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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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자가 되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다.===
1882년에 그는 《[[공산당 선언]]》을 번역하여 출판했는데 [[마르크스]]가 서문을 썼다. 다음 해에 그는 인민주의를 반대하는 최초의 긴 논문을 썼으며 제네바에서 노동자 해방 그룹을 조직하였다. 지적으로 플레하노프의 지도를 받던 이 그룹은 19세기 후반기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성을 규정하였고 1914년까지 레닌의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882년에 그는 《[[공산당 선언]]》을 번역하여 출판했는데 [[마르크스]]가 서문을 썼다. 다음 해에 그는 인민주의를 반대하는 최초의 긴 논문을 썼으며 제네바에서 노동자 해방 그룹을 조직하였다. 지적으로 플레하노프의 지도를 받던 이 그룹은 19세기 후반기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성을 규정하였고 1914년까지 레닌의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라는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플레하노프는 자신이 집필·편집한 책과 팜플렛 및 잡지들을 통해 인민주의에 대하여 광범위한 비판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지성계에 마르크스주의를 보급하였고 1914년까지 운동을 지배했던 장기적 전략의 전반적 흐름을 주도하였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라는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플레하노프는 자신이 집필·편집한 책과 팜플렛 및 잡지들을 통해 인민주의에 대하여 광범위한 비판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지성계에 마르크스주의를 보급하였고 1914년까지 운동을 지배했던 장기적 전략의 전반적 흐름을 주도하였다.



2022년 4월 19일 (화) 23:52 판

게오르기 플레하노프(1856년 11월 29일 ~ 1918년 3월 10일)

생애

생애 초기

플레하노프는 자신의 혁명적 생활을 혁명적 인민주의의 신봉자로서 출발했다. 그는 그 당시에 주류를 이루었던 정치적 테러리즘 노선을 거부하면서 도시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진 최초의 인민주의적 선동가였다. 1878년까지 그는 러시아 공동체의 공동적 토지 소유가 러시아의 지배적 생산양식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며 마르크스주의를 거리낌없이 인용했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다.

1882년에 그는 《공산당 선언》을 번역하여 출판했는데 마르크스가 서문을 썼다. 다음 해에 그는 인민주의를 반대하는 최초의 긴 논문을 썼으며 제네바에서 노동자 해방 그룹을 조직하였다. 지적으로 플레하노프의 지도를 받던 이 그룹은 19세기 후반기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성을 규정하였고 1914년까지 레닌의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라는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플레하노프는 자신이 집필·편집한 책과 팜플렛 및 잡지들을 통해 인민주의에 대하여 광범위한 비판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지성계에 마르크스주의를 보급하였고 1914년까지 운동을 지배했던 장기적 전략의 전반적 흐름을 주도하였다.

플레하노프는 보다 일반적이고 국제적인 수준에서 마르크스주의의 혁신적이고 정통적인 이론가로서 카우츠키 다음가는 사상가로 평가되었다. 플레하노프는 《일원론적 역사관의 발전》에서 헤겔포이에르바흐가 마르크스의 성숙한 사고에 끼친 영향을 강조하며 철학 및 사회 사상의 전반적인 발전을 추적하였으며,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이러한 변증법적이고 유물론적 방법이 모든 인식을 조명해주며 통합시킨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방법을 정치학, 경제학, 철학뿐만 아니라 언어학, 미학, 문학 비평에 적용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변증법적 방식으로 적용된 경제적 결정론이 완전한 세계관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완수에 필수적인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는 다른 철학적 요소들을 들여옴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개량하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맹렬하게 대응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베른슈타인과 그의 추종자들의 절충주의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 일원론의 대표적 옹호자였다.

1905년 러시아 혁명 이후

1905년 이후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의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플레하노프의 위치는 1905년 러시아 혁명에 대한 그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하여 급격하게 떨어졌다. 이때부터 그는 점차적으로 역사와 철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말년

플레하노프는 1914년에는 공공연한 전쟁 지지자가 되었으며, 1917년에 추방된지 35년 만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다.

남은 여생 동안 그는 원칙에서 벗어난다고 느끼는 볼세비키의 행동을 비판하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볼세비키의 권력 장악과 그로 인한 불행한 결과의 유발을 개탄하였다.

사후

레닌은 그의 저서들을 전투적인 유물론으로 가장 높이 평가하였으며 이러한 저서들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소련의 행동파 세대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사상

러시아의 복잡한 사회·경제적 구조의 독특하고 저개발적인 특성을 인식함으로써 플레하노프는 혁명은 필연적으로 2단계로 진행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1단계는 차르 체제와 봉건적 잔재를 반대하는 민주혁명의 단계가 될 것이다. 민주혁명은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하고 따라서 계급 분화를 가속화시켜 제2단계 또는 사회주의 혁명이 활성화될 집회 및 출판의 자유와 같은 조건들을 갖추어 나가게 할 것이다. 이러한 2단계의 혁명이 추구하는 목적은 분명히 다르지만 시기상으로는 필연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다. 플레하노프는 러시아 부르주아의 특수한 취약성 때문에 프롤레타리아와 그 당이 민주혁명을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당의 임무는 예외적이라 할만큼 무겁고 복잡하며, 특히 숫자상의 상대적 열세와 의식의 저급성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플레하노프는 노동계급을 조직하고 의식화시키며 응집하는 데 있어서 사회민주적 인텔리겐치아에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였다. '인텔리겐치아로 구성된 혁명적 세포'의 단호한 행동이 없이 운동은 성공할 수 없다고 플레하노프는 일관성 있게 주장했다.

변증법적 유물론

참고자료

플레하노프, 노동자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