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주의의 기초/이론(3)

좌파도서관
Karl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22일 (토) 17:50 판


레닌주의의 기초
III. 이론
3) 프롤레타리아혁명 이론

왜 레닌은 ‘영구혁명’ 사상을 상대로 싸웠는가?


왜냐하면, 레닌은 농민의 혁명적 역량은 ‘소모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들의 혁명적 에너지는 차리즘을 완전히 청산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전화하는 데 최대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반면, ‘영구혁명’의 신봉자들은 러시아 혁명에서 농민이 지닌 중대한 역할을 이해하지 못했고, 농민이 가진 혁명적 에너지의 힘을 과소평가했으며 농민을 지도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힘과 능력을 과소평가함으로써, 농민을 부르주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들을 프롤레타리아트 주위에 결집시켜내는 작업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또한, 레닌은 혁명이 프롤레타리아트로의 권력의 이전으로 최종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반면에 영구혁명의 신봉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수립에 즉시 착수하기를 갈망했으며, 그렇게함에 있어서 그들이 농노제의 유제와 같은 ‘사소한 세부사항’에 눈을 감고 있으며 러시아 농민층과 같은 중요한 세력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는데 그러한 정책은 농민을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지체시킬 뿐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레닌이 연속성의 문제로 영구혁명의 신봉자들과 싸웠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레닌 스스로 연속혁명의 관점을 견지했지만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거대한 예비군인 농민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속혁명이라는 사상은 새로운 사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이 주장은 1840년대 말 맑스가 그의 유명한 공산주의 동맹에 대한 연설(1850)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우리의 "영구혁명"이 연속혁명이라는 개념을 취한 것은 바로 이 문서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의 "영구혁명론자"들은 맑스로부터 그것을 취함으로써 그것을 어느 정도 변형시켰고, 그것을 바꾸면서 그것을 "망쳐 놓았고" 실제 사용에 부적합하게 만들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실수를 바로잡고, 연속혁명에 대한 맑스의 사상을 순수한 형태로 취하여 이를 그의 혁명 이론의 초석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련한 레닌의 손이 필요했다.


다음은 맑스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승리를 촉구하는 수많은 혁명적 민주주의 요구를 열거한 후 연속혁명에 관한 연설에서 말한 내용이다.


민주적 쁘띠부르주아 계급은 가능한 한 빨리 혁명을 종결시키고 기껏해야 위의 요구를 달성하기를 원하지만, 거의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혁명을 항구적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관심이자 임무이다. 유산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그들의 지배적 위치에서 쫓겨났고, 한 나라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지배적인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연합이 프롤레타리아트들 사이의 경쟁이 일어날 정도로 발전해 왔다. 이들 국가 중 상당수는 중단되었으며, 적어도 결정적인 생산력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에 집중되었다.[1]


다시 말해서:


a) 맑스는 우리 러시아 ‘영구혁명론자들’의 계획과는 반대로 1840년대 독일혁명이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즉각적인 수립에 착수할 것을 결코 제안하지 않았다.


b) 맑스는 오직, 혁명은 부르주아지의 부분을 권력의 결정으로부터 하나씩 서서히 쓰러뜨림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을 획득한 후 모든 나라에서 혁명의 불을 지르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 국가권력의 확립으로 완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또한 레닌이 제국주의의 조건 아래에서 혁명이론을 추구하면서 혁명과정에서 가르치고 수행했던 모든 것은 이 명제와 완전히 일치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러시아 ‘영구혁명론자들’은 러시아 혁명에서의 농민의 역할과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개념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했을 뿐 아니라 영구혁명에 관한 맑스의 사상을 (한층 나쁘게) 변경시켰고 이를 실제적으로 이용하는 데 부적합하게 만들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이유로 레닌은 우리의 ‘영구혁명론자들’의 이론을 ‘독창적’이고 ‘훌륭한’ 것이라 부르면서, ‘왜 십년 내내 세상이 이 훌륭한 이론을 못본 체하고 지나쳤는지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있다고 그들을 비난하며 이 이론을 비웃었다.(레닌의 글은 러시아에서 "영구혁명론" 이론이 출현한지 10년 후인 1915년에 작성되었다. Vol. XVIII, p. 317을 보라.)


그렇기 때문에 레닌은 이 이론을 반半멘셰비키 이론으로 간주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단호한 혁명적 투쟁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 권력 장악을 요구하는 볼셰비키로부터, 그리고 멘셰비키로부터 '부인'을 요구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농민의 역할"(레닌의 기사 "혁명의 두 노선"을 보라).


그렇다면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넘어가고 부르주아 혁명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의 "즉각적인" 이행을 위해 활용한다는 레닌의 사상에 관한 입장이다.


이전에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모든 선진 국가, 또는 최소한 대다수 선진국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행동이 필요하다는 가정 하에서 일국에서 혁명의 승리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제 이러한 관점은 더 이상 사실에 부합되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승리의 가능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제국주의 조건하에서 각각의 자본주의국가들이 지닌 발전의 불균등성과 발작성, 필연적으로 전쟁을 초래하는 제국주의 내부의 종말적 모순의 격화,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혁명운동의 성장−이 모든 것이 개개 국가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의 가능성뿐 아니라 그 필연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부르주아지의 타도는 어떤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조건이 존재할 때만 성공적으로 완수될 수 있으며, 이것이 결여되어 있는 곳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장악이라는 문제는 있을 수조차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음은 레닌이 자신의 팜플렛 "좌익" 공산주의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 말한 내용이다.


모든 혁명, 특히 20세기 세 번의 러시아 혁명에서 확증된 혁명의 기본 법칙은 다음과 같다. 피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대중이 삶의 불가능성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혁명에 충분하지 않다. 낡은 방식과 요구가 바뀌고, 착취자들이 낡은 방식으로 살고 통치할 수 없는 것이 혁명에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혁명이 승리할 수 있다. 이 진리는 다시 말해서 혁명은 (피착취자와 착취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전국적 위기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첫째, 노동자의 대다수(또는 적어도 계급의식, 사상,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노동자의 대다수)가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혁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지배계급은 가장 후진적인 대중조차 정치에 끌어들이는 정부 위기를 겪고 있어야 하며... 정부를 약화시키고 혁명가들이 정부를 급속히 전복시킬 수 있게 만든다(Vol. XXV, p, 222을 보라.)


그러나 일국에서 부르주아 권력의 타도와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수립은 결코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승리한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농민을 지도한 후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고 또 건설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주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승리를 달성한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즉, 단 한 나라의 힘으로 마침내 사회주의를 통합하고 개입과 결과적으로 복원에 반대하는 국가를 완전히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이것을 위해서는 적어도 여러 국가에서의 혁명의 승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들의 혁명을 진전시키고 지원하는 것은 승리한 혁명의 필수적 과제이다. 그러므로 일국에서 승리를 거둔 혁명은 스스로를 자급자족하는 실체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앞당기는 지원세력이나, 수단으로 간주해야한다.


레닌은 승리하는 혁명의 임무는 "모든 나라의 혁명을 발전시키고 지원하며 각성시키기 위해 한 나라에서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 사상을 간결하게 표현했다.(Vol. XXIII, p. 385을 보라.)


이는 일반적으로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의 특징이다.


  1. 카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주의자 동맹에 대한 중앙위원회의 첫 번째 연설(카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Selected Works, Vol. I, Moscow 1951, p. 1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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