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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1일 (월) 17:37 기준 최신판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
1. 프랑스 사회주의

현대 사회주의는 그 내용 면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한편으로는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유산자와 무산자,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 사이의 계급 대립과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을 지배하고 있는 무정부 상태를 관찰한 결과다. 그러나 현대 사회주의는 그 이론의 형식 면에서 처음에는 18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계몽 사상가들이 제기한 원칙들을 더 철저하게 발전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새로운 이론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도, 비록 그 뿌리가 물질적 토대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우선은 과거에 쌓여 온 사상의 재료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 다가오는 혁명을 위해 사람들의 머리를 깨우쳐 주던 위대한 인물들은, 그들 스스로 아주 혁명적으로 행동했다. 그들은 종류가 어떻든간에 외적 권위는 모두 승인하지 않았다. 종교, 자연관, 사회, 국가 제도 등 그 모든 것들을 가장 무자비하게 비판했다. 모든 것이 이성의 심판 앞에서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단념하든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유하는 오성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단 하나뿐인 척도가 되었다. 헤겔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세계가 머리로(거꾸로--역자) 서게 된 시대였다. 처음에는 인간의 두뇌와 두뇌의 사유를 통해 발전한 명제가 모든 인간 행위와 사회 관계의 기초로 승인되기를 요구하고 나섰다는 의미에서 그랬으나, 나중에는 이 명제들에 모순되는 현실이 위에서부터 밑에까지 사실상 뒤집어엎어 졌다는 더 넓은 의미에서 그랬다. 과거의 모든 사회 형태와 국가 형태, 온갖 전통적 관념은 불합리한 것으로 인정되어 헌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세계는 지금까지 한갖 편견에 근거를 두어 왔으며, 과거의 모든 것들은 동정받고 멸시당할 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해가 솟았고, 이성의 왕국이 닥쳐왔다. 이제부터 미신, 부정, 특권, 압박은 영원한 진리, 영원한 정의, 자연 자체에서 나오는 평등, 박탈할 수 없는 인권에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는 이제, 그 이성의 왕국이란 부르주아 왕국의 이성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영원한 정의는 부르주아 법질서로 실현되었다는 것, 평등이란 결국 법률 앞에서의 부르주아적 평등이었고, 가장 본질적인 인권의 하나로 선언된 것은 부르주아적 소유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성 국가---루소의 사회 계약론---는 부르주아 민주 공화국으로 실현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의 위대한 사상가들도 모든 선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그들에게 설정한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봉건 귀족과 나머지 사회 전체의 대표자로 등장한 부르주아지 사이의 대립과 아울러, 착취자와 피착취자, 게으른 부자와 일하는 가난뱅이 사이의 일반적 대립이 있었다. 바로 이런 사정으로 부르주아 출신자가 어떤 개별 계급의 대표자로서가 아니라 고통받고 있는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는 생겨날 때부터 그 자체의 대립물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자본가는 임금 노동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중세 동업 조합의 장인이 현대의 부르주아로 발전함에 따라, 동업 조합 직인과 조합 외의 날품팔이 노동자는 프롤레타리아로 발전했다. 대체로 부르주아지가 귀족과 투쟁하는 데서는 당시의 갖가지 근로 계급의 대표자로 자처할 권리가 어느 정도 있었으나, 대규모의 부르주아 운동이 있을 때마다 그 발전 정도야 어찌 됐든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선구자 격인 계급의 독자적인 운동이 함께 일어나곤 했다. 독일의 종교 개혁과 농민 전쟁 당시의 재세례파와 토머스 뮌처의 운동, 영국 대혁명 당시의 수평파의 운동,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바뵈프의 운동이 그러했다. 미숙한 계급의 이러한 혁명적 무장 봉기에는 이에 상응하는 이론적 진출이 뒤따랐다. 즉 16세기와 17세기에는 이상적 사회 제도를 공상적으로 서술하는 글들이 나타났고, 18세기에는 벌써 직접적인 공산주의 이론(모렐리, 마블리)이 나타났다. 평등에 대한 요구는 벌써 정치적 권리의 영역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회적 지위에까지 넓어져 나갔다. 계급적 특권뿐만 아니라 계급적 차별 자체까지도 폐지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새로운 학설은 맨 처음에는 모든 향락을 금하는 금욕적인 스파르타식 공산주의 형태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생 시몽, 푸리에, 오언이라는 3대 공상가가 나타났다. 생시몽은 프롤레타리아적 경향과 함께 부르주아적 경향에 아직 의의를 어느 정도 부여하고 있었으며, 오언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장 발전한 나라에서, 그리고 그러한 생산으로 생겨난 대립들의 자극을 받아 계급 차별 철폐안을 프랑스 유물론과 직접 연결해 체계화했다.


이 세 사람에게 공통된 점은, 그들이 그 무렵에 역사적으로 발생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로 나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계몽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우선 어떤 특정한 사회 계급을 해방하려 하지 않고 단번에 모든 인류를 해방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왕국은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들이 주장하던 이성의 왕국과는 천양지차가 있었다. 계몽 사상가들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 부르주아 세계 또한 봉건제나 과거의 모든 사회 제도와 마찬가지로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이것 또한 쓰레기통에 내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참된 이성과 참된 정의가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하지 못한 이유는 오직 그것이 정확하게 파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금은 천재가 나타나서 진리를 인식하게 되었지만 전에는 그럴 만한 천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천재가 지금 나타나, 바로 지금 진리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은 결코 역사 발전 과정에서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는 결과나 피할 수 없는 사건이 아니며 순전한 요행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천재는 500년 전에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렇게 되었더라면 그는 500년에 걸친 인류의 오류와 투쟁,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혁명을 준비하고 있던 18세기 철학자들은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유일한 심판자로서 이성에 호소했다. 그들은 이성 국가, 이성 사회를 세울 것을 요구했으며, 영원한 이성에 모순되는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없애길 요구했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이 영원한 이성이란 실은 바로 당시 부르주아로 발전하고 있던 중산 시민의 이상화된 오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으로 그 이성 사회와 이성 국가가 이룩되었을 때, 이 새 제도는 이전까지의 제도에 비해 매우 합리적이기는 했으나 절대 이성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성 국가는 완전히 파산하고 말았다. 루소의 사회 계약론은 공포 정치 시대에 실현되었는데, 오히려 자기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믿지 못하게 된 부르주아지는 처음에는 집정 정부를 매수하는 데서, 그리고 나중에는 나폴레옹 전제 정치에 비호를 청하는 데서 피난처를 구했다. 약속되었던 영원한 평화는 끊임없는 침략 전쟁으로 대치되었다. 이성의 사회도 그리 잘되어 가는 편이 아니었다. 빈부 대립은 전반적 번영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첨예해졌다. 즉 이 대립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던 동업 조합 등의 특권이 폐지되었고, 이 대립을 얼마간 누그러뜨리던 교회의 자선 시설이 폐지되었다. 이제 봉건적 질곡으로부터 '소유의 자유'가 이루어졌지만, 이 자유는 소부르주아나 소농민의 경우에 대자본과 대토지 소유자 사이의 세찬 경쟁에 압도되어 자신의 자그마한 소유를 바로 이 대부호들에게 팔아넘기는 자유를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자유'는 소부르주아나 소농민의 경우에는 소유를 잃는 자유가 되고 말았다. 자본주의적 기초 위에서 진행되는 공업의 급속한 발전으로 근로 대중의 가난과 궁핍이 사회 존립의 필수 조건이 되었다. 칼라일의 말에 의하면, 현금이 더욱더 이 사회를 연결하는 유일한 요소가 되어 갔다. 범죄 건수가 해마다 늘어났다. 멀건 대낮에 파렴치하게 저질러지던 이전의 봉건적 죄악이 뿌리뽑히지 않은 채 밀려나기는 했지만, 그 대신 과거에는 오직 비밀스럽게 일어나던 부르주아적 죄악이 그만큼 더 성행하게 되었다. 상업은 더욱더 사기가 되어 갔다. '박애'라는 혁명적 표어는 경쟁에서의 사기와 질투로 실현되었다. 폭력적 억압 대신에 매수가 나타났고, 칼 대신에 돈이 사회 권력의 가장 주된 지렛대가 되었다. 초야권(初夜權)은 봉건 영주에게서 부르주아 공장주에게로 넘어갔다. 매음이 유례없는 규모로 늘어났다. 결혼 자체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법적으로 승인된 매음 형태였고 매음의 공식적 가면이었으며, 무수한 간통으로 보충되었다. 한마디로 '이성의 승리'로 채워진 사회·정치 제도는 계몽 사상가들의 눈부신 약속에 비하면 쓰라린 환멸을 자아내는 하나의 희화였다. 다만 이 환멸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직 없었을 뿐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면서 나타나게 되었따. 1802년에 생 시몽의 『제네바 편지』가 나왔고, 1808년에 푸리에의 처녀작---그의 이론의 기초는 이미 1799년에 세워졌지만---이 나왔으며, 1800년 1월 1일에 로버트 오언이 뉴라나크의 관리를 담당했다.


그러나 당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은 아직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대공업은 영국에서 겨우 생겨났을 뿐이며 프랑스에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직 대공업만이, 한편으로는 생산 양식의 변혁, 즉 생산 양식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없애라고 절박하게 요구하는 충돌---대공업에 의해 형성된 계급들 사이의 충돌뿐만 아니라 대공업에 의해 나타난 생산력과 교환 형태 사이의 충돌---을 발전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이 거대한 생산력의 발전 속에서 그와 같은 충돌을 해결할 수단도 제공한다. 따라서 1800년에는 새 사회 제도에서 발생하는 충돌들이 아직 겨우 일어나기 시작했던 만큼, 이러한 충돌을 해결할 수단의 발전 또한 아주 미미했다. 비록 공포 정치 시대에 파리의 무산 대중이 한때 권력을 빼앗아 부르주아지 자체를 반대하는 부르주아 혁명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무산 대중은 당시의 정세에서 자기들이 오랫동안 지배할 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다. 계급의 맹아로서 이제 겨우 일반 무산 대중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아직은 독자적인 정치 행동을 전혀 할 수 없었던 프롤레타아리아트는 억압과 고통을 받는 계층에 지나지 않았다. 이 계층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기껏해야 외부나 위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정세가 사회주의 창시자들의 관점을 규정했다. 미숙한 자본주의적 생산 상태, 미숙한 계급 관계에 상응하여 미숙한 이론이 나왔다. 발달하지 못한 경제 관계 속에 아직 가려져 있던 사회적 과제의 해결책을 머리 속에서 꾸며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회 제도는 오직 결함만을 나타냈을 뿐이다. 이러한 결함을 없애는 거싱 사유하는 이성의 과제였다. 더 완전한 사회 기구의 새로운 체계를 발명하고, 선전을 통해서 할 수 있다면 모범적인 실천 사례를 보여 줌으로써 이를 외부로부터 현존 사회에 강요해야 했다. 따라서 이러한 새 사회 제도는 처음부터 공상에 그칠 운명을 지니고 있었으며, 세밀하게 작성되면 될수록 더욱더 순수한 환상에 빠져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의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이제는 지나간 일이 된 이 같은 측면들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자. 이제 와서는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이 환상을 잘난 듯이 들춰내, 이러한 '환상'에 비해 자기 자신의 사고 방식이 건전하다고 뽐내는 따위는 문필가 나부랭이들에게나 맡겨 두자. 우리는 오히려 환상의 껍질을 뚫고 곳곳에서 솟아 나오는 것이기에 속물들로서는 볼 수 없는 그 천재적인 관념의 맹아와 천재적 사상을 반기는 바다.


생 시몽은 프랑스 대혁명의 아들로, 혁명이 일어났을 때 아직 30세도 되지 않았다. 혁명은 이제까지의 특권적인 유한 신분---승려와 귀족---에 대한 제3신분, 즉 생산과 생업에 종사하는 대다수 국민 대중의 승리였다. 그러나 제3신분의 승리는 이 신분 가운데 일부분의 승리에 지나지 않으며, 제3신분 가운데 사회의 특권층인 유산 부르주아지가 정권을 탈취했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이 부르주아지는, 일단 몰수되었다가 다음에는 매각된 귀족과 교회의 소유지를 가지고 투기하고 군수품 조달자로 국민을 속여 혁명 과정에서 급속히 발전했다. 집정 정부 시기에 바로 이 투기꾼들이 지배함으로써 프랑스와 혁명을 파멸에 이르게 했으며, 마침내 나폴레옹에게 쿠데타의 구실을 주었다. 그래서 생 시몽의 머리 속에는 제3계급과 특권 계급 사이의 대립이 '근로 계층'과 '유한 계층' 사이의 대립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유한 계층이란 이전까지의 특권 계급의 대표자들뿐만 아니라 생산이나 상업에 참가하지 않고 금리로 생활하는 모든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또 '근로 계층'이란 임금 노동자뿐만 아니라 공장주, 상인, 은행가들도 다같이 일컫는 말이었다. 유한 계층이 정신적으로 지도하고 정치적으로 지배할 능력을 잃었다는 것은 혁명을 통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로 확증되었다. 또 생 시몽이 보기에는 무산자 또한 이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공포 정치 시대의 경험으로 증명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경우에 누가 지도하며 지배해야 할 것인가? 생 시몽의 견해에 의햐면 그것은 새로운 종교적 유대로 결합된 과학적 산업이었는데, 이 종교적 유대란 종교 개혁 이래 혼란된 종교 사상을 통일할 사명을 지닌, 필연적으로 신비적이며 엄격히 신분적인 '신(新)기독교'였다. 그리고 과학이란 곧 학자였으며, 산업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적극적인 부르주아·공장주·상인·은행가였다. 물론 이러한 부르주아는 일종의 공무원, 즉 사회 전체의 신임을 받는 자라야 했으나, 노동자에 비하면 그들은 명령권과 경제적 특권이 있는 지위를 누려야 하는 것이었다. 은행가로 말하면, 바로 그들이야말로 신용을 조절함으로써 사회적 생산 전체를 조절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견해는 프랑스에서 대공업이, 따라서 동시에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이 아직 생겨나는 과정에 있던 시기에 전적으로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 시몽은 특히 강조해 말하기를, 자기는 언제 어디서나 '가장 다수이며 가장 가난한 계급'의 운명에 우선 관심을 가진다고 했다.


생 시몽은 이미 『제네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제기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노동해야 한다.


그는 이미 그 책에서, 프랑스에서 나타난 공포 정치의 지배가 무산 대중의 지배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무산 대중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보라, 당신들의 동지들이 프랑스를 지배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굶주림을 빚어 냈던 것이다.


프랑스 혁명을 하나의 계급 투쟁, 그것도 단지 귀족과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으로서만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주아지와 무산자 사이의 투쟁으로 이해한 것은 1802년으로서는 아주 천재적인 발견이었다. 1816년에 생 시몽은 정치학을 생산의 과학이라고 선언했으며, 정치학이 경제학에 완전히 흡수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여기서는 경제 상태가 정치 제도의 기초라는 견해가 아직 맹아적 형태로밖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인간에 대한 정치적 지배가 물건에 대한 관리와 생산 과정에 대한 지도로 바뀌어야 한다는 사상, 즉 최근에 그렇게도 많이 거론된 '국가 폐지'에 관한 사상이 벌써 명백하게 표명되고 있다. 또 생 시몽은 동시대인을 능가하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연합군의 파리 입성 직후인 1814년과 백일 천하 시기인 1815년에 프랑스와 영국의 동맹, 나아가 이 두 나라와 독일의 동맹이 유럽이 평화적으로 발전하고 번영하기 위한 유일한 담보라고 선언하고 있다. 1815년에 프랑스 사람들에게 워털루의 승자인 영국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말한데는 실로 크나큰 용기와 역사적 선견지명이 필요했다.


생 시몽의 경우에 그 식견이 천재적인 해박함을 지니고 있어서 그의 견해가 후대 사회주의자들의 엄밀한 경제 사상을 빼고는 거의 모든 사상을 내포하고 있었다면, 푸리에에게서 우리는 현존 사회 제도에 대한, 진짜 프랑스적인 기지와 심각한 분석이 결합된 비판을 접하게 된다. 푸리에는 부르주아지, 혁명 전 그들에게 열광하던 예언자들, 그리고 혁명 뒤 그들에게 매수된 아첨꾼들의 본질을 잡아낸다. 그는 부르주아 세계의 모든 물질·정신적 빈곤을 용서없이 폭로하고, 이것을 이성만이 지배하는 사회라느니 모든 이에게 행복을 줄 문명의 수립이라느니 하는 과거 계몽 사상가들의 휘황 찬란한 약속, 또 인간의 끝없는 완성 능력이니 뭐니 하는 그들의 선언과 대립하면서 당대 부르주아 사상가들의 허황된 주장의 허구성을 폭로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요란스러운 공치사에 비해 현실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지적하고 이러한 공치사가 완전히 파탄한 데 대해 신랄하게 비웃었다. 푸리에는 비평가일뿐만 아니라, 언제나 낙천적인 성격으로 말마임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풍자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혁명이 쇠퇴하면서 성행하던 투기적 사기뿐만 아니라 당시 프랑스 상업 활동에 나타난 일반적인 소상인 근성을 비웃는 문구로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한층 더 훌륭한 솜씨로 남녀 관계의 부르주아적 형태와 부르주아 사회의 여성의 처지를 비판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여성 해방의 정도는 곧 일반적 해방의 자연적 척도라는 사상은 그가 처음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푸리에의 위대한 면은 사회사에 관한 그의 견해에서 가장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의 사회사의 모든 과정을 야만, 가부장제, 미개, 문명이라는 네 발전 단계로 나누고 있다. 그가 말하는 문명이란 오늘날의 이른바 부르주아 사회, 따라서 16세기부터 발전하고 있는 사회 질서와 일치하는 것인데,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다.


문명 제도는 모든 시대에 단순한 형태로 감행되던 갖가지 죄악에다 복잡하고 애매하고 양면적이고 위선적인 존재 형태를 부여한다.


또 문명은 '악순환'과 모순에 의해 움직이며, 문명은 이 모순을 늘 재생산하며 그것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진심으로건 또는 가식으로건 이루려고 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결과에 이른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다. 그래서 예컨대, "문명 시대에 빈곤은 부 그 자체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푸리에도 동시대인인 헤겔과 마찬가지로 능란하게 변증법을 파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인류의 끝없는 완성 능력이라는 공론(空論)을 반대하여, 역시 변증법적으로 역사 단계에는 상승선과 함께 하강선도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이러한 견해를 인류 전체의 장래에 대해서도 적용하고 있다. 칸트가 자연 과학과 지구가 앞으로 멸망한다는 사상을 끌어들인 것과 같이, 푸리에는 역사관에 인류의 장래 멸망이라는 사상을 끌어들이고 있다.


혁명의 폴풍이 프랑스 전국을 휩쓸고 있을 때, 영국에서는 조용했으나 그에 못지않은 거대한 변혁이 일어나고 있었다. 증기와 새로운 작업기는 매뉴팩처를 현대식 대공업으로 바꾸었으며, 그리하여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기초를 변혁했다. 매뉴팩처 시대의 더딘 발전 과정은 생산에서 그야말로 질풍 노도의 시대로 급변했다. 사회가 대자본가와 무산 프롤레타리아로 더욱 급속히 분열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는 구시대의 안정된 중간 계급 대신에 몹시 불안정한 수공업자와 소상인 등의 불안한 대중, 즉 주민 가운데 가장 유동적인 부분이 동요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생산 방식은 아직 그 상승 발전의 첫 단계에 들어섰을 뿐이다. 그것은 아직 정상적인, 정당한, 당시의 조건에서 있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생산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에 벌써 무서운 사회적 재해를 낳고 있었다. 즉 대도시 빈민굴로 부랑민들이 밀집하고, 출신 성분과 가부장적 풍습과 가족 관계 등에서 온갖 전통이 파괴되고, 특히 부녀와 아동의 노동 시간이 무지막지하게 늘어나며, 완전히 새로운 환경 속으로---즉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농업으로부터 공업으로, 안정된 생활 조건으로부터 날마다 달라지는 불안한 생활 조건으로---갑자기 들어가게 된 근로 계급이 대량으로 타락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때 29세의 한 공장주가 개혁가로서 등장했다. 그는 어린애처럼 순진하고도 고상한 품성을 지녔으며 보기 드물게 타고난 지도자였다. 로버트 오언은 인간의 성격이 타고난 체질의 산물인 동시에 인간의 일생, 특히 그의 발육기의 여러 환경 조건의 산물이라고 하는 유물론적 계몽주의의 학설을 채택했다. 오언과 같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업 혁명을, 단지 흐린 물에서 고기 잡기 좋듯 졸부가 되기에 알맞은 무질서와 혼돈으로밖에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오언은 산업 혁명을 자신이 동경하는 사상을 실현하여 이 혼돈 속에 질서를 세우기에 좋은 기회로 보았다. 맨체스터에서 이미 그는 5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의 지배인으로서 이 사상을 적용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1800년부터 1829년까지, 그는 지배인인 동시에 동업자의 한 사람으로서 스코틀랜드 뉴라나크의 커다란 방직 공장을 관리하는 데서도 똑같은 노선을 취했다. 이번에는 훨씬 더 자유롭게 활동하여 오래지 않아 그의 이름이 전유럽에 알려질 만큼 큰 성과를 거두었다. 뉴라나크의 주민은 점점 늘어나 2500명에 이르렀고, 처음에는 아주 잡다하고 대부분 몹시 타락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오언은 이를 완전히 모범적인 주민 집단으로 변화시켰다. 여기서는 폭음, 경찰, 형사 재판, 소송 사건, 빈민 구제와 자선 사업 등등이 전혀 필요 없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을 좀 더 인간에 알맞은 환경에 두고 특히 자라나는 세대를 잘 교육하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다. 오언이 창안한 유치원이 뉴라나크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거기서는 2세 이상의 어린이들을 받았는데, 어린이들은 이 유치원에서 어찌나 잘 지냈던지 부모들이 그 애들을 집으로 데려가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오언의 경쟁자들은 자기 노동자들에게 매일 13시간 또는 14시간 작업할 것을 강요했는데, 뉴라나크에서는 노동 시간이 10시간 반밖에 디지 않았다. 면화 공황으로 하는 수 없이 4개월간 휴업하게 되었을 때에도 휴업 노동자들에게 임금의 전액을 계속 지불했다. 그런데도 공장의 가치는 2배 넘게 늘어났고 끝까지 소유자에게 많은 이득을 보장했다.


그러나 오언은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노동자들을 위해 만들어 준 생활 조건도 그의 눈에는 아직 인간에 알맞은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나의 노예였다.


그가 말한 것은, 자신이 뉴라나크 노동자들에게 만들어 준 비교적 좋은 조건이란, 자유로운 생산 활동은 제쳐놓고라도 그들의 성격과 지능을 올바르고도 전면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아직 대단히 불충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2500명의 노동 부대는 사회를 위해, 불과 반세기 전에는 60만 명을 가지고서야 겨우 생산할 수 있었던 대량의 현실적 부를 만들어 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2500명이 소비하는 부와 60만 명이 소비했을 부의 차액은 어디로 갔느냐고.


대답은 명백했다. 그 차액은 기업에 투하된 자본에 대한 5%의 이자와, 그 밖에도 30만 파운드가 넘는 이득을 얻은 공장 소유주들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이 사실은 뉴라나크에서보다 훨씬 더 크게 영국의 다른 모든 공장들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이 새로운 부가 없었다면, 나폴레옹을 타도하고 귀족적 사회 제도의 원칙을 보존하기 위한 전쟁을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힘은 노동자 계급의 창조물이었다.


따라서 그 성과도 반드시 노동자 계급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 지금까지 다만 개인의 부유와 대중의 예속화에 봉사해 온 데 지나지 않은 이 새로운 강대한 생산력이 오언에게는 사회 개조의 기초로 생각되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반드시 모든 이의 공동 재산으로서 모든 이의 공동 복리를 위해서만 쓰여야 할 것이었다.


이러한 순전히 실무적인 원칙 위에서, 말하자면 상인적 계산의 결과로서 오언의 공산주의가 생겨났다. 그는 자기의 이러한 실천적 성격을 언제 어디서나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1823년에 오언은 공산주의 이민지를 창설하여 아일랜드의 빈궁을 없앨 안을 작성하고, 거기에 필요한 투자액, 매년 지출과 수입 예상액에 관한 상세한 계산서를 덧붙였다. 오언은 미래의 제도에 대한 자기의 마지막 계획에서 평면도와 정면도, 조감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술적 세목을 작성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깊은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수행되었기 때문에, 일단 그의 사회 개조 방법이 채용된다면 심지어 전문가의 입장에서도 그 세목에 대해 반박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산주의로 옮아간 것은 오언의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가 단순히 박애주의에 머물렀던 동안, 그는 오직 부와 칭송과 존경과 명예를 거두었을 뿐이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명성 높은 사람이었다. 그와 비슷한 사회적 처지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정치가들과 군주들까지 그의 말에는 호의를 가지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공산주의 이론을 들고 나타나자 사태는 급변했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사회 변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세 개의 큰 장애물, 즉 사적 소유, 종교, 현존 결혼 제도였다. 이러한 장애물과 투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자기가 공적인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잃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언은 이 점을 고려해서 그 장애물에 대한 자신의 가차없는 공격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가 예견했던 그대로 되었다. 공적인 사회에서는 내쫓기고 신문에서는 묵살되었으며, 자신의 모든 재산을 희생하여 미국에서 실시해 본 공산주의적 실험에 실패한 결과 가난해진 오언은 직접 노동자 계급에 의거하여 그들 속에서 30년 동안이나 확동을 계속했다.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영국에서 진행된 모든 사회 운동과 이 사회 운동의 모든 실제 성과는 오언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1819년에는, 5년간에 걸쳐 그가 애쓴 덕택에 공장에서의 여성과 아동 노동을 제한하는 최초의 법안이 통과되었다. 그는 영국의 모든 노동 조합이 하나의 노동 총동맹으로 결집한 제1차 대회의 의장이었다. 또 그는 완전히 공산주의적인 사회 조직으로 넘어가기 위한 과도적 방책으로, 한편으로는 협동 단체(소비 조합과 생산 조합)를 조직했다. 이것은 그 뒤 적어도 상인이나 공장주들이 사회적으로 전혀 필요없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증명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그는 노동자 시장을 조직했는데 여기서는 노동 시간 한 시간을 단위로 하는 노동 증권으로 노동 생산물이 교환되었다. 이 시장은 어쩔 수 없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훨씬 뒤에 나타난 프루동의 교환 은행의 선구자였으며, 그 차이점은 전자가 모든 사회악에 대한 만능약으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 전체를 훨씬 더 급진적으로 개혁해 나갈 하나의 첫 조치로 제시되었을 따름이라는 점이다.


이 공상가들의 사고 방식은 19세기 사회주의 사상을 오랫동안 지배했으며 또 부분적으로는 지금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와 영국의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바이틀링을 포함한 이전의 독일 공산주의는 이 사고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사회주의는 절대적 진리·이성·정의의 표현으로서, 발견되기만 하면 그 자체의 힘으로 전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절대적 진리는 시간과 공간과 인류 역사 발전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그것이 발견될 것인가는 실로 순전히 하나의 우연으로 여겨졌다. 동시에 절대적 진리와 이성과 정의도 각 학파의 창시자에 따라 서로 다르며, 각 학파 창시자의 절대적 진리·이성·정의의 특수한 형태는 그 학파 창시자의 주관적인 오성·생활 조건·인식의 넓이와 사고의 발전 정도에 따라 제약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절대적 진리들간에 충돌이 있을 때 이 충돌은 그 서로간의 차이를 마멸시킴으로써만(즉 절충과 타협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고 방식에서는,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와 영국의 대다수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머리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특수한 종류의 절충적이고 평균적인 사회주의 이외에 아무것도 나올 수 없었다. 이 절충적 사회주의는 갖가지 분파 창시자들의 더 온건한 비판적 논평, 경제학적 명제와 미래 사회관이 마구 뒤섞인, 갖가지 색채로 가득 찬 혼합물이었다. 이 혼합물은 그 각 구성 부분이 논쟁의 물결 속에서 마치 시내의 조약돌처럼 그 날카로움을 잃으면 잃을수록 더욱 쉽게 얻어진다.


사회주의를 과학으로 만들려면 우선 그것을 현실의 토대 위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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