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주의의 기초/농민문제(1):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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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에서 네 가지 문제를 다루겠다. | 이 주제에서 네 가지 문제를 다루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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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의 특이성을 결정지은 상황이다. | 이상이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의 특이성을 결정지은 상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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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5일 (화) 21:35 판
레닌주의의 기초 | ||
◀ | V. 농민문제 | ▶ |
1절 ~ 2절 | ||
이 주제에서 네 가지 문제를 다루겠다. ㄱ) 문제 제기 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기의 농민 ㄷ) 프롤레타리아 혁명기의 농민 ㄹ) 쏘비에트 권력이 공고화된 후의 농민
1) 문제 제기 어떤 사람들은 레닌주의의 기본은 농민문제이며, 레닌주의의 출발점은 농민문제 즉 농민의 역할과 상대적 중요성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전혀 옳지 않다. 레닌주의의 기본 문제, 그 출발점은 농민문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이다.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성취할 수 있는 조건과 강화할 수 있는 조건에 관한 문제이다. 농민문제는 권력쟁취 투쟁에서 동맹자에 관한 문제로 파생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이렇다 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지니는 농민문제의 중대하고 절박한 의의가 조금이라도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알다시피 러시아 맑스주의자 사이에서 농민문제가 진지하게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혁명(1905년) 직전이었다. 이 시기는 짜리즘을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실현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당 앞에 제기된 때이다. 임박한 부르주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자에 관한 문제가 지극히 중요하게 제기된 것이다. 또한 러시아 농민문제가 프롤레타리아 혁명 시기에 와서는 한층 더 절실하게 제기되었다. 이도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이 시기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문제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성취하고 유지하는 문제는 당면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의 동맹군에 관한 문제와 직결되었다. 권력을 향해 나아가고 이를 책임질 준비를 하는 자라면 누구나 진정한 동맹군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농민문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총체적 문제의 한 부분이며 레닌주의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이다. 제2 인터내셔널 정당들이 농민문제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노골적으로 반감을 보이는 것은 서구에서의 농업 발전이 특수하다는 조건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이들 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또한 혁명을 두려워하고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도록 도와줄 생각이 없다는 데 기인한다. 그러니 혁명을 두려워하며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도록 도와줄 생각이 없는 자가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동맹군 문제에 관심을 가질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들에게 동맹군 문제는 관심 밖이며 절실하지도 않았다. 제2 인터내셔널 영웅들은 농민문제에 대해 빈정대는 태도를 점잖은 교양의 징표로, “진정한” 맑스주의의 징표로 간주했다. 사실 여기에 맑스주의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야에 농민문제와 같은 중요한 문제에 무관심한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는 동전의 다른 면이며 맑스주의를 노골적으로 배신하는 명백한 징표인 까닭이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농민은 일정한 생활조건 때문에 내부의 혁명적 잠재력이 이미 없어졌는가? 또는 그렇지 않은가? 만일 없어지지 않았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그 잠재력을 동원할 희망과 근거가 있는가? 서구의 부르주아 혁명 당시에 부르주아지의 예비군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농민을, 즉 착취당하는 대다수 농민을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군으로 바꾸어낼 희망과 근거가 있는가? 레닌주의는 이 문제에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즉 농민 대다수가 혁명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해 이 역량을 동원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러시아에서 세 번의 혁명은 이 점에서 레닌주의의 결론을 전적으로 확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천적 결론은 근로농민대중의 속박과 착취를 반대하는 투쟁, 억압과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프롤레타리아가 온갖 농민운동을 다 지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해방운동을 직간접적으로 촉진하고, 어쨌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이익이 되며, 농민을 노동계급의 예비군이자 동맹군으로 전환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농민운동과 농민투쟁에 대한 지지이다.
2)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기의 농민 이 시기는 제1차 러시아 혁명(1905)에서 제2차 혁명(1917년 2월)까지다. 이 시기의 특징은 농민이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이다. 농민이 까제츠에서 이탈하여 프롤레타리아트 편으로, 볼쉐비끼 당 편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 시기의 역사는 농민을 획득하기 위한 까제츠(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볼쉐비끼(프롤레타리아트) 간의 투쟁의 역사이다. 이 투쟁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두마 시기였다. 네 차례의 두마 시기가 농민들에게 실물 교육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 경험을 통해 농민들은 까제츠 하에서는 토지도 자유도 얻지 못한다는 것, 짜르는 전적으로 지주들의 편이고 까제츠는 짜르를 지지한다는 것, 그리고 농민들에게 도움을 줄 유일한 세력은 도시 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사실을 절실히 자각하였다. 제국주의 전쟁은 부르주아지로부터 농민이 이탈하고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고립시킴으로써 두마 시기의 경험을 확증했을 뿐이다. 전쟁 기간 동안 짜르와 그 부르주아 동맹군으로부터 평화를 바라는 것은 완전히 그림의 떡이고 허망하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두마 시기의 실물 경험의 교훈이 없었더라면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노동자 농민의 동맹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짜리즘을 타도하기 위한 공동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지도력), 즉 1917년 2월 혁명을 이끌어냈던 헤게모니는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알다시피 서구(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부르주아 혁명은 다른 길을 걸었다. 서구에서 혁명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였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유약하여 독립적인 정치세력으로 되지 못했고 될 수 도 없었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는 농민이 봉건제도로부터의 해방을 수적으로 적고 아직 조직되지 못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에게서 획득했다. 농민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함께 낡은 질서에 대항해 나섰고, 부르주아지의 예비군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에서 혁명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달리, 러시아의 부르주아 혁명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러시아 혁명에서는 정치세력으로서의 부르주아지는 강화된 것이 아니라 약화됐고 정치적 예비군의 증대가 아니라 주요 예비군, 즉 농민을 잃었다.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전면에 나섰고, 그 주위에 수백만 농민이 결속하였다. 말하자면 이것이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이 비교적 짧은 기간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성장 전환한 이유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맹아이자 과도적 단계였다. 서구 부르주아 혁명사에서 전례가 없는 러시아 혁명의 이 특이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 특이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그것은 러시아의 부르주아 혁명이 서구에서보다 전진된 계급투쟁 속에서 수행되었고,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미 독립적 정치세력으로 되었던 반면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성에 놀라 혁명적 경향의 외피마저도 모두 버린 채(특히 1905년의 교훈 이후에) 혁명에 반대하고 짜르 및 지주와 동맹하여 노동자 농민과 대립하였다는 사실로써 설명된다. 러시아의 부르주아 혁명의 특이성을 결정지운 다음과 같은 상황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ㄱ) 혁명 전야에 러시아의 산업이 전례 없이 집중된 점이다. 예를 들면 알다시피 러시아에서는 전체 노동자의 54%가 500인 이상의 기업체에 고용되어 있었다. 반면 미국과 같은 발전된 나라에서도 500인 이상 기업체에 고용된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겨우 33%밖에 안 되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은 볼쉐비끼 당과 같은 혁명적 당이 있는 조건에서 러시아의 노동계급이 정치생활의 거대한 세력으로 될 수 있게 하였다. 이를 굳이 증명할 필요는 없겠다. ㄴ) 공장의 아주 극심한 착취방식과 짜르 친위대의 견딜 수 없는 경찰체제가 결합된 점이다. 이런 상황은 노동자의 중요한 파업 하나하나를 거대한 정치적 행동으로 전화시켰고 노동계급을 철저한 혁명 역량으로 단련시켰다. ㄷ) 러시아 부르주아지가 정치적으로 무기력했다는 점이다. 부르주아지는 1905년 혁명 후에 짜르 제도에 굴종하여 노골적인 반혁명으로 떨어졌다.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반혁명성은 단지 러시아 부르주아지가 짜르의 품에 안기게 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성에 기인할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가 짜르의 정부계약에 직접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는 데도 기인한다. ㄹ) 농촌에서는 가장 난폭하고 견딜 수 없는 농노제의 잔재가 지주의 절대 권력과 결합되었다는 점이다. 이 상황은 농민을 혁명의 품에 안기게 하였다. ㅁ) 짜르 제도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질식시켰고 짜르의 횡포는 자본가와 지주의 억압을 더욱 가중시켰던 점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은 하나의 혁명적 격류 속에서 결합되었다. ㅂ) 제국주의 전쟁은 러시아 정치생활의 모든 모순이 심각한 혁명적 위기로 발하는 기폭제가 되어 혁명에 거대한 추진력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은 어느 쪽에 서야 하였는가? 지주의 절대 권력과 짜르의 횡포에 대항하고 농촌 경제를 파괴하는 파멸적 전쟁에 반대하는 데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였는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인가? 그런데 그들은 적이었다. 네 차례의 두마에서 맛본 다년간의 경험이 입증한 것이다. 사회혁명당인가? 물론 사회혁명당은 까제츠보다는 “나았다.” 그들의 강령은 농민 강령으로 거의 “적합”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농민에게만 의지하려고 하였고 적의 주요한 역량 원천지인 도시에서는 힘이 약하였다.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어떠한 어려움에 부닥쳐도 멈추지 않고, 짜르와 지주에 대항한 투쟁에서 용감하게 앞장서 나아가며, 농민을 농노 신분과 토지 결핍, 억압과 전쟁에서 해방되도록 도와줄 새로운 세력은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이러한 세력이 러시아에 있었는가? 물론 있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였다. 그들은 1905년 이미 자신의 힘과 최후까지 투쟁하는 능력과 용감성 그리고 혁명성을 보여 주었다. 어쨌든 이러한 세력은 다른 어디에도 없었고, 어디에서도 이와 같은 세력을 얻을 수는 없었다. 이것이 농민이 까제츠에서 이탈하여 사회혁명당에 애착을 갖게 되고 동시에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용감한 혁명 지도자의 지도를 받을 필요성을 깨닫게 된 이유이다. 이상이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의 특이성을 결정지은 상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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