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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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4월 14일 (목) 19:31 판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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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영어: Liberal democracy, 自由民主主義)는 자유주의와 대의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가 혼재된 통치 형태를 말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Bourgeois democracy)라고도 불린다.

개요

자유민주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대립 산물로, 19세기 말을 기점으로 고전적 자유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의 수많은 주장이 혼재된 양상의 결과물이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에서 구체적으로 밝힌 바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18-19세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대립된 양상을 보였다.

자유주의자들은 이성적 존재를 자산계급에 한정하였고, 따라서, 자연법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존재를 자산계급에 한정하였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유는 자연을 소유한 인격체에게 존재할 수 있으며, 이성 역시 자연을 소유하고 그것을 능동적으로 다루는 한에서 존재할 수 있다. 반면, 자연을 소유하고 있지 못 한 계급계층은 이성이 존재할 수 없거나, 상대적으로 불충분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이성적 인격체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자유주의자들이 참정권 논쟁에서 형식적으로는 평등권을 부르짖더라도, 자산계급의 정치 참여만을 주장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와는 반대로, 민주주의자들은 자연권의 부여에서 자산 여부를 따지지 않아야 함을 내세웠으며, 소수의 대부르주아의 지배가 아닌, 모든 민중의 직접 통치, 즉 직접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급진적 민주주의자인 장자크 루소에 의해 제기된 바 있으며, 프랑스의 급진적 지식인들, 특히 반교권적 성향을 갖는 무신론자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두 경향의 대립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어졌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 민주주의 섹트 중 좌익에 속한 몽테뉴파는 자유주의 섹트에 속하는 지롱드파를 억압하고, 참정권의 전민적 확대(여성은 제외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인해 급진적 민주주의 그룹은 몰락하였고, 자유주의 섹트 중 가장 온건적인 분파가 정국 주도권을 잡게 된다.

자유주의 그룹과 급진적 민주주의 그룹 간 대립은 독일에서도 이어졌다. 카를 마르크스 역시 1843년 이전까지는 혁명적 민주주의 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는, 당시 청년 헤겔 학파에 속해 있었으며, 프로이센 입헌군주제의 확립을 인륜성의 실현으로서 국가의 생성이라 보았던 헤겔의 관점을 비판하였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 외, 1850년 3월, 6월에 각각 보낸 ≪공산주의자 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의 호소문≫에도 자유주의와 혁명적 민주주의 그룹 간 대립에 대해 상세히 서술해놓았다. 당대 마르크스의 시각에 따르면, 혁명적 민주주의 그룹은 소부르주아 좌익에 의해 좌우되는 그룹, 그리고 소부르주아 일반의 그룹으로서 민주주의 그룹, 대부르주아는 자유주의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당대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역량이 충분하지 못 하다는 것을 절감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가 급진적 민주주의 그룹과 연합하여 봉건세력에 대항하고, 소부르주아가 반(反)프롤레타리아 기세에 돌입할 경우에는 급진적 민주주의 그룹 내에서 소부르주아에 반대하는 투쟁에 떨쳐나서야 한다고 언급하였다.[1]

자본주의 발전에 상응하여 자본-임노동 관계가 발달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역량이 강화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당파성과 부르주아 당파성 간 투쟁이 격화되자, 대부르주아 자유주의(즉, 고전적 자유주의)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간 대립은 크게 소멸하였고, 두 경향은 혼재된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 생성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각주

  1. K. 마르크스·F. 엥겔스, 한철 편역 (1989), ≪당에 대하여 I≫, 이성과현실, pp. 185-187, 199-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