부터, 현재의 작품은 사건의 즉각적인 압력에 의해 형성되었고 그것의 역사적 자료는 1852년 2월 이후까지 확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그것의 출판은 부분적으로 독일에 있는 내 친구들의 긴급한 요청에 의한 책 거래의 요구 때문이다.

나와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주제를 다룬 글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단 둘 뿐이다. 빅토르 위고의 나폴레옹 레 프티(Napoleon le Petit)와 프루동의 쿠데타(Coup d’Etat). 빅토르 위고는 쿠데타를 일으킨 자에게 신랄하고 재치 있는 독설을 퍼부었다. 그 사건 자체가 그의 작품에 청천벽력처럼 나타난다. 그는 그 안에서 오직 한 개인의 폭력적인 행동만을 본다. 그는 그가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독창성의 개인적 힘을 그에게 돌림으로써 작은 것이 아니라 이 개인을 위대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프루동은, 그의 입장에서, 이전의 역사적 발전의 결과로서 쿠데타를 대표하려고 한다. 그러나 무심코 쿠데타에 대한 그의 역사적인 건설은 쿠데타의 영웅에 대한 역사적인 사과가 된다. 그래서 그는 소위 객관적인 역사학자들의 잘못에 빠진다. 반대로, 나는 프랑스의 계급 투쟁이 어떻게 상황과 관계를 만들어냈는지 보여주며, 그로테스크한 평범함이 영웅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현재의 작품을 개정하였다면 그 자체만의 독특한 색채를 빼앗았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단순한 인쇄 오류의 수정과 이제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암시를 제거하는 일만 하였다.

"하지만 마침내 황제 맨틀이 루이 보나파르트의 어깨에 떨어지면, 나폴레옹의 청동상이 벤돔 기둥 꼭대기에서 무너져 내릴 것이다."라는 내 작품의 결론적인 말은 이미 이루어졌다. Charras 대령은 1815년 작전에서 나폴레옹 숭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그 후, 특히 지난 몇 년간 프랑스 문학은 역사 연구, 비평, 풍자, 위트의 무기로 나폴레옹의 전설을 종식시켰다. 프랑스 밖에서는, 전통적인 대중적 믿음, 이 엄청난 정신 혁명과 관련된 폭력적인 위반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여전히 덜 이해되었다.

마지막으로, 나의 연구가 현재(특히 독일에서) 소위 '시저주의'라고 불리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문구를 없애는 데 기여하길 바란다. 이 피상적인 역사적 비유에서, 고대 로마에서 계급 투쟁은 '자유 부자'와 '자유 빈자' 사이의 특권적인 소수 집단 내에서만 일어났고, 반면 인구의 거대한 생산 집단인 노예들은 이러한 전투원들을 위한 순수하게 수동적인 대좌를 형성했다. 사람들은 시스몬디[2]의 중요한 말을 잊는다. 로마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사회를 희생하며 살았고, 현대 사회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희생으로 살았다. 고대 계급 투쟁의 물질적, 경제적 조건, 그리고 현대 계급 투쟁의 완전한 차이 때문에,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적 인물들은 캔터베리 대주교[3]가 대제사장 사무엘[4]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공통점을 가질 수 없다.

칼 마르크스 1869년 6월 13일, 런던

영문

My friend Joseph Weydemeyer, whose death was so untimely, intended to publish a political weekly in New York starting from January 1, 1852. He invited me to provide this weekly with a history of the coup d’etat. Down to the middle of February, I accordingly wrote him weekly articles under the title The Eighteenth Brumaire of Louis Bonaparte. Meanwhile, Weydemeyer’s original plan had fallen through. Instead, in the spring of 1852 he began to publish a monthly, Die Revolution, whose first number consists of my Eighteenth Brumaire. A few hundred copies of this found their way into Germany at that time, without, however, getting into the actual book market. A German bookseller of extremely radical pretensions to whom I offered the sale of my book was most virtuously horrified at a “presumption” so “contrary to the times.”

From the above facts it will be seen that the present work took shape under the immediate pressure of events and its historical material does not extend beyond the month of February, 1852. Its republication now is due in part to the demand of the book trade, in part to the urgent requests of my friends in Germany.

Of the writings dealing with the same subject at approximately the same time as mine, only two deserve notice: Victor Hugo’s Napoleon le Petit and Proudhon’s Coup d’Etat. Victor Hugo confines himself to bitter and witty invective against the responsible producer of the coup d’etat. The event itself appears in his work like a bolt from the blue. He sees in it only the violent act of a single individual. He does not notice that he makes this individual great instead of little by ascribing to him a personal power of initiative unparalleled in world history. Proudhon, for his part, seeks to represent the coup d’etat as the result of an antecedent historical development. Inadvertently, however, his historical construction of the coup d’etat becomes a historical apologia for its hero. Thus he falls into the error of our so-called objective historians. I, on the contrary, demonstrate how the class struggle in France created circumstances and relationships that made it possible for a grotesque mediocrity to play a hero’s part.

A revision of the present work would have robbed it of its particular coloring. Accordingly, I have confined myself to mere correction of printer’s errors and to striking out allusions now no longer intelligible.

The concluding words of my work: “But when the imperial mantle finally falls on the shoulders of Louis Bonaparte, the bronze statue of Napoleon will come crashing down from the top of the Vendome Column,” have already been fulfilled. Colonel Charras opened the attack on the Napoleon cult in his work on the campaign of 1815. Subsequently, and especially in the past few years, French literature has made an end of the Napoleon legend with the weapons of historical research, criticism, satire, and wit. Outside France, this violent breach with the traditional popular belief, this tremendous mental revolution, has been little noticed and still less understood.

Lastly, I hope that my work will contribute toward eliminating the school-taught phrase now current, particularly in Germany, of so-called Caesarism. In this superficial historical analogy the main point is forgotten, namely, that in ancient Rome the class struggle took place only within a privileged minority, between the free rich and the free poor, while the great productive mass of the population, the slaves, formed the purely passive pedestal for these combatants. People forget Sismondi’s significant saying: The Roman proletariat lived at the expense of society, while modern society lives at the expense of the proletariat. With so complete a difference between the material, economic conditions of the ancient and the modern class struggles, the political figures produced by them can likewise have no more in common with one another than the Archbishop of Canterbury has with the High Priest Samuel.

Karl Marx, London, June 23, 1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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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국마르크스주의 언론인. #
  2. 프랑스의 경제, 역사학자. #
  3. 영국 성공회의 최고위 성직자
  4. 구약 성경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