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라파르그
❝ | 착취당할 권리에 불과한 '인간의 권리'나 비참해질 권리에 불과한 '일할 권리' 대신에, 누구나 3시간보다 더 일하지 못하도록 결단해야 한다. | ❞ | |
출생 ▼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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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프랑스의 의사이자 문화 평론가, 언론인, 정치인으로, 국제노동자협회(1인터) 선출 위원 및 프랑스 의회 의원이기도 했다.
본래 프루동주의자였으나 마르크스, 엥겔스와 교류하며 마르크스의 열렬한 지지자[1]가 되었고, 런던 이주 이후엔 마르크스의 둘째 딸 라우라 마르크스와 결혼했다. 프랑스 노동자당을 지도하는 등 정치 활동을 이어가다, 1911년 부인과 함께 동반자살한다.
생애
출생
1842년 쿠바에서 태어났으며, 유대인, 흑인, 자메이카 원주민과 크리올의 혼혈이다. 이에 대해 그는 스스로 "이념으로서의 국제주의를 접하기도 전에 국제주의자"였으며 "억압받는 세 인종의 피가 내 혈관에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이민
1851년 가족과 함께 프랑스 보르도로 이주했으며, 이후 라파르그는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하게 된다. 파리에서 실증주의 철학과 공화주의를 접한 그는 정치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프루동의 저작에 감명을 받아 아나키스트를 자처하게 된다.
이후 국제노동자협회 프랑스 지부에 프루동주의자로서 합류한 그는 블랑키와 마르크스와 교류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프루동주의를 부정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영국과 스페인 활동
1865년 리에주에서 열린 국제 학생 회의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라파르그는 모든 프랑스 대학에서 추방되었다. 영국으로 재차 이주한 그는 마르크스, 엥겔스와 친분을 맺게 되며, 마르크스의 지지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까지도 아나키즘을 전면적으로 비판하진 않았다.
그러던 1868년 4월, 마르크스의 둘째 딸인 라우라와 결혼한다. 자녀를 셋을 두었으나, 병원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영아기에 숨을 거뒀다.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의사였음에도 의학에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1871년 파리 코뮌이 진압되자, 런던, 보르도, 파리를 오가며 활동하던 라파르그는 스페인으로 쫓겨나다시피 하였다. 당시 스페인은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이 우세하던 다른 국제노동자협회 지부들과는 달리 아나키즘이 강세였고,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 지지자를 결집시키려 시도하였지만 실패한다.
1873년부터 영국 런던에 완전히 정착한 라파르그 부부는 정치 활동이나 의원 개업 대신 인쇄소를 차렸으나 잘 되지 않았고, 엥겔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된다. 한편으로는 제한적으로나마 프랑스 노동자들과 접촉했다.
파리로
1880년부터 프랑스 사회주의 신문인 "평등(L'Égalité)"지의 편집자가 된 라파르그는 <게으를 권리>의 초고 등을 발표하는 등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1882년 보험 회사 근무를 명목으로 파리로 귀환한 그는 새로 창립된 프랑스 노동자당(Parti Ouvrier Français, POF)을 지도하게 된다. 프랑스 노동자당은 당의 안팎에서 아나키스트, 자코뱅 좌파, 블랑키주의자들과 충돌했고, 라파르그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고수하며 당내 입지를 다졌다.
한편 라파르그는 1880년대부터 점차 사회주의 운동 전반을 잠식해나가던, 장 조레스로 대표되는 개량주의적 경향을 강력히 비판했다.
1891년, 수십차례의 시위 주동 혐의로 투옥된 라파르그는, 구금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릴의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는 사회주의자로서는 최초로 공직에 진입한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그는 부르주아 국가 의회에 매달려서는 유의미한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1908년 범 사회주의 세력들이 같은 당으로 통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량주의 세력에 대한 반대를 굽히지 않았다.
죽음과 평가
1900년대 중반 이후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했던 그는 고령으로 인해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여전히 그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 이론가였으나, 건강 문제로 인해 파리 교외에서 요양하며 제한적으로 글을 썼다. 그러던 1911년, 아내 라우라와 함께 스스로 생을 마쳤다.
“ | 몸과 마음의 건강, 쾌락과 기쁨을 차례로 앗아간 무자비한 늙음 앞에 생을 마감합니다. 나의 육체적, 정신적 힘을 빼앗아 온 노화라는 것은 이미 나의 에너지를 마비시켰고 나의 의지를 무너뜨렸습니다. 나는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될 것입니다.
나는 70세 이상은 살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인생을 떠날 정확한 연도를 정했고, 우리의 결의안을 실행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시안화산(청산가리)의 피하 주사였습니다. 나는 45년 동안 내가 헌신해 온 대의가 언젠가는 승리할 것이라는 최고의 기쁨을 안고 죽습니다. 공산주의 만세! 국제 사회주의 만세! |
“ |
라파르그의 유서 |
“ | 내가 아직 미숙한 청년이었고 폴 라파르그와 그의 아내 라우라 마르크스[2]의 자살이 사회주의 정당들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킬 때, 나는 그들의 입장의 원칙적이고 올바른 성격을 확고히 옹호했습니다.
나는 그들 부부의 자살에 대해 분개한 아우구스트 베벨에게 격렬하게 반대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라파르그의 죽음을 말하려면, 그가 옳았느냐가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로서 그가 죽기로 선택한 나이에 대해서만 첨언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가 평생을 바친 대의에 더는 공헌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삶을 마친 그 결정에, 결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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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 게으를 권리(1883, le droit à la paresse)[3]
- 마르크스에 대한 회상(1890)[4]
- 아테나 신화(1890)[4]
- 추상적 개념의 기원(1898)[4]
- 권리와 인간의 권리(1900)[4]
- 사회주의와 지식인(1900)[4]
- 여성 문제(1904)[4]
- 그 밖의 저작은 Marxist Internet Archive(영문)에서 무료로 읽어볼 수 있다.
- ↑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줄곧 '마르크스주의'라는 개념을 부정했다.
- ↑ 스페인은 기혼 여성도 본래 성을 유지했다. 폴 라파르그는 스페인령 쿠바 출신이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대부분의 시간을 영국과 프랑스에서 보냈고, 그녀 역시 열렬히 활동하던 사회주의자였음을 고려하면, 본래 성을 유지한 것이 단순히 스페인 문화의 영향이라고만 보긴 힘들다.
- ↑ 한국어 역본이 두 개 있다. 필맥 차영준, 새물결 조형준. 번역의 질은 둘 다 문제가 없으나, 전자가 수록된 글이 더 많으면서 가격도 저렴하다.
- ↑ 4.0 4.1 4.2 4.3 4.4 4.5 한국어로 옮긴 책이 있다. 게으를 권리, 마르크스에 대한 회상, 사회주의와 지식인 등 7편이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