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
개요
호치민(Hồ Chí Minh, 1890~1969)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 지도자다.
1890년 베트남 응에안 성 낌리엔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시절 베트남을 떠나 프랑스 식민주의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1930년에 현재의 베트남 공산당(당시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했다. 일본이 침략했던 시점에는 베트민을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1945년 베트남민주공화국을 건국했다. 이후 프랑스가 침략하자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독립투쟁을 전개했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100년간 지속되는 프랑스 식민지 지배를 종결시켰다. 프랑스가 물러간 이후 미국이 침략하자, 침략자 미국에 맞서 싸웠으며 베트남 민중이 제국주의에 맞서 단결하도록 큰 역할을 했다.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호치민의 위업을 받들어 제국주의의 침략을 무찌르고 통일을 이룩했다.
독립운동을 하며 사용한 가명도 최소 70개 이상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현재까지도 베트남에서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생애
초기 생애
호치민은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 지배 하던 1890년 5월 19일 베트남 응에안 성의 낌리엔 마을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가난한 유학자였고 어머니는 서당 훈장의 딸이었다. 아버지 응우옌 신 삭과 어머니 호앙 티 로앙 사이의 셋째 아들이 응우옌신꿍이었고, 그가 바로 호치민인다.[2] 호치민이 10살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응우옌 탓 탄(응우옌 탓 타인이라고도 표기한다.)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준다. 이 시기 호치민은 아버지와 함께 고전 공부를 계속했지만, 그의 아버지 친구가 가르치는 지역 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 시기 호치민은 <삼국지>나 <서유기>같은 책들을 읽은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 시절 호는 중국의 한자와 유교를 공부하였지만 새로운 문물을 알기위해 17세가 되던 1907년 베트남 도시 후에에 있는 프랑스식 국립학교인 국학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으며,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호치민은 반프랑스 시위에 참가했다. 결국 호치민은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 때문에 국학에서 퇴학당했으며, 이후 베트남을 돌아다녔다. 당시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인 판보이쩌우가 만든 학교에서 잠시나마 교사로 활동했었으며, 학생들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매우 인기 있는 교사였다고 한다.[3] 1911년 6월 호치민은 사이공에서 프랑스의 기선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를 타고 베트남을 떠났다. 이렇게 해서 30년간의 긴 해외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젊은 시절 해외생활과 항불 독립운동
1911년 호치민은 사이공에 있던 프랑스의 기선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해외를 돌아다니는 프랑스 선박이었다.)에 주방보조로 취직하여 약 2년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 등을 여행했다.[4]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에 따르면, 프랑스 기선에서의 생활은 식민지 체제의 악랄함을 깨닫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호치민은 다카르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데도 프랑스인들의 명령에 따라 배까지 해엄쳐 가던 아프리카인 몇 명이 죽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5] 당시 프랑스 제국주의의 실상을 본 호치민은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다.
“ | 프랑스의 프랑스인들은 선량하다. 그러나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아주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다.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이다. 고향에서는 판 링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프랑스인들은 우리 동포들이 그들을 위해 일하다가 익사하는 것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식민주의자들에게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인의 목숨은 한푼의 가치도 없다. | “ |
- 호치민 평전 p.96~97 |
그 시기 호치민은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에 있는 호텔 ‘옴니 파커 하우스(Omni Parker House)’에서 요리사로 일했고, 노동자로도 일하며 흑인인권운동에도 관여했다. 1914년 영국에서는 청소부 요리사 보조 등 온갖 일을 하며 노동조합 활동에 관여했다. 당시 호치민은 흑인인권운동을 전개했던 마커스 가비에 대해 알게됐으며, 미국의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KKK가 벌이는 린치 행위도 직접 목격했다. 버나드 폴이 정리한 <호찌민 베트남 혁명론>을 보면, 당시 그가 KKK와 그들이 벌이는 잔인무도한 린치에 대해 비판한 글이 나오는데, 아무래도 직접 목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6]
1917년 호치민은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베트남 노동자들을 선동하는 작업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1919년 1차 대전 이후 열렸던 파리강화회의를 염두에 두었던 호치민은 안남애국자연합을 결성한 뒤 ‘안남 민족의 요구’를 그해 6월 베르사유 회의에서 응으옌 아이 꾸옥이란 가명으로 발표하였으나 프랑스를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안남 민족의 요구’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시기 프랑스 파리에서 김규식과 조소앙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도 교류한 것이 2018년에 확인됐다.[7] 우드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감명 받았던 호치민은 서구 제국주의의 위선에 배신감을 느꼈으며, 이러한 그의 경험은 1917년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의 러시아 혁명과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됐다.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이 집필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에는 그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 | 호찌민은 서양식 턱시도와 중산모를 빌려 착용한 채 베트남 독립 청원서를 가지고 회의장으로 윌슨과 미국 대표단을 찾아갔다. 파리평화회의에 참가한 대부분의 비서구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호찌민도 해방은 식민통치세력의 선심이 아니라 무장투쟁을 통해 얻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 “ |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88 |
1920년 호치민은 본격적으로 좌파운동에 참가했으며, 처음에는 프랑스 사회당에 있다가 프랑스 공산당 창당에 기여했으며, 공산당원으로 활동했었다. 1920년 여름 레닌이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 제출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에 감명 받았다고 한다.[8] 1922년 호치민은 <르 파리아>를 창간하고 편집인으로써 활동했다. 르 파리아의 신문사는 주로 프랑스의 식민정책을 비판하고 특히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비판했다. 이런 신문이었기에 프랑스 당국은 이 신문사를 탄압했고, 호치민을 체포하려 했었다. 그 외에도 호치민은 파리에서 발행되는 다른 좌파 신문이나 정기간행물에도 꾸준히 글을 썼다.
1923년 6월 호치민은 프랑스에서 도망처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탈출하면서 체포는 면했다. 그 대신 그가 이끌던 르 파리아는 해체되고 만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호치민은 코민테른 극동국에서 근무하였고, 그해 12월 호치민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다. 베트남 혁명사와 베트남 전쟁을 연구한 미국의 반공주의 성향의 역사학자 더글라스 파이크는 호치민이 트로츠키, 부하린, 지노비에프, 라데크, 디미트로프, 보로딘, 바실리 블루헤르, 저우언라이, 로이, 센 카타야마, 마르셀 까신, 마리우스 무떼, 레옹 블룸 등과 친교가 있었지만, 레닌과의 친교는 없었다고 저서에서 주장했다.[9] 이는 사실이며, 실제로 호치민은 레닌이 죽기 전까지 레닌을 만난 적이 없었다. 다만 듀이커에 따르면 1924년 소련에서 열린 국제적인 여성 대회에 참석하여, 레닌의 미망인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었다.[10] 찰스 펜에 따르면 호치민은 1924년 여름 제5회 국제 공산당회의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식민지 문제를 등한시한 프랑스 공산당을 비판하기도 했었다고 한다.[11]
호치민은 1924년까지 모스크바에서 머물렀으며, 1925년에 중국의 광저우로 갔다. 1925년 호치민은 베트남 혁명 청년회를 결성하고 광저우에 세워진 혁명 단체에서 교사로 활동했으며, 호치민은 교사로 활동하면서 1926년 베트남 혁명 교과서인 <혁명의 길>을 집필하고, <시험대에 오른 프랑스 식민주의>를 출간했다. 이 과정 속에서 호치민은 독립운동 세력들을 규합했고, 공산당 결성파와 안남 공산당 그리고 신월혁명당 쪽이 가세한 인도차이나공산주의 연맹을 규합하여 1930년 2월 영국령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다. 베트남 공산당이 창당되던 1930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베트남 국민당이 주도한 봉기가 통킹과 안남 일대에서 일어났다. 시작은 베트남 국민당이 주도했지만, 베트남 공산당(당명을 나중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바꿈) 인사들도 참여 했다. 응에안 하틴 성 소비에트 봉기로 대표되는 이들의 투쟁은 초기 적잖은 성과를 달성했다. 이들은 봉기를 통한 집권 몇달 동안 과하게 부과된 정부의 세금을 철폐하고, 노동 시간을 단축했으며, 지주로 부터 몰수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했고, 문맹퇴치운동도 전개했으며, 따라서 단기간 동안 정의를 실현했다.[12]
그러나 프랑스는 군대와 전투기를 동원하여 이를 야만적으로 진압했다. 1930년 9월부터 응에안 성 소비에트 운동은 프랑스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직면했는데, 프랑스의 외인부대는 기관총과 전투기를 동원하여 농민시위대에게 난사와 기총소사를 했으며, 이러한 진압은 1931년 여름에 진압됐다. 이 과정에서 최소 9,000~10,000명이 체포되고, 수천 명이 프랑스에 의해 사망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베트남 공산당의 별 쩐 푸(Tran Phu)가 체포됐다.[13] 말미암아 봉기는 실패로 끝났으며, 프랑스는 베트남 독립투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그러던 1931년 6월 호치민은 홍콩에서 체포되었으나, 영국 공산당원의 도움으로 1년 뒤 석방됐다. 1934년 호치민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레닌대학에 입학했고, 1935년에는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 참가했으며, 스탈린 대학교에서 교사로도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레닌의 <좌익 소아병>을 베트남어로 번역했다. 1938년 호치민은 모스크바를 떠나 중국으로 들어갔고, 중국 구이린성에 있는 팔로군 본부에서 보건담당 간부로도 일했다.[14]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아시아를 위협했다. 호치민 또한 베트남 독립을 위해 귀국할 준비를 하게 된다.
베트남으로의 귀국과 항불 항일투쟁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40년 6월 나치 독일은 마지노선을 돌파하여 프랑스를 점령했고, 영국까지 위협했다. 당시 나치의 동맹세력이던 일본은 동남아시아에 있는 프랑스령 식민지가 무주공산이 되자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공했고, 베트남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됐다. 호치민은 초기부터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고자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호치민은 대중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었다.[15]
“ | 모든 애국자, 농부, 노동자, 상인, 군인들이여! 단결하여 프랑스와 일본 제국주의자들 그리고 그 협력자들을 물리칠 때가 왔습니다. | “ |
- PBS Vietnam War 2017 |
1941년 호치민은 베트남을 떠난 지, 30년만에 귀국하여 중월국경지대인 까오방 지역에서 베트남 독립을 위한 실질적인 조직 창설작업에 들어갔으며, 팍 보(Pac Bo)'라고 불린 동굴에서 호치민은 베트남독립동맹회(Việt Nam Độc Lập Đồng Minh Hội) 즉 베트민(Viet Minh)을 창설했고, 베트민 안에 독립군을 만들어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싸우고자 했다. 송필경씨가 쓴 <왜 호찌민인가>에 따르면 이때부터 항전에 대비해서 간부를 양성하고 훈련시켰으며, <소련 공산당사>와 <손자병법>을 철저히 공부하고 레닌 개울 옆 천연석 탁자에서 <게릴라 전술>, <중국에서 전개한 게릴라전의 경험>같은 논문을 썼다고 한다.[16]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자 호치민은 1942년 중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스파이로 오인하여 중국 경찰에게 체포당했다. 감옥생활을 하면서 <옥중일기>를 집필했으며, 이것은 나중에 시집으로 발간되기도 했다. 오인으로 인한 체포였기에 1943년 9월에 석방됐다.
미국과 접촉하고자 했던 호치민의 바람은 1944년 11월 베트민 대원이 미군 조종사 루돌프 쇼 중위를 구출해주면서 이어졌다. 미군 조종사를 구출해준 계기로 호치민이 이끌던 베트민은 미군 OSS에서 훈련을 받기도 했다. 미국의 OSS는 베트민 병력 중 최소 200명 이상을 최정예 부대로 훈련시켰다. 보 응우옌 잡이 이끄는 베트민 부대는 미군의 무기로 무장한 뒤, OSS와 협력하여 몇개의 일본군 외곽 초소를 공격했으며,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와중에 미국 OSS와 베트민이 치렀던 대일전이었다.[17] 더글라스 파이크에 따르면 베트민군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만한 전투에 참가한 것은 단 한번인데, 1945년 5월 찬수로 전투에서 최소 60명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18]
1945년이 되면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잔인한 공출과 착취로 인해 대기근이 발생하여 100~200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이 아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베트민은 일본군의 창고와 기지를 습격하여 농민들에게 쌀을 나눠줬으며, 이 덕분에 베트민은 대중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켄 번즈가 만든 'PBS 베트남 전쟁'에 따르면, 당시 대다수 베트남 민중들에게 베트민은 구원자로 인식되었으며, 그 이유는 일본군의 창고를 습격하여 그 쌀을 농민들에게 나눠줬기 때문이었다.[19] 1945년 7월 16일에는 앨리슨 토머스 소령이 이끄는 50명의 OSS 게릴라 부대가 낙하산으로 투하되어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게릴라 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자동소총, 기관총,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지압장군의 게릴라 부대가 몇 개의 일본군 외곽 초소를 공격했고, OSS의 ‘사슴팀’은 베트민과 계속 공동 작전을 펼치면서 관활 지배 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당시 OSS 대원으로 중국 운남성에서 호치민을 집적 만났던 아르키메데스 패티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 | 호치민은 무례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베트남 독립을 최우선 당면 과제로 삼고 싸우는 민족주의자일 뿐이다. | “ |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29 |
베트남의 독립 선언
1945년 8월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군이 만주에서 진격을 시작하자 호치민은 베트남 전역에서 총 봉기를 준비했었다. 1945년 8월 12일 총봉기를 결정한 호치민의 부름에 따라 베트민은 봉기를 준비했고, 천황 항복 다음날인 8월 16일에 혁명을 시작했다. 이 봉기를 이른바 8월 혁명(August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이 혁명은 베트남 북부와 중부 남부에서 신속히 진행됐다. 북부에서는 하노이. 중부에서는 후에, 남부에서는 사이공에서 베트민이 주도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 봉기에 전국적으로 총 100만 명 이상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8월 19일 하노이 봉기에서만 총 10만 명이 봉기에 참여하여 일본군 철수와 프랑스 식민 통치 종결 그리고 바오다이 황제 폐위를 요구했다. 이 8월 혁명에 대해 베트남의 역사학자 응우옌 칵 비언(Nguyễn Khắc Viện)은 “1945년 당시 8월 혁명은 80년간의 프랑스 식민통치를 종결시켰고, 군주제를 폐지시켰으며, 베트남을 독립국가로 재건했다.”고 <베트남 오래된 역사, Vietnam A Long History>에서 주장했다. [20]
8월 봉기를 게시하며 호치민은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 |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우리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 우리 온 힘을 모아 일어서자!
전 세계 수많은 피압박 민족들이 독립을 얻기 위해 다투어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만 뒤처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전진! 전진! 베트민전선 깃발 아래 용감하게 전진합시다! |
“ |
- 호치민 평전 p.457 |
봉기는 성공적이었다. 1971년 베트남 전쟁 당시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전 세계에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The Pentagon Papers)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 호치민은 이미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베트남 전체 차원의 유일한 정치조직으로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호치민은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베트남의 유일한 전시 지도자였으며, 1945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일본을 타도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창설하고, 진주하는 연합군을 위해 환영식을 개최하면서 베트남 국민들 사이에서 널리 충성을 얻고 있음을 확인시켜 줬다. 1945년 9월의 몇 주 동안, 베트남은 근대사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호치민의 지도하에 남에서 북까지 통일됐다. | “ |
- The Pentagon Papers |
8월 혁명을 통해 베트남에서 해방정국을 주도한 베트민은 9월 2일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켰다. 그 나라가 바로 베트남민주공화국(Việt Nam Dân Chủ Cộng Hòa, 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이었다. 1945년 9월 2일 이미 베트남 전역은 베트민이 만든 붉은 깃발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는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베트민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호치민은 미국 자동차를 타고 하노이 바딘광장으로 향했으며, 도착하여 자신이 준비한 베트남 독립 선언(Declaration of Vietnam Independence)을 낭독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 |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태어났다. 창조주에게 절대적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그중에는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권이 있다. 1776년 미합중국 독립선언문에 둥장했던 불멸의 문구입니다. 더 넓게 해석한다면, 모든 민족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며, 살 권리, 행복할 권리, 자유로울 권리를 지닌다는 말입니다.(중략) 우리 베트남민주공화국 임시정부는 세상을 향해 엄숙히 선포합니다. 베트남은 자유와 독립을 누릴 권리를 가지며, 사실상 자유로운 독립국가가 되었습니다. 베트남 민족이라면 누구나 몸과 마음을 다하여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유와 독립을 수호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 “ |
- 호치민 평전 p.483~484 |
이렇게 해서 베트남에는 새로운 민주공화국이 탄생했다.
항불 독립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 |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은 하노이 대중 앞에 섰다. 수도에 처음 온 것이었음에도, 수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알고 있었다. 호찌민은 "국민 여러분, 제 말이 들립니까? 제 말이 여러분에게 와닿습니까?"하고 물었다. 그의 연설이 있기 몇 주 전, 떤 짜오(Tan Trao)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새로운 베트남을 위한 의제가 제시되었다. 호찌민은 "민족해방위원회와 모든 대표단의 목적은 그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쟁취해 우리 아이들이 충분히 먹고 입으며 학교에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혁명의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노이에 모였던, 그리고 베트남 전역의 민중은 호찌민의 말을 듣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했다. 호찌민의 슬로건은 식량, 의복, 그리고 교육이었다.
한 국가의 인구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하려면, 그만큼의 자원이 필요하다. 베트남 혁명은 더 이상 베트남의 사회적 부가 프랑스와 서구 사회로 유출되지 못함을 의미했다.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정부는 이러한 부를 활용해 수 세기 동안 베트남 농민이 겪은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바로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베트남의 노동력은 베트남의 전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구 자본가, 특히 프랑스 부르주아지에게 잉여가치를 제공하는 데 쓰여야 했다. 베트남 국민의 우선 과제가 베트남의 발전이어서는 안 되었으며, 프랑스와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세력이 확대되도록 하는 것이 우선 과제여야 했다. 그래서 프랑스는 베트남 왕조와 그들의 수하들과 공모해 베트남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베트남 전쟁은 1946년부터 1954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전쟁 후에도 미국은 1975년 패전할 때까지 계속 전쟁을 조장했다. |
“ |
- 워싱턴 불렛 p.23~24 |
위의 인용문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비자이 프라샤드가 쓴 저서 <워싱턴 불렛>에 나오는 내용이다. 위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호치민이 건국한 베트남민주공화국은 사회의 평등과 정의 부의 재분배와 정의실현을 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호치민과 베트남 민중의 노력을 짓밟고자 했던 이들이 있었고, 그들이 바로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와 미국이었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화 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초기 호치민 정부는 프랑스와 타협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결국 1946년 11월 프랑스가 하이퐁을 무차별 포격 및 폭격하여 6,000명 이상의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하면서 무산됐다.[21] 그리고 1달 뒤인 12월 19일에는 수도 하노이에서 프랑스군과 베트민군 사이의 교전이 벌어졌으며, 항불전쟁 이른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됐다.
전쟁 초기 전세는 프랑스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레아 작전을 게시하여 12,000명의 낙하산 부대를 투입하여 비엣박을 대대적으로 공격했고, 호치민을 거의 체포할 뻔 했을 정도였다. 프랑스군은 2차대전 당시 나치독일과의 전쟁으로 단련된 군대였던 데에다가, 화력도 베트민보다 훨씬 우수했으며, 병력의 규모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미국의 역사학자 마릴린 B. 영에 따르면 프랑스군은 자국 프랑스군 8만 명 외인부대 2만 명(이 중 1만 명은 나치 독일군에서 복무했던 이들) 그리고 다른 식민지에서 차출해낸 5만 명의 병력으로 이루어진 15만 명의 대군이었다. 추가적으로 식민지 베트남에서 강제로 끌어모은 30만 명의 베트남인 병사들까지 존재했다.[22] 그러나 이들은 전쟁에서 질 수 밖에 없었다. 절대다수의 베트남 민중은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베트민 편이었기 때문이다.
1949년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베트민을 보다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1950년에는 마오쩌둥의 중국과 스탈린의 소련이 호치민의 베트남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중국은 프랑스에 맞서 독립투쟁을 전개하던 베트민에게 물자를 지원하고, 중월 국경 근처에서 베트민의 군사훈련을 지원해줬다. 그덕분에 1950년 9월 중순 베트민 부대들은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의 취약 시설에 대한 일련의 기습을 개시했고, 중월 국경지대에 있는 동케를 점령했고, 더 나아가 그해 12월에는 홍 강 삼각주까지 탈환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되면서 미국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한국전쟁과 더불어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 전쟁으로 보려는 우를 범했고, 실제로 제국주의 프랑스를 물적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지원은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 시점에서 대략 1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과 1400대의 탱크와 340대의 비행기, 350대의 정찰 보트, 24만 정의 소총 및 기관총, 1500만 발의 탄약 등을 프랑스에게 지원했다. 이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가 지불하던 전쟁 비용의 78% 사실상 80%까지 오르게 된다.[23]
프랑스군은 미군의 전폭적인 물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에서 패배했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이후 프랑스군 사령관 앙리 나바르는 라오스 국경 지대에 있는 디엔비엔푸 비행장에 요새를 세워 베트민에 대항하고자 했다. 그러나 호치민을 따르던 베트남 최고의 명장 보 응우옌 잡은 천재적인 군사적 전략으로 프랑스군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운 뒤, 1954년에 이를 실행에 옮겼다. 잡 장군은 5만 명의 병사와 애국심과 독립을 향한 열정 하에 모인 25만 명 이상을 동원했고, 대포 200대를 산에 배치했다. 1954년 3월 13일 베트민군은 포격을 게시했고, 이렇게 해서 포위전은 56일간 지속됐다. 1954년 5월 6일 프랑스군의 베아트리스 사령부 기지가 베트민군에게 뚫렸으며, 5월 7일 프랑스군은 항복했다. 프랑스군 2,293명이 전사하고, 6,650명이 부상당했으며, 1,729명이 실종되었고, 11,721명이 포로가 됐다.[24]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 소식을 들은 호치민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베트민의 손실은 듀이커에 따르면 대략 2만 5,000명 정도의 사상자가 나왔고, 이들 중 1만 명이 전사했다고 한다.[25] 이유야 어찌됐든 호치민과 베트민 지도부 그리고 베트남 민중은 역사적으로 정말 감동적이고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 | 우리 군이 디엔비엔푸를 해방시켰습니다. 정부와 저는 우리 모든 장병, 전시 근로자, 청년 의용대, 지역 주민들이 부과된 각자의 과업을 획기적으로 완수한 데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승리는 위대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 “ |
- 디엔비엔푸 p.403 |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베트민 지도부와 베트민 군대 그리고 베트남 민중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100년간 지속되던 프랑스의 식민지 통치를 종결시켰고, 이는 제3세계 민중의 반식민지 투쟁에 큰 영감과 영향을 줬다. 이 승리로 1954년 7월 21일 프랑스와 제네바 협정을 체결해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서의 군대 철수에 합의했으며,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한 베트민군은 자랑스럽게 하노이에서 민중의 환호를 받으며 승리의 시가행진을 했다. 그러나 이런 영광 스러운 승리로 베트남의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반공주의를 내세우는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베트남의 주권과 독립을 방해하기 위해 나서고자 했고, 호치민 또한 미제국주의자들의 분단에 맞서 싸우고자 했다.
베트남의 분단과 토지개혁
미국의 침략과 항미전쟁(베트남 전쟁)
사후
평가
관련서적
각주
- ↑ 그의 출생 연도는 다소 논란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호치민을 연구한 일본의 역사학자 후루타 모토오는 그의 출생일로 설정된 5월 19일이 사실은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 창설일에 해당되며, 1891년과 1892년 그리고 1893년으로 써 있는 자료도 있다고 한다.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p.45~46를 참고)
- ↑ 왜 호찌민인가? p.98
- ↑ 호치민 평전 p.78
- ↑ 칠레의 대통령 아옌데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1년 전인 1969년에 북한과 북베트남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호치민에게 감명받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에 따르면, " 아옌데는 당시 호치민이 스페인어로 자기 일행을 맞이하고 이야기를 나눈 사연을 소개하기도 했다. 호치민은 젊은 시절 프랑스로 유학 가는 길에 이용했던 아르헨티나 증기선에서 주방 보조로 일하면서 스페인어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치민의 그 시절의 실력을 발휘해, 베트남 인민들에게 연대를 표하기 위해 멀리까지 찾아와준 아옌데 일행에 감사 인사를 건냈다"고 한다.(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p.161)
- ↑ 호치민 평전 p.96
- ↑ Vietnam’s Ho Chi Minh: ‘On lynching & the Ku Klux Klan’
- ↑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호치민 주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 ↑ 호치민 평전 p.117
- ↑ 베트남 공산주의운동사 연구 p.96~97
- ↑ 호치민 평전 p.166
- ↑ 호치민 평전(찰스 펜) p.93
- ↑ The Vietnam War 1945-1990 p.5
- ↑ 베트남의 역사(유인선) p.329
- ↑ 베트남의 혁명가 호치민 사망 50주기를 맞으며 돌아본 반제국주의 투쟁의 생애
- ↑ 호치민은 어째서 일본에 맞서 싸웠는가?
- ↑ 왜 호찌민인가 p.207
- ↑ 호치민은 어째서 일본에 맞서 싸웠는가?
- ↑ 베트남 공산주의운동사 연구 p.86
- ↑ PBS Vietnam War 2017
- ↑ Vietnam A Long History p.217
- ↑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549
- ↑ The Vietnam War 1945-1990 p.29
-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83
- ↑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p.200
- ↑ 호치민 평전 p.6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