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
개요
호치민(Hồ Chí Minh, 1890~1969)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 지도자다.
1890년 베트남 응에안 성 낌리엔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시절 베트남을 떠나 프랑스 식민주의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1930년에 현재의 베트남 공산당(당시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했다. 일본이 침략했던 시점에는 베트민을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1945년 베트남민주공화국을 건국했다. 이후 프랑스가 침략하자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독립투쟁을 전개했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100년간 지속되는 프랑스 식민지 지배를 종결시켰다. 프랑스가 물러간 이후 미국이 침략하자, 침략자 미국에 맞서 싸웠으며 베트남 민중이 제국주의에 맞서 단결하도록 큰 역할을 했다.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호치민의 위업을 받들어 제국주의의 침략을 무찌르고 통일을 이룩했다.
독립운동을 하며 사용한 가명도 최소 70개 이상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현재까지도 베트남에서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생애
초기 생애
호치민은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 지배 하던 1890년 5월 19일 베트남 응에안 성의 낌리엔 마을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가난한 유학자였고 어머니는 서당 훈장의 딸이었다. 아버지 응우옌 신 삭과 어머니 호앙 티 로앙 사이의 셋째 아들이 응우옌신꿍이었고, 그가 바로 호치민인다.[2] 호치민이 10살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응우옌 탓 탄(응우옌 탓 타인이라고도 표기한다.)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준다. 이 시기 호치민은 아버지와 함께 고전 공부를 계속했지만, 그의 아버지 친구가 가르치는 지역 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 시기 호치민은 <삼국지>나 <서유기>같은 책들을 읽은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 시절 호는 중국의 한자와 유교를 공부하였지만 새로운 문물을 알기위해 17세가 되던 1907년 베트남 도시 후에에 있는 프랑스식 국립학교인 국학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으며,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호치민은 반프랑스 시위에 참가했다. 결국 호치민은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 때문에 국학에서 퇴학당했으며, 이후 베트남을 돌아다녔다. 당시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인 판보이쩌우가 만든 학교에서 잠시나마 교사로 활동했었으며, 학생들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매우 인기 있는 교사였다고 한다.[3] 1911년 6월 호치민은 사이공에서 프랑스의 기선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를 타고 베트남을 떠났다. 이렇게 해서 30년간의 긴 해외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젊은 시절 해외생활과 항불 독립운동
1911년 호치민은 사이공에 있던 프랑스의 기선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해외를 돌아다니는 프랑스 선박이었다.)에 주방보조로 취직하여 약 2년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 등을 여행했다.[4]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에 따르면, 프랑스 기선에서의 생활은 식민지 체제의 악랄함을 깨닫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호치민은 다카르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데도 프랑스인들의 명령에 따라 배까지 해엄쳐 가던 아프리카인 몇 명이 죽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5] 당시 프랑스 제국주의의 실상을 본 호치민은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다.
“ | 프랑스의 프랑스인들은 선량하다. 그러나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아주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다.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이다. 고향에서는 판 링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프랑스인들은 우리 동포들이 그들을 위해 일하다가 익사하는 것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식민주의자들에게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인의 목숨은 한푼의 가치도 없다. | “ |
- 호치민 평전 p.96~97 |
그 시기 호치민은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에 있는 호텔 ‘옴니 파커 하우스(Omni Parker House)’에서 요리사로 일했고, 노동자로도 일하며 흑인인권운동에도 관여했다. 1914년 영국에서는 청소부 요리사 보조 등 온갖 일을 하며 노동조합 활동에 관여했다. 당시 호치민은 흑인인권운동을 전개했던 마커스 가비에 대해 알게됐으며, 미국의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KKK가 벌이는 린치 행위도 직접 목격했다. 버나드 폴이 정리한 <호찌민 베트남 혁명론>을 보면, 당시 그가 KKK와 그들이 벌이는 잔인무도한 린치에 대해 비판한 글이 나오는데, 아무래도 직접 목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6]
1917년 호치민은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베트남 노동자들을 선동하는 작업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1919년 1차 대전 이후 열렸던 파리강화회의를 염두에 두었던 호치민은 안남애국자연합을 결성한 뒤 ‘안남 민족의 요구’를 그해 6월 베르사유 회의에서 응으옌 아이 꾸옥이란 가명으로 발표하였으나 프랑스를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안남 민족의 요구’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시기 프랑스 파리에서 김규식과 조소앙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도 교류한 것이 2018년에 확인됐다.[7] 우드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감명 받았던 호치민은 서구 제국주의의 위선에 배신감을 느꼈으며, 이러한 그의 경험은 1917년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의 러시아 혁명과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됐다.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이 집필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에는 그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 | 호찌민은 서양식 턱시도와 중산모를 빌려 착용한 채 베트남 독립 청원서를 가지고 회의장으로 윌슨과 미국 대표단을 찾아갔다. 파리평화회의에 참가한 대부분의 비서구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호찌민도 해방은 식민통치세력의 선심이 아니라 무장투쟁을 통해 얻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 “ |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88 |
1920년 호치민은 본격적으로 좌파운동에 참가했으며, 처음에는 프랑스 사회당에 있다가 프랑스 공산당 창당에 기여했으며, 공산당원으로 활동했었다. 1920년 여름 레닌이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 제출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에 감명 받았다고 한다.[8] 1922년 호치민은 <르 파리아>를 창간하고 편집인으로써 활동했다. 르 파리아의 신문사는 주로 프랑스의 식민정책을 비판하고 특히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비판했다. 이런 신문이었기에 프랑스 당국은 이 신문사를 탄압했고, 호치민을 체포하려 했었다. 그 외에도 호치민은 파리에서 발행되는 다른 좌파 신문이나 정기간행물에도 꾸준히 글을 썼다.
1923년 6월 호치민은 프랑스에서 도망처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탈출하면서 체포는 면했다. 그 대신 그가 이끌던 르 파리아는 해체되고 만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호치민은 코민테른 극동국에서 근무하였고, 그해 12월 호치민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다. 베트남 혁명사와 베트남 전쟁을 연구한 미국의 반공주의 성향의 역사학자 더글라스 파이크는 호치민이 트로츠키, 부하린, 지노비에프, 라데크, 디미트로프, 보로딘, 바실리 블루헤르, 저우언라이, 로이, 센 카타야마, 마르셀 까신, 마리우스 무떼, 레옹 블룸 등과 친교가 있었지만, 레닌과의 친교는 없었다고 저서에서 주장했다.[9] 이는 사실이며, 실제로 호치민은 레닌이 죽기 전까지 레닌을 만난 적이 없었다. 다만 듀이커에 따르면 1924년 소련에서 열린 국제적인 여성 대회에 참석하여, 레닌의 미망인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었다.[10] 찰스 펜에 따르면 호치민은 1924년 여름 제5회 국제 공산당회의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식민지 문제를 등한시한 프랑스 공산당을 비판하기도 했었다고 한다.[11]
호치민은 1924년까지 모스크바에서 머물렀으며, 1925년에 중국의 광저우로 갔다. 1925년 호치민은 베트남 혁명 청년회를 결성하고 광저우에 세워진 혁명 단체에서 교사로 활동했으며, 호치민은 교사로 활동하면서 1926년 베트남 혁명 교과서인 <혁명의 길>을 집필하고, <시험대에 오른 프랑스 식민주의>를 출간했다. 이 과정 속에서 호치민은 독립운동 세력들을 규합했고, 공산당 결성파와 안남 공산당 그리고 신월혁명당 쪽이 가세한 인도차이나공산주의 연맹을 규합하여 1930년 2월 영국령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다. 베트남 공산당이 창당되던 1930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베트남 국민당이 주도한 봉기가 통킹과 안남 일대에서 일어났다. 시작은 베트남 국민당이 주도했지만, 베트남 공산당(당명을 나중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바꿈) 인사들도 참여 했다. 응에안 하틴 성 소비에트 봉기로 대표되는 이들의 투쟁은 초기 적잖은 성과를 달성했다. 이들은 봉기를 통한 집권 몇달 동안 과하게 부과된 정부의 세금을 철폐하고, 노동 시간을 단축했으며, 지주로 부터 몰수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했고, 문맹퇴치운동도 전개했으며, 따라서 단기간 동안 정의를 실현했다.[12]
그러나 프랑스는 군대와 전투기를 동원하여 이를 야만적으로 진압했다. 1930년 9월부터 응에안 성 소비에트 운동은 프랑스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직면했는데, 프랑스의 외인부대는 기관총과 전투기를 동원하여 농민시위대에게 난사와 기총소사를 했으며, 이러한 진압은 1931년 여름에 진압됐다. 이 과정에서 최소 9,000~10,000명이 체포되고, 수천 명이 프랑스에 의해 사망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베트남 공산당의 별 쩐 푸(Tran Phu)가 체포됐다.[13] 말미암아 봉기는 실패로 끝났으며, 프랑스는 베트남 독립투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그러던 1931년 6월 호치민은 홍콩에서 체포되었으나, 영국 공산당원의 도움으로 1년 뒤 석방됐다. 1934년 호치민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레닌대학에 입학했고, 1935년에는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 참가했으며, 스탈린 대학교에서 교사로도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레닌의 <좌익 소아병>을 베트남어로 번역했다. 1938년 호치민은 모스크바를 떠나 중국으로 들어갔고, 중국 구이린성에 있는 팔로군 본부에서 보건담당 간부로도 일했다.[14]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아시아를 위협했다. 호치민 또한 베트남 독립을 위해 귀국할 준비를 하게 된다.
베트남으로의 귀국과 항불 항일투쟁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40년 6월 나치 독일은 마지노선을 돌파하여 프랑스를 점령했고, 영국까지 위협했다. 당시 나치의 동맹세력이던 일본은 동남아시아에 있는 프랑스령 식민지가 무주공산이 되자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공했고, 베트남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됐다. 호치민은 초기부터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고자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호치민은 대중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었다.[15]
“ | 모든 애국자, 농부, 노동자, 상인, 군인들이여! 단결하여 프랑스와 일본 제국주의자들 그리고 그 협력자들을 물리칠 때가 왔습니다. | “ |
- PBS Vietnam War 2017 |
1941년 호치민은 베트남을 떠난 지, 30년만에 귀국하여 중월국경지대인 까오방 지역에서 베트남 독립을 위한 실질적인 조직 창설작업에 들어갔으며, 팍 보(Pac Bo)'라고 불린 동굴에서 호치민은 베트남독립동맹회(Việt Nam Độc Lập Đồng Minh Hội) 즉 베트민(Viet Minh)을 창설했고, 베트민 안에 독립군을 만들어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싸우고자 했다. 송필경씨가 쓴 <왜 호찌민인가>에 따르면 이때부터 항전에 대비해서 간부를 양성하고 훈련시켰으며, <소련 공산당사>와 <손자병법>을 철저히 공부하고 레닌 개울 옆 천연석 탁자에서 <게릴라 전술>, <중국에서 전개한 게릴라전의 경험>같은 논문을 썼다고 한다.[16] 듀이커에 따르면 당시 호치민은 진보적인 도시의 부르주아지와 봉건적인 사대부층의 반식민주의적 인자들을 포함한 베트남의 모든 애국적 계급들의 연합으로 구성된 광범한 통일전선의 형성을 강조하는 마오쩌둥의 중국 혁명 모델의 정치적 측면에 매료되어 있었다고 한다.[17] 1941년에 창설된 베트민 조직은 광범위한 민족적 전선, 게릴라전에 기초한 농촌전략, 그리고 북베트남 산악지역에서의 해방지역 형성을 포함한 새로운 전략에선 마오쩌둥의 모델을 직접 적용한 것이었지만, 후퇴와 재정비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대적인 공격이라는 마오쩌둥식 3단계 지구전 이론의 핵심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대신 호치민은 정치투쟁, 정치투쟁과 군사투쟁의 결합 그리고 전쟁의 막바지에 두 가지의 투쟁형태들을 모두 합친 대중봉기라는 3단계 발전모델을 구상한 것으로 확인된다.[18]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자 호치민은 1942년 중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스파이로 오인하여 중국 경찰에게 체포당했다. 감옥생활을 하면서 <옥중일기>를 집필했으며, 이것은 나중에 시집으로 발간되기도 했다. 오인으로 인한 체포였기에 1943년 9월에 석방됐다.
미국과 접촉하고자 했던 호치민의 바람은 1944년 11월 베트민 대원이 미군 조종사 루돌프 쇼 중위를 구출해주면서 이어졌다. 미군 조종사를 구출해준 계기로 호치민이 이끌던 베트민은 미군 OSS에서 훈련을 받기도 했다. 미국의 OSS는 베트민 병력 중 최소 200명 이상을 최정예 부대로 훈련시켰다. 보 응우옌 잡이 이끄는 베트민 부대는 미군의 무기로 무장한 뒤, OSS와 협력하여 몇개의 일본군 외곽 초소를 공격했으며,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와중에 미국 OSS와 베트민이 치렀던 대일전이었다.[19] 더글라스 파이크에 따르면 베트민군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만한 전투에 참가한 것은 단 한번인데, 1945년 5월 찬수로 전투에서 최소 60명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20]
1945년이 되면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잔인한 공출과 착취로 인해 대기근이 발생하여 100~200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이 아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베트민은 일본군의 창고와 기지를 습격하여 농민들에게 쌀을 나눠줬으며, 이 덕분에 베트민은 대중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켄 번즈가 만든 'PBS 베트남 전쟁'에 따르면, 당시 대다수 베트남 민중들에게 베트민은 구원자로 인식되었으며, 그 이유는 일본군의 창고를 습격하여 그 쌀을 농민들에게 나눠줬기 때문이었다.[21] 1945년 7월 16일에는 앨리슨 토머스 소령이 이끄는 50명의 OSS 게릴라 부대가 낙하산으로 투하되어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게릴라 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자동소총, 기관총,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지압장군의 게릴라 부대가 몇 개의 일본군 외곽 초소를 공격했고, OSS의 ‘사슴팀’은 베트민과 계속 공동 작전을 펼치면서 관활 지배 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당시 OSS 대원으로 중국 운남성에서 호치민을 집적 만났던 아르키메데스 패티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 | 호치민은 무례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베트남 독립을 최우선 당면 과제로 삼고 싸우는 민족주의자일 뿐이다. | “ |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29 |
베트남의 독립 선언
1945년 8월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군이 만주에서 진격을 시작하자 호치민은 베트남 전역에서 총 봉기를 준비했었다. 1945년 8월 12일 총봉기를 결정한 호치민의 부름에 따라 베트민은 봉기를 준비했고, 천황 항복 다음날인 8월 16일에 혁명을 시작했다. 이 봉기를 이른바 8월 혁명(August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이 혁명은 베트남 북부와 중부 남부에서 신속히 진행됐다. 북부에서는 하노이. 중부에서는 후에, 남부에서는 사이공에서 베트민이 주도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 봉기에 전국적으로 총 100만 명 이상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8월 19일 하노이 봉기에서만 총 10만 명이 봉기에 참여하여 일본군 철수와 프랑스 식민 통치 종결 그리고 바오다이 황제 폐위를 요구했다. 이 8월 혁명에 대해 베트남의 역사학자 응우옌 칵 비언(Nguyễn Khắc Viện)은 “1945년 당시 8월 혁명은 80년간의 프랑스 식민통치를 종결시켰고, 군주제를 폐지시켰으며, 베트남을 독립국가로 재건했다.”고 <베트남 오래된 역사, Vietnam A Long History>에서 주장했다. [22]
8월 봉기를 게시하며 호치민은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 |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우리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 우리 온 힘을 모아 일어서자!
전 세계 수많은 피압박 민족들이 독립을 얻기 위해 다투어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만 뒤처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전진! 전진! 베트민전선 깃발 아래 용감하게 전진합시다! |
“ |
- 호치민 평전 p.457 |
봉기는 성공적이었다. 1971년 베트남 전쟁 당시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전 세계에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The Pentagon Papers)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 호치민은 이미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베트남 전체 차원의 유일한 정치조직으로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호치민은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베트남의 유일한 전시 지도자였으며, 1945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일본을 타도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창설하고, 진주하는 연합군을 위해 환영식을 개최하면서 베트남 국민들 사이에서 널리 충성을 얻고 있음을 확인시켜 줬다. 1945년 9월의 몇 주 동안, 베트남은 근대사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호치민의 지도하에 남에서 북까지 통일됐다. | “ |
- The Pentagon Papers |
8월 혁명을 통해 베트남에서 해방정국을 주도한 베트민은 9월 2일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켰다. 그 나라가 바로 베트남민주공화국(Việt Nam Dân Chủ Cộng Hòa, 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이었다. 1945년 9월 2일 이미 베트남 전역은 베트민이 만든 붉은 깃발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는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베트민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호치민은 미국 자동차를 타고 하노이 바딘광장으로 향했으며, 도착하여 자신이 준비한 베트남 독립 선언(Declaration of Vietnam Independence)을 낭독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 |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태어났다. 창조주에게 절대적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그중에는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권이 있다. 1776년 미합중국 독립선언문에 둥장했던 불멸의 문구입니다. 더 넓게 해석한다면, 모든 민족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며, 살 권리, 행복할 권리, 자유로울 권리를 지닌다는 말입니다.(중략) 우리 베트남민주공화국 임시정부는 세상을 향해 엄숙히 선포합니다. 베트남은 자유와 독립을 누릴 권리를 가지며, 사실상 자유로운 독립국가가 되었습니다. 베트남 민족이라면 누구나 몸과 마음을 다하여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유와 독립을 수호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 “ |
- 호치민 평전 p.483~484 |
이렇게 해서 베트남에는 새로운 민주공화국이 탄생했다.
항불 독립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 |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은 하노이 대중 앞에 섰다. 수도에 처음 온 것이었음에도, 수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알고 있었다. 호찌민은 "국민 여러분, 제 말이 들립니까? 제 말이 여러분에게 와닿습니까?"하고 물었다. 그의 연설이 있기 몇 주 전, 떤 짜오(Tan Trao)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새로운 베트남을 위한 의제가 제시되었다. 호찌민은 "민족해방위원회와 모든 대표단의 목적은 그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쟁취해 우리 아이들이 충분히 먹고 입으며 학교에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혁명의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노이에 모였던, 그리고 베트남 전역의 민중은 호찌민의 말을 듣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했다. 호찌민의 슬로건은 식량, 의복, 그리고 교육이었다.
한 국가의 인구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하려면, 그만큼의 자원이 필요하다. 베트남 혁명은 더 이상 베트남의 사회적 부가 프랑스와 서구 사회로 유출되지 못함을 의미했다.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정부는 이러한 부를 활용해 수 세기 동안 베트남 농민이 겪은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바로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베트남의 노동력은 베트남의 전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구 자본가, 특히 프랑스 부르주아지에게 잉여가치를 제공하는 데 쓰여야 했다. 베트남 국민의 우선 과제가 베트남의 발전이어서는 안 되었으며, 프랑스와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세력이 확대되도록 하는 것이 우선 과제여야 했다. 그래서 프랑스는 베트남 왕조와 그들의 수하들과 공모해 베트남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베트남 전쟁은 1946년부터 1954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전쟁 후에도 미국은 1975년 패전할 때까지 계속 전쟁을 조장했다. |
“ |
- 워싱턴 불렛 p.23~24 |
위의 인용문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비자이 프라샤드가 쓴 저서 <워싱턴 불렛>에 나오는 내용이다. 위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호치민이 건국한 베트남민주공화국은 사회의 평등과 정의 부의 재분배와 정의실현을 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호치민과 베트남 민중의 노력을 짓밟고자 했던 이들이 있었고, 그들이 바로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와 미국이었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화 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초기 호치민 정부는 프랑스와 타협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결국 1946년 11월 프랑스가 하이퐁을 무차별 포격 및 폭격하여 6,000명 이상의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하면서 무산됐다.[23] 그리고 1달 뒤인 12월 19일에는 수도 하노이에서 프랑스군과 베트민군 사이의 교전이 벌어졌으며, 항불전쟁 이른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됐다. 사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호치민은 과거 OSS와의 협력 관계를 토대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국무장관 번즈 그리고 베트남의 독립 후 처음 몇 달간 하노이에 체류했던 몇몇 미국인들과의 조심스런 관계를 통해 미국을 설득하려 했었다.[24] 물론 미국은 루스벨트 사후 반공주의자 트루먼이 이끌었기에, 베트남편을 전혀 들지 않았다.
전쟁 초기 전세는 프랑스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레아 작전을 게시하여 12,000명의 낙하산 부대를 투입하여 비엣박을 대대적으로 공격했고, 호치민을 거의 체포할 뻔 했을 정도였다. 프랑스군은 2차대전 당시 나치독일과의 전쟁으로 단련된 군대였던 데에다가, 화력도 베트민보다 훨씬 우수했으며, 병력의 규모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미국의 역사학자 마릴린 B. 영에 따르면 프랑스군은 자국 프랑스군 8만 명 외인부대 2만 명(이 중 1만 명은 나치 독일군에서 복무했던 이들) 그리고 다른 식민지에서 차출해낸 5만 명의 병력으로 이루어진 15만 명의 대군이었다. 추가적으로 식민지 베트남에서 강제로 끌어모은 30만 명의 베트남인 병사들까지 존재했다.[25] 그러나 이들은 전쟁에서 질 수 밖에 없었다. 절대다수의 베트남 민중은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베트민 편이었기 때문이다. 아래에 있는 로버트 에스프레이의 저서 <세계게릴라전사>의 내용을 보도록 하자.
“ | '독랍(Độc lập)'은 어떻게 성취되는가
호치민 아저씨(Bác Hồ)의 말대로 인민에 의해 성취된다. 베트민 공작원들의 선전에 귀를 기울이는 노동자, 농민 등 인민에 의해 성취된다. 베트민은 인민의 정당이었다. 베트민은 인민전쟁을 위해 신병을 모집하고 있었다. |
“ |
- 세계게릴라전사 3 p.54 |
1949년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베트민을 보다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1950년에는 마오쩌둥의 중국과 스탈린의 소련이 호치민의 베트남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중국은 프랑스에 맞서 독립투쟁을 전개하던 베트민에게 물자를 지원하고, 중월 국경 근처에서 베트민의 군사훈련을 지원해줬다. 그덕분에 1950년 9월 중순 베트민 부대들은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의 취약 시설에 대한 일련의 기습을 개시했고, 중월 국경지대에 있는 동케를 점령했고, 더 나아가 그해 12월에는 홍 강 삼각주까지 탈환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되면서 미국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한국전쟁과 더불어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 전쟁으로 보려는 우를 범했고, 실제로 제국주의 프랑스를 물적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지원은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 시점에서 대략 1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과 1400대의 탱크와 340대의 비행기, 350대의 정찰 보트, 24만 정의 소총 및 기관총, 1500만 발의 탄약 등을 프랑스에게 지원했다. 이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가 지불하던 전쟁 비용의 78% 사실상 80%까지 오르게 된다.[26] 1954년 2월 미국은 250명의 미 공군 기술병들과 함께 B-26 폭격기를 프랑스군 휘하에 배속시켜 주었으며, 이들 250명은 전체 1,200명으로 구성된 기술지원반의 선발대였다.[27] 아래의 인용문은 미국의 역사학자 마릴린 B. 영의 저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 | 어느 누가 바오다이 황제를 위해 죽음을 택할 것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가? 어느 병사가 미국에 의해 지원받고, 프랑스군에게 훈련받는 대지주와 바오다이의 군대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싸우려 하겠는가? | “ |
- The Vietnam Wars 1945-1990 p.36 |
프랑스군은 미군의 전폭적인 물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에서 패배했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이후 프랑스군 사령관 앙리 나바르는 라오스 국경 지대에 있는 디엔비엔푸 비행장에 요새를 세워 베트민에 대항하고자 했다. 그러나 호치민을 따르던 베트남 최고의 명장 보 응우옌 잡은 천재적인 군사적 전략으로 프랑스군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운 뒤, 1954년에 이를 실행에 옮겼다. 잡 장군은 5만 명의 병사와 애국심과 독립을 향한 열정 하에 모인 25만 명 이상을 동원했고, 대포 200대를 산에 배치했다. 1954년 3월 13일 베트민군은 포격을 게시했고, 이렇게 해서 포위전은 56일간 지속됐다. 1954년 5월 6일 프랑스군의 베아트리스 사령부 기지가 베트민군에게 뚫렸으며, 5월 7일 프랑스군은 항복했다. 프랑스군 2,293명이 전사하고, 6,650명이 부상당했으며, 1,729명이 실종되었고, 11,721명이 포로가 됐다.[28] 베트민의 손실은 듀이커에 따르면 대략 2만 5,000명 정도의 사상자가 나왔고, 이들 중 1만 명이 전사했다고 한다.[29] 어찌됐든 호치민과 베트민 지도부 그리고 베트남 민중은 역사적으로 정말 감동적이고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 소식을 들은 호치민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 | 우리 군이 디엔비엔푸를 해방시켰습니다. 정부와 저는 우리 모든 장병, 전시 근로자, 청년 의용대, 지역 주민들이 부과된 각자의 과업을 획기적으로 완수한 데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승리는 위대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 “ |
- 디엔비엔푸 p.403 |
디엔비엔푸 전투 10주년 승리를 맞이하여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쓴 '디엔비엔푸 대첩과 동춘 승리의 궁극적 의의'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 제국주의자들이 당황하고 낙담한 반면, 우리의 승리에 대한 소식은 전 세계의 진보적인 인민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디엔비엔푸에서 거둔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이는 억압받던 인민들의 자랑거리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알고 있던 국가 해방을 위한 세계적인 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 “ |
- 디엔비엔푸 p.501 |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베트민 지도부와 베트민 군대 그리고 베트남 민중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100년간 지속되던 프랑스의 식민지 통치를 종결시켰고, 위의 인용문 처럼 제3세계 민중의 반식민지 투쟁에 큰 영감과 영향을 줬다. 이 승리로 1954년 7월 21일 프랑스와 제네바 협정을 체결해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서의 군대 철수에 합의했으며,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한 베트민군은 자랑스럽게 하노이에서 민중의 환호를 받으며 승리의 시가행진을 했다. 그러나 이런 영광 스러운 승리로 베트남의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반공주의를 내세우는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베트남의 주권과 독립을 방해하기 위해 나서고자 했고, 호치민 또한 미제국주의자들의 분단에 맞서 싸우고자 했다. 1954년 7월 15일 베트남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총회 보고에서 호치민이 미국에 대해 어떻게 얘기했는지 아래의 인용문을 통해 보도록 하자.
“ | 현재 상황이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도 바뀌고 있고, 이에 따라 정책과 슬로건도 바뀝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프랑스 제국주의 세력을 일소하는 데 온힘을 집중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프랑스인들과의 대화가 가능해진 반면, 미제국주의자들이 우리의 주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공격의 초점을 후자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평화를 되찾을 때까지 프랑스와의 전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뿐 아니라 전 세계 민족 모두가 미국에 대한 공격에 집중해야 합니다. 미국은 인도차이나 전쟁을 확신하여 국제화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싸우며 미국의 전쟁 정책에 반대합니다. | “ |
-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p.209~210 |
아래의 인용문은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 | 호치민은 당의 정확한 지도와 세계 여러 민족의 지지를 바탕으로 완전한 독립과 민족통일이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다짐했다. 호치민은 저우언라이의 충고를 따라, 당의 동료들에게 완전한 승리에 비하면 훨씬 불만족스러운 타협적 해결책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을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며칠 전 류저우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그런 방법을 받아들일 것을 권했다. 그러나 호가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타협적인 평화안을 수용한 것은 이전에도 여러 번 드러났던 그의 태도, 특히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 그가 보여주었던 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은 혼자서 잘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변화의 맥락 속에서 달성해야 하는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 “ |
- 호치민 평전 p.676~677 |
베트남의 분단과 토지개혁
“ | 미국은 제네바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미국의 지속적인 입장은 베트남 국민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할 자격이 있기 때문에, 이에 반하는 어떠한 행동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실질적인 입장은 6월의 <펜타곤 페이퍼>에 잘 나타나 있다. 미국은 24만 명에 달하는 남베트남 정규군(ARVN)을 훈련시키는 한편, 재정 지원을 지속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프랑스와도 협력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 “ |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100~101 |
1954년 제네바 회담을 통해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북베트남에는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이 남베트남에는 과거 프랑스가 세워놓은 꼭두각시 바오다이 황제의 베트남국이 유지됐다. 그 외에도 라오스와 캄보디아가 개별적인 국가로 독립됐다. 사실 이러한 결정에 베트남 노동당 내부에서고 강한 불만의 목소리가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디엔비엔푸 전투로 프랑스군의 열세가 명백해지면서 베트남민주공화국 측의 지배지역은 베트남 전 국토의 3/4으로 확장된 상태였기 때문이다.[30] 어쨌든 분단이 되면서,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에 협력했던 인사들과 가톨릭 교도들 그리고 베트민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이들 80만 명이 월남했고, 남베트남에 있던 대략 10만 명 정도의 베트민 지지자들이 월북했다.
1954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이 분단되자, 수십만 명의 난민이 남베트남에 정착하게 되는데 당연하게도 미국이 프랑스와 함께 이를 도왔다. 월남한 80만 명의 인사들 중에 대다수인 60만 명 이상이 로마 가톨릭 교도였고, 가톨릭 교도 상당수가 프랑스와 바오다이 정부와 밀접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31] 제네바 협정은 호치민에게 베트민군 전체를 남부에서 철수시키라고 요구했지만, 북부로의 철수가 완료된 뒤에도 베트민을 지지하는 수십만의 게릴라는 여전히 그대로 남베트남에 남아 있었다.[32] 항불전쟁 8년 기간 동안 베트남은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다. 대부분의 공장이 폐쇄됐고, 소유자들 가운데 다수가 나라를 떠났으며, 자동차용 가솔린은 부족했고, 기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관개시설(농경지에 물을 대고 빼는 시설)은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대부분 파괴된 상태였고, 1954년 말에는 여러 자연재해도 겹쳤었다.[33] 따라서 호치민과 북베트남 정부는 전후 재건의 필요성을 느꼈고, 실제로 조국을 재건하고자 했다.
1954년 첫 해 호치민 정부는 소련의 재정원조와 버마로부터 쌀을 수입함으로써 식량난의 위기를 넘겼다. 호치민 정부는 미곡 부족현상을 항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사회주의 경제체제하에서 농업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골몰했으며, 이 과정에서 실행된 것이 1953년 이래 일부 해방구에서 실시되었던 토지개혁이었다. 북베트남 정부는 이 토지개혁을 북부 전체로 확대시켰다.[34] 토지개혁은 호치민의 실책과 과오로 지적하는 부분이다. 1954년부터 1956년까지 북베트남 전역에서 단행됐던 토지개혁은 적잖은 억울한 피해자와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과거 토지개혁에 대한 희생자 숫자는 5만 명에서 10만 명 많게는 20만 명이 처형되었다는 주장이 돌아다녔었다. 미국의 반전성향의 역사학자 가레스 포터는 호치민 정권의 토지개혁 중에 일어난 처형의 실질적 범위는 800건에서 2,500건 사이일 것이라고 주장했다.[35] 이 토지개혁 문제를 연구한 에드윈 모이스는 가레스 포터의 추산과 여러 자료를 토대로 하여 토지개혁으로 인해 처형당한 희생자의 총수는 대략 5,000명 내외일 것이며 3,000명에서 15,000명 사이로 추산했다.[36] 반면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토지개혁에 공감하는 사람들조차도 최소 3천 명에서 5천 명은 죽었을 것이라고 인정하며, 1만 2천 명에서 1만 5천 명에 이르는 사람이 방해 활동이나 다른 방식의 반혁명 활동 지원이라는 엉터리 혐의로 부당하게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다"고 추산했다.[37]
토지개혁 처형자의 숫자가 반공주의적인 입장에서 과장된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적잖은 억울한 희생자가 나온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호치민을 포함한 북베트남 지도부들은 이 부분에 대해 과오를 인정하고 자아비판을 해야했다. 당연히 호치민은 철저하게 자아비판을 했고, 이들에 대한 보상도 분명히 했다. 토지개혁으로 인한 피해자는 당연하게도 가톨릭 교도들이 많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톨릭 교도 60만 명 이상이 월남한 상태였지만, 대략 90만 명에 달하는 가톨릭 교도가 북베트남에 남아있는 상태였다. 북베트남은 그들을 부당하게 대우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1955년 6월에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교회 내부 문제에 대하여 바티칸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정부의 포고도 발표했다.[38] 당시 가톨릭의 반베트민 봉기가 있었지만, 북베트남의 대응이 어땠는지는 아래에 있는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 | 1956년 여름, 토지개혁이 이 지역을 휩쓸고 지나갔고, 그 과정에서 정부의 권력 남용이 불러일으킨 불만은 종교적 차별 때문에 더욱 악화되었다. 당 일꾼들은 지역의 가톨릭 지도자들이 반동적이고 사보타주를 선동한다고 비난하곤 했다. 국제감시위원회 조사단이 이 지역에 도착했을 때는 긴장이 팽팽해져 정부 보안대와 조사단을 만나려는 마을 주민 사이에 폭력 충돌이 빈발했다. 11월 9일, 마을 주민들이 지프를 타고 쿠인 루 부를 돌아다니던 국제감시위원회 위원들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 지역 경찰이 군중을 해산하려 하자,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13일, 연장과 원시적인 무기로 무장한 주민 수천 명이 쿠인 루 부 청사로 행진했다. 그러나 정규군이 그들의 앞을 막았다. 충돌이 벌어져 시위자 몇 명이 사망했다. 다음 날 1개 사단이 출동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소요를 선동한 주모자들을 체포했다.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하노이로부터 내려온 조사단은 토지개혁 운동 기간에 체포했던 사람들 다수를 석방했고, 그들의 재산도 반환했다. | “ |
- 호치민 평전 p.713 |
이 사건에 대해선 디엔비엔푸 전투의 명장인 보 응우옌 잡 장군이 군중과 함께 근처 운동장으로 가서 토지개혁 운동 기간에 과오들이 있었다고 인정하며 사과했다.[39] 호치민 또한 1957년 2월 베트남민주공화국 국회에서 토지개혁 시행에서 심각한 과오를 범했음을 인정했다.[40] 비록 이러한 과오도 있었지만, 토지개혁은 성공적인 면도 분명히 있었다. 토지개혁을 통해 대략 200만 에이커(80만 헥타르) 이상의 토지가 200만 명 이상의 농민 및 농민 가족에게 분배되었고, 마을에서 토지를 독점했던 향신 계급의 오랜 지배 체제가 붕괴되었으며, 빈농과 중농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도력이 형성됐다.[41] 과거 일본과 비시 프랑스 점령 시절 야기됐던 지주와 지배계급의 착취로 인한 대기근이 일어날 수 있는 구조가 전반적으로 무너졌으며,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선 불협화음을 사실상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까지 사회가 회복됐다. 토지개혁은 지주와 부농의 토지를 몰수하여 빈농과 소작농에 분배하여 이들의 생산의욕을 고취시키려는 것이 목작이었으며, 그 결과 1957년까지 81만 헥타르의 토지가 800만 농민에게 분배됐다.[42] 또한 1955년부터 1959년까지 농업 분야에서 쌀 산출량은 360만 톤에서 520만 톤으로 증가했다. 산업 분야에서는 1955년에 단지 17개 공장이 있었으나 1959년에는 107개 국영공장이 건설되었으며, 하층 농업협동조합에는 농민 가계의 43.9%가 포함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작업 교대조에 합류했다. 직인 53%가 협동조합조직에 가입했으며, 문화 영역에서는 우선 문맹을 퇴치했다. 1955년과 비교하여 일반 학교 학생 수는 두 배로, 중등 직업학교 학생 수는 여섯 배로, 대학생 수는 일곱 배로 증가했다. 또한 의사의 수도 80%나 증가했다.[43]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토지개혁은 일부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우 성공적이었다.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의 남북분단이 결정됐지만, 이 분단에는 전제조건이 붙었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군사경계선(DMZ)은 잠정적일 뿐이며 정치적으로 통일문제는 1956년 7월 이전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결정한다."였다.[44] 즉, 분단 이후 2년 이내에 남북 베트남을 아우르는 총 선거를 실시하여, 베트남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협정은 결과적으로 미국의 아이젠 하워 정부와 남베트남의 노골적인 적대정책과 파기로 인해서 위반됐다. 1954년 바오다이는 미국에서 귀국한 가톨릭 반공주의자인 응오딘지엠을 베트남국의 총리로 내세웠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던 응오딘지엠은 국민투표를 통해 바오다이를 축출하고 1955년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 응오딘지엠 정부는 초기부터 과거 항일 항불투쟁을 했던 베트민 투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에 나섰고, 적잖은 민간인을 학살했으며, 1954년에 맺은 제네바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가브리엘 콜코에 따르면 1958년까지 최소 4만 명 이상을 구금하고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최소 12,000명 이상의 정치범을 처형했다.[45] 미국의 아이젠 하워 와 응오딘지엠이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 | 미국의 후원을 등에 업은 지엠은 제네바 협정의 가장 중요한 조항을 파기해버렸다. 1956년으로 예정된 총선거를 취소한 것이다. 총선거를 했더라면 베트남 전체에 대한 통제권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후일 이렇게 말했다. “인도차이나 문제 전문가들과 대화하 편지로 의견을 나눠보면 의견이 거의 일치했다. 양측이 싸우는 상황에서 총선을 치르면 남베트남 인구의 80%는 국가수반인 바오다이가 아니라 공산주의자 호찌민을 지도자로 선출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반정부 무장투쟁은 곧 다시 시작됐다. | “ |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446~448 |
그러나 응오딘지엠 정부는 선천적으로 미제국주의자들의 괴뢰 정부였기에 다음과 같은 모순점이 너무나도 분명했다.
“ | 어쩌면 응오딘디엠이 저지른 최대 잘못은 베트남공화국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농민의 요구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이공 정권은 미국의 재촉에 따라 토지 소유의 엄청난 불평등(인구의 약 1%가 경작 가능한 농지의 반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가난한 농민이 부재 지주에게 연간 수확량의 1/3을 바치는 경우도 많았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그 나름의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대도시의 부유한 지주나 부르주아지는 사이공 정권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었으며, 그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불리한 토지개혁에 반대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결과 토지개혁 법안은 지주들이 쉽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작성되었으며, 토지개혁이 몇 년 동안 실시된 후에도 자격을 갖춘 소작인들 가운데 실제로 토지를 받은 사람은 10% 정도에 불과했다. 이전에 베트민이 장악했던 지역에 사는 농민은 프랑스-베트민 전쟁 동안 받았던 토지를 전 주인에게 돌려주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런 농민이나 전국의 다른 많은 농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디엠 정권은 식민지 시대의 프랑스 정권보다 나을 것이 거의 없었다. | “ |
- 호치민 평전 p.744~745 |
미국의 침략과 항미전쟁(베트남 전쟁)
“ | 미국이 월남 내란을 월맹과 공산주의자의 원조·지령·사주에 의해서 시작된 침략이라는 명분으로 전면적인 군사개입을 하기까지의 베트남 정세는 대체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한마디로 그것은 프랑스 제국주의·식민주의에 반대해 싸운 베트남 인민의 80년의 투쟁과 반민중적 권력에 대한 민중의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고려돼야 할 전쟁이다. | “ |
- 전환시대의 논리 p.397 |
“ | 우리는 다음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국가 기구, 군대, 부르주아 계급의 보안대가 여전히 막강한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무장 투쟁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베트남 민족은 평화적 수단으로 조국을 통일할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주적은 여전히 조국의 반을 점령하고 있는 미제국주의자들과 그들의 대리인들이며, 그들은 열심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평화의 깃발을 높이 들면서도 동시에 경계심을 강화해야 합니다. | “ |
- 호치민 평전 p.721~722 |
베트민과 혁명투사들에 대한 응오딘지엠 정부의 탄압과 학살로 인해, 남부에 있던 베트민을 포함한 게릴라들은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60년 12월에는 캄보디아 국경 지대에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이 창설되어 응오딘지엠 정부 타도 및 통일을 위한 혁명 및 무장투쟁을 전개했으며, 미지상군 개입 이전인 1957년부터 1965년까지 이들은 남베트남 정부의 살인적이고 반민중적인 정책에 맞서, 투쟁을 벌였다. 1959년 1월부터는 제15차 전체회의의 결정과 더불어 북베트남의 당 지도부는 남부통일에 대한 제일 높은 우선 순위를 부여했다.[46] 아이젠 하워 정부 이후 등장한 미국의 존 F. 케네디 정부는 남베트남의 지엠 정부를 돕는 방식으로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점진적으로 증강해 나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북베트남 정부는 북파되었던 일부 인사들을 훈련시켜 남파하기도 했지만, 미국은 라오스와 캄보디아 그리고 남베트남에서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행위들을 빈번히 저질렀다. 제네바 회담 이후 미국은 남베트남에 685명의 군사고문단을 파견했지만, 비밀리에 숫자를 늘려나갔고, 케네디 행정부하에선 그 숫자가 무려 1만 6,000명으로 늘어났다.[47]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은 1963년 압박 전투에서 1/6 수준인 베트콩 병력에게 장갑차와 헬기를 동원하고도 참패를 당하는 졸전을 치렀다. 그러는 한편 남베트남 내부에서는 응오딘지엠 정부의 반공정책과 반민중적 그리고 반농민적 정책으로 인해, 베트콩들이 점차 민중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응오딘지엠 정부가 베트콩이 활동을 할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촌락을 파괴하고 그 촌락에 살던 주민들을 강제로 전략촌이라는 이름의 수용소에 수용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1963년 전략촌은 전국에 8,670개에 달했고 100만 명이 넘는 농민들이 수용소에서 감금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48] 따라서 베트콩은 전략촌을 접수하고 파괴하면 할수록 농민들의 지지를 획득하기 매우 쉬웠다.
1963년 6월 11일 틱광둑이라 불리던 남베트남의 고승이 소신공양하는 일이 있으면서, 남베트남 민중은 베트콩과 더불어 지엠 정부에 저항했고, 지엠 정부가 무너져 공산화가 될 것을 우려한 미국은 남베트남 내부 쿠데타를 일으켜 응오딘지엠을 살해했다. 이에 힘입은 베트콩 혁명 세력들은 병력을 끌어모아 농촌 지역에서 체제 전복을 위한 합동 공격을 감행했다. 단 2주 만에 400건일 정도로 활발히 활동했고, 최소 남베트남 농촌의 절반 이상이 베트콩 수중 하에 놓였다.[49] 결국 미국의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1965년 2월 플레이쿠가 베트콩의 공격을 받았다는 빌미로 존슨 정부는 이른바 북폭을 감행했고, 3월에는 미 해병대 3,500명이 다낭에 상륙했다. 전쟁이 격화 될수록 남베트남 주둔 미군의 숫자도 늘었는데, 1964년에 1만 7000명이었던 미군 병력은 1965년에는 16만 명을 넘어섰고, 1966년에는 45만 명, 1967년에는 49만 7천 명, 그리고 1968년에는 거의 54만 9000 명까지 증가했다.[50]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민중은 미국의 침략에 맞서 저항했다. 이는 1966년 호치민의 연설을 통해 그 투쟁의 의지가 잘 드러난다.
“ | 미국은 수십만 명, 아니 수백만 병력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전쟁은 10년, 20년, 어쩌면 그 이상 지속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민은 승리할 때까지 계속 싸울 것입니다. 집과 마을과 도시가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겁먹지 않습니다.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 “ |
-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 p.195 |
1966년 7월 옛 친구이자 적이었던 프랑스의 장 생트니가 프랑스의 중재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하노이를 방문했을 때도 호치민은 앞의 연설과 같이 강경한 입장을 전달했다. 호치민은 생트니와 만난자리에서 미국이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모든 도시를 부수어버릴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와 그의 동포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끝까지 싸울 각오가 되어 있으며, 최종 승리를 얻기 전에는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호치민은 미국이 체면을 구기지 않고 철수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용의가 있지만, 결국 유일한 해결책은 미국이 물러나는 것뿐이며,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일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트니에게 이야기했다.[51]
1967년에 들어서 미군 전사자가 2만 명으로 늘었지만, 미국의 존슨 정부는 자신들이 베트남에서 이기고 있다는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에서 자신들이 승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됐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54만 명의 미군과 100만 명의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감행한 구정 공세를 통해 미군은 다시한번 전쟁의 전환점을 맞게 됐기 때문이다. 1968년 구정 공세로 사이공에 있던 미국 대사관 1층이 베트콩에 의해 점령당하고, 후에에서 1달간의 치열한 시가전 및 공방전이 벌어졌지만,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막강한 화력으로 구정 공세는 적잖은 베트콩이 전사했다. 1달 기간의 전투 동안만 베트콩은 37,000명이 사망한 데에 반해 미군은 2,500명이 전사했을 정도였다. 구정 공세 이후 호치민은 레둑토와 함께 남부로 내려가 병사들을 격려하고자 했지만, 결국 당 인사들이 말려서 남부에 들리지는 못했다. 어쨌든 구정 공세 이후 린든 B. 존슨 행정부는 미국 내의 반전여론에 휩싸였고, 11월에는 잠시나마 북폭을 중지할 수 밖에 없게 됐다.
사후
“ |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비탄과 감동, 혼란이 함께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넋을 잃은 듯이 행동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정치 지도자를 잃고 애도하는 그런 슬픔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슬픔을 꾹 참고 견디는 모습이었다. 호찌민의 인민들은 ‘호 아저씨’가 부르기만 하면 누구라도 달려와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순간들이었다 | “ |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44 |
1960년대 베트남 전쟁 시기 호치민은 해외 순방과 중국 및 소련에서의 건강차원에서의 요양이었다. 또한 노동당의 권력을 레주언과 보 응우옌 잡 그리고 팜반동 등과 공유하고 있었고, 이들을 통해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서 호치민의 건강은 좀처럼 좋지가 않았고, 따라서 중국에서 요양을 자주했다. 1960년대 시점부터 호치민은 유언장을 쓰기 시작했으며, 또 자주 고쳤던 것으로 확인된다. 호치민은 그가 존경하는 카를 마르크스나 블라디미르 레닌과 같은 존경하는 혁명가들을 만나러 갈 것이라고 쓰기도 했고, 농업세를 1년간 면제하는 조항과 더불어 통일 이후 남부 인민들에게 유혈 보복을 하지말라고 유언장에 쓰기도 했다. 또한 호치민은 남부 부대원에 대한 복지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도 보인다.[52]
1969년 9월 2일 베트남 전쟁이 닉슨 독트린에 따라 미군의 철수로 끝나가고 있던 도중 호치민은 통일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에서 여러 논평이 쏟아졌다. 세계 주요 국가에서 조문을 했으며, 북베트남 정부는 121개국으로부터 2만 2천통의 조문을 받았다. 수많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들 나름대로 추모식을 열었으며, 우호적인 사설들을 게재했다. 소련은 공식 성명을 통해 호치민을 “영웅적인 베트남 인민의 위대한 아들이며,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뛰어난 지도자이며, 소련의 훌륭한 친구”라고 찬양했다.[53] 아래의 인용문은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 | 호치민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에서 논평이 쏟아졌다. 세계 주요 국가에서 조문을 했으며, 하노이는 121개국으로부터 2만 2천 통의 조문 메시지를 받았다. 수많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들 나름대로 추모식을 열었으며, 우호적인 사실들을 게재했다. 모스크바는 공식 성명을 통해 호치민을 “영웅적인 베트남 인민의 위대한 아들이며,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뛰어난 지도자이며, 소련의 훌륭한 친구”라고 찬양했다. 제3세계 국가들에서는 그를 억압받는 민족들의 옹호자로 찬양했다. 인도에서 나온 어떤 글은 그를 “인민의 정수이며, 자유를 향한 열렬한 갈망과 인내와 투쟁의 화신”이라고 묘사했다. 다른 그들은 그의 소박한 태도와 높은 도덕성에 주목했다. 우루과이의 한 신문에서는 이런 사설이 실렸다. “그는 우주만큼 넓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아이들에 대한 가없는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소박함의 모범이다.” | “ |
- 호치민 평전 p.817 |
호치민이 사망한 이후 북베트남의 지도자는 레주언이 되었고, 그는 통일전쟁을 이끌어 나갔다. 베트남 전쟁은 1970년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과 1971년 라오스 침공이 있었지만, 북베트남은 굴복하지 않았다. 1972년 북베트남은 이른바 부활절 공세를 감행했으며, 그해 닉슨 정부가 감행한 대규모 융단 폭격을 견뎌냈다. 크리스마스 폭격이라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폭격을 버텨낸 북베트남 지도부는 1973년 1월 파리평화회담을 통해 미군을 남베트남에서 철군시켰다. 1974년 북베트남 지도부는 통일을 위한 계획을 세웠고, 1975년 3월 총공격을 게시하여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점령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을 종결시켰다. 비록 호치민은 6년 전에 사망했지만, 그가 이루고자 했던 통일이 이루어졌으며, 호치민이라는 한 인물의 비젼은 수많은 베트남 민중을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승리를 이루도록한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그런 점에서 호치민은 일본과 프랑스에 이어 미국의 침략까지 무찌른 위대한 지도자가 됐다.
평가
1969년 그가 사망했을 당시 남베트남 북베트남 할 거 없이 호치민 주석을 추모하기 바빴다. 1965년 남베트남 군부 쿠데타의 주역이자 지도층이었던 공군총사령관 응우옌 까오 끼 마져도 그가 전설적인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정도다. 사망 했을 당시 미국의 언론들도 그의 추모글을 게재했으며, 미국의 타임즈 또한 그가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헌신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가이자 베트남 전쟁을 연구한 리영희 또한 그의 청렴함과 독립지도자라는 점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현재 미국의 경우 호치민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특히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OSS와 동맹을 맺었던 그를 버려서 결국은 베트남 전쟁을 치르게 된 점에 대해 큰 실수라고 생각하는 정서가 현재 미국에도 강력하게 남아 있다. 이처럼 미국도 전반적으로 호치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호치민은 현재 베트남에서도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것은 북부와 남부 할 것 없이 그렇다. 형식적이라는 평가를 받을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베트남 공산당도 호치민의 정신과 위인적인 면모 투쟁적인 면모를 국가적으로 많이 강조한다.
현재 호치민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집단은 베트남 전쟁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 혹은 돈을 번 전쟁 정도로 역사를 왜곡하는 극우세력들과 베트남 전쟁 이후 보트피플이 되어 도망쳐 미국이나 서유럽에 정착한 극렬 반공주의자들 뿐이다. 물론 이들의 주장은 호치민이나 베트남 전쟁에 대한 객관적인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공주의적 도그마로 점철된 매카시즘적 비난 혹은 폄하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문제점은 호치민에 대해 폄하하면서 매우 반동적인 남베트남 정권에 대해선 아무런 제한없이 옹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들은 독립운동가 호치민을 근거없는 비난을 하지만, 정작 친외세 반역의 길을 걸었던 남베트남에 대해선 영혼없는 옹호를 한다. 그런 이들이 호치민에 대해 정확한 평가를 내리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 보다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호치민에 대해 종합적인 결론을 내리자면 토지개혁 유혈사태와 같은 한계가 있긴 하지만, 철저히 자아비판을 하고 피해자들에게 보상대책을 세웠을 정도로 훌륭한 인품과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극우세력이나 미국에 사는 보트피플의 호치민 폄하는 단순히 반공 이데올로기적 도그마에 불과한 매카시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으며, 현재 베트남과 미국을 포함하여 호치민에 대핸 전 세계적인 보편적 평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 그리고 훌륭한 인품과 국제정세를 읽는 탁월한 시각을 가진 지도자다. 따라서 호치민이 지금까지도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관련서적
각주
- ↑ 그의 출생 연도는 다소 논란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호치민을 연구한 일본의 역사학자 후루타 모토오는 그의 출생일로 설정된 5월 19일이 사실은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 창설일에 해당되며, 1891년과 1892년 그리고 1893년으로 써 있는 자료도 있다고 한다.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p.45~46를 참고)
- ↑ 왜 호찌민인가? p.98
- ↑ 호치민 평전 p.78
- ↑ 칠레의 대통령 아옌데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1년 전인 1969년에 북한과 북베트남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호치민에게 감명받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에 따르면, " 아옌데는 당시 호치민이 스페인어로 자기 일행을 맞이하고 이야기를 나눈 사연을 소개하기도 했다. 호치민은 젊은 시절 프랑스로 유학 가는 길에 이용했던 아르헨티나 증기선에서 주방 보조로 일하면서 스페인어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치민의 그 시절의 실력을 발휘해, 베트남 인민들에게 연대를 표하기 위해 멀리까지 찾아와준 아옌데 일행에 감사 인사를 건냈다"고 한다.(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p.161)
- ↑ 호치민 평전 p.96
- ↑ Vietnam’s Ho Chi Minh: ‘On lynching & the Ku Klux Klan’
- ↑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호치민 주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 ↑ 호치민 평전 p.117
- ↑ 베트남 공산주의운동사 연구 p.96~97
- ↑ 호치민 평전 p.166
- ↑ 호치민 평전(찰스 펜) p.93
- ↑ The Vietnam War 1945-1990 p.5
- ↑ 베트남의 역사(유인선) p.329
- ↑ 베트남의 혁명가 호치민 사망 50주기를 맞으며 돌아본 반제국주의 투쟁의 생애
- ↑ 호치민은 어째서 일본에 맞서 싸웠는가?
- ↑ 왜 호찌민인가 p.207
- ↑ 베트남 혁명 연구 p.34~35
- ↑ 베트남 혁명 연구 p.35~36
- ↑ 호치민은 어째서 일본에 맞서 싸웠는가?
- ↑ 베트남 공산주의운동사 연구 p.86
- ↑ PBS Vietnam War 2017
- ↑ Vietnam A Long History p.217
- ↑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549
- ↑ 베트남 혁명 연구 p.61
- ↑ The Vietnam War 1945-1990 p.29
-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83
- ↑ 세계게릴라전사 3 p.192
- ↑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p.200
- ↑ 호치민 평전 p.668
- ↑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p.170~171
- ↑ 호치민 평전 p.686
- ↑ 호치민 평전(찰스 펜) p.280
- ↑ 호치민 평전 p.686
- ↑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p.390
- ↑ 미국 대외정책론 p.406
- ↑ 미국 대외정책론 p.406
- ↑ 호치민 평전 p.714
- ↑ 호치민 평전 p.712
- ↑ 호치민 평전 p.713~714
- ↑ 호치민 평전 p.714
- ↑ 호치민 평전 p.714
- ↑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p.390
- ↑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p.250
- ↑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p.387
- ↑ Anatomy of War p.89
- ↑ 호치민 평전 p.751
- ↑ 미국 민중사 2 p.214~215
- ↑ 미국과 맞짱 뜬 나쁜 나라들 p.136
- ↑ PBS The Vietnam War 2017
- ↑ 베트남 전쟁(박태균) p.117
- ↑ 호치민 평전 p.801~802
- ↑ 호치민 평전 p.815
- ↑ 베트남의 혁명가 호치민 사망 50주기를 맞으며 돌아본 반제국주의 투쟁의 생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