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거칠게나마 할 수 있는 데까지 가치, 모든 상품 가치의 성격을 분석했으므로 이제 우리는 특수한 노동의 가치로 주의를 돌려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나는 다시금 얼핏 보면 역설처럼 여겨지는 것으로 여러분을 놀라게 할 수밖에 없다. 여러분은 모두 사람들이 날마다 파는 것은 자기의 노동이라는 것, 따라서 노동은 가격을 가진다는 것, 상품의 가격은 단지 그 가치를 화폐로 표현한 것일 뿐이므로 노동의 가치라는 어떤 것이 틀림없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고 있다. 하지만 통상적인 의미에서 노동의 가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 상품에 결정화해 있는 필요 노동량이 그 상품의 가치를 이룬다는 것을 보았다. 이제 이 가치 개념을 적용한다면 어떻게 우리는, 예컨대 10시간 노동일의 가치를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노동일에는 얼마 만큼의 노동이 포한되어 있는가? 10시간의 노동이다. 10시간 노동일의 가치가 10시간의 노동 또는 그 노동일에 포함된 노동량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동어 반복일 것이며 나아가 무의미한 표현일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일단 '노동의 가치'라는 표현의 참된, 그러나 숨겨진 의미를 찾아낸다면, 우리는 이 불합리하며 얼핏 불가능해 보이는 가치 적용의 의미를 해석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일단 천체의 실제 운동을 알게 되면 그 외관상의, 또는 단지 현상적인 운동을 설명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동자가 파는 것은 그의 노동 자체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그 처분을 자본가에게 맡기는 그의 노동력인 것이다. 영국의 법률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일부 대륙의 법률에서는 노동력 판매에 허용되는 최대한의 시간이 확실히 정해져 있는 것을 보아도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만약 노동력을 한정 없이 파는 것이 허용된다면 노예제가 곧바로 되살아 날 것이다. 또 만약 그것이 예컨대 노동자의 일생에 걸쳐 팔린다면, 노동자는 곧 그 고용주의 종신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영국의 가장 오랜 경제학자이자 가장 독창적인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토마스 홉스는 일찍이 그의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그의 모든 계승자들이 간과한 이 점을 본능적으로 간파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인간의 가치 또는 값어치는 다른 모든 물건에서와 같이 그의 가격이다. 즉 그가 힘을 사용하는 데 대해 주어지는 것만큼의 값인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노동의 가치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시장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토지·기계·원료·생활 수단 등, 미개간지를 제외한다면 모두가 노동 생산물인 물건들을 소유하고 있는 구매자 집단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노동력, 즉 일하는 파과 두뇌 외에는 아무것도 팔 것이 없는 판매자 집단이 존재하는 이 기이한 현상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어떻게 해서 전자의 집단은 이윤을 남겨 돈을 벌려고 늘 사는 반면, 후자의 집단은 생계를 위해 늘 팔게 되느가? 이 질문에 대한 연구는 경제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선행적 또는 본원적 축적', 그러나 실은 본원적 착취라고 해야 할 것에 대한 연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른바 본원적 축적이라는 것이 노동하는 인간과 그의 노동 도구 사이에 존재하는 본원적 통일의 해체로 귀결된 일련의 역사적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연구는 내 당면 주제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노동하는 인간과 노동 도구의 분리가 일단 확립되면, 그러한 사태는 계속 유지되며 나아가 끊임없이 규모를 키우면서 재생산될 것이다. 그리하여 생산 양식에서는 새롭고도 근본적인 혁명이 그것을 다시금 뒤집고 원래의 통일을 새로운 역사적 형태로 되살려 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력의 가치란 무엇인가?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가치도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 한 사람의 노동력은 오직 그의 살아 있는 개체 속에서만 존재한다. 한 사람이 성장하고 삶을 유지하려면 일정량의 생활 필수품이 소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도 기계와 마찬가지로 마모되며,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어야 한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양의 생활 필수품 외에도 노동 시장에서 자기를 대체하고 노동자의 대를 잇게 될 일정한 수의 자녀를 양육하는 데 또 다른 양의 생활 필수품이 필요하다. 더구나 그의 노동력을 개발하고 어떤 기술을 습득하는 데도 또 다른 양의 가치가 지출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그 교육비와 개발비가 얼마 되지 않아 평균 노동만을 고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서로 다른 질을 가진 노동력을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이 각기 다르듯이 서로 다른 직종에서 고용되는 노동력의 가치도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해 두어야겠다. 그러므로 균등한 임금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결쿠 이루어질 수 없는 어리석은 바람이다. 그것은 전제는 받아들이면서도 그 결론은 회피하려는 그릇되고 피상적인 급진주의의 산물이다. 임금 제도를 토대로 하는 한,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같은 방식으로 결정된다. 즉 이 노동력을 생산하는 데는 서로 다른 노동량이 필요하므로 노동 시장에서도 노동력은 서로 다른 가격으로 팔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임금 제도라는 토대에서 같은 또는 심지어 공정한 보상을 요구한다는 것은 노예 제도라는 토대에서 자유를 요구하는 것과 똑같다. 여러분이 무엇을 정당하거나 공정한 것으로 생각하는가는 논외의 문제다. 문제는 이렇다. 주어진 생산 제도에서는 무엇이 필연적이며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지금까지 언급한 바에 따르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을 생산·발전·유지·영속화하는 데 필요한 생활 필수품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