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주의의 제국주의의 제조건 아래서, 즉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점에 다다르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당면한 실천적 문제로 되었을 때, 노동계급이 혁명을 준비하던 구시대가 새로운 시대, 즉 자본주의에 대한 직접적 공격의 시대에 접어들었던 때에 성장하고 구체화되었다.
레닌은 제국주의를 “사멸해가는 자본주의”라 불렀다. 왜냐하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그 최후의 한계로까지, 혁명이 시작되는 극한까지 이끌어갔기 때문이다.
제1의 모순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모순이다. 제국주의는 산업 국가에서 독점적인 트러스트와 신디케이트, 은행과 금융과두제를 지닌 전지전능의 권력이다. 이 전지전능한 권력에 대한 투쟁에서 노동계급이 지닌 일상적 방식−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의회정당과 의회투쟁−으로는 아주 불충분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자본의 처분에 자신을 맡기고 예전과 마찬가지로 비참한 생활을 계속하면서 밑바닥으로 영락해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무기를 채택할 것인가−이것이 제국주의가 거대한 프롤레타리아트 대중 앞에 제기한 양자택일이다. 제국주의는 노동계급을 혁명으로 이끌어간다.
제2의 모순은 원료산지와 타국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금융세력들과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모순이다. 제국주의는 원료산지에 대한 자본의 수출이며, 원료산지의 독점적 소유를 위한 광적인 투쟁이자 이미 분할된 세계의 재분할을 위한 투쟁이며, 장악한 것을 완강히 고수하고 있는 구금융세력들과 열강에 대항하여 ‘태양이 뜨는 대지’를 노리는 신세력들과 열강에 의해 더욱 광폭하게 수행되는 투쟁이다. 자본가들의 여러 다양한 세력들 사이의 이러한 광폭한 투쟁은 제국주의 전쟁, 즉 타국의 영토를 강탈하기 위한 전쟁을 불가피한 요소로서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이러한 상황은 제국주의 상호간을 약화시키고 자본주의의 위치를 전반적으로 약화시키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도래를 가속화시키는 동시에 이 혁명이 실천적 필연성을 갖게 만든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제3의 모순은 한줌의 지배 ‘문명’ 민족과 수억에 달하는 세계의 식민지 및 종속국 인민 사이의 모순이다. 제국주의는 방대한 식민지 및 종속국에 살고 있는 수억의 인민에 대한 가장 파렴치한 착취이자 가장 비인간적인 압제이다. 이러한 착취와 입제의 목적은 초과이윤을 수탈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들 국가를 착취하면서 제국주의는 그곳에 철도와 공장, 제재소, 그리고 공업과 상업 중심지들을 건설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출현, 토착 인텔리겐챠의 등장, 민족의식의 각성, 해방운동의 성장−이러한 것들은 ‘정책’의 필연적 결과이다. 모든 식민지와 종속국에서 혁명운동의 성장은 예외 없이 이같은 사실을 분명히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식민지와 종속국들을 제국주의의 예비군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예비군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약화시키므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것이 낡고 "번영하는" 자본주의를 죽어가는 자본주의로 전환시킨 제국주의의 주요 모순이다.
10년 전에 발발했던 제국주의전쟁의 의의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 전쟁이 모든 모순을 한 덩어리로 모아 그것을 저울 위에 내던졌으며 그럼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투를 가속화하고 촉진시켰다는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해서, 제국주의는 혁명이 실천적 필연성을 갖게 하는데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요새에 대한 직접적 공격을 위해 호조건을 창출하는 데 유효한 수단이었다.
이것이 레닌주의를 탄생시켰던 국제적 상황이었다.
많은 나라 가운데 왜 러시아가 레닌주의의 모국이 되었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과 전술의 탄생지가 되었는가?
왜냐하면 러시아는 제국주의가 갖는 이 모든 모순들의 집합점이었으며,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혁명을 잉태했고, 따라서 러시아만이 이러한 모순을 혁명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차르 러시아는 가장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형태로 가해지던 모든 종류의 억압(자본주의적⋅식민지적⋅군국주의적)의 본고장이었다. 러시아에서 자본이 가진 전지전능한 권력은 차리즘의 전제와 결합되었고, 러시아 민족주의의 공격성은 비러시아계 인민에 대한 사형집행자로서 차리즘의 역할과 결합되었고, 또 취약한 지역들−터키⋅페르시아⋅중국에 대한 착취는 차리즘에 의한 이들 지역의 강탈이나 정복전쟁과 결합되었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는가? 레닌이 차리즘을 “군사적-봉건적 제국주의”였다고 말한 것은 정당했다. 차리즘은 제국주의의 가장 사악한 특징의 집약이었으며 그것을 고도로 끌어올렸다.
나아가, 차르 러시아는, 연료와 야금산업과 같은 러시아 민족경제의 기본분야를 지배하고 있었던 그런 외국자본의 자유로운 참여를 허용했다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수백만의 군인들을 제공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도 서구 제국주의의 중요한 예비군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자본가들의 엄청난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제국주의전선에서 피를 흘렸던 1,400만의 러시아군대를 기억해 보라.
더 나아가, 차리즘은 유럽 동부에서 제국주의의 파수견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파리와 런던⋅베를린과 브뤼셀에서 제공된 차관에 대한 이자를 수억의 주민들에게서 갈취하려는 서구 제국주의의 대리인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차리즘은 터키⋅페르시아⋅중국 등을 분할할 때 서구 제국주의의 가장 충실한 동맹자였다.
이것이 바로 짜르주의와 서구 제국주의의 이해관계가 서로 얽혀 궁극적으로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라는 단일한 타래로 합쳐진 이유이다.
서구 제국주의가 차리즘을 방어하고 유지하기 위해 러시아에서의 혁명에 대해 생사의 투쟁을 벌이는 데 전력을 다하지 않고서, 낡고 전제적이며 부르주아적인 러시아라는 동방의 강력한 예비대와 인력 및 자원의 풍부한 저장고의 손실을 체념할 수 있었을까? 물론 아니다.
그러나 방금 말한 것으로부터, 차리즘을 공격하고자 했던 누구라도 반드시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손을 치켜들었고, 차리즘에 대항하여 일어섰던 그 누구라도 동시에 제국주의에 반항하여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차리즘을 타도하는 데 전념했던 누구든지 간에 만약 그가 진정으로 차리즘을 패퇴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완전히 일소하려고 했다면, 제국주의 역시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리즘에 대한 혁명은 제국주의에 대한 혁명,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에 가까웠으며 그것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편으로, 러시아에서 거대한 인민혁명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지도되었으며, 그들은 러시아의 혁명적 농민층과 같은 중요한 동맹군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혁명이 중도에 멈춰질 수 없었다는 것, 그것이 성공했을 때 더욱 더 나아가야 했으며 제국주의에 대항해 반기를 들어야 했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는가?
요컨대 이들 모순이 특히 역겨워 견디기 어려운 특징으로 인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곳이 바로 러시아였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또 러시아가 서구 금융자본을 동방의 식민지들과 연결시켜주는 서구 제국주의의 매우 중요한 후원자였기 때문일 뿐 아니라, 러시아가 제국주의의 모순을 혁명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 세력이 실재했던 유일한 국가였다는 이유에서도 러시아는 제국주의의 모순의 집합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러시아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 시초부터 그것은 국제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 그러므로 그것은 세계 제국주의의 바로 그 기초를 흔들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도출된다.
그러한 상황 아래서,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활동을 러시아혁명이라는 좁은 민족적 테두리 안에 가둬둘 수 있었겠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반대로, 국내적이고(심각한 혁명적 위기) 국외적인(전쟁) 상황 전체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활동에서 이러한 테두리를 뛰어넘게 만들었고, 투쟁을 국제적 영역으로 이전하게 만들었으며, 제국주의의 병폐를 폭로하고 자본주의의 붕괴가 필연적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사회배외주의와 사회평화주의를 타파하고, 마침내 그들 자신이 그 나라에서 자본주의를 타파케 만들었으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본주의 타도의 과업을 용이하게 해주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투쟁무기(프롤레타리아트의 이론과 전술)를 만들어내도록 하였다.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은 결코 달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오직 이 길만이 부르주아적 질서의 부활로부터 러시아를 수호할 수 있는 국제적 상황의 확실한 변화를 가져올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러시아는 레닌주의의 모국이 되었으며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 레닌은 그것의 창시자가 되었다.
지난 세기의 40년대 독일, 마르크스, 엥겔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와 레닌의 경우에도 대략 동일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독일은 20세기 초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혁명을 잉태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당시 공산주의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공산주의자들은 주로 독일에 관심을 돌린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영국보다 훨씬 더 발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유럽 문명의 더 발전된 조건 하에서 수행될 부르주아 혁명의 직전에 있기 때문이다. 17세기, 18세기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부르주아 혁명은 바로 뒤따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서막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의 러시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러시아는 부르주아 혁명 직전이었다. 그녀는 유럽의 상황이 더 발전된 시기에, 그리고 1940년대 독일(영국과 프랑스는 물론이고)보다 더 발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이 혁명을 완수해야 했다. 더욱이 모든 증거는 이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조이자 발효물이 될 것임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혁명이 아직 초기 단계에 있던 1902년 초에 레닌이 자신의 팜플렛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예언적인 말을 쓴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
"역사는 이제 모든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모든 당면 과제 중 가장 혁명적인 당면 과제로 우리(즉,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 -- 필자의 주)에게 직면했다." ,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 반동의 가장 강력한 보루가 파괴되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국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가 될 것이다."(Vol. IV, p. 382 참조) ."
즉 혁명운동의 중심이 러시아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러시아 혁명의 과정은 레닌의 예측이 입증된 것 이상이다.
결국 그러한 혁명을 성취하고 그러한 프롤레타리아트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과 전술의 발상지였다는 것이 놀라운 일인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 레닌이 이 이론과 전술의 창시자이자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