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개요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 군인.
박정희가 양성한 정치군인 출신으로 박정희가 10.26 사태로 처단된 이후에는 박정희를 암살한 범인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군부 내의 반대파와 정적들을 때려잡았다. 이후에는 10.26 사건과는 자신의 정적인 정승화를 숙청하고 최규하 정권을 무너트렸다. 그리고 그 후에 있었던 서울의 봄을 진압하고 광주민주화운동에서는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였으며 이후 독재를 하였다.
생애
생애초반
12.12 군사정변
5.17 내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대통령이 된 이후
수많은 간첩사건들을 조작하고 민주화 인사들을 간첩과 내란범으로 체포하고 김대중과 김영삼을 같이 엮어놓은 간첩사건을 구축하기까지 했다. 공안정국이던 이 당시에는 전두환을 비판하기만 해도 남산으로 끌고 가 온갖 종류의 고문을 행했다.
신자유주의의 도입
조지 카치아피카스 미국 웬트워스공대 교수가 23일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주최 국제학술대회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한국의 신자유주의 체제는 이미 1980년부터 시작됐다. 미국은 그 해 5월, 전두환 군사정부의 광주 무력 진압을 승인한 대가로 시장 개방을 끌어냈고 미국식 신자유주의 체제를 한국에 이식시키는데 성공했다. 전두환은 광주민중항쟁 직후 미국 기업 관계자들을 만나 원자력발전소와 서울지하철공사 등의 알짜배기 사업을 넘겨주기로 약속하기도 했다."라고 밝혔다.
또한 "미국이 전두환을 지지한 것은 박정희가 추진해 왔던 중앙집권식 발전 모델을 종식시키고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을 강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히며, "3600페이지에 이르는 미국 의회 속기록과 정부 문서 등을 확인한 결과 미국은 철처히 자국의 이해에 따라 전두환 군부의 광주 무력 진압을 승인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강조했다.
미국 백악관은 5월22일 긴급 회의를 열고 무력 진압을 허락해 달라는 한국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존 무어 미국 수출입은행장을 한국에 보내 원자력발전소와 서울지하철공사 사업 등을 미국이 수주할 수 있도록 요청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윌리엄 글레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는 이에 앞서 백악관에 보낸 편지에서 "한국은 13번째 무역 상대국"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안보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 경제적 상업적 속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또 "미국이 한국의 안보를 위임받는 것은 미국의 외교 정책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레이스틴은 광주에서 무력 진압이 끝난 뒤인 5월30일, 미국 상공회의소에서 펴내는 잡지, '내셔널비즈니스'에 기고한 글에서 "이 나라의 경제 성장에 다음 중요한 단계는 강력한 중앙 집권을 넘어 시장의 힘을 신뢰하는 경제 자유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은 대외적으로는 북한의 위협과 내부 혼란을 무력 진압의 명분으로 삼았지만 공개된 문서들은 미국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북한에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않았음을 증명해준다. 공식 문서에는 "두 번째 이란을 막아야 한다"거나 "한국이 또 다른 베트남이 될 수 있다"는 등의 표현이 눈에 띄지만 내부 문건에는 "북한이 미국에 관계 개선을 희망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등 전쟁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음을 확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전두환에게 사업하기에 좋은 안정적인 환경을 구축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투자자들의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전두환은 6월13일 주한 미국 상공회의소 회원들을 초청해 만찬을 베풀기도 했다. 이 자리에는 뱅크오브아메리카와 3M, 다우케미컬, 걸프오일 등의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독재를 인정받는 대가로 미국 정부와 기업들의 이해를 전폭적으로 수용했다는 이야기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전두환은 미국 비즈니스에 우호적인 인사들을 적극 기용했는데 이들이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주도했다"고 설명했다. 1983년 전두환 정부는 외국인 투자 유치법을 개정하고 자본의 대외 유출을 금지하는 모든 제약을 폐지했다. 1977~1981년 사이 한국의 외국인 투자는 5억달러가 조금 넘는 정도였는데 1985년까지 해마다 두배 이상 뛰어올랐다. 대외 부채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1980년 272억달러에서 1985년에는 468억달러까지 늘어났다. 한국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멕시코에 이어 세계 최대의 부채국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