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

좌파도서관
Kbuntang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2월 11일 (일) 01:23 판 (오탈자 및 비문 수정)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는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1909년 발표한 글이다.

내용

(들어가기 전, 20세기 초라는 시대 상 페미니스트라는 용어는 1세대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따르는 여성들, 혹은 중산층 유산 계급 여성운동가에 한정되어 사용되었다. 본문에서 종종 등장하는 페미니스트를 비판하는 문장에는 이런 맥락이 있음을 일러둔다.)
(Alix Holt의 영역본을 한국어로 중역함)

유산(有産, bourgeoisie) 계급 학자들이 한 성(性)이 다른 성보다 우월한가에 대한 논의나, 남성과 여성의 뇌를 저울질하고 정신 구조를 비교하는 일을 하든 말든, 사적 유물론을 따르는 이들은 각 성의 자연적 특성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각각의 사람들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진정 가장 완전하고 자유로운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모든 자연적 성향을 발달시키고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요구할 뿐이다. 사적 유물론을 따르는 이들은 우리 시대의 일반적 사회 문제에서 동떨어져 있는 특수한 여성의 존재를 거부한다. 여성의 복종에는 특정한 경제적 요인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자연적 특성은 이 문제에서 부차적인 요소였다. 이러한 요소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 과거 어느 시점에 여성이 복종하게끔 만든 그 힘이 진화할 때만 근본적으로 그들의 사회적 위치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여성은 새로운 사회적, 생산적 틀을 따라 조직된 세계 하에서만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현대적 체계의 틀 안에서 여성의 삶을 부분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노동자들의 의문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현대적 생산관계의 완전한 재구조화가 있을 때만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산(無産, proletariat) 계급에게 시급한 이익을 제공할 개혁을 하지 못하는가? 오히려 노동계급이 얻는 이득은 각각이 자유와 사회적 평등의 왕국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을 상징한다. 여성이 쟁취한 각각의 권리는 그들을 완전한 해방이라는 분명한 목표에 가까이 데려간다.

사회민주주의는 처음으로 그들의 계획에 여성의 권리와 남성의 권리의 동등함에 대한 요구를 포함시켰다. 연설과 인쇄물에서 당은 언제 어디서나 여성에게 영향을 주는 제한을 철회할 것을 요구해왔다. 다른 당이나 정부가 여성이 원하는 개혁을 하게끔 한 것은 오직 당의 영향 뿐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당은 이론적인 측면에서 여성을 방어하는데 그치지 않고 여성의 평등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이 경우에, 우리의 “평등권 운동가”들을 강력하고 능숙한 당의 지지를 받지 못하도록 한 것은 무엇이었나? 평등권 운동가들이 “급진적”이었을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이 여전히 자신이 속한 유산 계급에 충실하다는 것이 사실이다. 정치적 자유는 특정한 시기에는 러시아 유산자의 권력과 성장에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고, 그것이 없다면, 후기(後期)에는 모든 경제적 복지가 모래 위에 지어진 것이나 다름 없게 될 것이다. 여성에게 정치적 평등에 대한 요구는 삶에서 가지치고 나오는 필수적인 것이다.

“직업에 대한 접근”이라는 구호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나라의 정부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만이 여성의 경제적 상황을 개선하는 것을 보장한다. 그러므로 중산층 유산자(有産者) 여성들은 선거권을 얻고자 열렬히 열망하고 있고, 또 그렇기에 그들은 현대 관료제에 적대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평등에 대한 요구에 있어 우리의 페미니스트들은 그들의 외국에 있는 자매들처럼 행동한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배움이 열어젖힌 지평은 그들에게 여전히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평등을 현존하는 계급사회의 틀에서 바라보며, 이 사회의 기초를 공격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특권을 위해 싸우며, 이미 존재하는 특권에 도전하지 않는다. 우리는 유산 계급 여성 운동의 실패를 대표하는 이들에게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의 시각은 그들의 계급적 위치를 필연적으로 따르기 때문이다.

경제적 독립을 위한 투쟁

우선 우리는 계급 모순을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여성 운동의 단일한 연합이 가능한지 자문(自問)해야한다. 모든 편향되지 않은 관찰자가 볼 때, 해방 운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이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성의 세계는, 남성의 세계가 그렇듯 두개의 진영으로 분리되어 있다. 한 여성 그룹의 관심사와 열망은 유산 계급에 가까워진다. 다른 그룹은 무산 계급과 깊은 관계를 맺고, 그들의 해방을 위한 주장은 여성 문제의 완전한 해결책을 포함한다. 그리하여 비록 양 진영이 “여성 해방”이라는 공통의 구호를 따른다 해도, 그들의 주장과 관심사는 다르다. 각각의 집단은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계급의 관심사에 따라 시작점을 설정하며, 이는 자신들의 목표와 과제에 특정한 계급의 색채를 입힌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의 요구가 급진적으로 보인다고 해도, 그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위치 때문에 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위해 투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변화 없이 여성 해방은 완성될 수 없다.

특정한 상황에서 모든 계급 여성의 단기적 과제가 일치한다면, 장기적인 운동의 방향과 전술을 결정짓는 두 진영의 최종 목표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페미니스트들에게는 현대의 자본주의적 세계의 틀 안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얻는 것이 그 자체로 충분히 명확한 목표가 되지만, 무산자(無産者) 여성에게 같은 시기의 평등권은 노동 계급의 경제적 노예 상태에 맞서는 투쟁을 전진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남성이 모든 권리와 특혜를 부당하게 누리고 여성에게 족쇄와 의무만을 남겼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을 주적으로 본다. 그들에게 승리는 남성이 독점적으로 누렸던 특권을 여성에게 내어줄 때 얻어지는 것이다. 무산자 여성은 다른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남성을 적이나 억압자로 보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은 남성을 그들과 일상의 고된 일을 함께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함께 싸우는 동지로 여긴다. 여성과 그들의 남성 동지는 같은 사회적 조건에 따라 노예가 되었으며, 같은 증오스러운 자본주의의 사슬이 그들의 의지를 억누르고 그들에게서 즐거움과 인생의 매력을 빼앗는다. 현대의 시스템이 여러 측면에서 여성에게 이중적인 짐을 지우는 것도 사실이고, 임금노동의 조건이 때때로 노동자 여성을 남성의 경쟁자로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노동 계급은 누구에게 죄를 물어야할 지 알고 있다.

여성 노동자는 그의 불행한 남자 형제 못지 않게, 희생자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백만 사람들의 목숨 값으로 성장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는, 남성, 여성, 어린이 누구에게나 탐욕스럽게 달려드는 금칠한 입을 가진 끝모를 욕망의 괴물을 싫어한다. 수천 가닥의 실들이 노동자 남성과 가까이 이끈다. 반면에 유산자 여성의 열망은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무산자의 마음을 울리지 않는다. 그들은 무산자 여성에게 착취당하는 인류 모두가 시선을 쏟는 밝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

물론 무산자 여성의 최종 목표가 유산 계급 체제 하에서 그들의 상태를 개선하고자 하는 갈망을 막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런 갈망을 깨닫는 것은 그 자본주의의 본성에 의해 끊임없이 방해받는다. 여성이 평등한 권리를 갖고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노동이 사회화된, 화합과 정의의 세상에서 뿐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이 것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평등이 법으로 성문화(成文化)될 때 억압적, 속박적, 노예적인 눈물과 고난의 구 세계에서 자신들의 안락한 자리를 얻어낼 수 있다고 믿는 듯 하다. 그리고 이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 맞는 말이다. 여성의 대다수인 무산자에게 남성과의 평등이란 그저 불평등을 평등하게 나누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선택받는 소수”인 유산자 여성에게 평등은 그간 유산 계급 남성만이 누려왔던 전례없고 새로운 권리와 특혜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유산자 여성이 하나씩 양보를 얻어낼 때마다 그의 여동생을 착취하기 위한 무기가 그에게 하나씩 늘어날 것이며 두개의 반대되는 사회적 진영에 속한 여성 간의 분열은 커져갈 것이다. 그들의 이해관계는 더욱 첨예하게 대립할 것이고, 그들의 열망은 더욱 명확하게 모순 될 것이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여성 문제”란 어디에 있나? 페미니스트들이 그렇게도 외쳐대는 과업과 염원의 연대는 어디에 있나? 냉철하게 현실을 보았을 때 그러한 연대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페미니스트들은 헛되게도 “여성 문제”는 어떤 특정한 정당과도 관련이 없으며 “모든 정당과 모든 여성이 함께할 때 가능하다”고 확언한다. 한 독일의 과격파 페미니스트가 말했듯, 현실적 논리를 따른다면 페미니스트들의 이러한 위안적 망상을 거절한다.

생산의 조건과 구조는 인류사를 통틀어 여성을 지배하였으며 여성을 지금까지 자리잡고 있는 억압받고 의존하는 위치로 서서히 끌어내렸다.

여성이 잃어버린 중요성과 독립을 되찾을 수 있으려면 전체 사회·경제적 구조의 거대한 격변이 필요했다. 언젠가 가장 뛰어난 사상가들도 너무 어려워했던 문제들은 이제, 생명이 없지만 전능한 생산조건에 의하여 해결되었다. 그 힘은 수천 년간 여성을 노예화했지만, 이제는 더욱 발전된 단계에서 그들을 자유와 독립의 길로 이끈다.

여성 문제는 약 19세기 중반, 무산자 여성이 노동의 영역의 발을 들이고 한참 후에 유산 계급 여성에게 중요성을 띄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말도 안되는 성공의 영향으로, 중간 계급은 필요의 흐름에 인해 타격을 받았다. 경제적 변화는 소시민과 중산층(petty and middle bourgeoisie)의 재정적 상황을 불안정하게 만들었으며, 유산 계급 여성은 가난을 받아들일 것인가, 일할 권리를 얻을 것인가 하는 위협적인 균형의 딜레마에 직면했다. 이런 사회적 집단의 아내와 딸들은 대학, 미술 전시장, 출판사, 사무실의 문을 두드리며 그들에게 열려있는 전문직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과학이나 더 높은 문화적 혜택에 대한 유산 계급 여성의 욕망은 즉각적이고 성숙한 요구가 아니었다. “일용(日用)할 양식(糧食)”에 관한 같은 문제로부터 뻗어나온 것이었다.

유산자 여성은 남성의 강한 반발을 마주했다. 그들의 “작고 안일한 직업”에 애착을 가진 전문직 남성과 매일의 밥벌이에 미숙한 여성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 투쟁이 “페미니즘”을 낳았다. 유산 계급 여성이 결속하여 적에게, 남성에게 맞서려는 시도였다. 이 여성들은 노동의 영역에 진입하면서 스스로를 “여성 운동의 선봉”이라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들은 이러한 경제적 독립을 쟁취하는 문제에서, 다른 영역에서 그랬듯, 자신들이 여동생들의 자취를 따라가며 그들이 부르튼 손으로 애썼던 결실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유산 계급 여성 운동이 태동하기 전부터, 전세계에서 수십만의 무산자 여성이 공장과 공방으로 몰리며, 산업의 각 분야를 하나씩 점거하였음에도 페미니스트가 여성 노동의 길을 개척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이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 덕에 유산자 여성은 페미니스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무산자 여성들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서 보편적인 페미니즘 운동이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단 하나도 보기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 무산자 여성이 자신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킨 영역에서 얻어낸 성취는 노동자 계층 전반의, 특히 그들 자신의 노력의 결과이다. 노동자 여성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투쟁의 역사는 무산 계급이 그들 스스로의 해방을 위해 벌인 투쟁의 역사이다.

무산자의 불만이 위험하게 터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하지 않고 공장주들에게 노동의 가치를 끌어올리게 만들지 않았다면, 무엇이 노동 시간을 줄이고 노동 조건을 개선했겠는가? “노동 불안”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면, 무엇이 자본에 의한 노동 착취를 제한하는 법을 만들도록 정부를 압박했겠는가?

사회민주주의 정당처럼 여성을 대변했던 정당은 어디에도 없다. 그 무엇보다도 노동자 여성은 노동 계급의 일원이며, 더욱 그들의 위치가 충분한 곳으로 가고 무산자 가족의 일원 각각의 안녕이 더욱 일반화된다면, 노동 계급 전체의 이익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사회적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의를 위하는 진실된 투쟁가는 슬픔의 혼란을 멈춰야 한다. 그는 보편 여성 운동이 무산자 여성을 위해 이룬 것이 얼마나 사소한 지를, 그것이 노동 계급의 노동 조건과 생활 상태를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밖에 없다. 평등을 위해 싸우지만 무산자의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다 나은 사회 제도가 올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없는 그러한 여성들에게 인류의 미래는 어둡고 칙칙하며 불확실하다. 현대 자본주의 세계가 변하지 않는다면, 해방은 그들에게 불완전하고 치우치지 않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사려깊고 세심한 여성들은 얼마나 절망하겠는가. 이런 사회적 관계가 왜곡된 현대 세계에서 노동 계급만이 의욕을 유지할 수 있다. 확고하고 신중한 발걸음으로 그들은 그들의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간다. 그들은 노동자 여성을 자신들의 행렬에 끌어들인다. 무산자 여성은 용감히 노동의 가시밭길을 걸어나간다. 그의 다리는 지치고, 그의 몸은 찢어진다. 길을 따라 위험한 낭떠러지를 마주할 것이고, 곳곳에 맹수가 도사릴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을 걸어야만이 그 멀지만 황홀한 목표, 새로운 세상에서의 진정한 해방에 도달할 것이다. 밝은 미래로 나아가는 이 어려운 행진이 이어지는 동안, 모욕받고 탄압받으며 어떠한 권리도 지니지 못했던 무산자 여성은 그에게 달라붙어있던 노예적 사고를 버리는 법을 배우며, 한걸음씩 자주적인 노동자, 자주적인 인격, 사랑에 자유로운 이로 스스로 변화할 것이다. 무산계급의 행렬에서 싸우는 자, 여성이 일할 권리를 쟁취하는 자, 바로 그녀일 것이다. 그 “여동생”, 미래의 “자유롭고” “평등한” 여성을 위한 기반을 만드는 자, 바로 그녀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로 여성 노동자가 유산 계급 페미니스트와 손을 잡아야하는가? 실지로, 누가 그러한 동맹이 발생할 때 이득을 보겠는가? 여성 노동자는 분명히 아닐 것이다. 그의 구세주는 그 자신이다. 그의 미래는 그의 손에 달려있다. 노동자 여성은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지키며 “모든 여성이 함께하는 세계”를 말하는 위대한 연설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유산 계급 여성의 목표가 우리에게 적대적인 사회의 틀 안에서 그들의 안녕을 지키는 것임을, 우리의 목표가 낡고 뒤쳐진 세계 위에 보편적 노동과 동지적 연대, 환희의 자유의 성전(聖殿)을 짓는 것임을, 노동자 여성은 잊어서도 안되며 잊지도 않을 것이다.

Marriage and the Problem of the Family

The Struggle for Political Righ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