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을 구해내지 못한 남자, 에곤 크렌츠 인터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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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0일 (일) 11:19 기준 최신판
저자: Jacobin
발표시기: 2019년 11월 8일
출처: https://www.jacobinmag.com/2019/11/east-germany-egon-krenz-berlin-wall (1차) / 원본 게시글 삭제됨 (2차)
저자: Jacobin
그것은 종언의 시작이었다. 1989년 11월 9일, 처음으로 동쪽과 서쪽 사이의 국경이 열리게 되면서, 독일의 수도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축하를 하는 장면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유럽 의 냉전 분단의 가장 상징적인 상징물이었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곧, 나치즘의 패배 이후에 동독에 세워졌던 국가인 독일민주공화국(GDR)의 종말로 곧 이어졌다.
이 사건의 30주년이 되는 때에도, 동독의 역사는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가장 가혹한 비평가들에게, 이 국가는 비밀경찰과 시민들을 둘러싸고 있는 국경이 지배하는 ‘제2의 독일 독재정권’에 불과했다. 다른 이들은 일상의 보다 정상적인 요소들을 주목하거나, 심지어는 동독의 강력한 복지의 보장으로부터 시작해서 완전고용과 연대의 문화에 이르기까지 동독의 사회체계를 긍정적으로 되돌아보기까지 한다.
위기의 몇 주 동안의 동독의 정치적 지도자는 오랫동안 에리히 호네커의 후계자로 여겨지던 에곤 크렌츠였다. 1989년 10월 18일, 그의 멘토의 자리를 넘겨받으면서, 크렌츠는 곧 위기에 몰리게 되었고, 증가하는 거리의 시위들과 외채의 압박, 그리고 흔들리는 소련의 지지에 직면하게 된다. 비록 크렌츠가 내부 개혁을 약속했지만, 동독은 최악의 순간으로 다다르게 되었고, 그는 동독의 붕괴를 피할 수 없었다.
1990년 현실 정치에서 밀려나게 된 크렌츠는, 여전히 동독의 마지막 위기에서 유혈사태를 피하게 했던 그의 역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 그는 나치즘의 폐허 위에 세워졌고, 그가 자라났던 사회의 강력한 옹호자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남아있다.
그의 서기장 임기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그는 <자코뱅>의 데이비드 브로더와 이네스 슈베어트너, 그리고 로렌 발혼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발트 해변에 있는 크렌츠의 소박한 집에서 몇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논의에서, 그들은 동독에서의 크렌츠의 역할과 냉전 유럽에서의 동독의 위치, 그리고 왜 그가 여전히 오늘날까지 그 기록을 방어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회주의자가 되다
로렌 발혼) 당신은 나치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유년기 대부분은 동독에서 보냈었죠. 혹시 “그래요. 저는 사회주의자고 이 국가를 지지합니다”라고 말하게 만든 유년기의 순간이나 성격들을 기억하나요?
에곤 크렌츠) 전쟁이 끝났을 때 저는 8살이었어요. 어머니의 첫 번째 남편은 1차 대전에서 전사했고, 두 번째 남편인 아버지도 2차 대전에서 전사하셨어요. 당연히, 그건 그녀에게 큰 영향을 주었죠. 어머니는 사회주의든, 아니면 그 반대든 간에 정치 자체에 무관심한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전쟁이 가족의 삶에 너무나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어머니에게 있어서 평화를 결정적인 문제로 만들었었죠.
저의 정치적인 기억은 제가 아이였을 때 소련 점령군이 붙여놓았던 커다란 포스터에까지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거기엔 스탈린의 큰 그림이 있었고, 아래에는 “히틀러는 왔다가 가버렸다. 그러나 독일인과 독일 국가는 남아있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어요. 아이였던 제게 그 문구들은 왠지 강렬하게 느껴졌어요. 독일에서 모든 것은 내려앉아 있었고, 그 누구도 정확히 무언가가 진행될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당연히, 스탈린을 인용할 때 당신은 스탈린주의자로 쉽게 모욕당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은 틀리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는, 어쨌든, 소련의 최고 대표자였죠.
‘브리트니츠-담가텐(Britnitz-Dammgarten)’에 있던 군 지휘소 근처에 한 소련 통역관이 머물면서 가끔씩 퇴근 후 저녁에 음식을 가져다준 것이 도움이 되었었죠. 언제 한번 우리는 그의 집의 계단에 앉았었고, 그는 노래를 불러줬어요. 그리고 갑자기 그가 말했습니다. “같이 노래 부르자!” 저는 노래의 음도 가사도 몰랐죠. 그는 꽤 분개하면서 말했습니다. “그건 괴테의 ‘들장미’야!” 그것이 저에게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독일인이 가르치는 독일어 교실에서가 아니라 소련 군복을 입은 러시아 사람 덕분에 괴테나 ‘들장미’를 만날 수 있었어요.
이런 것들이 제게는 깊은 인상을 주었었고, 비록 10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점차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46년에 창설된 ‘자유독일청년회(FDJ)’는 14세 이상만 가입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의 축복과 함께, 저는 모임에 나갔었고 FDJ의 행사들에 참여해서 여러 다른 노래들을 배우고 정치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학생 시절, 저는 교실 벽에 붙이는 신문의 편집장이 되었어요.
저는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1947년 어머니는 저를 서쪽에 있는 질트(Sylt) 섬의 베스터란트(Westerland)로 데리고 갔습니다. 전쟁은 제 누나를 그곳으로 데려갔습니다. 매형이 해군에서 복무했기 때문이죠. 누나는 어머니와 제가 그 곳에 머무르기를 원했지만, 어느 날 (무엇이 원인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우리는 떠날게. 여기엔 여전히 나치들이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녀는 저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되돌려 보내기로 결정했던 것이죠. 그 때문에 저는 오랫동안 감사해왔습니다. 왜냐면 그렇지 않았다면 제 인생은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기 때문이에요.
동독에서, 저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단계를 거쳐갔어요. 벽보 편집장부터 국가평의회 (State Council)의 의장까지요. 그것이 제가 서독 정치인들이나 누구든 ‘동독의 거물’에 대한 말을 했을 때 대개 약간의 상처를 받는 이유에요. 저는 그런 역할로 태어나지도 않았고, 그렇게 느껴본 적도 없습니다.
이네스 슈베어트너) 어떤 걸 읽으셨거나, 혹은 어떤 책이 당신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나요? 예를 들면, 학생 시절이나 FDJ에 있었을 때 말입니다.
에곤 크렌츠) 전 정치적으로 활동적이었기 때문에, 아주 일찍부터 공산당 선언에 도전했었죠. 제 생각엔 12살 때였던 것 같아요. 물론, 거의 이해하지 못했었고, 리프트네히트 외국어 사전을 사용했었죠. 저는 사전을 선언보다 더 많이 읽었습니다. 몇 번이나 읽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그걸 요즘에도 가끔씩 다시 봅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마다, 혹은 적어도 무언가가 새롭다고 인지할 때마다. 마르크스를 읽어요. 그리고 엄두가 난다면 <자본론>도요. 전 그걸 모스크바에서 유학하기 전까지 읽어보진 않았었지만, <자본론>은 왜 사회주의가 반드시 오는지에 대한 논리를 제공합니다.
데이비드 브로더 – 당신은 동독에서 성장한 첫 번째 세대에 속합니다.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독일을 모두 경험했던 레지스탕스 투사들이나, 독일공산당(KPD), 그리고 사회민주당(SPD) 당원이었던 이들과 대조되죠. 그 세대와 당신의 세대 사이의 어떤···. 관점이나 전망의 차이를 느끼신 적이 있습니까?
에곤 크렌츠) 글쎄요. 일단 무엇보다 저는 순수하게 동독에서 일대기를 써 내려간 세대에 속합니다. 파시즘에 맞서 싸운 이들보단 어리지만, 저희 세대보다는 열 살쯤 위의, 1945년에 사회민주당이나 독일공산당, 혹은 그 후에 사회주의통일당(SED, 동독의 집권당)을 선택하게 된, 또 다른 세대가 그 사이에 있었어요. 그러나 저는 완전한 첫 번째의 동독 세대에 속해있습니다.
확실히 차이점들이 있었어요. 서쪽이나 모스크바에서 망명을 왔거나, 히틀러의 감옥에서 돌아온 이들은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열성적인 투사들이었어요. 물론, 그들에 대한 존경이 너무나 커서 때로 우리는 그들이 어떠한 잘못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들은 히틀러에 맞서 싸웠고, 12년(혹은 에리히 호네커처럼 10년)을 감옥에서 보내기도 했고 그래서 당연히 우리는 그들을 우러러보았죠. 적어도, 저희 세대의 많은 이들이 그랬어요.
그것은 동독의 종언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당신은 그 대의명분을 위해 삶을 헌신해온 것으로 충분해. 이제 여기엔 우리가 있고 당신들이 주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해”라는 것을 말하기엔 우리는 너무 느렸죠. 그것은 무언가가 잘 안 되었을뿐더러, 그들이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독일, 하나의 나라
데이비드 브로더) 적어도 1949년 동독이 시작되던 당시에, 독일 통일을 추구하는 이야기들이 있었죠. 그러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의 건설과 ‘독일 토양의 사회주의 국가’라는 동독의 스스로에 대한 정의는 이 개념에 작별을 고하는 것처럼 보였죠. 평등한 조건에서의 통일, 혹은 사회주의 독일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었을 때, 어떤 전환점이 있었나요? 에곤 크렌츠) 동독 건국 당시, 모스크바와 베를린 양쪽에서 모두 “독일은 통일되어야 한다.”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동독은 그것을 위한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스탈린은 동독 정부에 전보를 보내서, 동독의 설립이 유럽 역사에서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보는 “통일되고 평화로운 민주적 독일로서 만수무강하라”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기도 했습니다. 이 생각은 1945년 6월 11일 독일공산당 창당호소문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것은 독일은 자유로운 민주공화국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소비에트 시스템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소련의 승인을 받은 동독의 공식적인 정책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연방공화국(서독)이 수립되고 동독이 수립된 후, 갑자기 어떤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어떤 종류의 독일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1952년에는 외부의 어떤 군사협정에서도 벗어난 통일 독일을 위해, 독일 전역에서의 자유 선거를 제안하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에 보내는) 소련의 편지가 있었습니다.
이 제안은 서구 열강들과 연방정부의 수장이었던 콘라트 아데나워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그런 목표를 거절한 실제적인 주장이 있었지 않았기 때문에, “이건 모두 프로파간다일 뿐이기 때문에,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빌헬름 픽(Wilhelm Pieck)이 동독의 대통령이 되었고, 오토 그로테볼(Otto Grotewohl)이 수상이 되었습니다. 당의 총서기였던 발터 울브리히트는 스탈린에 의해 모스크바로 올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벌주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러 오도록 해야 한다”고 말해졌습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인민경찰로 시작하여 군으로 이어지는, 동독 군대를 설립하는 어려운 임무—우리에게 많은 경제적인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왔던—들과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젊은이였던 저는 우리 학교의 피오니어(Pioneer)들과 함께 소련의 편지를 지지하는 서명을 모았습니다. 우리는 이 성명을 베를린으로 보냈고, 그로테볼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는 이런 결론이었습니다. “항상 독일민주공화국의 강화를 위해 당신이 무엇을 하는지를 기억하고, 평화와 독일 통일의 건설을 위해 봉사하라” 그것은 수년간 계속된 동독의 공식 정책이었습니다.
동독 측의 슬로건은 “모든 독일인이 같은 테이블에”였습니다. 아데나워는 “핵심은 통일이 아니라, 동쪽의 해방이다.”라고 말하며 화답했습니다. 아데나워는 프랑스의 고등판무관에게 “나는 조국의 통일보다 유럽의 통일을 선호하는 유일한 정부 수반”이라 말하며 자화자찬했습니다.
우리의(동독의) 국가는 멋진 시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당신에게 영원히 봉사할 수 있게 하라, 독일, 통일된 조국을 위해” 이것이 첫 번째 시구였으면 더 나았을 텐데 말이죠,
이네스 슈베어트너) 정치가 변화했을 때, 결국 당신은 국가의 이 부분을 건너뛰지 않으셨었나요.
에곤 크렌츠) 예. 그건 말하자면, 분단이 안건으로 올라가 있었고, 독일연방공화국이 나토에 가입하고, 그리고—단지 그것이 생겨난 이후여야만 한다고 주장해야 할 것입니다—[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의]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생겨난 이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 가사를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정부나 중앙위원회, 혹은 다른 누군가의 결정도 없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점점 일반적인 것으로 되었습니다. 주요 축제들에서 더는 불리지 않게 되었고, 이젠 가사 본문을 가르치지 않게 되었죠.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저는 옥토버 클럽의 정치 가수인 제 친구 하트무트 쾨니히(Hartmut König)와 말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가서 우리 국가의 가사를 바꾸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독일, 통일된 조국”이라는 이 과장된 주장을 제거해야 할 방법을 찾아내야 했고,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것도 꽤 잘했죠. 그래서 저는 호네커에게 이것을 들고 갔지만, 그는 제게 말했습니다. “왜 이걸 바꾸려고 하는 거지? 이건 우리의 목표야!”
데이비드 브로더) 그래도 최소한 추상적인 목표로라도 지도부에 남아있었다는 것이죠?
에곤 크렌츠) 네. 물론, 우리가 사회주의 독일을 가지고 싶어 했다는 생각은요. 물론 비현실적이었지만요.
1968년 서쪽에서는 청년들의 봉기가 있었지만, 동독에서도 헌법 투표가 있었어요. 다른 선거들과 달리, 여기엔 “예”와 “아니오”라는 대안이 있었고, 실제의 결정을 위해 투표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94%가 찬성표를 던졌죠. 이 헌법은 동독을 독일 민족(nation)의 사회주의 국가로 규정했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발터 울브리히트가 총서기였던 한, 우리는 언제나 동독을 사회주의 국가일 뿐만 아니라, 독일 민족을 위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국가는 분리되어있었지만, 민족은 계속 존재했던 것이죠.
그리고 1970년에는 독일 민족이 해체되었고, 한쪽이 더는 통일국가를 말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소련 친구들의 암시가 있었습니다. 이 논쟁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는 않군요. 그러나 당연히, 정치적으로 변화를 가져오는 일은 좋지 않은 것이었죠. 여기서는요. 소련 친구들은 동독으로 하여금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 100주년을 기념하는, 민족 문제에 관한 결의문을 준비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독일, 통일된 조국”이라는 아이디어는 여전히 거기 있었습니다—그것은 “독일 민족의 사회주의 국가”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소련 친구들은 그것을 바꾸라는 압력을 넣었고, 그리고 발터 울브리히트가 죽을 때까지 기다린 후에, 그것은 헌법에서 삭제되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실수였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서적 중요성이 이해되지 못하는—모든 동독 사람들은 서독에 친척이 있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경계 짓기에 기여했기 때문입니다.
동지와 친구
데이비드 브로더) 만약 동독이 단지 동구권 뿐만 아니라, 남반구의 해방운동을 포함하는 ‘반 제국주의 전선’의 일부였다고 한다면, 서구는 한동안 흔들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주도권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나요? 사회주의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지 않을 것이며, 가진 것을 고수하는데 한정되어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에곤 크론츠) 물론, 제가 말하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고, 아마 다른 어떤 사람들은 다르게 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1961년에서 어떤 진정한 기회를 봅니다. 물론 그것이 가장 눈에 띄는 전환점이긴 했어도, 장벽을 세우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언제나 동독에 특별히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1961년 6월 초, 니키타 흐루쇼프와 존 F. 케네디의 만남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렸고, 영향력의 영역은 다시 근본적으로 위태로워졌습니다. 그건 꽤 날카로운 만남이었습니다. 흐루쇼프는 “대통령님.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한다면, 가지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그리고 우리는 당시에 그것을 들었죠. 이것이 장벽이 세워졌을 때 미국으로부터 결정적인 반응이 없었던 이유입니다. 케네디가 통보를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 그것이 아주 좋은 해결책은 아니었지만, 장벽이 전쟁보다는 훨씬 더 낫죠.”
이것이 그 정치적 기회였지만, 다른 하나가 더 있습니다. 1961년 4월 12일, 처음으로 인간이 우주로 비행했을 때입니다.—유리 가가린 말입니다. 그것은 소련이 올바른 궤도로 나아가고 있다는 신호였습니다. 당시 우리 쪽에는 안일함이 있었고, 미국 측에선 진지한 분석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게 되었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따라잡았고, 우리는 계속 뒤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로렌 발혼) 당시 동독의 지도부에서 루마니아나 북한 같은 나라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었나요? 그들이 정말 ‘무장한 형제’처럼 보였나요, 아니면 이상하게 여겨졌을까요?
에곤 크렌츠) 루마니아가 운영되었던 방식에 대해선, 이야기하고 싶지 않지만, 저는 고르바초프가 총서기가 되기 전인 1985년 니콜라 차우셰스쿠와 바르샤바 조약의 기간 연장에 대한 회담을 나누기 위해 호네커의 특사로 파견되었습니다. 저는 그와 부쿠레슈티에서 장장 4시간에 걸쳐 토론을 펼쳤는데, 왜냐하면 소련과 우리가 20년을 연장하려 했을 때 그는 단지 5년을 연장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와 논의하면서, 저는 그 남자가 적어도 약간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제게 꽤 개인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렌츠 동지. 당신은 정치국에서 가장 어린 사람인데, 왜 20년씩이나 헌신하고 싶어 하시는지요? 앞으로 단 5년만이 남았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볼 수 있으실 겁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역할과 사회주의 국가들이 함께 일하는 방식을 두고 루마니아와 소련 사이에는 아주 강한 의견 차이가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브로너) 그리고 서유럽 공산당들이 동독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당신의 인상은 어떠셨나요? 그들이 종종 “현실사회주의”와의 차이를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삼았을 때 말입니다.
에곤 크렌츠) 우선, 저는 얼마나 오늘날의 사람들이 똑같이 판단하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말해야겠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공산당(PCF)과 이탈리아 공산당(PCI) 모두, 그리고 심지어는 스페인 공산당(PCE)까지 동독을 사회주의 공동체에서 가장 안정적인 요인으로 여겼습니다. 저는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 조르주 마르셰(Georges Marchais)와 몇 차례의 회담을 하였고, 에리히 호네커는 어린 시절부터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엔리코 베를링게르와 친구였습니다. 한때, 베를링게르는 세계민주청년연맹(World Federation of Democratic Youth)의 사무총장이었고 동시에 에리히 호네커는 FDJ의 의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그때부터 알게 되었고, 매우 개인적인 친분도 가졌습니다. 1976년 베를린에서 공산당과 노동자당들의 정상회담이 열렸고, 소련의 브레즈네프와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마르셰, 베를링게르, 스페인의 카리요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좋은 분위기였습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베를링게르는 호네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도 알겠지만, 유로코뮤니즘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해 주더라도 그렇게 나쁘진 않을 거예요.”
호네커는 그것을 브레즈네프에게 말했고, 브레즈네프는 곧장 요점을 말했습니다. “좋아요. 당신들의 제안을 해보시죠” 그리고 이제 여러분은 누가 그것을 막았는지에 놀라게 될 겁니다. 헝가리였습니다! 동독이 아니라요.
하지만 우리는 사회민주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1985년 빌리 브란트는 동독을 방문했고, 호네커와 아주 길고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브란트는 그에게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분리된 1918-19년의 해가 마지막 말이 되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호네커는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아뇨. 당연히 아닙니다.” 그리고 나서 사회민주당과 사회주의통일당은 “이념적 분쟁과 공동안보”라는 공동 논문에 동의했습니다.
통일 이후의 시기에, 이 논문이 고르바초프의 주도 아래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소련 친구들은 심지어 우리가 이 논문에 서명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기까지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문서에는 사회주의통일당의 역할에 관한 모호한 문구들이 들어있었거든요. 다른 어떤 사람들은 사회주의통일당이 지지했지만 지도부가 반대했다고 말했습니다만, 그것도 말이 안 됩니다. 우리는 지도부 내에서 결정을 내렸고, 문서는 동독 측의 사회과학아카데미에서 준비되었습니다. 그곳의 총장은 사회주의통일당 지도부의 논의 요청과 함께 그 문서를 미리 에리히 호네커에게 보냈었습니다. 호네커는 거기에 검은 잉크로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문서다.”
데이비드 브로더)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대화를 나눌 때, 그가 당신을 진실한 공산주의자로, 마르크스주의 문화를 가진 사람으로 생각했나요?
에곤 크렌츠) 만약 에리히 호네커가 여기 앉아있다면, 그는 분명 대답에 저와는 다르게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호네커의 경험과 관련이 있는 것이며, 솔직히 저는 언제나 소비에트 연방에서처럼 일들이 진행될 수 없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고르바초프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구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분명히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건 즉시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었고 몇 년의 과정들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1989년 11월 1일, 저는 모스크바에서 그와 4시간에 걸친 토론을 했습니다. 저는 그가 여전히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제게 말해주시죠,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당신의 ‘유러피안 홈’(고르바초프의 유럽의 블록간 협력 요구)에서 동독은 어떠한 역할을 하나요?” 그는 제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척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말했습니다. “당신은 동독이 소련의 아이라고 말했고, 그것은 2차대전의 결과이자 냉전의 결과입니다. 이제 저는 당신이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지킬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독 인민들은 소련에 가장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조지 부시와 다른 많은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어느 누구도 독일 통일을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유럽의 안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지 않았고, 그리고 적어도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나토가 있는 한 독일 통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꽤 날카롭게 말했습니다. “크렌츠 동지, 정치국의 동지들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독일 통일은 의제로 올라와 있지 않다고.”
그것은 1989년 11월 1일의 일이었습니다. 왜 그가 특히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바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지만, 당연히 그것은 독일 정치에서도 스캔들이었었고, 고르바초프 없이는 독일 통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국경을 열다
이네스 슈베어트너) 동독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 대중들의 기억의 정치가 천천히 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으시나요? 에곤 크렌츠) 예. 당연하죠. 하지만 아마도 좀 더 깊이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1989년 11월 9일의 그 밤, 연방공화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동독에 대해 처음으로 중대한 오판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국경에서 기쁨에 취한 사람들이 연방공화국의 시민이 되기를 원한다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여행하기를 원했을 뿐이었죠. 그리고 그들이 그런 소원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가 그걸 충족시켜주지 못했다는 것이 지금까지도 저 스스로를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동독 지도부의 직권남용과 부패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대해 말해지는 것들의 대부분은 사실이 아니며, 어떤 법치국가에서도 조사되지 않은 것이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말한 대로 실천하지 않았다는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여행에 대한 갈망 속에서 사람들은 쇼윈도를 보았습니다. 동독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죠. 그러나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해야만 할 것이고, 임대료를 내야만 하며, 세금을 내야만 하며, 연방공화국에서의 평범한 생활이 동독에서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를 것이라는 사실은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1990년 3월 동독에서, 기독교민주당이 승리를 거두었던 인민의회 (Volkskammer) 선거의 결과에 대해 말합니다. 하지만 “연방공화국의 시민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은 투표용지에 적혀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이 결정들에 대해 언급되는 모든 것들은 추정일 뿐이지, 사실은 아닙니다.
올해는 독일연방공화국의 기본법(Basic Law)이 제정된 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연방공화국의 설립은 소련의 승인과 함께, 동독이 출현하게 되는 조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본법은 독일 분단의 ‘마그나카르타’이기도 했습니다. 그건 오늘날 완전히 은폐되었죠. 기본법에는 146조가 있는데, 그것은 자유로운 자기 결정에 따른 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새로운 헌법을 채택한다는 것을 모든 독일인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건 오늘날까지도 일어나지 않은 일입니다.
짧은 기간 안에, 전체 경제는 폐지되다시피 했습니다. 지금 정확한 수치는 모르겠지만, 만약 당신이 1차대전 직후 첫 번째 해와, 2차 대전 직후 첫해, 그리고 통일 후 첫해를 본다면, 그전에는 전쟁 전의 수준과 비교해보아도 옛 동독의 영역에서 그렇게 적게 생산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신탁청(Treuhand)의 첫 번째 청장이었던 카슈텐 로베더 (Karsten Rohwedder)는 왜, 누구에 의해서 그랬는지는 여전히 불명확하지만, 총격을 받아 죽었습니다. 그는 동독 경제의 가치를 부동산과 토지를 제외하고, 제가 알기로는, 6,500억 독일 마르크로 추정했습니다. 이것은 비교적 현실적인 추정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동독 경제를 부동산을 포함하여 1조 6천억 마르크의 가치가 있다고 추정했었거든요.
이네스 슈베어트너) 당신은 체제 전환의 주요 이유 중 하나가 사람들이 다시 여행하기를 원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엔 경제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고, 슈타지 등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런 것들을 인정하시나요? 왜냐면 그건 단지 “우리는 지금 여행하고 싶어”가 아니었고, 그것은 하나의 측면일 뿐이었죠.
에곤 크렌츠) 글쎄요. 국가보안부(Staatssicherheit)에 관한 한, 저는 ‘슈타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게슈타포 등과 비교하기 위해서 꽤 잘 고안된 것입니다. 저는 왜 심지어 일부의 좌익 정치인들까지 이 단어를 쉽게 사용하는지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보기관에는 그들만의 법이 있고, 그건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습니다. CIA도 정확히 민주적인 조직이 아니고 BND(연방독일의 정보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되는 건 우리뿐입니다. 모든 것이 저 밖에 열려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겐 모든 게 닫혀있지만요. 종종 그렇게 많은 부담을 지니고 있는 이들은 대항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동등한 조건에서 싸우고 있지 못합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제 BND 문서 열람을 신청했습니다. 당연히, 저는 그것을 볼 수 없었죠. 그건 불가능해요. 그것이 민주적인 정보기관입니다. 그러나 그리고 나서 그들은 제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저에 대한 내용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 그리고 몇주 전 그들은 제게 제 앞에 놓여 있는 것들에 대한 언급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들은 정치국의 어떠한 당원들이 당시에 가졌을 법한 질병들을 모두 제게 돌려놓았습니다···. 그건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다행히도 저는 그곳에 적혀있던 어떤 병도 앓고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동독 주민들이 뒤늦게 주장되었던 것만큼 국가보안부에 대해 중요성을 부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정말로 사람들이 그것을 경험했을까요? 아니면 그들이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어딘가에서 읽은 것인 걸까요? 오늘날 말해지는 것과는 모두 약간 다릅니다.
11월 9일에서 10일까지의 밤에 대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저는 “그대로 진행되도록 둘 것인가? 아니면 군대를 사용해야 할 것인가?”—그리고 이건 실제로 가능했었죠—를 고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 군대를 사용하는 것은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었죠. 그래서 저는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기로 결정했지만, 11월 3일에 국경 지역의 시민들에게 화기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제가 내렸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11월 9일의 밤이 찾아왔고, 귄터 샤보스키(Günter Schabowski)가 다음날이 아니라 갑자기 즉시 국경을 개방할 것이라고 선언하여 촉발한 혼란 이후에, 국경수비대는 기본적으로 국경을 열 수 있는 방법도, 명령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설령 시위대가 국경 지역으로 오더라도 총기를 사용하지 말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그것은 방지되었습니다. 재난을 피했죠.
이네스 슈베어트너) 하지만 당신은 무언가 다른 것에 동의했죠. 국경을 개방하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그건 불필요하게 혼란스러웠다고 하죠.
에곤 크렌츠) 네. 11월 10일부터 동독 시민들은 그들이 원할 때, 원하는 곳으로, 원하는 만큼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그리고 11월 9일의 기자회견에서 샤보스키는 실수로 “지금부터”라고 말하는 바람에, 혼란이 생겨났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상황이 뒤늦게 묘사된 것 같진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장벽은 습격받지 않았죠. 오늘날 영화를 보면, 사람들은 곡괭이와 삽과 망치를 들고 장벽으로 갑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서독 지역에서 촬영되거나 훨씬 이후에 촬영된 것이었습니다. 11월 9일 저녁, 단지 국경검문소만이 열렸을 뿐입니다. 그리고 동쪽에서 서쯕으로만 갈 수 있었고, 서쪽에서 동쪽으로는 올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도 11월 9일이 아니었습니다. 훨씬 이후에 일어났죠. 미국 대통령이 제게 개인적인 축하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건 ‘국경개방’을 언급하는 것이었죠. 저는 헬무트 콜과 11월 11일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장벽의 붕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설령 국경검문소가 열린다고 하더라도 국경이 사라지진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미국 대통령과 영국 총리, 그리고 프랑스 대통령에게 공개 전보를 보내, 동독 정부의 결정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어느 누구도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서쪽에서도요. 심지어 서베를린의 시장도요. 그는 “오늘은 통일의 날이 아니라, 서로 다시 만나는 날”이라 표현했죠.
데이비드 브로더) 하지만 아무리 샤보스키가 실수를 해서 대중들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국경으로 향하게 되었을 때 당신은 그 상황에 대해 통제력을 잃었다고 생각하진 않았나요?
에곤 크렌츠) 글쎄요. 우선 당신은 동독 주민들이 여기에 익숙해졌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무언가 공식적으로 말해지면, 그건 이미 이루어진 거라는 것 말이죠. 샤보스키가 그렇게 말한 이후에, 그건 일종의 초대장처럼 여겨졌죠. 그날 저녁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샤보스키의 실수였고, 또 하나는 ARD(독일연방공화국 공영방송)의 8시 뉴스에서 상황에 다시 불을 붙였던 것입니다. 그 시점까지만 해도 국경을 향하던 사람은 200명도 채 안되었지만, “국경이 열려 있다.”라는 뉴스가 나왔을 땐, 이미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었죠.
사람들은 독일연방의회(Bundestag)의 국회의원들보다 더 잘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거의 모든 것들을 망칠 수도 있었습니다. 소식이 알려지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독 국가를 불렀습니다. 일이 평화롭게 진행될 것이라는 보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완전히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소련이 불과 며칠 전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2차대전 연합군의 관할로 되어있던 베를린의 국경을 개방할 수 없습니다. 베를린은 4국의 통제 아래에 있습니다.”
끝이 난 후
이네스 슈베어트너) 저는 당신이 오늘날 동독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 정체성과 분열은 마음속에도 살아있지만,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에서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동독과 서독 사이에는 일종의 계급적 차이가 존재합니다. 에곤 크렌츠) 네. 그건 모두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죠. 예를 들어, 1991년 6월에 저는 헬무트 콜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그에게 만약에 일이 진행되어왔던 방식 그대로 진행된다면, 동독인들은 2류 독일인처럼 느낄 것이라고요. 저는 그에게 동독인들이 차별받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동독이나 동독인들은 파시즘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라고요.
2012-17년의 독일 대통령, 가우크는 56년간 동독인들이 독재정권하에 살아왔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56년이라는 말로 그는 12년간의 나치 독재, 4년간의 소련 점령, 그리고 40년간의 동독 정권을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나치독일과 동독을 동등한 위치에 두는 끔찍한 비교입니다. 이건 전혀 그렇지 않았고, 또한 당시 나치에 맞서 싸웠던 이들에 대한 모욕이기도 합니다. 편지에서 저는 동독의 대표적인 사회과학자였던 라이프치히의 발터 프리드리히(Walter Friedrich) 교수의 7쪽 분량의 평가를 동봉했습니다. 그는 만약 이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독일의 상황은 마치 북부와 남부 이탈리아 사이의 상황과 비슷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네스 슈베어트너) 그건 대체로 현실이 되었죠···.
에곤 크렌츠) 네. 그건 현실이 되었죠. 동독이 높은 생산성을 달성할 가능성은 전국의 탈산업화로 인해 빼앗겼죠. 동독의 인구는 러시아 혁명이 있었던 1905년의 인구와 비슷합니다. 이것은 생활의 조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버스 연결이 끊기고, 철도 연결이 끊겼습니다. 이전에는 각 마을마다 간호사가 한 명씩 있었고, 심지어 더 큰 마을에는 의사가 있는 경우도 때때로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게 되었죠.
동독 학교의 일부 학위들은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 아내는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녀는 1991년에 “1985년에 사회주의통일당의 작은 분회의 서기였으며,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반대했던 사람은 새로운 연방공화국에서 교직에 취임할 수 없다”라는 이유로 해임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제 아내는 고르바초프 가족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었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미하일의 아내] 라이사 고르바초프가 동독에 있을 때마다 함께 다녔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1985년에 고르바초프 편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은 가르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독 엘리트 전체가 교체되었죠.
데이비드 브로더) 통일 이후에 콜에게 편지를 썼다면, 고르바초프와도 관계를 유지했었나요?
에곤 크렌츠) 네 그랬었죠. 1994년까지는요. 당시에 고르바초프는 독일 수도의 명예시민이 되기 위해 베를린으로 초청받았었죠. 그러나 그가 그것을 받기 몇 주 전, 베를린 해방으로 서훈을 받거나 동독의 명예시민이 되었던 소련군 지도자와 소련 병사들은 영예의 명단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게다가, 고르바초프의 친구이자 동지인 에리히 호네커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명은 명예시민이 되고 다른 하나는 감옥에 갈 정도로 그렇게 크게 다르진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미하일 세르게예비치에게. 이 도시에서 파시즘에 맞선 싸움에서 공을 얻은 이름보다 당신의 이름이 우선하지 않는 것은, 양심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는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45년 3월 30일 제국의회에서 붉은 깃발을 게양했던 소련군 예고로프와 칸타리아가 영예의 명단에서 제외되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건 제게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습니다.
그 후 언론에서는 그가 터키의 어떤 대학에서 연설을 했고, 평생 동안 공산주의를 물리칠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발언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 믿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에게 팩스를 보내 정말 그랬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에 대해 어떠한 답변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질문에서는 답을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죠.
전 그가 체제 전환 이후에 올바르게 행동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를 오랫동안 믿어왔고, 그건 제 실수라고도 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너무 길게 말하긴 했지만, 저는 소련을 망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의 손에서 물건이 미끄러져서 떨어진 것이죠.
이네스 슈베어트너) 동독이 뒤처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동독의 역사를 연방공화국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에서 재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에곤 크렌츠) 아뇨. 저는 동독과 역사를 함께 분석함으로서 독일 전체의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호작용에서 말이죠. 동독과 연방공화국의 관계는 항상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였습니다. 동독을 독일 분단의 주범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비난이 쏟아져야 한다면, 양쪽 모두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제기된 의혹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장벽, 철조망, 사격명령(심지어 그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지만요), 여행 중단, 그리고 몇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고유한 사회주의의 가치들이 아니라, 전후의 전개와 냉전의 상황에 의해 생겨난 조건들입니다. 우리는 만약에 서독이 사회주의 국가였다면 결코 장벽을 세우지 않았을 거예요. [웃음] 그러나 이런 것들마저 사회주의의 가치의 이루인 것으로 주장되었죠. 만약에 세상에 적이 없다면, 군대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렌 발혼) 하지만 되돌아보면, 당신은 동독에서 그렇게까지 문화적 생산에 대한 검열이 많이 필요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에곤 크렌츠) 저는 문화의 영역에서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만을 지은 것이 아니라 위대한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전후 시대에 문학과 문화의 위대한 정신이 동독에서 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연방공화국이 아니라요.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나의 의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견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안나 제거스(Anna Seghers)가 왔고, 저는 음악과 문학 분야의 많은 이들을 열거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반파시스트 독일을 지지하기로 결정했고, 남았습니다. 볼프 비어만(Wolf Biermann)만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네스 슈베어트너) 그러나 크리스타 볼프(Christa Wolf)같은 작가들에 대해선 잘못하지 않았나요?
에곤 크렌츠) 크리스타 볼프는 심지어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의 후보 멤버이기도 했습니다.
로렌 발혼) 네. 하지만 아주 모순적인 관계가 있었죠. 왜냐하면 열망과 현실은 달랐으니까요.
에곤 크렌츠) 음. 그 의도는 언제나 예술과 문화를 무기로 보는 것이었고, 무기는 항상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는 것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술과 문화를 무기로만 보는 일방적인 시각은 물론 당연히 실수였습니다.
데이비드 브로더) 당신은 브레히트를 언급했었죠. 그의 시 '울름 1592'를 아시는지 궁금합니다. 시는 하늘을 나는 기계를 만들어서 탑 위에서 뛰어내렸지만, 그저 바닥에 부딪혀 죽게 된 재단사에 대해 말합니다. 그 재앙을 지켜봤던 사제는 사람들에게 말했죠. "본 것처럼, 인간은 절대 하늘을 날 수 없어". 하지만 수많은 실험들의 세기를 거친 후, 인간의 비행이라는 꿈은 불명예를 씻게 됩니다. 1991년에 일부 사람들은 공산주의 실험을 수호할 것에 대한 브레히트의 우화를 언급하면서 주장했습니다. 실패한 "첫 번째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실행 가능한 채로 남아있다고. 그러나 루치오 마그리(Lucio Magri)가 말했던 것처럼, 비유하자면, 우리는 재단사의 실험이 정말 항공학에 무언가를 기여했는지, 혹은 다른 시도를 할 가치가 있지는 않았을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동독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우리는 잘 알려진 수많은 부정적인 면과 몇 가지의 긍정적인 면을 봅니다. 무엇이 역사에서 실제로 구출될 수 있을까요?
에곤 크렌츠 - 글쎄요. 그 실험에 관련된 한, 저는 이미 제가 생각하는 바를 말했습니다. 그건 하나의 시도가 아니라, 날아야만 했던 프로젝트였죠. 만약 남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일반적으로 말하면, 동독은 자본가 없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40년에 걸쳐 증명했습니다. 그건 꽤 가치가 있는 일이에요. 그리고 인간에 의한 착취가 인간에 의해 폐지될 수 있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모두를 위해 일자리가 존재하고 모두를 위한 교육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죠.
독일의 어느 곳에서도 가장 낮은 계급의 그렇게 많은 사람이 교육의 기회를 동독에서처럼 제공받을 수 없습니다. 1949년 동독에서 여성은 남편의 허락 없이 은행에서 계좌를 만들거나 취직을 할 수 있었죠. 서독에서는 1970년대 중반에서야 가능해졌었죠. 우리는 오늘날 동독 여성들의 자부심이 여전히 매우 높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동독은 탁아소나 유치원들이 가족과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데에 좋다는 것을 증명했죠.
그래서, 저는 많은 것들을 나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당연히 독일신탁청(Treuhand, 1989년 이후의 공공 자산의 민영화를 위한 기구)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서독에서의 최초의 주장 중의 하나는 동독인들이 콜처럼 살고 호네커처럼 일하길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독인들은 근면 성실하고 동독인들은 멍청하고 게으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최고의 교수 중의 한 명이었던 사람은 <지금, 독일은?>이라는 책으로 토크쇼를 진행하면서, 동독이 40년간 사람들을 망쳤고 현재는 그들은 모두 멍청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네스 슈베어트너) 일부가 말하는 것처럼, 동독의 모든 것이 나쁘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만들어내고 싶어하죠.
에곤 크렌츠) 저는 차라리 모든 것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겠습니다. 모든 것이 나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은 나쁜 것들이 가장 명백했었다는 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