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엥겔스

좌파도서관
프리드리히 엥겔스
Friedrich Engels
지배계급에게 좋은 것은 지배계급이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회 전체에 좋다고 주장된다.
출생
출생
1820년 11월 28일

프로이센 왕국 라인란트 주 바르멘 시
사망
사망
1895년 8월 5일

영국 런던
국적
국적
프로이센 왕국 → 독일 제국
약력
약력


개요

독일마르크스주의자, 사업가, 사상가.

공장주 출신의 마르크스주의자이며, 마르크스의 동반자로 유명하다. 그는 아버지가 영국 맨체스터에 동업자와 함께 세운 공장을 맡아 운영했다. 동시에 엥겔스는 상류층의 스포츠인 여우사냥을 다니고 최고급 포도주를 즐겨 마시고 매력적인 여성들과 어울리며 인생의 온갖 즐거움을 탐하는 전형적인 유복한 부르주아의 삶을 산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엥겔스는 부르주아 결혼제도를 거부한 사람이기도 했다. 아일랜드 노동자 계급 출신의 메리 번스와 20여년 동안 동거했으며, 메리가 죽자 그 여동생 리지 번스와 다시 15년을 살았다.

생애

생애 초기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독일 라인란트 지방 부퍼탈에서 방적공장을 운영하는 산업 자본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엥겔스가 자본가의 삶을 산 것은 절반쯤은 아버지의 압박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엥겔스는 평생 아버지와 불화했다. 17살 때 김나지움을 자퇴한 것도 아버지가 보기에 인생에 아무 쓸모없는 ‘문학나부랭이’나 끼고 사는 것이 못마땅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엥겔스는 아버지 사업을 전수받는 일에 투입됐으나, 마음은 계속 딴 세계를 향했다. 스무살 무렵 엥겔스는 독학으로 헤겔을 공부해 청년헤겔파, 곧 반체제적 철학운동에 눈을 떴다. 1841년 프로이센 군대에 입대해 베를린의 포병 근위대에 배속된 엥겔스는 1년 동안 청강생으로 베를린 대학에 드나들었다. 이 무렵 베를린대학 철학교수로 부임한 사람이 프리드리히 셸링이었다. 젊은 날 헤겔의 동지였다가 이내 갈라져 원수가 된 셸링은 헤겔 철학이 낳은 청년좌파들의 사상을 때려 부수라는 특명을 받은 터였다. 셸링의 강좌가 열린 ‘베를린대학 6호실’은 ‘19세기 유럽 준재들의 집결지’였다.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미하일 바쿠닌, 쇠렌 키르케고르가 함께 강의를 들었고, 엥겔스는 교실 맨 앞자리에 앉아 자신의 철학적 스승에게 논리의 포격을 가하는 셸링의 강의를 열심히, 그러나 마음으로 논박하면서 받아 적었다.

마르크스를 만난 후

엥겔스의 삶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은 마르크스라는 평생 동지를 만난 일일 것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라인신문> 편집장을 하던 1842년 우연히 신문사에 들러 장래의 인생 파트너를 잠깐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다 1844년 여름 파리에 망명중이던 마르크스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완전한, 되돌릴 수 없는 의기투합이었다. 이때부터 ‘제1 바이올린을 보조하는 제2 바이올린’의 삶이 시작됐다. 1849년 마르크스 가족이 런던에 망명한 뒤 엥겔스는 맨체스터 공장을 이어받아 20년 동안 공장주 노릇을 했다.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마르크스의 생계를 뒷받침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의 헌신적인 지원 덕에 《자본론》이라는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이론적 무기를 벼려낼 수 있었다.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의 독자적인 삶은 1883년 마르크스가 죽고 난 뒤에 열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삶도 먼저는 마르크스 사상을 보위하고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론을 널리 퍼뜨리는 데 바쳐졌다. 엥겔스의 중요한 과업은 마르크스가 초고 상태로 남기고 간 《자본론》의 원고들을 정리해 제2권(1885), 제3권(1894)으로 갈무리해낸 일이었다. 1889년 엥겔스는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 분파를 아울러 새로운 국제노동자협회(제2 인터내셔널)를 결성했다. 제2바이올린이 마침내 제1바이올린으로 등장한 순간이었다.

1890년대의 엥겔스는 독일 사회민주당의회주의 전략을 적극 지지했다. 대중민주주의 시대에 걸맞은 정치전략의 수정이었다. 엥겔스는 “의식 있는 소수가 의식 없는 대중을 끌고 가는 혁명의 시대는 지났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의회와 투표를 통해 집권할 수 있다면 그런 방법을 적극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엥겔스는 초기 기독교 역사를 연구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한 원형을 거기서 발견했다.

노동계급운동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원래는 억압받는 자들의 운동이었다. … 양쪽 다 박해당하고 괴롭힘당했다. … 그런데 그 모든 박해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거기서 자극을 받아 멈추지 않는 승리의 행진을 계속한 것이다.

사후

1895년 엥겔스가 숨을 거두었을 때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친구요 조언자요 지도자요 전사”였던 “정신의 거인”을 잃었다고 추도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