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주의의 기초/민족문제(1):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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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억압국의 민족운동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의 총결산에서 나오는 실제적 결과의 관점에서, 다시 말해 “고립적으로가 아니라 세계적 규모에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레닌의 말은 올바르다. (제19권, p.257을 보라.)<ref>같은 곳.</ref>
피억압국의 민족운동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의 총결산에서 나오는 실제적 결과의 관점에서, 다시 말해 “고립적으로가 아니라 세계적 규모에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레닌의 말은 올바르다. (제19권, p.257을 보라.)<ref>같은 곳.</ref>
2) 피억압 민족 해방운동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민족문제를 해결할 때 레닌주의는 다음과 같은 원리에서 출발한다.
ㄱ) 세계는 두 진영으로 나누어졌다.:
금융자본을 소유하고 지구상 인구의 대다수를 착취하는 극소수의 문명민족 진영과 식민지 및 종속국이 대다수를 이루는 피억압 피착취 민족 진영으로 나뉜다.
ㄴ) 식민지 및 종속국은 금융자본에 억압받고 착취당하며 제국주의 세력의 가장 큰 예비군이자 가장 중요한 힘의 원천이다.
ㄷ) 종속국과 식민지국가가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피억압 민족 혁명투쟁이다.
ㄹ) 가장 중요한 식민지 종숙국은 이미 민족해방운동의 길에 들어섰으며, 이는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다.
ㅁ) 선진국 프롤레타리아운동과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이해관계로 보아 두 혁명운동은 공동의 적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으로 결합할 것이 요구된다.
ㅂ) 발전된 나라에서 노동계급이 승리하고 제국주의의 멍에로부터 피억압 민족이 해방되자면 공동의 혁명전선을 결성하고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ㅅ) 공동혁명전선을 결성하자면 억압 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국”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피억압 민족의 해방운동을 단호하게 직접적으로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은 자유로울 수 없기”(엥겔스) 때문이다.
ㅇ) 이러한 지원의 의미는 민족이 분리할 권리, 독립된 국가로서 생활할 권리라는 외침을 고수하고 옹호하며 실천하는 것이다.
ㅈ) 이 외침을 실행하지 않고서는 세계 사회주의 승리를 위한 물질적 기초인 단일한 세계경제체제 내부의 제 민족이 단결하고 연대할 수 없다.
ㅊ) 이러한 단결은 민족들의 상호신뢰와 형제관계의 기초위에서 나오는 자발적 단결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민족문제의 두 가지 측면, 두 가지 경향이 나온다.: 하나는 제국주의의 족쇄에서 정치적으로 해방되어 민족 독립국가를 형성하려는 경향이다. 이는 제국주의적 억압과 식민지적 착취 때문에 발생한다. 다른 하나는 민족이 경제적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다. 이는 세계시장과 세계경제가 형성된 결과 나타났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발전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민족문제에 있어 두 가지의 역사적 추세를 경험한다. 첫째: 민족생활과 민족운동의 자각, 모든 민족적 억압에 대한 투쟁, 민족국가의 창설이다. 둘째; 온갖 종류의 민족 간 상호교류의 발전과 촉진, 민족적 장벽의 파괴, 자본, 경제생활 일반, 정치, 과학 등의 국제적 통합의 형성이다.
    이 두 추세는 자본주의의 세계적 법칙이다. 첫째 추세는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에 지배적이었다. 둘째 추세는 성숙한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곧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해 간다. (제27권, pp. 139-140을 보라.)<ref>Lenin Collected Works: Volume 20, 1977, p. 27.</ref>
제국주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가지 추세는 조화될 수 없는 모순이다. 제국주의는 식민지를 착취하며 폭력으로 “통일적 전체” 범위 안에 가두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으며, 영토합병과 식민지 정복의 수단으로만 민족들을 결합시킬 수 있고 이렇게 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산주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가지 추세는 한 가지 문제, 즉 피억압 민족이 제국주의 족쇄로부터 해방되는 문제의 두 측면일 따름이다. 공산주의는 각 민족이 통일적 세계경제체제로 연합하는 것은 오직 민족들의 상호신뢰와 자발적 의지에 기초해서만 가능하며, 민족들이 자발적 연합을 형성하는 길은 “통일적” 제국주의 “전체”에서 분리되어 독립국가로 전환되어야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배민족들(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일본 등)의 “사회주의자들”이 지닌 지배민족의 배타적 애국주의와는 완강하고 끊임없는 단호한 투쟁이 요구된다. 이들은 자국의 제국주의 정부와 투쟁하지 않고, 억압으로부터 해방과 분리 독립을 위한 “자신들의” 식민지 피억압 민족의 투쟁을 지지하지 않는다.
배타적 애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이 없었다면 진정한 국제주의 정신으로, 종속국과 식민지 근로대중과의 더욱 긴밀한 연대의 정신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실제 준비하는 정신으로 지배민족 노동계급을 교육시킨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구(舊) 러시아제국의 피억압 민족들의 동조(同調)와 지지를 받지 못했다면, 러시아 혁명은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고 꼴챠크와 제니낀을 격파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민족들의 동조(同調)와 지지를 받자면 러시아 노동계급은 무엇보다 러시아 제국주의의 족쇄를 부수고 이들 민족을 민족 억압의 멍에에서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배타적 애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이 없었다면 쏘비에트 권력을 공고히 하지도, 진정한 국제주의를 확립하여 민족협조의 탁월한 조직을 세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조직은 쏘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으로 미래에 제 민족이 연합할 통일적 세계경제체제의 살아있는 원형이다.
그러므로 자기 민족의 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또 자기 나라의 해방운동과 지배국가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간의 연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피억압국 사회주의자들의 폐쇄성, 편협성, 고립성을 반대하여 투쟁하여야 한다.
이러한 투쟁이 없다면 공동의 적을 타도하는 투쟁,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투쟁에서 피억압 민족 프롤레타리아트가 독립적 정책을 고수하고 지배국의 프롤레타리아트와 계급적 연대를 유지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이러한 투쟁이 없다면 국제주의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지배민족과 억압받는 민족의 근로대중이 혁명적 국제주의 정신을 기르는 방법이다.
    이와 같은 교육이 … 억압하는 큰 민족과 억압받는 작은 민족에서, 병탄(倂呑)한 민족과 병탄당한 민족에서 구체적으로 동일할 수 있는가?
    명백히 그럴 수 없다. 모든 민족의 완전한 평등, 매우 긴밀한 연계, 나아가 융합이라는 공동의 목적은 구체적인 경우 확실히 다른 길로 나아간다. 말하자면 한 지면의 중앙에 있는 점에 이르는 길이 한쪽 끝에서는 왼쪽으로 반대편 끝에서는 오른쪽으로 가는 것과 같다. 만일 억압하고 병탄(倂呑)하는 큰 민족의 사회민주주의자가 일반적으로는 민족의 융합을 주장하면서도, ‘자국의’ 니꼴라이 2세, ‘자국의’ 빌헬름, 조지, 포안카레 등도 역시 소수 민족과의 융합(병탄에 의한)을 지지한다는 것―니꼴라이 2세는 갈리시아와의 ‘융합’, 빌헬름 2세는 벨기에와의 ‘융합’ 등등을 지지한다는 것―을 잠시라도 망각한다면 이론적으로는 가소로운 교조주의자이고 실천적으로는 제국주의의 교사범(敎唆犯)이다.
    억압하는 나라의 노동자에 대한 국제주의 교육의 중점은 반드시 억압받는 나라의 분리의 자유를 선전하고 옹호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국제주의는 없다. 이러한 선전을 하지 않는 억압민족의 사회민주주의자는 누구나 다 제국주의자로, 악질분자로 취급하는 것이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비록 분리의 기회가 사회주의 이전에는 단지 천에 하나 정도 가능하거나 ‘실현’될 수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무조건적 요구이다. …
    이에 반해서, 소수민족의 사회민주주의자는 자기의 선동에서 우리의 일반적 정식의 두 번째 문구 즉 제 민족의 “자발적 통합”을 강조해야 한다. 국제주의자로서의 의무를 위반하지 않고서도 자기 민족의 정치적 독립을 지지할 수도 있고 자기 민족이 인접국 x, y, z 등과 통합하는 것도 지지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소수민족의 편협성, 폐쇄성, 고립성을 반대하여 투쟁해야 한다. 전체적이고 일반적인 이익을 위해, 부분적 이익을 일반적 이익에 복종시키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억압민족의 사회민주주의자가 ‘분리의 자유’를 주장하는 반면 피억압 민족의 사회민주주의자는 ‘연합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하면, 주어진 상황에서 국제주의와 민족의 융합에 이르는 어떤 다른 길, 이 목적에 이르는 그 어떤 다른 길은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19권, pp. 261-262를 보라.)<ref>레닌, “자결에 대한 토론의 결산”, 앞의 책, p. 212.</ref>

2024년 6월 25일 (화) 22:10 판

이번 주제에서는 두 가지 주요 문제를 다루겠다.

ㄱ) 문제 제기

ㄴ) 피억압 민족 해방운동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1) 문제 제기

민족문제는 최근 20년 동안 매우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제2 인터내셔널 시기의 민족문제와 레닌주의 시기의 민족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범위와 본질적인 성질에서 현저하게 다르다.

이전에는 민족문제가 대개 “문명”민족이라는 좁은 범위에 국한되었다. 아일랜드인, 헝가리인, 폴란드인, 핀란드인, 세르비아인, 그리고 몇몇 다른 유럽민족들 ― 이것이 제2 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이 민족의 불평등한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범위이다. 제2 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은 가장 야만적이고 잔혹하게 민족 억압에 시달리는 수천 수억의 아시아 아프리카 인민을 늘 무시하였다. 백인과 흑인, “문명민족”과 “미개민족”을 동렬에 두려 하지 않았다. 식민지 해방이라는 문제를 애써 회피하는 의미 없고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결의안 몇 개가 이들이 유세 떠는 전부였다. 지금은 민족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이러한 표리부동과 불철저성은 청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레닌주의는 이러한 악명 높은 부당성을 폭로하고 백인과 흑인, 유럽인과 아시아인, 제국주의의 “문명한” 노예와 “미개한” 노예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 버려 민족문제와 식민지문제를 연결시켰다. 그리하여 민족문제는 특수한 국내 문제에서 보편적 국제 문제로, 즉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종속국 및 식민지 피억압 인민의 해방이라는 세계적 문제로 되었다.

이전에는 민족자결의 원칙이 대개 잘못 이해되어 민족자치로 축소되었다. 제2 인터내셔널의 어떤 지도자는 민족자결을 심지어 문화적 자치로 바꾸는 데까지 나아갔다. 즉 모든 정치적 권력은 지배 민족의 수중에 남겨둔 채 피억압 민족이 문화적 관습만을 가지는 것이다. 그 결과 민족자결 사상은 합병에 반대하여 싸우는 무기로부터 합병을 정당화하는 무기로 변질될 위험에 처했다. 지금은 이러한 혼란이 제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레닌주의는 자결의 개념을 확장하여, 종속국 및 식민지의 피억압 민족이 완전히 분리할 권리로, 민족이 독립국가을 건설할 권리로 해석하였다. 이것으로 자결권을 자치권으로 해석하여 합병을 정당화할 가능성을 없앴다. 그래서 제국주의 전쟁 시기에 사회배외주의자의 대중기만의 명백한 도구였던 바로 그 민족자결 원칙이 모든 제국주의 야망과 배외주의적 책동을 폭로하는 무기로, 국제주의 정신 속에서 대중의 정치교육을 위한 도구로 되었다.

이전에는 피억압 민족을 보통 순수하게 법률적 문제로 보았다. “민족 평등권”을 엄숙히 선포하고 “민족의 평등”을 무수히 선언하는 것 ― 이것이 한 무리의 민족(소수)이 다른 한 무리의 민족을 착취하여 살아가는 제국주의 하에서의 “민족의 평등”이란 피억압민족에 대한 완전한 조롱이라는 사실을 그럴듯한 말로 발뺌하는 제2 인터내셔널의 상투적 수법이다. 이제 민족문제에 대한 이러한 부르주아 법률적 관점은 폭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레닌주의는 민족문제를 과장된 선언의 숭고한 하늘에서 신뢰할 수 있는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즉 피억압 민족 해방투쟁을 프롤레타리아 당이 직접 지지하지 않는 그런 “민족의 평등”에 관한 선언은 무의미한 기만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피억압 민족문제는 피억압 민족을 지지하는 문제, 즉 민족의 진정한 평등과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제국주의와의 민족해방투쟁을 실질적이고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문제가 되었다.

이전에는 민족문제를 개량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자본 권력과 제국주의의 타도 및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일반적 문제와 관계없이 별개의 독립적인 문제로 취급하였다. 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식민지해방운동과의 직접적 동맹 없이도 가능하고, 민족-식민지 문제의 해결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경로에서 떨어져 나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혁명투쟁 없이도 살그머니 “저절로” 실현될 수 있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해 왔었다. 이제 이런 반혁명적 견해는 폭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레닌주의가 논증하고, 제국주의 전쟁과 러시아 혁명이 실증한 바와 같이 민족문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의 연관 속에서만 또 그 기초 위에서만 해결될 수 있으며, 서구에서의 혁명 승리는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식민지 및 종속국의 해방운동과의 혁명적 동맹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민족문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총체적 문제의 한 부분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의 한 부분이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즉 피억압국의 혁명적 해방운동 내부에 있는 잠재적 가능성은 이미 없어졌는가? 또는 그렇지 않은가? 만약 없어지지 않았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그 가능성을 활용하고, 식민지 및 종속국을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의 예비군으로부터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예비군, 동맹군으로 전환시킬 어떤 가망과 근거가 있는가?

레닌주의는 이 문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즉 피억압국 민족해방운동 내부에 혁명적 역량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역량을 공동의 적인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데 활용할 가능성을 인정한다. 제국주의 발전원리와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러시아 혁명은 이 점에서 레닌주의의 결론을 전적으로 확증하고 있다.

여기에서 “지배”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피억압 및 종속국 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결연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할 필요성이 나온다.

물론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든 민족운동을 어디서나 언제나 구체적인 어떠한 경우에나 일일이 다 지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제국주의를 약화시키고 타도하는 경향의 민족운동을 지지하는 것이지 제국주의를 강화하고 보존하는 경향의 민족운동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피억압국 민족운동이 프롤레타리아 운동 발전의 이해관계와 상충할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는 물론 지지할 수 없다. 민족의 권리문제는 고립된 자족적 문제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총체적 문제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전체에 종속된 그리고 전체의 관점에서 고려해야만 한다. 1840년대에 맑스는 폴란드인과 헝가리인의 민족운동은 지지하고 체코인과 남슬라브인의 민족운동은 반대했다. 왜 그렇게 하였는가? 체코인과 남슬라브인은 당시 “반동적 민족”, 즉 유럽에 있어 “러시아의 전초부대”였고 전제주의의 전초부대였지만, 폴란드인과 헝가리인은 전제주의와 투쟁하는 “혁명적 민족”이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체코인과 슬라브인의 민족운동에 대한 지지는 유럽 혁명운동의 가장 위험한 적인 짜리즘을 간접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결권을 포함한 민주주의의 여러 요구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전체 민주주의(현재는 전체 사회주의) 운동의 한 부분이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경우에는 부분이 전체에 모순될 수도 있다. 그때 그것은 거부되어야 한다.” (제19권, pp. 257-258을 보라.)[1]

이것은 개별적인 민족운동 문제이며 그중 있을 수 있는 반동적 성격에 관한 태도문제이다. 물론 민족운동은 형식적 관점, 즉 추상적 권리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혁명운동의 이익의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민족운동 전체의 혁명적 성격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다. 어떤 개별적인 민족운동에 있을 수 있는 반동성이 상대적이고 특수한 것처럼 압도적 다수의 민족운동의 명백한 혁명성도 상대적이고 특수하다. 제국주의적 억압의 조건 속에서 민족운동의 혁명적 성격은 그 운동 내부에 프롤레타리아적 요소나 혁명적 공화주의 강령, 민주주의의 토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을 위한 아프가니스탄 국왕의 투쟁은 그와 그 전우들의 군주주의 관점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혁명적이다. 제국주의를 약화시키며 와해시키고 그 뿌리를 침식시키기 때문이다. 반면에 께렌스끼와 쩨레쩰리, 레노델과 샤이데만, 체르노프와 단, 헨더슨과 클라인즈 같은 “필사적인” 민주주의자와 “사회주의자”, “혁명가”와 공화주의자가 수행한 제국주의 전쟁 당시의 투쟁은 반동적이다. 제국주의를 미화하며 강화하고 승리하게 했기 때문이다. 동일한 이유로, 이집트의 상인과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이집트 독립투쟁은 그들이 부르주아 출신이고 부르주아 신분이며 사회주의에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혁명적이다. 반면에 영국 “노동당” 정부가 이집트의 종속적 위치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벌이는 투쟁은 정부 구성원이 프롤레타리아 출신이고 프롤레타리아 신분이며 사회주의를 “염원”한다고 할지라도 반동적이다. 인도와 중국과 같은 더 큰 식민지 및 종속국에서의 민족운동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해방의 길로 나가는 이 나라들의 한 걸음 한 걸음은 비록 형식적 민주주의의 요구에 위반된다 할지라도 제국주의를 증기해머(steam-hammer)로 타격하는 것이며 의심의 여지없이 혁명적 진일보이다.

피억압국의 민족운동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의 총결산에서 나오는 실제적 결과의 관점에서, 다시 말해 “고립적으로가 아니라 세계적 규모에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레닌의 말은 올바르다. (제19권, p.257을 보라.)[2]

  1. 레닌, “자결에 대한 토론의 결산”, ≪맑스-레닌주의 민족운동론≫, 벼리, 1989, p. 207.
  2. 같은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