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하
개요
대한민국의 제 10대 대통령,외교관, 정치인이다.
생애
초기 생애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한학을 수료했고 1928년 10세 때부터 원주보통학교에 월반 입학하여 근대교육을 받았다. 이후 엘리트 코스를 타서 경성제1공립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기고)를 졸업하고,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후에 만주 국립대동학원 정치행정반에 입학, 1943년 수료하였다. 그 후 만주국 관리로 재직하였다. 때문에 친일 논란이 있지만, 민족문제연구소에선 일단 친일파로 분류하지는 않았다.
공직 생활
1945년 경성사범대학 영문과 조교수에 취임하여 재직 중에 미군정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어 공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처음엔 농림행정직을 맡았으나 영어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당시 외무부장관 변영태에 의해 발탁되어 1951년부터는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부터 1959년 외무부차관이 될 때까지 주일한국대표부에서 근무하면서 한일회담 대표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외무부차관 재직 중 박정희의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사임하였다. 최규하는 자유당 내각의 관료였기 때문에 잠시 은퇴당할 위기를 맞았으나, 김종필의 공화당 사전조직에 가담하게 되면서 공직에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967년 외무부장관이 되었고 1976년 국무총리가 되어 박정희가 10.26 사건으로 살해당할 때까지 국무총리로 재직하게 된다.
실권 없는 대통령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처단당하자,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정권을 인수하여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박정희의 처단으로 그해 11월부터는 시민운동가와 학생들에 의해 민주화 요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지만, 정치감각이 없는 관료타입인 최규하는 이를 무시하고 유신헌법에 따라 체육관 선거를 통해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취임식을 하기도 전에 이미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은 사실상 전두환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결국 대통령 재임 8개월간 전두환의 꼭두각시 노릇만 하다가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을 사임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에는 국정자문회의 의장 등 명예직을 맡았고 제도적 민주화 달성 이후에도 조용히 지낸 편이다. 문제는 너무 조용히 지낸 나머지 5공 청문회 때도 아무 증언도 하지 않았고 당시 상황에 대한 어떠한 증언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그 이유를 '전직 대통령이 증언에 응하는 악례를 남기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묵언수행을 하다가 2006년 10월 22일 사망하였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평가
관료로써는 준수한 능력을 갖추고 청렴한 괜찮은 외교관이었지만, 절대 정치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종류의 인물이었다. 박정희의 처단으로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에서 최규하는 구체제 유지와 안정에만 관심을 두어 전두환의 군사반란이 성공할 토양을 제공하였고,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등에서 보인 행보와 같이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였다. 전두환에게 실권을 모두 빼앗긴 후로는 방관자가 되어 대통령 재직 중 5.18 민주화 운동 같은 사건에서 사실상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절차적 민주화 달성 이후 최규하의 증언거부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행동이었다. 최규하는 당시 명목상이나마 국가의 총책임자였고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물 중 하나였는데, 군사정권과 그 관련자들의 죄과를 밝혀야 할 시점에서 '전직 대통령이 증언에 응하는 악례를 남기지 않겠다'다며 모든 인터뷰, 증언, 면담을 거절한 것은 사실상 침묵으로써 역사의 평가를 회피하려 한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