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1890년 독일어판 서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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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공산당 선언 | |제목 = 공산당 선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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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장 = 공산당 선언/1883년 독일어판 서문 | |이전 장 = 공산당 선언/1883년 독일어판 서문 | ||
|다음 장 = 공산당 선언/서두 | |다음 장 = 공산당 선언/서두 | ||
|내용 = 앞서 쓰인 서문[ | |내용 = 앞서 쓰인 서문<ref>편집자의 주 -- [[공산당 선언/1883년 독일어판 서문|1883년의 독일어판 서문]]을 가리킨다.</ref>이 나온 이래 다시 『선언』의 새로운 독일어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언』과 더불어 여기서 언급해 두어야만 할 갖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 ||
러시아어로 된 두 번째 판---베라 자수리치( | 러시아어로 된 두 번째 판---베라 자수리치<ref>역자의 주 -- Vera Iwanowna Sassulitsch(1851~1919년) 러시아의 여성 혁명가. 처음에는 나로드티키였으나 1883년 노동 해방단의 설립에 참여. 마라크스의 몇몇 저작을 러시아 어로 번역했으며, 마르크스·엥겔스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다. 1900년 『이스크라』(Iskra) 편집진에 참여했으며, 1903년 이후에는 멘셰비키 진영에 가담. 1917년 이후 소비에트 권력의 반대자가 되었다. </ref>가 번역한<ref>편집자의 주 -- 엥겔스는 1894년에 쓴 『러시아 사회 상태』후기에서(『전집』제18권, 668쪽) 이 번역본의 역자가 플레하노프라고 말하고 있다. 플레하노프도 1900년에 나온 『선언』의 러시아 어판에서 자신이 그 번역을 완성했다고 말한 바 있다.</ref>---이 1882년 제네바에서 출판되었다. 그 서문은 마르크스와 내가 썼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독일어 원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러시아어판을 다시 독일어로 번역해야 했지만, 그렇게 해서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ref>편집자의 주 -- 엥겔스가 잃어버린 독일어 원문, 즉 그가 마르크스와 함께 썼던 1882년 러시아 어판 서문은 뒷날 발견되어 모스크바의 마라크스 레닌주의 연구소 문서실에 보관되어 있다. 따라서 아래에 실린 내용은 그 원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전집』에는 러시아 어판 서문이 따로 실려 있으나 이 책에서는 러시아 어판 서문을 따로 뽑지 않고 엥겔스가 한 대로 그냥 1890년 독일어판 서문에 포함하여 소개했다.--역자)</ref>. | ||
『공산당 선언』의 첫번째 러시아 어판은 바쿠닌( | 『공산당 선언』의 첫번째 러시아 어판은 바쿠닌<ref>역자의 주 -- Michail Alexandrowitscho Bakunin(1814~1876년) 서유럽으로 이주해 온 러시아 이민. 민주주의적인 언론인. 독일의 1848~1849년 혁명에 참가. 뒷날 무정부주의 이데올로그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적이 되었다. 마르크스가 지도하던 제1인터내셔널의 총평의회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1872년의 헤이그 대회에서 인터내셔널에서 제명되었다.</ref>이 번역하여 1860년대 초에 나왔으며, 『종소리』인쇄소에서 출판되었다<ref>편집자의 주 -- 이 러시아 어판은 1869년에 나왔다. 엥겔스가 쓴 1888년의 영어판 서문에도 『선언』의 첫번째 러시아 어판의 출판 연도가 정확하지 않게 나와 있다.(『전집』제4권, 580쪽을 보라)</ref>. 당시 서유럽에서 『선언』의 러시아 어판은 문필계의 진기한 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견해가 있을 수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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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제 러시아를 살펴보자. 1848~1849년의 혁명 동안 유럽의 군주들뿐만 아니라 부르주아들까지도 이제 막 깨어난 프롤레타리아트 앞에서 러시아의 간섭을 유일한 구원으로 여기게 되었다. 짜르는 유럽 반동 세력의 두목으로 선포되었다. 오늘날 그는 가취나 | 그러면 이제 러시아를 살펴보자. 1848~1849년의 혁명 동안 유럽의 군주들뿐만 아니라 부르주아들까지도 이제 막 깨어난 프롤레타리아트 앞에서 러시아의 간섭을 유일한 구원으로 여기게 되었다. 짜르는 유럽 반동 세력의 두목으로 선포되었다. 오늘날 그는 가취나<ref>편집자의 주 -- 레닌그라드에서 남서쪽으로 45km 떨어진 고장. 동시에 그곳에 있는 유명한 성(城) 이름. 10월 혁명 전에는 러시아 짜르의 휴양지였으나 오늘날에는 박물관이 되엇다.(러시아의 알렉산드르 3세는 혁명가들로부터 테러를 당하지 않으려고 이곳에 숨어 있었다.--역자)</ref>에 수용된 혁명의 전쟁 포로이고, 러시아는 유럽 혁명 운동의 선봉을 이루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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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은 그 나름의 경력을 갖고 있다. 그것은 출현하자마자 (맨 처음 서문에 열거된 번역본들 | 『선언』은 그 나름의 경력을 갖고 있다. 그것은 출현하자마자 (맨 처음 서문에 열거된 번역본들<ref>편집자의 주 -- 『전집』제4권, 573쪽을 보라.</ref>이 증명하고 있듯이) 당시 아직 소수였던 과학적 사회주의의 선봉으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1848년 6월 파리 노동자 봉기가 실패로 끝나면서 시작된 반동 때문에 『선언』은 얼마 안 가 뒷전으로 밀려났으며, 1852년 11월 쾰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유죄 판결<ref>편집자의 주 -- [[쾰른]]에서 열린 공산주의자 동맹 회원들에 대한 재판을 가리킨다.(『전집』제4권, 578쪽을 보라.)</ref>로 마침내 '법에 따라' 파문당했음이 선포되었다. 2월 혁명에서 시작된 노동 운동은 공식 무대에서 사라지고, 이와 함께 『선언』도 뒤로 물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 ||
유럽의 노동자 계급이 지배 계급의 권력에 대항하여 새로운 진격을 개시할 만큼 또다시 충분히 강해졌을 때, 국제 노동자 협회가 탄생했다. 이 협회의 목적은 유럽과 미국의 전투적인 노동자 계급 전체를 하나의 대군(大軍)으로 뭉치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협회는 『선언』에 실린 원리들에서 출발할 수는 없었다. 협회는 영국의 노동 조합들이나 벨기에·이탈리아와 스페인의 프루동주의자들 | 유럽의 노동자 계급이 지배 계급의 권력에 대항하여 새로운 진격을 개시할 만큼 또다시 충분히 강해졌을 때, 국제 노동자 협회가 탄생했다. 이 협회의 목적은 유럽과 미국의 전투적인 노동자 계급 전체를 하나의 대군(大軍)으로 뭉치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협회는 『선언』에 실린 원리들에서 출발할 수는 없었다. 협회는 영국의 노동 조합들이나 벨기에·이탈리아와 스페인의 프루동주의자들<ref>역자의 주 -- 프랑스 무정부주의 이론가이며 경제학자인 프루동의 추종자들을 가리킨다. 프루동은 마르크스나 엥겔스와는 달리 노동자 계급의 정치 투쟁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노동자들은 오직 생산과 교환의 자발적 연합체를 결성함으로써만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프루동은 대규모의 자본주의적 소유만을 거부했을 뿐, 소농민이나 장인들의 경제적 독립성을 옹호했다. 따라서 프루동주의는 당시에 자본주의적 발전이 뒤쳐지고 농민층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 등지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ref>, 그리고 독일의 라살레파<ref>저자의 주 -- [[라살레]] 자신은 우리에게 늘 마르크스의 '제자'로 자처했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선언』을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국가의 융자에 의한 생산 협동 조합이라는 요구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노동자 계급 전체를 국가의 도움을 받는 자와 스스로 돕는 자로 나누었던 그의 추종자들과는 달랐던 셈이다.</ref>까지 모두 포용하는 강령을 가져야만 했다. 마르크스는 바쿠닌이나 무정부주의자들<ref>역자의 주 -- 여기서는 특히 바쿠닌의 추종자들을 가리킨다. 국가 권력이 없는 자유롭고 분산적인 소생산자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는 독특한 사회주의 사상을 뜻한다.</ref>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솜씨로 이러한 강령---인터내셔널 규약의 취지를 설명한 부분---을 작성했다. 『선언』에서 제시된 명제들의 궁극적인 승리를 위해서, 마르크스는 전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지적 발전에 기대를 걸었다. 통일된 행동과 토론을 통해 반드시 지적 발전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자본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승패의 교차, 특히 승리보다는 패배를 지켜 보면서 투쟁하는 사람들은 그때까지 써 오던 자신들의 만병 통치약이 전혀 듣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 노동자 해방의 참된 조건들을 철저히 통찰하기 위해 좀더 머리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옳았다. 1874년 인터내셔널이 해산되었을 때의 노동자 계급은 1864년 인터내셔널이 창설되었을 때의 노동자 계급과는 완전히 달랐다. 라틴계 나라들의 프루동주의, 독일 특유의 라살레주의는 사멸해 가고 있었으며, 당시 가장 보수적이던 영국의 노동 조합까지도 차츰 바뀌어 1887년 스완시(Swansea) 대회에서는 의장이 조합의 이름으로 "우리는 이제 대륙의 사회주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까지 되었다. 그런데 대륙의 사회주의라면 1887년에는 거의 다 벌써 『선언』에 공포되어 있는 이론뿐이었다. 이처럼 『선언』의 역사는 1848년 이후의 현대 노동 운동의 역사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그것이 모든 사회주의 문헌 가운데서 가장 널리 보급된 국제적 문헌이며, 시베리아에서 캘리포니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라 수백만 노동자의 공동 강령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
그러나 『선언』이 나왔을 때 우리는 이것을 사회주의적 선언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1847년에는 두 부류으 ㅣ사람들이 사회주의자라고 불리고 있었다. 하나는 각종 공상적 체계의 신봉자들, 특히 영국의 오언주의자들( | 그러나 『선언』이 나왔을 때 우리는 이것을 사회주의적 선언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1847년에는 두 부류으 ㅣ사람들이 사회주의자라고 불리고 있었다. 하나는 각종 공상적 체계의 신봉자들, 특히 영국의 오언주의자들<ref>역자의 주 -- Robert Owen(1771~1858년) 영국의 노동 운동가. 사회 개혁가. 오언은 뉴라나크(New Lanark)의 대방적 공장의 소유자로 일찍부터 노동자의 참상을 깨닫고 협동 조합 운동을 주도했다. 오언은 평등 사회 건설을 꿈꾸고 사재(私財)를 털어 1825년 미국 인디애나 주에 공산촌인 뉴하모니(New Harmony)를 건설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ref>과 푸리에주의자들<ref>역자의 주 -- Francois Marie Charles Fourier(1772~1837년)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푸리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와 부르주아지의 탐욕을 비난하고, 사람들이 노동한 양에 따라 공평하게 분배받는 이상 사회 건설을 꿈꾸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설교에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서 많은 사회주의 이상촌을 건설했으나 실패했다.</ref>로 이 두 조류는 당시에 벌써 점점 사멸해 가는 하찮은 종파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가지 각색의 돌팔이 사회 의사들로 이들은 자본과 이윤은 전혀 손대지 않은 채, 온갖 만병 통치약과 갖가지 미봉책으로 사회의 재앙을 없애려 했다. 어느 경우에나 그들은 모두 운동 밖에 있으면서, 오히려 '고양 있는' 계급의 지지를 구한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노동자들 가운데서도 단순한 정치 변혁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요구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자신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불렀다. 그것은 아직 잘 다듬어지지 못한, 단지 본능적이고 좀 조잡한 공산주의이기는 했으나, 공상적 공산주의의 두 체계---프랑스의 카베<ref>역자의 주 -- Etienne Cabet(1788~1856년) 프랑스의 공산주의 사상가, 언론인, 법률가, 공상적인 소설『이카리아 기행』(Voyage en Icarie, 1842)의 저자. 이카리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섬 이름으로 카베가 꿈꾸던 공산주의 이상향을 뜻한다.</ref>의 '이카리아' 공산주의와 독일의 바이틀링<ref>역자의 주 -- Christian Wilhelm Weitling(1808~1871년) 제단사 출신의 독일 공산주의 사상가. 공상적인 평등 공산주의 이론을 주장. 의인 동맹의 회원이었으며, 뒤에 미국으로 건너가 이상촌 건설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다.</ref>의 공산주의---를 만들어 낼 만큼 충분히 힘있는 것이었다. 1847년에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운동을 뜻했고, 공산주의는 노동 운동을 뜻했다. 사회주의는 적어도 대륙에서는 점잖은 것이었으나 공산주의는 그 반대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때 이미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계급 자신의 사업이어야 한다'는 의견을 단호하게 고수하고 있었으므로, 이 두 가지 명칭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는 다른 의견이 나올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도 우리는 이 명칭을 버리려고 생각한 적이 결코 없었다. | ||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지금부터 41년 전 프롤레타리아트가 맨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요구를 들고나섰던 파리 혁명( |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지금부터 41년 전 프롤레타리아트가 맨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요구를 들고나섰던 파리 혁명<ref>역자의 주 -- 1848년에 파리의 노동자 계급이 일으킨 6월 봉기를 가리킨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첫번째 대전투'(엥겔스), 6월 24~26일에 일어난 파리 노동자들의 봉기, 전쟁상(相)인 카베냑(Cavaignac)에 의해 유혈 진압되었다. </ref>의 전야에 우리가 이 말을 전세계에 외쳤을 때, 이에 호응한 목소리는 아주 적었다. 그러나 1864년 9월 28일에는 서유럽 대다수 나라의 프롤레타리아들이, 지금 돌이켜 보면, 영광스러운 국제 노동자 협회를 위해 단결했다. 물론 이 인터내셔널 자체는 겨우 9년밖에 존속하지 못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이 기초를 닦아 놓은 전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영원한 동맹은 아직도 살아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견고해졌는데, 이 점을 오늘날보다 더 잘 증명해 주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날 서유럽과 미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하나의 당면 목표를 위해, 하나의 깃발 밑에 하나의 군대로서 처음 동원된 자신들의 전투력을 점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목표란 이미 1866년 인터내셔널 제네바 대회에서 처음으로 선언되었고 1889년 파리 노동자 대회<ref>역자의 주 -- 제2인터내셔널 창립 대회를 가리킨다.</ref>에서 다시 선언된 것으로서, 1일 표준 8시간 노동을 법적으로 명문화하는 일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이 광경은 전세계의 자본가와 지주들로 하여금 오늘날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들이 실제로 단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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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5월 1일, 런던에서 | 1890년 5월 1일, 런던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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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분류:공산당 선언]] |
2022년 3월 13일 (일) 13:15 기준 최신판
공산당 선언 | ||
◀ | 1890년 독일어판 서문 | ▶ |
앞서 쓰인 서문[1]이 나온 이래 다시 『선언』의 새로운 독일어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언』과 더불어 여기서 언급해 두어야만 할 갖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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