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판의 서문에선 유감스럽게도 나 혼자 서명하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에게서, 유럽과 미국의 노동자 계급 전체는 어느 누구에게서보다도 더 큰 은혜를 입었지만, 그 마르크스는 이제 하이게이트(Highgate) 묘지에 누워 있으며 그의 무덤 위에는 벌써 첫 풀이 자라나고 있다[1]. 그가 떠난 이상 『선언』을 뜯어고치거나 보충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나는 더욱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선언』을 뚫고 흐르는 기본 사상, 즉 어떤 역사적 시기의 경제적 생산과 거기서 뒤따라 나올 수밖에 없는 사회 조직은 그 시대의 정치사와 지성사의 토대를 이루며, 이에 상응하여 (원시 공동체적 토지 소유가 붕괴한 이래) 역사 전체는 계급 투쟁, 즉 서로 다른 사회 발전 단계에서의 피착취 계급과 착취 계급 사이의 투쟁, 피지배 계급과 지배 계급 사이의 투쟁의 역사였다는 사상, 그러나 지금 이 투쟁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동시에 사회 전체를 착취와 억압과 계급 투쟁으로부터 영원히 해방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계급(부르주아지)에게서 해방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사상, 이 기본 사상은 전적으로 또 오로지 마르크스의 것이다[2].
나는 이것을 이미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이것이 『선언』 자체의 앞머리에 놓일 필요가 있다.
1883년 6월 28일, 런던에서
- ↑ 편집자의 주 -- 마르크스는 1883년 3월 14일 런던에서 죽었다. 그의 유해는 3월 17일 런던의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혔다.
- ↑ 나는 영어판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생각으로는 다윈의 이론이 자연 과학 분야에서 진보의 기틀을 마련했듯이, 이 사상은 역사 과학 분야에서 똑같은 진보의 기틀을 마련했다. 우리 두 사람이 이 사상에 차츰 접근한 것은 1845년이 되기 몇 해 전이었다. 내가 독자적으로 얼마만큼 이 방향으로 나아갔는가를 보여 주는 글이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다. 그러나 내가 1845년 초 브뤼셀에서 마르크스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이 사상을 힘들여 완성해 놓고 있었으며 내가 위에서 개괄해 놓은 바와 거의 똑같을 만큼 명료한 말로써 그것을 내게 내놓았다." [엥겔스가 1890년의 독일어판에 덧붙인 주---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