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6):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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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7일 (월) 22:46 기준 최신판

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
3.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6)

무정부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를 어떻게 보는가?


우선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가 단순한 철학 학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는 노동자 대중의 학설, 그들의 기치이며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이를 존경하며 “숭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맑스와 엥겔스는 단순히 어떤 철학 “학파”의 창시자인 것이 아니라 나날이 장성ㆍ강화하는 살아 있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살아 있는 지도자이다. 이 학설과 투쟁하며 그것을 “전복”하려고 하는 자는 누구나 힘에 겨운 이 투쟁에서 공연히 자기의 이마를 깨지 않으려거든 이 모든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무정부주의자 제씨는 이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맑스, 엥겔스와 투쟁할 때 매우 별난 새로운 무기를 사용한다.


이 새로운 무기란 무엇인가?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새로운 연구인가? 맑스의 ≪자본론≫에 대한 논박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혹은 그들이 “새로운 사실”과 “귀납적” 방법으로 무장하고 사회민주주의의 “성서”인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과학적으로” 논박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비범한 수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맑스와 엥겔스가 “표절”하였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여러분이라면 이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결국 맑스와 엥겔스에게는 독창적인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과학적 사회주의는 순전히 꾸며낸 것인데 그것은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처음부터 끝까지 빅토르 콩시데랑의 ≪선언≫에서 “훔쳐” 온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극히 가소로운 이야기이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들의 “비할 바 없는 지도자” 체르케지쉬빌리는 대단한 자신을 가지고 이 가소로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으며 체르케지쉬빌리의 얼빠진 “사도” 피에삐르 라무스란 자와 우리의 국내 무정부주의자들이 이 “발전”을 열심히 되풀이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간단하게나마 이 “이야기”를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체르케지쉬빌리의 말을 들어 보라.


≪공산당 선언≫의 전체 이론적 부분 즉 제1장과 제2장은 … 빅토르 콩시데랑에게서 빌려 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합법적인 혁명적 민주주의 성서인 맑스와 엥겔스의 ≪선언≫은 빅토르 콩시데랑의 ≪선언≫을 서투르게 되풀이하여 놓았을 뿐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콩시데랑의 ≪선언≫의 내용만을 훔친 것이 아니라 … 심지어는 개개의 제목까지도 그대로 베끼었다. (“≪공산당 선언≫의 유래”라는 표제 하에 독일어로 출판된 체르케지쉬빌리,라무스,라브리올라의 논문집, 10페이지를 보라.)


이 이야기는 다른 무정부주의자 라무스도 반복하고 있다.


그들(맑스와 엥겔스)의 주요 저작(≪공산당 선언≫)은 순전한 절취(표절), 파렴치한 절취이며 그것도 도적들이 보통 하듯이 말마디마다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사상과 이론만을 절취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 (같은 책,4페이지를 보라.)


≪호소≫, ≪노동자≫[1], ≪목소리≫[2] 등등에서 우리의 무정부주의자들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이리하여 과학적 사회주의와 그의 이론적 기초는 콩시데랑의 ≪선언≫에서 “절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주장할 만한 근거라고 할 것이 있는가?


빅토르 콩시데랑은 어떤 사람인가?


칼 맑스는 어떤 사람인가?


1893년에 사망한 빅토르 콩시데랑은 공상적 사회주의자 푸리에의 제자였으며 구제할 수 없는 공상주의자(utopian)였던 그는 “프랑스의 구원”을 위한 희망을 계급들의 타협에서 찾았다.


1883년에 세상을 떠난 맑스는 유물론자이며 공상주의자들의 적이었던 그는 인류해방의 담보를 생산력의 발전과 계급들의 투쟁에서 보았다.


그들 간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론적 기초는 맑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적 이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사회생활의 발전은 전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에 의하여 규정된다. 만일 지주-농노제의 뒤를 이어 부르주아 제도가 나타났다면 그 ‘죄’는 부르주아 제도의 발생을 불가피하게 한 생산력의 발전에 있다. 또 현대 부르주아 제도를 대신하여 사회주의 제도가 불가피하게 나타난다면 그 원인은 현대 생산력의 발전이 그것을 요구한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가 파괴되고 사회주의가 수립될 역사적 필연성은 여기에 기인한다. 우리가 자기의 이상을 인간의 정신(minds)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생산력 발전의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는 맑스주의의 명제는 여기에서 온 것이다.


이것이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의 이론적 기초이다(≪공산당 선언≫, 제1장, 제2장을 보라).


빅토르 콩시데랑의 ≪민주주의 선언≫에 이와 비슷한 말이라도 있는가? 콩시데랑은 유물론적 관점을 받아들이는가?


체르케지쉬빌리나 라무스나 우리의 ≪호소≫파는 콩시데랑이 유물론자이며 사회생활의 발전을 생산력의 발전에 근거하여 설명하였다고 확증할 단 하나의 성명도, 단 한 마디의 말도 콩시데랑의 ≪민주주의 선언≫에서 인용하지 않았다고 우리는 단언한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콩시데랑이 사회주의의 역사에서 관념론적 공상주의자로서 알려져 있다는 것을 대단히 잘 알고 있다(폴 루이, ≪프랑스 사회주의의 역사≫를 보라).


무엇 때문에 이 괴상한 ‘비판가들’은 쓸모없는 수다를 떨고 있으며 어째서 그들은 유물론과 관념론도 구별하지 못하는 주제에 맑스와 엥겔스를 비판하려고 덤벼들었는가? 단지 사람들이나 웃겨 보려고 한 것인가? …


과학적 사회주의의 전술적 기초는 비타협적인 계급투쟁에 관한 학설이다. 그것은 이 학설이 노동계급의 수중에 있는 최고의 무기인 까닭이다. 노동계급의 계급투쟁 ― 이것은 노동계급이 정권을 전취하고 다음에 사회주의를 수립하기 위하여 자본가계급을 수탈하는 무기이다.


이것이 맑스와 엥겔스의 ≪선언≫에 서술되어 있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전술적 기초이다.


콩시데랑의 ≪민주주의 선언≫에 이와 비슷한 말이라도 있는가? 콩시데랑은 계급투쟁을 노동계급의 수중에 있는 최고의 무기로 인정하였는가?


체르케지쉬빌리와 라무스의 논문들(위에서 언급한 논문집을 보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콩시데랑의 ≪선언≫에는 이런 말이 한 마디도 없다. 거기에는 다만 계급투쟁이 유감스러운 사실이라고 지적되어 있을 따름이다.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수단으로서의 계급투쟁에 대해서는 콩시데랑은 자기의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본과 노동과 재능 ― 이것이 생산의 세 개의 기본요소이며 부의 세 개의 원천이며 산업 메커니즘의 세 수레바퀴다. … 이것들을 대표하는 세 계급은 ‘공통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역할은 기계가 자본가와 인민을 위하여 작동하도록 하는 데 있다. … 그들에게는 … 통일된 민족 내부에서 모든 계급들의 연합을 결성할 위대한 목적이 있다. … (칼 카우츠키의 소책자 ≪공산당 선언―어떤 표절≫, 14페이지를 보라, 거기에 꽁씨데랑의 ≪선언≫으로부터 인용되어 있다.)


모든 계급들이여, 단결하라! ― 이것이 빅토르 콩시데랑이 자기의 ≪민주주의 선언≫에서 선포한 구호이다.


계급들을 타협시키려고 하는 이 전술과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모든 반(反)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반대하여 단결하라고 견결히 호소하는 맑스와 엥겔스의 비타협적 계급투쟁의 전술 간에 무슨 공통점이 있는가?


물론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그런데 왜 체르케지쉬빌리와 그의 얼빠진 추종자들은 이 부질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가? 그들은 우리를 죽은 사람으로 아는가? 우리가 그들을 폭로하지 못할 줄 알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다. 빅토르 콩시데랑은 1893년까지 살았다. 1843년에 그는 자기의 ≪민주주의 선언≫을 출판하였다. 1847년 말에 맑스와 엥겔스는 자기들의 ≪공산당 선언≫을 썼다. 그 후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유럽의 각국어로 거듭하여 출판되었다. 맑스와 엥겔스가 자기의 ≪선언≫으로써 신기원을 열어 놓았다는 것은 모두 아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콩시데랑이나 그의 친우들은 누구 하나 맑스와 엥겔스의 생존시에 이들이 콩시데랑의 ≪선언≫에서 ‘사회주의’를 표절하였다는 말을 어디에서도, 단 한 번도 한 일이 없다. 독자들이여! 이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면 무엇이 “귀납법”을 뽐내는 이… (실례이지만) “학자”들로 하여금 부질없는 소리를 지껄이게 하였는가? 누구의 이름으로 그들은 지껄이고 있는가? 과연 그들은 콩시데랑보다 그의 ≪선언≫을 더 잘 안단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빅토르 콩시데랑과 그의 지지자들이 ≪공산당 선언≫을 읽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만하면 충분하다. … 무정부주의자들 자신도 라무스-체르케지쉬빌리의 돈키호테식 진격에 큰 주의를 돌리지 않고 있다. 이 가소로운 진격의 수치스러운 종말은 너무나 명백하므로 많은 주의를 돌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


이제 본질적인 비판으로 넘어 가자.


  1. [편집부] 1906년 치플리스에서 간행된 그루지야 무정부주의자들의 일간지.
  2. [편집부] 1906년 치플리스에서 간행된 그루지야 무정부주의자들의 일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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