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프 브로즈 티토
개요
요시프 브로즈 티토(Јосип Броз Тито)는 유고슬라비아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혁명가이자 노동운동가로 2차 세계대전 당시 파르티잔 운동을 주도했으며, 1953년 1월 14일부터 1980년 5월 4일까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대통령직을 맡았다.
생애
생애 초기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1892년 현재 크로아티아 지방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했기 때문에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한 티토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발칸 반도를 떠돌아 다니며 기술공으로 돈을 벌며 살았다. 그러던 중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당시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고 티토는 오스트리아군으로 징집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러던 중 티토는 러시아 제국군의 포로로 잡혔고 1917년 포로 수용소에서 러시아 혁명을 목격한다. 러시아 혁명을 목격한 티토는 볼셰비키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1920년 유고슬라비아 지방으로 돌아와 유고슬라비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여러 파업 현장을 돌아다니며 노동자 투쟁에 직접 참가했고 그러던 1928년 유고슬라비아의 국가보안법에 걸려 5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감옥생활을 하던 티토는 감옥에서도 동지들을 만나며 인맥을 넓혔고 1935년 모스크바로 건너갔다. 티토의 모스크바 생활 시기 스탈린의 대숙청이 있었지만 티토는 살아남았다. 티토는 1939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서기장의 자리에 올랐다.
2차 세계대전 시기
1939년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셰계대전을 일으켰고,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을 점령했다. 그리고 1941년 나치군은 동맹국 이탈리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했고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해버렸다. 이때부터 티토는 나치군과 유고슬라비아의 극우조직 우스타샤에 대항하여 파르티잔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히틀러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한 뒤 얼마 안되어 히틀러는 소련까지 침공한다.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타잔 활동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련을 침공했고 그 시기 티토의 파르티잔은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빨치산 투쟁을 계속 전개해 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군은 티토의 파르티잔을 토벌하기 위해 유고슬라비아에 30만명이나 되는 대군을 투입했다. 이는 독일이 소련군에 맞서는데 있어 나치 독일의 후방을 교란시키고 30만명이라는 대군을 동부전선에 투입시키지 못함으써 수많은 병력 손실을 초래하기까지 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히틀러는 오토 슈코르체니가 이끄는 SS 친위부대까지 투입하여 티토를 죽이려고 했다. 오토 슈코르체니의 SS는 티토를 거의 잡을 뻔했으나 티토는 위기상황에서 부하들과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나치의 티토 사살 계획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티토의 파르티잔은 나치 치하의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나치군과 파시스트 조직인 우스타샤에 대항하여 수많은 전투를 치뤘고 1945년 소련군이 유고슬라비아 내에 들어왔을때 소련군과 연합하여 수도 베오그라드를 점령함으로써 유고슬라비아를 해방시켰다.
전후 복구와 인민민주주의 혁명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전후복구 정책을 활발하게 추진했다. 1947년에 개시된 1차 5개년 계획에 따르면 유고슬라비아의 국민총소득은 1억 3200만 디나르에서 2억 5500만 디나르로 1939년에 비해 19.3%가 증가하고, 1인당 국민총소득은 1951년에 이르면 8,464 디나르에서 15,625 디나르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전력 생산량 또한 1인당 72킬로와트에서 1951년에 이르면 271 킬로와트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됐다. 1차 5개년 계획 당시에 설정된 목표는 1) 경제적, 기술적 후진성의 제거와, 2) 경제력과 국방력의 강화, 3) 국민경제의 사회주의적 부문의 공고화와 발전, 4) 근로인민대중의 전반적인 복지 개선으로 분류됐다.[1]
유고슬라비아 공산당과 인민전선[2]은 전후복구의 주된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1945년에 일찍이 대지주와 중소지주, 교회가 전통적으로 소유했던 경작지에 대한 무상몰수를 골자로 하는 토지개혁법을 실행했으며[3], 대규모 공업의 국유화를 단행했고 농업 부문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를 강화하기 위해 협동조합 운동[4]을 개시함으로써 생산수단의 집산화를 달성하고자 했다. 티토는 이 당시 '제 2의 스탈린'이라는 별칭이 붙었을 정도로 농업집산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토지개혁으로 몰수된 농지의 상당수는 협동조합 운동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각지에 건립됐던 농업 시설과 합작사들에게 귀속됐으며, 1947년 12월에는 개인 부업과 집단농업이 공존하는 아르텔(Artel) 형 농촌합작사 612곳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5] 그러나 티토는 코민포름의 비판에서도 드러나듯, 집산화 과정에서 부농에 대한 빈농과 중농, 노동자계급의 동맹에 입각한 생산수단의 사회화보다 부농을 용인하는 방침을 취했다. 미국의 우파 매체인 ≪더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유고슬라비아 농촌의 전반적인 상황을 논하며 아래와 같이 말했다.
“ | 유고슬라비아에서 집산화는 다른 나라들보다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부농에 대한 억압은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부농들은 다른 '인민민주주의 국가들'과 다르게 집단농장에서 원칙적으로 배제되지 않고 있다. | “ |
≪더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1950년 2월 18일자 기사 中 |
1948년 무렵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전반적인 상황은 열악했다. 나치 독일의 침략 이전에 비합법 지하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1만 2천명의 선진적 당원들은 파르티잔 전쟁으로 인해 4천 명으로 줄어들었으며, 전체 당원들의 30%만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티토는 이 당시 당의 기간요원들을 양성함으로써 내실을 강화하는 데에 힘을 쏟기보다 양적 숫자를 늘리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1945년~1948년 사이에 전체 당원의 숫자는 14만 명에서 50만 명으로 증가했지만, 그만큼 노동자들이 당 내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급격하게 감소했다.[6] 티토는 소생산자와 소부르주아, 농민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지도보다 초(超) 계급적 동맹을 강조했고, 노동자계급의 역할을 경시했다. 티토와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지도부에 따르면, 인민전선과 국가에 대한 지도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인 당의 몫이 아니라 인민전선의 자체적인 책무였다.[7]
“ |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인민전선의 강령 이외에 다른 강령을 보유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공산당은 다른 어떤 강령도 갖추고 있지 않다. 인민전선의 강령이야말로 곧 당의 강령이다.[8] | “ |
요시프 브로즈 티토, 유고슬라비아 인민전선 제 2차 대회 보고(1947) |
유고슬라비아 공산당과 티토는 인민전선에 대한 당의 지도를 간과했고, 유고슬라비아 인민전선 강령의 제 1항에 수록된 "유고슬라비아 인민전선은 가장 주요한 정치세력이다"라는 취지의 내용처럼 전위조직과 대중조직을 혼동함으로써 노동자의 비중이 미약했던 당 내부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제임스 클루그먼(James Klugmann)에 따르면, 베오그라드 인근의 젤레즈닉(Zeleznik) 대공장에 근무했던 4000여 명의 노동자들 중에서 당원은 160명에 그쳤고, 생산 현장에 대한 이해와 노동자들과의 결합은 미진한 수준에 머물렀다.[9] 유고슬라비아에서 노동자계급 정당의 지도력 약화와 부농과의 타협, 미진한 토지 개혁은 '티토-스탈린 결별'의 핵심적인 원인으로 작용했고, 더 나아가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패배에 있어 중요한 단초가 됐다.
티토-스탈린 결별
티토는 비록 공산권 지도자였지만 서방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고 미소냉전기 스탈린과 대립하게 되었다. 실제로 스탈린은 암살자를 보내 티토를 암살하려 했지만 암살에는 실패했고 티토는 "스탈린 동지, 다시 한 번 암살자를 보낸다면 나도 모스크바에 암살자를 보내겠소"라고 쓴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가 된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내의 소수민족들에게 우대정책을 폈다. 반대파를 제거하는데 있어서도 굉장히 유연한 방법을 썻다. 2차대전 시기 티토와 함께 파르티잔 투쟁을 했던 정적 드질라스는 티토를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유언비어도 퍼뜨렸지만 티토는 그를 죽이지 않았고 감옥에만 가뒀다. 다른 정적들의 경우 죽이기 보단 대부분 가택연금을 하는 선에서 끝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세계는 미소 냉전이 격화되었지만 티토는 제3의 외교를 펼치며 서방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1960년대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가장 먼저 해외 자율화에 성공했다. 거기다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에선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이 출판되기 까지 했다.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는 미국을 중심으로한 서방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 대신 제3세계를 중점으로 비핵화와 후진국의 산업화를 추진하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고쳐나가는 첫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
1968년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의 구정공세와 구정공세로 인한 미국의 반전운동을 지지하고, 소련의 관료체제에 맞서 봉기했던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민중봉기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1974년 티토는 신헌법을 제정하여 종신 대통령이 되었지만 이후 주로 해외 순방을 통한 외교활동을 중시했다. 그러던 1980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더 보기
각주
- ↑ Edvard Kardelj. (1947). The Communist Party of Yugoslavia in the Struggle for the Independence of the Yugoslav People: For The People's Power, For Economic Rehabilitation and Socialist Reconstruction of the Economy. For a lasting peace, for a people's Democracy, Vol.1, p. 90.
- ↑ 나치 독일의 강점기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운동에서 공산당의 전선체 역할을 맡은 정치조직으로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광범위한 계급계층들을 모두 포괄했다.
- ↑ ibld, p. 84
- ↑ ibld, p. 87
- ↑ ibld, p.92
- ↑ James Klugmann. From Trotsky to Tito. Farleigh Press Ltd., p. 13, 1951.
- ↑ ibld, p. 19
- ↑ ibld, p.20
- ↑ ibld, p.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