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인터내셔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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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2022년 4월 25일 (월) 17:13 판

제2인터내셔널
Deuxième Internationale
Zweite Internationale
창립일
창립일
1889년 7월 14일
해산일
해산일
1916년
역사
역사


개요

제2인터내셔널독일 사회민주당이 주도한 마르크스주의 국제 기구로,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운동 세력간의 공동 행동을 추구하였다. 이후 사회민주주의의 우경화 진행 과정에서 내분을 겪다 제3인터내셔널이 분리되었다.

1940년까지 이름만 남은 채 '노동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로 존속하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로 이어진다.

역사

제2 인터내셔널은 1889년 7월 14일 열린 국제 노동자 회의에서 설립되었다. 제1 인터내셔날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본질적으로 유럽의 노동운동에 기반을 두었으나 이는 선행자들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았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주도권을 잡았으며 여기에 속한 당들은 대중의 기반을 이미 구축했거나, 또는 구축해가고 있는 과정에 있었다. 1904년에 이들은 무려 21개국에서 선거에 참여하여 660만표를 획득하였으며 의회에서 261석을 얻을 수 있었다. 1914년에는 400만명의 당원을 확보하였으며 유권자는 1200만이 되었다. 제2 인터내셔널은 기본적으로 당과 노동조합의 방만한 동맹이었다.

1900년에는 직접적인 기능보다도 기술적이고 중재적인 역할을 하는 국제 사회주의 사무국이 브뤼셀에 설치되었고, 상임 비서는 카밀 휴즈만이었다. 다른 사상적 조류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제2 인터내셔날에 속했던 정당들 중에서 영국 노동당(1908년에 승인된)을 제외하고서는, 마르크스주의가 그들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여기에는 1893년과 1896년 총회에서 정치투쟁에 관한 문제로 패배한 뒤에 인터내셔날로부터 축출되었던 무정부주의자들도 초기에는 포함되어 있었다. 1895년 엥겔스가 죽은 후 제2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공식적 성격을 규정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한 두 이론가는 카우츠키플레하노프였다.

인터내셔날은 4년에 2회씩 정기총회를 열어 1차 회의에서는 공동의 행동을 결정하고, 2차 회의에서는 정책의 문제를 놓고 토론했다. 1차 회의에서는 1890년부터 8시간제 노동을 지지하여 메이데이(노동절)때마다 모든 나라에서 시위를 조직할 것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우파와 좌파, 그리고 중도파 간의 투쟁은 처음에는 국내 정당들 내에서 시작되었으나 곧 국제적인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1900년 파리 총회에서는 '밀레랑주의[Millerandism]'의 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했다. 즉, 프랑스 사회주의자인 밀레랑이 전년에 했던 것처럼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놓고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결국에 가서는 당이 승인만 하다면 그러한 타협의 단계가 '일시적인 편의로서 … 예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카우츠키에 의해 기초된) 타협안이 채택되었다.[1]

1904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다음 총회에서는 일년 전에 드레스덴에서 열린 독일 사회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통과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적 이념을 비판하는 결의문에 국제적 정당성을 부여할 것인가의 문제에 관해 토론이 벌어졌다. 이것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인 베벨이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지도자인 죠레스Jaurs의 비난에 저항하여 그의 당을 옹호하는 전략상 중요한 논쟁이었다. 죠레스의 이론적 경직성은 선거에서의 지지율 신장과 왕권 전제체제를 변화시킬 수 없는 무기력 사이의 엄청난 간극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총회는 드레스덴 결의문에 25:5의 지지를 보냈고 12명은 기권하였다. 그러나 수정주의자들은 독일 대표자로서 인터내셔널에 남아 있었으며 그 양자는 자신들의 이념을 침투시켰다.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다른 중요한 문제는 식민주의에 관한 것이었다. 식민주의는 [(보어전쟁]] 당시인 1900년의 인터내셔날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7년 후에 열린 슈투트가르트 회의에 참석했던 식민지 대표들 대부분은 '어떤 상황 하에서나 모든 식민지 정책을 일률적으로 거부할 수만은 없다.'고 주장했다. 즉 여기에는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개화를 목적으로 한' 식민정책의 경우를 들 수 있다.[2] 격렬한 논쟁을 벌인 후에 127:108로 이 주장은 부결되었다. '자본주의적 식민지 정책은 그 본질상 토착민들을 노예화시키고 노동을 강요하며 뿌리를 근절시킨다.'는 결의문이 통과되었다.[3]

반전투쟁이 인터내셔널의 핵심적인 투쟁이었으며 인터내셔널의 초창기부터 총회의 결의문에 반영되어 왔었다. 이 문제는 전쟁의 먹구름이 유럽을 뒤덮고 있을 때인 1907년에 열린 슈투트가르트 총회의 중심적인 문제였다. 여기에서 토론과정에 있어서의 심각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만장일치로 채택된 마지막 결의문은 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을 촉구한 후에 계속되었던, 레닌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마르토프에 의해서 제출된 수정안에 흡수되었다. '어느 곳에서든 전쟁이 발발한 경우에는 전쟁의 빠른 종식을 위해서 개입해야 하고, 대중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전쟁에 의해서 생기는 모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위기를 전력을 다하여 활용해야 하며, 자본주의적 계급지배를 하루라도 빨리 종식시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바로 "노동운동"의 임무이다.'[4] 이것은 다음에 계속되는 두 번의 대회에서 재확인되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열린 바젤의 정기총회는 평화를 위한 시위가 되었으며 또 다시 만장일치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혁명적 투쟁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2년 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그러한 말들이 '깊이 내재된 민족주의를 폭로하는 두터운 허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하였다.[5] 제2인터내셔널의 주축이 되었던 정당들은 자국의 정부에 의해 수행되는 전쟁을 지지했으며, 그리하여 인터내셔날의 불명예스러운 붕괴를 유발시켰다. 이것은 자본주의 팽창의 절정이며 노동운동의 민족적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해체이후

오직 다른 당 내에 있는 소그룹들, 러시아, 세르비아, 헝가리 등의 당들만이 인터내셔널에 의해 계속 지지되었던 원칙들을 고수하였다.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전쟁 중에, 특히 중립국에 있는 당들을 중심으로 제2인터내셔널을 복구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인터내셔널 사무국은 네덜란드로 옮겨졌다. 그러나 1919년의 베른 회의는 그 해의 제2 인터내셔널의 잔영만 남은 모습으로 재구성되었으며, 다음해에 제네바에서 17개국이 참가한 총회가 개최되었다. 1921년에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SPÖ) 그리고 영국 노동당을 포함한 10여개국의 좌익 사회주의자들이 비엔나에 모여 '제2.5인터내셔널'이라는 별칭이 붙은 사회당 국제 노동동맹('비엔나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것은 총괄적인 인터내셔널의 1단계였다. 1923년에 함부르크 총회에서 부활된 제2인터내셔널과 결합하여 노동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결성했고, 이것은 1940년까지 그 기능이 지속되었다. 1951년 현재 존재하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로 이어졌으나, 이는 세계에 퍼져있는 사회주의 정당 및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느슨해진 연합으로서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다.

참고

각주

  1. 브라운탈[Braunthal]에 의해 인용됨, 1966, 1권, pp. 272∼3
  2. 브라운탈, 앞의 책, p. 318
  3. 브라운탈, 앞의 책, p. 319
  4. 브라운탈, 앞의 책, p. 363
  5. Deutscher 1972, p. 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