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파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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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도서관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4월 21일 (목) 12:2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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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중파업론
저자: 로자 룩셈부르크
주제: 파업, 노동조합, 사회민주당(독일)
발표시기: 1906년
출처: 알 수 없음


대중파업론

편집자의 주
독: Massenstreik, Partei und Gewerkschaften

영: The Mass Strike, the Political Party

and the Trade Unions

러시아 혁명, 무정부주의, 총파업

대중파업이라는 주제에 관한 거의 모든 국제 사회주의의 저술과 선언이 러시아 혁명[1]이 일어나기 전부터 나왔다. 러시아 혁명은 이 대중파업이라는 투쟁 무기를 맨처음 대규모로 시험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따라서 러시아 혁명 전에 나온 거의 모든 저술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이전 저술들의 관점은 1873년에 엥겔스가 스페인 바쿠닌주의자들의 행동을 비판하면서 아래와 같이 썼던 것과 기본적으 로 똑같았다.

바쿠닌주의자들의 강령에서 총파업이란 사회혁명을 도입하는 데 쓰일 지렛대이다. 어느

날 아침, 한 나라 또는 모든 나라에서 모든 산업 노동자들이 일을 그만둠으로써 지배계급이 4주 안에 항복하거나 노동자들을 공격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를 가지고 낡은 사회를 뒤엎을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제안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프랑스와 벨기에 사회주의자들은 1848년부터 끊임없이 이런 주장을 해 왔지만 총파업의 기원은 영국이다. 1837년의 위기 뒤에 영국 노동자들 사이에 차티즘[인민헌장운동]이 급속하고 강력하게 발전해 가는 동안, 1839년초에 ‘신성한 달’(holy month)이라는 전국적 규모의 작업 거부가 촉구되었으며, 1842년 7월에는 영국 북부의 공장 노동자들이 이를 실행하려 고 했을 만큼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1873년 9월 1일에 제네바에서 열린 동맹파 (Alliancists)대회[2]에서는 총파업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지만, 총파업을 실행하려면 노동자계 급의 완전한 조직화와 충분한 파업기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였다. 바로 이것이 곤란한 문제였다. 정부가 노동자들이 정치적 행동을 삼가는 것에 크게 고무된다면 결코 노동자들 이 충분한 파업기금을 확보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정치적 사건이 벌어지고 지배계급 이 움츠러든다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이처럼 충분한 조직과 거대한 비축 기금을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들기 훨씬 전에 노동자들이 해방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노동자들이 그런 수단들을 확보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이룩하려고 굳이 총파업이라는 우회적인 방식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여기에서 우리는 그 뒤 몇 십 년 동안 국제 사회민주주의가 대중파업을 바라보던 태도를 특징짓는 논거를 발견한다. 그것은 총파업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이론 - 총파업은 사회혁명을 시작하는 수단이며 노동자계급의 일상적인 정치투쟁과 모순된 것이라는 이론 - 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단순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즉,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강력한 조직과 충분한 재정적 자원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총파업을 벌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충분히 잘 조직되어 있을 때에는 총파업이 필요 없다. 이러한 논거는 아주 단순하며 언뜻 보기에 전혀 반박할 수 없는 것이었고 지난 25년 동안 무정부주의라는 유령에 맞서는 논리적 무기로서, 그리고 광범위한 노동자 써클들에 정치투쟁의 사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근대 노동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지난 25년 동안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운동이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사실이야말로 바쿠닌주의에 대항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했던 정치투쟁 전술의 가치를 확인시켜 주는 증거이다. 그러나 독일 사회민주주의[3]는 전체 국제 노동운동에서 전위적 지위를 차지했음에도 이러한 전술들을 한결같이 그리고 정열적으로 적용하여 생겨난 직접적인 산물이 결코 아니다. 현재 러시아 혁명은 위에 제시된 논거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계급투쟁의 역사에서 러시아 혁명은 대중파업 사상을 맨처음 웅대하게 실천했다. 또한 러시아 혁명은 -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 총파업을 완전히 발전시킴으로써 노동운동의 발전에 신기원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한 정치투쟁 전술이 오류라든가 무정부주의에 적용된 그들의 비판이 틀렸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오히려 독일 사회민주당이 지금껏 해 온 실천의 밑바탕을 이루며, 오늘날 러시아 혁명에서 계급투쟁의 새로운 요소와 새로운 조건들을 창출해 내고 있는 것은 여전히 똑같은 사상과 방법, 곧 마르크스‧엥겔스의 전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중파업이라는 모델을 역사에서 맨처음 시험한 러시아 혁명은 그저 무정부주의가 올바르지 못함을 입증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무정부주의의 역사적 파산을 뜻한다. 요즈음 몇 십 년 동안 독일에서 사회민주주의가 힘차게 발전하면서 비난해 온 이 사상적 경향이 유감스럽게도 아직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정도는 의회주의 시기가 배타적으로 지배했고 또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오로지 ‘선제 공격’과 ‘직접 행동’을 모범으로 삼는 경향, 가장 적나라하고 설익은 의미에서 ‘혁명적’인 이 경향은 보통 때의 의회주의적 고요함 속에서는 단지 일시적으로 그 힘을 잃을 수 있다. 그러나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투쟁이 일어나는 때가 돌아오면 다시 살아나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더구나 러시아는 무정부주의가 영웅적인 행위를 시험하는 곳처럼 보였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 권리가 전혀 없는 처지에 있었고 조직은 아주 약했으며 여러 인종이 뒤섞인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서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혼란 상태였다. 게다가 인민대중은 교육 수준이 낮았을 뿐만 아니라 지배체제는 야만적인 폭력을 쓰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는 이 모든 사실들 때문에 무정부주의가 비록 생명이 짧기는 했지만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러시아는 무정부주의의 역사적 출생지였다. 그러나 바쿠닌의 조국은 무정부주의의 가르침을 묻는 무덤이 되어 버렸다. 러시아 무정부주의자들은 대중파업 운동의 선두에 서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다. 혁명적 행동뿐만 아니라 대중파업에서도 전체 정치 지도권은 무정부주의자들이 ‘부르주아 정당’이라고 비난하는 사회민주주의 조직[4]들이 거머쥐고 있거나, 부분적으로는 어느 정도 사회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 조직들 또는 어느 정도 이들과 엇비슷한 조직, 이를테면 ‘사회혁명당’ 같은 테러리즘 정당이 장악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에서 하나의 중요한 정치 경향으로서 자리잡지도 못했다. 그저 특별히 어려운 조건 - 노동자들이 서로 다른 민족으로 뒤섞여 구성되어 있고, 소규모 산업이 아주 분산되어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가 극심하게 억압받고 있는 조건 - 을 가진 비알리스토크 라는 리투아니아의 한 작은 도시에서만 7~8개의 혁명조직들 가운데서 몇몇 미숙한 ‘무정부주의자’들이 온 힘을 기울여 노동자들 사이에 혼돈과 당혹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모스크바와 그 밖의 다른 두세 도시에서도 이처럼 몇몇 무정부주의자들이 눈에 띈다. 그러나 이들 ‘혁명적’ 조직들 말고 러시아 혁명에서 무정부주의는 실제 어떤 역할을 했는가? 무정부주의는 함께 저지르는 도둑질과 약탈의 상징이 되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둑질과 약탈 행위 가운데 많은 부분이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저질러졌다. 이러한 행위들은 불황기와 일시적인 방어기에 번번히 골치 아픈 반혁명 공세를 불러일으키는 행위이다. 무정부주의는 러시아 혁명에서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론이 아니라 상어떼처럼 혁명의 전함을 쫓아 우글거리는 반혁명적인 룸펜프롤레타리아트[5]의 이데올로 기 간판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과 함께 무정부주의의 역사적 삶은 거의 끝나 버렸다. 한편, 러시아에서 대중파업은 노동자계급의 정치투쟁, 특히 의회적 정치투쟁을 회피하는 수단, 또는 극적인 쿠데타를 통해 갑자기 사회혁명으로 비약해 가는 수단으로서 벌어진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트가 일상적인 정치투쟁의 조건들과 특히 의회적 조건들을 창출하려는 수단으로서 벌어졌 다. 대중파업이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러시아의 혁명투쟁은 노동대중, 다른 누구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러한 정치적 권리와 조건을 개선하려고 벌인 것이었다. 노동자계급의 해방투쟁에서 그러한 정치 권리와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고도 중요하다는 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터내셔널[6]에서 무정부주의에 반대해 온 힘을 기울여 투쟁하는 가운데 맨처음 지적하였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의 모든 교의에서 밑바탕을 이루는 역사 변증법은 대중파업 사상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무정부주의가 오늘날에는 실천에서 대중파업에 적대적인 것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정치 행동의 대립물로 여겨져 배격당하곤 했던 대중파업이 오늘날에는 정치 권리를 위한 가장 힘 있는 투쟁 무기로 등장하였다. 따라서 만약 러시아 혁명 때문에 대중파업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낡은 관점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한다면, 그것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일반적인 방법과 견해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영예를 획득하는 일이 될 것이다. 무어인[7]의 애인은 오로지 무어인의 손에 죽을 수 있다.

대중파업은 역사적 산물이지 인위적 산물이 아니다

러시아 경험을 통하여 대중파업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는 일은 대중파업의 일반적 개념과 관계가 있다. 현재까지 독일에서 베른슈타인, 아이스너[8]등과 같이 ‘대중파업 시도’를 열렬히 주창하는 사람들과 보멜부르크같이 노동조합 진영 안에서 그러한 시도를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개념, 즉 무정부주의적인 개념으로 말하고 행동한다. 늘 그렇듯이 명백히 양쪽 끝의 대립물들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를 규정하고 보완한다. 왜냐하면 무정부주의적 사고방식은 ‘거대한 소 동’(Kladderadatsch)인 사회혁명을 드러내 놓고 그저 외적이고 비본질적인 특징으로만 평가하기 때문이다. 무정부주의에 따르면 대중파업과 전반적인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모든 조건들에 대한 완전히 추상적이고 비역사적인 관점만이 본질적이다. 무정부주의자의 ‘혁명적’ 관점에서 물질적 전제조건은 단 두 가지뿐이다. 첫째는 상상력이고, 둘째는 눈앞에 펼쳐지는 자본주의라는 눈물의 계곡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착한 의지와 용기이다. 60년 전에 이러한 환상적인 추론 방식에 따라 더 나은 미래 사회로 나아가는 데 대중파업이 가장 빠르고 가장 확실하며 가장 손쉬운 수단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요즈음에는 똑같은 추론 방식에 따라 오로지 노동조합 투쟁이야말로 실제적인 ‘직접적인 대중 행동’이며 실제적인 혁명투쟁이라는 - 잘 알려져 있듯이, 이것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생디칼리스트들’이 요즈음 갖고 있는 견해이다 - 결론에 이르렀다. 그런데 무정부주의에 늘 치명적인 것은 상상 속에서 즉흥적으로 생각해 낸 투쟁 방법들은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유토피아일 뿐만 아니라, 사악하고 흉칙한 현실을 생각하지 못함으로써 그 운동이 본디 지니고 있었던 대부분의 혁명적인 사고가 현실에서는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반혁명에 실제로 도움을 주게 된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추상적이고 비역사적인 사고방식에 뿌리를 두고 이사회(a board of directors)가 하듯이 지정된 날짜에 독일에서 대중파업을 벌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과 쾰른 노동조합대회 참석자들처 럼 ‘선전’을 금지함으로써 대중파업 문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려는 사람들이 있다. 두 경향은 대중파업을 바라는 대로 올바른 양심에 따라 ‘결정’하거나 ‘금지’할 수 있는 순전히 기술적인 투쟁 수단이라는, 완전히 무정부주의적인 가정을 똑같이 갖고 있다. 즉, 대중파업을 ‘위급할 때를 대비해’ 호주머니 속에 접어 넣어 두었다가 마음먹으면 꺼내 쓸 수 있는 일종의 주머니칼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대중파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불안정하게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오늘날의 상황과 어떤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없는지를 전혀 따지지 않는 ‘혁명적 낭만주의자들’에 반대한다. 이들은 독일의 역사적 토대와 물질적 조건들을 심사숙고하는 것이 자신들의 장점이라고 내세운다. 디킨즈의 "어려운 시절"(Hard Times)에 나오는 그래드그라인드 같이 그들은 “사실과 숫자, 숫자와 사실!”(Facts and figures, figures and facts)을 외친다. 노동조합에서 대중파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역사적 토대’와 ‘물적 조건’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취약성이고, 다른 하나는 프러시아 · 독일 군국주의의 강력함이다. 충분하지 못한 노동자 조직과 번뜩이는 프러시아의 총검들은 이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현실적인 정책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실과 숫자들’(facts and figures)이다. 노동조합 기금과 프러시아의 총검은 물질적이고 매우 역사적인 현상임에 틀림없지만, 그 현상들을 설명하는 개념은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이 아니라 푸트카머(Puttkammer)적 의미의 경찰관적인(Policemanlike) 유물론이다. 자본주의 경찰국 가의 대표자들은 총검의 물질적 힘뿐만 아니라 때로는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실적 힘을 아주 많이 생각한다. 이러한 두 가지 숫자들을 비교한 보기를 들면서 혁명적 노동운동은 늘 어떤 선동가나 데마고그가 만들기 때문에, 유쾌하지 못한 ‘일시적 현상’을 진압하는 데 알맞은 수단은 감옥과 총검이라고 결론짓는다. 계급의식이 깨어난 독일 노동자들은 모든 근대 노동운동이 몇몇 양심 없는 ‘선동가들과 데마고그들’이 제멋대로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경찰관 같은 이론이 우스갯소리임을 마침내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확히 이와 똑같은 생각이 다음과 같은 경우에도 나타난다. 즉 훌륭한 당원 동지 두세 명이 몇몇 ‘혁명적 낭만주의자들’의 위험한 선동과 ‘대중파업 선전’에 맞서 독일 노동자계급에게 경고하려 고 스스로 야경꾼의 대열로 모여드는 경우나 당 집행위원회와 노동조합 상임위원회(general commision) 사이의 ‘은밀한’ 합의를 거쳐 독일에서 대중파업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요란한 반대 운동을 계획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대중파업이 혁명적 낭만주의자들의 격정적인 ‘선전’이나 당 지도부의 은밀하거나 공개적인 결정에 좌우되는 것이라면, 러시아에서 진정한 대중파업은 아직껏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작센노동자신문"(Sachische Arbeiterzeitung)에서 내가 지적한 대로, 대중파업이 러시아만큼 그렇게 적게 ‘선전’되고 ‘논의’된 곳도 없다. 그리고 스스로 대중파업을 선언하려고 했던 러시아 당 간부들의 개별적인 결정과 합의 - 두마 해산 뒤인 올해 8월에 있었던 마지막 시도처럼 - 도 실제로는 거의 의미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러시아 혁명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대중파업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멋대로 ‘결정’되고 ‘선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계기에 역사적 필연성을 갖는 사회적 상황에서 비롯하는 역사적 현상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중파업이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 또는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현재의 계급투쟁 국면에서 대중파업이 성장하는 계기들과 사회적 상황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대중파업 문제를 이해하고 논의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바람직한가 하는 관점에서 대중파업을 논의하는 주관적 평가가 아니라,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관점에서 대중파업의 원인을 논의하는 객관적 탐구를 통해서만 대중파업 문제를 논의하거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추상적 논리 분석의 비현실적 영역에서는 대중파업이 절대 일어날 수 없거나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 또는 대중파업이 일어날 수 있으며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입장 둘 다 똑같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쪽도 증거가 전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대중파업을 ‘선전’하는 것에 대한 공포는 심지어 이러한 범죄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이단 선고를 내리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이러한 공포는 단지 우스꽝스런 혼동의 산물일 뿐이다. 대중파업을 추상적인 투쟁 수단으로 ‘선전’하는 것은 ‘혁명’을 선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대중파업’과 마찬가지로 ‘혁명’은 단지 특정한 정치 상황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계급투쟁의 외연적인 형태를 뜻할 뿐이다. 만약 누군가 일반적인 프롤레타리아 투쟁인 대중파업을 일상적 선동의 주제로 삼고, 차츰 노동자계급 을 획득하려고 이러한 ‘사상’(idea)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혁명과 바리케이드 전투라는 사상을 특별한 선동의 주제로 삼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고 무익하며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다. 대중파업은 현재 독일과 국제 노동자계급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대중파업은 새로운 투쟁 형태이며, 그것은 계급들의 관계와 계급투쟁 조건들이 철저한 내적 변화를 겪고 있다는 뚜렷한 조짐이기 때문이다. 독일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그렇게 완고하게 저항했는데도, 독일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그렇게 민감한 관심을 갖고 이 새로운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건강한 혁명적 본능과 날카로운 지적 능력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적 행동에 대해 노동자들이 이처럼 관심과 광범위한 지적 갈증 그리고 갈망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대중파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추상적인 두뇌 운동으로 노동자들을 대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러시아 혁명의 발전과 그 혁명의 국제적 의의, 서구에서 계급적대의 첨예화, 좀더 광범위한 독일 계급투쟁의 정치적 전망, 그리고 다가올 투쟁에서 대중이 해야 할 역할과 임무에 관한 것들을 대중에게 설명해야 한다. 오로지 이러한 형식을 통해서만 대중파업에 관한 논의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적인 지평을 확대하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날카롭게 만들어 주며 그들의 힘을 강철같이 단련시켜 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혁명적 낭만주의’를 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제기했던 형사 소송들은 아주 터무니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대중파업 문제를 다루었던 사람들은 예나 대회 결의안[9]본문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정치가’들은 필요하다면 이 결의안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로 대중파업을 보통선거의 운명과 연결시키고, 여기서 다음의 두 가지, 즉 첫째로 대중파업이 순전히 방어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 둘째로 대중파업이 의회주의에 종속된 것이며 의회주의의 단순한 부속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된 예나 대회 결의안의 실질적인 핵심은, 독일의 현재 조건에서 의회투표권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독일에서 처음으로 대중파업이 투쟁 수단으로 나타나면서 격렬한 정치투쟁 시기를 여는 계기이자 그 신호가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문제이자 계급투쟁 현상인 대중파업의 사회적 중요성을 대회 결의안의 문구로 좁혀 버리고 인위적으로 억제하면서 그 역사적 전망을 제한하려고 하는 것은, 쾰른 노동조합대회[10]에서 논의가 거부된 것에 견줄 수 있는 근시안적인 것이다. 예나 대회 결의안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은 러시아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국제적 조건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것에 공식적으로 주목하고, 다가오는 계급투쟁 국면에서 새로운 요구에 대한 당의 적응 능력과 당의 혁명적 발전 능력을 선언했다. 예나 결의안의 의의는 바로 이것이었다. 독일에서 대중파업을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관해서는 러시아에서 와 마찬가지로 역사가 결정할 것이다. - 물론 이 역사 속에서 독일 사회민주당과 그들의 결정이 중요한 요소임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많은 요소들 가운데 단지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러시아 대중파업 운동의 발전

독일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에 따르면 대중파업은 대부분 아주 명확하고 단순하며 뚜렷하게 그려지는 개별 현상이다. 또 오로지 정치적 대중파업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때의 정치적 대중파업이란 아주 중요한 어떤 정치적 원인에서 비롯하는 단일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거대한 봉기이다. 당과 노동조합의 통제부가 서로를 이해하는 가운데 알맞은 때에 파업을 벌이고 당 규율 정신과 완벽한 순서에 따라 철두철미하게 실행된다. 알맞은 때에 신호를 보내 훨씬 더 완벽한 순서를 지도위원회에 보내면 이 지도위원회가 지지를 조절하고, 비용, 희생 - 한마디로 말해 대중파업의 모든 물질적인 대차대조표 - 을 미리 정확히 결정하는 그러한 정치적 대중파업이다. 이제 이러한 이론적 도식과 5년 전에 러시아에서 실제로 등장한 대중파업을 견주어 볼 때, 독일의 논의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러한 설명이 현실에서 일어났던 많은 대중파업에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의 대중파업은 ‘그’ 대중파업, 즉 추상적이고 도식적인 대중파업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다양한 투쟁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대중파업의 특징뿐만 아니라 대중파업의 모든 요인들은 각 도시와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르고 그 일반적인 특징도 혁명과정에서 자주 바뀌었다. 러시아에서 대중파업은 특정한 역사적 국면을 지났고, 지금은 더욱 철저하게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러시아의 대중파업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대중파업의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 현재 이른바 러시아 혁명의 공식적인 시기는 20만 노동자 시위가 짜르 궁전 앞에서 끔찍한 대량학살로 끝난, 1905년 1월 22일의 프롤레타리아 반란에서 시작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일어났던 피의 대학살은 단 며칠 만에 러시아 곳곳으로 번져 갔던 거대한 일련의 대중파업을 촉발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광범한 부분들 사이에, 그리고 페테르스부르크로부터 제국의 모든 변두리에 이르기까지 혁명적 행동에 대한 요구를 불러일으키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1월 22일에 페테르스부르크 에서 벌어졌던 반란은 짜르 제국 수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그에 앞서 1905년 1월에 시작한 대중파업의 결정적 계기였을 뿐이다. 이 1월의 대중파업이 1904년 12월에 코카서스와 바쿠에서 일어나 러시아 곳곳을 한때 마비시켰던 거대한 총파업에 직접 영향을 받아 일어났음은 의심할 나위 없다. 바쿠의 12월 사건들은 주기적인 지진과 같이 남부 러시아 전체를 뒤흔든 거대한 대중파업들 가운데 최근의 강력한 지류였을 뿐이고, 그 서막은 1902년 3월에 코카서스의 바툼에서 있었던 대중파업이었다. 마침내 현재의 혁명적 봉기로 계속 이어진 이 맨처음 대중파업 운동은 1896년과 1897년의 페테르스부 르크 직물 노동자들의 거대한 총파업에서 시작하여 5년 또는 6년 단위로 구분된다. 그리고 이 맨처음 대중파업 운동은 몇 년 동안의 명백한 정체와 강력한 반동의 시기 때문에 현재의 혁명과 명확히 구분된다. 그러나 현재의 계급의식과 혁명적 에너지를 갖기까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겪은 내적인 정치적 발전을 아는 사람이라면, 오늘날 대중투쟁의 역사가 페테르스부르크 총파업과 함께 시작되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일어났던 총파업은 그 뒤에 벌어진 대중파업들의 모든 주요한 요소들의 싹을 이미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파업 문제에서 중요하다. 또한, 1896년의 페테르스부르크 총파업은 순전히 경제적이고 부분적인 임금 투쟁으로 시작하였다. 원인은 페테르스부르크의 방적공과 방직공들이 참을 수 없는 열악한 노동조건, 즉 하루 13~14시간이나 15시간의 노동, 지독한 도급률, 계속되는 비열한 고용주의 기만 등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아주 사소한 일들이 쌓여 참을 수 없어 마침내 폭발할 때까지 이러한 조건들을 오랫동안 참아 왔다. 혁명가들에 대한 공포로 2년 동안 연기되었던 현재의 짜르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이 1896년 5월에 거행되었다. 이 때에 페테르스부르크의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충성심을 돋보이게 하려고 노동자들에게 3일의 의무 휴가를 실시했다. 그러나 의무 휴가에만 관심이 있던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불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노동자들은 이에 분개하여 행동하기 시작했다. 에카테린호프 공원에서 선진 노동자 300명 남짓이 모여 파업을 결정하고 다음과 같은 요구를 내걸었다. 첫째, 대관식 휴가에 대한 임금 지급, 둘째, 10시간 노동 보장, 셋째, 도급률 인상 등이었다. 이 일은 5월 24일에 있었다. 일주일 동안 모든 방직 공장과 방적 공장의 기계가 멈추었고 노동자 4만 명이 총파업에 참가하였다. 오늘날의 혁명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대중파업과 견주어 보면 이 사건은 사소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 러시아의 강압적인 정치 분위기 속에서 총파업이란 들어볼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혁명의 축소판이었 다. 당연히 가장 야만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1천 명 남짓한 노동자들이 체포되었고 총파업은 진압되었다. 이미 여기에서 우리는 그 뒤에 벌어질 대중파업의 모든 기본 특징들을 보게 된다. 대중파업의 직접 원인은 완전히 우연적이었으며 심지어 사소하기까지 했으며 초보적인 모습으로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 운동이 성공하는 데는 몇 년 동안 이어져 온 사회민주주의 선동[11]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대중파업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 선동가는 앞장서 운동을 지휘했고, 혁명적 선동을 고무하려고 대중파업을 이용하 였다. 나아가 파업이 겉으로는 임금을 올리려는 단순한 경제투쟁이었지만, 정부의 태도와 사회민주주의 선동은 그것을 최고의 정치적 현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마침내 파업은 진압되었고 노동자들은 ‘패배’로 고통받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1월에 페테르스부르크 직물 노동자들이 다시 총파업을 일으켰고 이번에 는 꽤 성공을 거두었다. 러시아 모든 곳에 걸쳐 11시간 노동법을 실시하게 했다. 그럼에도 훨씬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거의 아무런 조직과 파업기금도 없이 벌였던 1896년의 1차 총파업 뒤에 러시아에서 강력한 노동조합 투쟁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 노동조합 투쟁은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온 나라로 번져 갔고 이 투쟁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적 선동과 조직에 완전히 새로운 전망이 열렸으며 얼핏 보기에 죽음 같은 침묵이 이어지던 뒷날에 지하활동을 통해 혁명을 준비할 수 있었다. 1902년 3월 코카서스에서 일어난 파업은 1896년 파업과 마찬가지로 아주 우연적이고 순전히 경제적이 며 부분적인 원인(비록 아주 다른 요인들에서 비롯했다고 할지라도)에서 비롯한 듯했다. 그러나 파업은 심각한 산업‧상업 공황과 관계가 있다. 그 공황은 러일전쟁[12]의 조짐이었으며 혁명적인 동요가 일게 한 가장 강력한 요소였다. 공황으로 프롤레타리아 대중선동에 자양분을 제공하는 거대한 실업자 대중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정부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평온함을 회복하려고 ‘남아도는 일손들’을 한꺼번에 자기 고향으로 되돌려보내는 일을 시작했다. 400명 남짓한 석유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끼칠 이 조치는 바툼에서 거대한 대중적 항의를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시위, 체포, 대량학살로 이어졌다. 마지막에 가서는 정치 재판으로 이어져 순전히 경제적이고 부분적인 문제가 갑자기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사건으로 발전했다. 완전히 ‘실속 없이’ 끝났고 마침내 진압되어 버린 바툼 파업의 반향이 니즈니 노브고로드, 사라토프와 그 밖의 도시에서 노동자들이 일련의 혁명적 대중시위들을 벌인 것으로 나타났다. 혁명운동의 물결이 사납게 밀려왔던 것이다. 이미 1902년 11월에 맨처음 진정한 혁명의 메아리가 로스토프(Rostov-on-Don)에서 총파업 형태로 울려 퍼졌다. 블라디코카서스 철도국 작업장에서 일어난 임금 분쟁이 이 운동에 원동력을 주었다. 경영주들은 임금을 깎으려 했고 그래서 사회민주당 돈 위원회는 9시간 노동, 임금인상, 벌금 폐지, 악질 기사들의 해고와 같은 요구를 내걸고 파업할 것을 선언했다. 철도국의 모든 작업장이 파업에 참가했다. 곧 다른 모든 산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가담했고 로스토프에서는 갑작스레 전에 없던 사태로 발전했다. 모든 산업 활동이 중단되었고 날마다 1만 5천에서 2만 명이 참가하는 거대한 집회가 공개적으로 열렸고, 때로는 코사크 기병대14)의 저지선으로 포위되기도 했다. 이 집회에서 처음으로 사회민주당의 대중연설가들이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사회주의와 정치적 자유에 관한 열정적인 연설을 하여 크게 호응을 받았다. 또한 수만 부의 복사본으로 혁명적 호소문들을 만들어 곳곳에 뿌렸다. 완고한 절대주의 러시아의 한가운데서 로스토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폭풍 같은 파업투쟁을 통해 처음으로 집회와 연설의 자유를 얻었다. 말할 나위 없이 여기에도 대량학살이 있었다. 블라디코카서스 철도국 작업장에서 벌어진 임금 투쟁은 며칠 만에 정치적 총파업과 혁명적 시가전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대한 반향으로 곧바로 같은 철도국의 티코레츠카야 역에서도 총파업이 이어졌다. 여기서도 대량학살과 재판이 벌어졌다. 티코레츠카야 또한 혁명의 여러 요소들로 이루어진 영속적인 사슬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03년 봄에 로스토프와 티코레츠카야 파업의 패배에 대한 응답이 나타났다. 5~7월에 남부 러시아 전체가 불타 올랐다. 바쿠, 티플리스, 바툼, 엘리자베트그라드, 오데사, 키예프, 니콜라예프, 에카테리노슬 라프가 말 그대로 총파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각각의 운동은 미리 준비된 계획에 따라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원인과 모습을 가지고 개별적인 지점에서 한 곳으로 합류한 것일 뿐이었다. 그 출발점은 몇몇 개별 공장과 부서의 부분적인 임금 투쟁이 총파업으로 나아가면서 절정에 이르렀던 바쿠였다. 티플리스에서는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해야 했던 상업 노동자 2천 명이 파업을 시작했다. 7월 4일에 그들 모두는 상점을 닫은 작업장의 고용주들에게서 요구사항을 얻어 내려고 상점을 출발해 도시를 순회하였다. 그들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상업 노동자들은 아침 8시부터 밤 8시까지의 노동시간을 쟁취했고, 곧바로 모든 공장과 작업장, 사무실 등의 노동자들이 여기에 가담했다. 신문은 발간되지 못했고, 전차는 군대의 보호로도 운행될 수 없었다. 7월 4일에 엘리자베트그라드의 모든 공장에서 순전히 경제적인 요구를 가지고 파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요구들은 거의 관철되었고 파업은 14일에 끝났다. 그러나 2주 뒤에 다시 파업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제빵공들이 시작하여 벽돌장이와 소목장이, 염색공, 제분공 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공장의 노동자들이 가담했다. 오데사에서는 임금 투쟁과 함께 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그 유명한 경무관 주바토프[13]의 계획에 따라 정부의 첩자들이 만든 ‘합법적인’ 노동자 조합이 발전했다. 역사 변증법이 또 한 번 심술궂은 장난을 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초기의 경제투쟁들(그 가운데 하나가 1896년의 위대한 페테르스부르크 총파업이다)에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른바 ‘경제’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잘못을 저지르 게 되었고, 이런 방식으로 주바토프의 참주선동이 노동자들에게 먹혀 들어갈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혁명의 세찬 물결이 잘못된 깃발을 꽂고 있는 작은 조각배에 밀어닥쳤고, 그 조각배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함대의 앞머리에서 밀려나야 했다. 주바토프 조합들은 1905년 1월의 페테르스부르크 총파업에서 그랬던 것처럼, 1904년 봄 오데사의 거대한 총파업의 도화선이었다. 오데사 노동자들은 정부가 노동자들한테 우호적인 체하고 순수한 경제파업에 동정의 손길을 뻗는 것에 속지 않고 갑자기 자신의 손에 넣을 수 있는 그 무엇을 요구했으며, 공장 안의 주바토프 ‘노동자 조합’이 아주 온건한 요구를 내건 파업을 선언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노동자들이 곧바로 거리로 나가 조합의 지도자들이 약속한 당국의 보호를 요구했을 때 신사 양반들은 도망쳐 버렸는데 이것이 노동자들을 걷잡을 수 없이 흥분시켰다. 사회민주주주의자들은 재빨리 이 사태의 선두에 나섰고, 파업운동은 다른 공장으로 확대되었다. 7월 1일 부두 노동자 2천5백 명이 임금을 80코펙에서 2루블로 올릴 것과 노동시간을 1시간 반 줄일 것을 요구하면서 파업에 들어갔다. 7월 16일에는 선원들도 파업에 가담했다. 13일에는 전차 승무원들이 파업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파업 노동자 7,8천 명 모두가 집회를 가졌다. 그들은 행진 대열을 형성하여 이 공장 저 공장을 돌아다녔고, 곧 눈사태처럼 4~5만으로 불어난 대열은 모든 작업을 정지시키려고 부두로 갔다. 도시 전체가 총파업에 휩싸였다. 키예프에서는 7월 21일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했다. 여기서도 파업이 일어난 직접 원인은 비참한 노동조건이었고 임금인상 요구가 제출되었다. 다음날 주물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 뒤따랐다. 7월 23일에 총파업의 도화선이 되는 사건이 터졌다. 밤 사이에 두 명의 철도 노동자 대표가 체포되었다. 파업 노동자들은 곧바로 그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들은 기차를 운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역에서는 모든 파업 노동자들이 부인과 가족들을 데리고 함께 철로를 점거해 버렸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권총 사격을 하겠다고 윽박지르는데도 노동자들은 가슴을 열어제치고 “쏴라!” 하고 외쳤다. 무방비 상태로 앉아 있던 군중들에게 한바탕 총격이 퍼부어졌고, 부녀자와 어린아이 들을 포함하여 30~40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키예프 전체가 같은 날 파업에 들어갔다. 군중들은 살해된 노동자들의 시체를 들고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대중시위를 벌였다. 집회, 연설, 체포, 곳곳의 시가전들 - 키예프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운동은 곧 끝났다. 그러나 인쇄공들은 노동시간을 1시간 줄였으며 임금을 1루블 올렸다. 효모 공장에는 8시간 노동이 도입되었다. 철도 작업장은 장관의 명령으로 폐쇄되었다. 다른 작업장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쟁취하려는 부분적인 파업이 계속되었다. 니콜라예프에서는 군대가 기동연습을 하려고 도시를 떠날 때까지 운동을 연기하기를 바란 사회민주당 위원회가 파업에 반대했는데도 오데사, 바쿠, 바툼, 티플리스에서 날아든 소식에 직접 영향을 받아 총파업이 일어났다. 대중은 망설이기를 거부했다. 한 공장이 시작을 알리자 파업은 이 공장에서 저 공장으로 퍼져 갔고 군대의 저항은 단지 불길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다. 혁명가를 부르는 대중의 행진 대열이 형성되었고, 여기에는 모든 노동자들, 피고용인, 전차 승무원, 남녀 모두가 참여하였다. 작업이 완전히 그쳤다. 에카테리노슬라프에서는 8월 5일에 제빵공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7일에는 철도 노동자가, 8월 8일에는 다른 모든 공장이 파업에 들어가 전차 운행이 마비되고 신문이 발행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거대한 총파업이 1903년 여름에 남부 러시아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수많은 부분적인 경제투쟁과 사소한 ‘우연적’ 사건들의 작은 시냇물이 급류를 이루어 바다로 흘러 들어갔고, 몇 주일 동안 짜르 제국의 남부 전체를 혁명적인 노동자 공화국으로 바꾸었다. 그때에 피요트르 스트루베의 자유주의 신문 "오스보보쉬데니예"(Osvoboshdenye)[14]의 통신원은 이렇게 썼다. “아침부터 밤까지 도시 전체를 뒤덮은 몇 천 명의 군중들 사이에는 동지적인 포옹, 기쁨과 열광의 환호성, 자유의 노래, 즐거운 웃음, 해학과 환희가 넘쳤다. 분위기는 매우 드높았고, 노동자들은 새롭고 더 나은 삶이 이 땅 위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거의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장엄하면서도 전원 같은 행진 모습 …….” 1904년은 전쟁과 함께 찾아왔고 대중파업 운동은 한동안 휴지기를 맞이한다. 처음에는 경찰이 계획한 ‘애국주의’ 시위들에서 일어나는 소란스러운 물결이 온 나라로 번져 갔다. 짜르의 공식적 국수주의 때문에 얼마 동안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사회의 기반이 잠식되었다. 그러나 곧 사회민주당이 영역을 확보했고, 혁명적인 노동자 시위가 경찰의 후원을 받으며 조직된 애국주의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시위와 맞서게 되었다. 드디어 짜르 군대의 수치스런 패배가 자유주의 사회의 무기력을 흔들어 깨웠다. 그러자 민주적 집회와 연회, 연설, 의견 발표와 선언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전쟁에서 망신을 당해 한때 숨통이 막힌 절대주의는 이 신사 양반들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었다. 이윽고 그들은 모든 것을 장미빛으로 보기 시작했다. 6개월 동안 부르주아 자유주의가 무대 중앙을 차지했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두운 구석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긴 침체 뒤에 절대주의는 다시 떠올랐고 지배 무리인 까마리야(camarilla)가 자신의 모든 힘을 결집하였고, 코사크 기병대 말발굽이 단 한 차례 강력하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모든 자유주의 운동은 구석으로 밀려났다. 연회와 연설, 집회는 ‘용납할 수 없는 무례함’으로 금지되었고, 자유주의는 갑자기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기진맥진한 바로 그 곳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동이 시작되었다. 1904년 12월에 실업이 발단이 된 총파업이 바쿠에서 일어났다. 노동자계급은 다시 투쟁의 장으로 돌아왔다. 연설을 가로막자 행동이 시작되었다. 바쿠에서는 몇 주일 동안 총파업의 한가운데서 사회민주당이 상황을 완전히 이끌게 되었다. 코카서스에서 일어났던 특수한 12월 사건들은 만약 그것들 자체가 작동시킨 혁명의 높아 가는 파고 때문에 그렇게 빨리 빛을 잃지 않았다면, 곧바로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바쿠에서 총파업이 일어났다는 놀랍고도 혼동스런 소식은 1905년 1월에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대중파업이 벌어지기까지 짜르 제국의 모든 곳에 전해지지는 않았다. 이 파업도 잘 알려진 대로 직접 원인은 사소한 것이었다. 두 명의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가 합법적인 주바토프 노동조합의 조합원이었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이 조치가 이 공장의 전체 노동자 1만 2천 명이 참여한 1월 16일의 연대파업을 불러일으켰다. 사회민주당은 이 파업을 기회로 잡아 요구 조건을 확대하려는 생생한 선동을 시작했고, 8시간 노동, 단결권, 연설과 언론‧출판의 자유 등d을 요구로 내걸었다. 푸틸로프 노동자들의 투쟁은 빠르게 다른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전해졌고, 며칠 만에 14만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연합 회의와 격렬한 토론을 거친 뒤 부르주아적 자유에 관한 프롤레타리아 헌장[15]이 고안되었다. 그 헌장의 첫 번째 요구는 8시간 노동이었다. 그리하여 가퐁 신부가 이끄는 20만 노동자들이 그 헌장을 들고 1월 22일에 짜르의 궁전으로 행진했다. 두 명의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를 해고한 일이 불씨가 된 이 투쟁이 단 일주일 만에 오늘날 가장 격렬한 혁명의 서곡으로 바뀐 것이다. 그 뒤에 벌어진 사건들은 잘 알려져 있다. 페테르스부르크 대학살[16]은 러시아와 폴란드, 리투아니아, 발트해 연안, 코카서스, 시베리아 등 곳곳의 산업 중심지와 도시들에서 1월과 2월에 걸쳐 거대한 대중파업 과 총파업을 낳았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대중파업이 앞서 일어난 파업과는 다른 모습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어느 곳에서나 사회민주주의 조직들이 투쟁을 호소하면서 전면에 나섰다. 페테르스부르크 프롤레타리아트와 혁명적 연대를 맺는 일이 어디서나 총파업의 원인이자 목표로 얘기되었다. 또 어디서나 시위와 연설, 군대와의 충돌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미리 준비된 계획은 없었고 조직된 행동도 없었다. 왜냐하면, 당의 호소가 대중의 자생적 봉기와 거의 보조를 맞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 지도자들은 돌진하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에게 알맞은 표어를 정식화할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다. 더욱이 앞서 벌어진 대중파업과 총파업들은 개별적인 임금 투쟁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시작되어 혁명적 상황이라는 전반적인 분위기와 사회민주주의 선동의 영향으로 빠르게 정치시위로 바뀌는 것이었다. 경제적 요소와 노동조합주의의 분산된 조건을 출발점으로 했고 마침내 전체를 아우르는 계급 행동과 정치적 방향으로 나아갔다. 운동의 방향은 이제 바뀌었다. 1월과 2월 총파업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지도로 시작된 통일된 혁명적 행동으로서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 행동은 곧 각 지구와 도시, 부문과 공장들의 지역적‧부분적‧경제적 파업이 끝없이 이어지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1905년 봄 내내 그리고 한여름까지 자본에 맞선 거의 모든 프롤레타리아트의 끊임없는 경제파업이 제국 곳곳에서 격렬하게 벌어졌다. 이 투쟁은 한편으로 거의 모든 쁘띠부르주아‧자유주의 전문직업인, 상업 노동자, 기술자, 배우 들과 예술집단의 구성원들을 사로잡았고, 다른 한편으로 하인들과 하급 경찰들, 심지어 룸펜프롤레타리아 층으로까지 번져 갔다. 이와 함께 이 투쟁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번져 갔고 심지어 군대 막사의 철문까지 두드렸다. 이 투쟁은 사회조직과 모든 부문과 지역의 정치의식에서 나타나는 온갖 복잡함을 반영하여 자본과 노동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배치되는지 보여 주는 거대하고 다채로운 그림이었다. 길다란 전체 투쟁 대열에는 대규모 산업에서 선발된 프롤레타리아 선진 부대의 정규적인 노동조합 투쟁을 비롯하여 몇몇 농촌 프롤레타리아트의 틀 잡히지 않은 항의와 동요하는 군대에게 사소한 선동을 하는 일도 있었다. 은행 회계실 안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유식하고 품위 있는 항의를 비롯하여 담배 연기로 꽉찬 어둡고 더러운 위병소에서 불만에 가득 찬 경찰들이 어색한 집회에서 털어놓는 조심스럽지만 대담한 불평이 있다. 계획과 도식을 좇아 벌어지는 ‘질서 있고 잘 훈련된’ 투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론에 따르면, 더구나 늘 멀리서 ‘어떻게 했어야 했는가’ 하는 것에 더 신경을 쏟는 사람들에 따르면, 1905년 1월에 벌어진 거대한 정치적 총파업이 수많은 경제투쟁으로 굴러 떨어져 버린 것은 아마도 큰 흠집을 남겨 그 투쟁을 ‘미약한 불꽃’(straw fire)으로 만들어 버린 ‘커다란 잘못’이었을 것이다. 또한 혁명에 참여하긴 했지만 혁명을 ‘만들어’ 내지 못했고, 심지어 혁명과정 그 자체에서 혁명의 법칙을 배워야 했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는 언뜻 보기에 총파업의 폭풍우가 뚜렷한 성과 없이 퇴조기로 접어들자 한동안 당황하는 듯했다. 그러나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던 역사는 그렇게 함으로써 참견하기 좋아하는 학교 선생의 이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피할 수도 없고 계산할 수도 없었던 혁명이라는 위대한 사업을 이룩했다. 페테르스부르크 사건에 크게 자극을 받아 프롤레타리아트가 1월에 갑작스럽게 일으킨 총반란은 겉으로 볼 때 절대주의에 대한 혁명전쟁을 선포하는 정치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최초의 전면적인 직접 행동은 훨씬 더 강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마치 전기충격과도 같이 몇 백만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계급감정과 계급의식을 처음으로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계급감정을 자각하면서 몇 백만을 헤아리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자본주의의 사슬에 묶여 몇 십 년 동안 끈기 있게 견뎌 왔던 사회적‧경제적 존재 조건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아주 갑작스럽고 철저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사슬을 흔들고 잡아당기려는 자생적‧일반적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근대 프롤레타리아트가 겪는 수많은 고통들은 그들에게 지난날의 피어린 상처들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한 쪽에선 8시간 노동을 위한 투쟁이 벌어지고 다른 쪽에선 도급제 노동에 맞서 싸웠다. 이 쪽에선 야만적인 감독을 푸대에 담아 손수레에 실어 ‘쫓아’냈고, 저 쪽에선 악명 높은 벌금제에 맞서 투쟁을 벌였다. 임금을 더 많이 받으려는 투쟁이 어디에서나 벌어졌고, 곳곳에서 가내노동을 없애려는 투쟁이 벌어졌다. 대도시의 낙후되고 볼품없는 거주지들과 지금까지 목가적인 꿈에 젖어 있었던 지방의 소도시, 봉건제의 유제를 안고 있던 시골 마을들 모두가 1월의 밝은 빛 때문에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 스스로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이제 열광적으로 이전에 무시당한 것을 보상받으려고 힘을 쏟았다. 여기에서 경제투쟁은 실제로 투쟁이 쇠퇴한 것이거나 행동이 낭비된 것이 아니라 그저 전선이 바뀐 것이다. 즉 절대주의에 맞선 맨처음 전면전에서 급작스럽고 자연스럽게 바뀐 것, 다시 말해서 자본에 대한 일반적인 고려 속에서 그 특징에 걸맞게 개별적이고 분산된 임금 투쟁의 모습을 보이는 것일 뿐이다. 총파업이 경제파업들로 쇠퇴해서 1월에 정치적 계급 행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특정한 상황에서 그리고 혁명의 특정 단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정치적 행동의 내용이 완전히 소진된 뒤에 경제적 행동이 일어나거나 경제적 행동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실제로 1월의 총파업이 무엇을 더 이룩할 수 있었을까? 아무런 생각도 없는 사람들만이 무정부주의적 계획에 따라 한 번 벌인 ‘오랫동안’(long-drawn)의 총파업으로 절대주의를 한꺼번에 파괴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러시아의 절대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분쇄해야 한다. 그러나 절대주의를 분쇄하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높은 수준의 정치 교육과 계급의식, 그리고 조직이 필요하다. 이 모든 조건들은 소책자나 전단으로는 충족될 수 없고 오직 살아 있는 정치 학교인 투쟁을 통해서만 그리고 투쟁 속에서, 혁명의 연속적인 과정 속에서만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절대주의는 단지 적절한 ‘노력’과 ‘인내’ 속에서 바라는 어떤 때에 언제든 분쇄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절대주의가 무너지는 것은 단지 러시아 사회 안의 사회적‧계급적 발전이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절대주의가 타도될 수 있기에 앞서, 그리고 타도되도록 하려면, 그 안에 근대적인 계급 분화가 이루어진 부르주아 러시아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것은 여러 사회계층과 이해관계가 집중될 것을 필요로 하며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 정당에 대한 교육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적‧급진적‧쁘띠부르주아적‧보수적‧반 동적 정당들에 대한 교육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단순히 여러 인민 계층들의 자의식, 자각, 계급의식만이 아니라 부르주아 계층들의 자기의식, 자기이해와 계급의식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것도 투쟁 속에서만, 혁명 자체의 과정에서만, 경험의 학교를 통해서만, 다른 계급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와의 충돌 속에서만, 그리고 끊임없는 상호 갈등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절대주의에 맞서는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동뿐만 아니라 이러한 부르주아 사회의 계급 분화와 계급적 성숙 또한 프롤레타리아 트의 특별한 지도적 역할 때문에 한편으로는 방해받고 곤란해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극받고 가속된다. 혁명이라는 사회과정에서 여러 저변기류들은 서로 엇갈리고 서로 억제하면서 혁명의 내적 모순들을 증대시키지만 마지막에는 가속됨으로써 그 폭발을 훨씬 더 격렬하게 한다. 따라서 이처럼 겉으로는 단순하고 순전히 기계적인 것으로 보이는 문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절대주의의 타도는 오랫동안의 연속적인 사회과정이며, 그 해결책은 사회 지반을 완전히 침식하는 것이다. 최상층은 최하층으로 바뀌고 최하층은 최상층으로 바뀌어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질서’는 혼돈으로 바뀌어야 하고 겉보기에 ‘무정부주의적인’ 혼돈은 새로운 질서로 바뀌어야 한다.” 옛 러시아의 사회 변화과정에서는 1월에 있은 맨처음 총파업의 번개뿐만 아니라 뒤이은 봄과 여름의 천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격화되는 임노동과 자본의 일반적인 적대관계는 여러 인민대중 계층들과 여러 부르주아 계층들을 결집시키는 데에, 그리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과 자유주의적‧보수적인 부르주아 지의 계급의식에 똑같은 정도로 이바지했다. 또 도시의 임금 투쟁이 모스크바에서 강력한 군주주의 산업 자본가 정당의 형성에 이바지한 것처럼 리보니아의 폭력적인 농민 봉기의 불길은 유명한 농업귀족 젬스트보[17] 자유주의를 급속하게 해체시켰다. 그와 함께 1905년 봄과 여름의 경제투쟁 시기 덕분에 도시 프롤레타리아트가 활발한 사회민주주의 선동과 지도로 뒷날 1월 서막의 모든 교훈을 흡수하고 한층 더 심화된 혁명의 과제들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서 또 다른 사회적 조건들이 지속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경제적‧사회적‧지적인 측면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생활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진 것이다. 1905년 1월 총파업은 거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그 증거는 엄청나게 많지만 아직도 거의 다가갈 수 없는 자료들 가운데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바르샤바에서 벌인 가장 중요한 몇몇 파업과 관련된 자료들을 여기에서 다루어 볼까 한다.[18] 바르샤바 금속 공업의 대공장들(릴포프 유한회사, 랜‧로벤슈타인, 루즈키 주식회사, 보르만, 슈베데 주식회사, 한츠케, 젤라치‧풀스트, 가이슬러 브로스, 에베르허트, 볼스키 주식회사, 콘라드‧야르누츠키에비츠 유한회사, 베버‧다에후, 에비츠드친스키 주식회사, 볼로노스키 철망 공장, 고스틴스키 유한주식회사, 르론‧손, 프라게 노르블린, 베르너, 부흐, 켄네베르크 브로스, 라보아, 디투나르 램프 공장, 세르코우스키, 베츠크) 가운데 22개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1월 25~26일부터) 4~5주 동안의 파업 뒤에, 9시간 노동과 25% 임금인상을 쟁취했고, 그 밖에 여러 양보 조치들을 얻어 냈다. 바르샤바의 목재 공업 대공장들, 즉 카르만스키, 다미에키, 그로멜, 체르빈스키크, 트베메로우스키, 호른, 디벤제, 트보르코우스키, 다아브, 마르텐스 등 모두 12개 작업장에서는 2월 23일까 지 파업을 벌여 9시간 노동을 쟁취했다. 그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8시간 노동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을 일주일 동안 계속해 이를 쟁취해 냈다. 벽돌쌓기 업종 전체도 2월 27일부터 파업에 들어갔고, 사회민주당의 슬로건에 따라 8시간 노동을 요구했다. 그들은 3월 1일에 모든 부문에서 임금인상과 10시간 노동, 주급제 등을 쟁취했다. 칠장이, 달구지 목수, 마구 제조인, 대장장이 들도 모두 임금을 깎이지 않고 8시간 노동을 쟁취했다. 전화 공장들에서도 10일 동안 파업이 벌어져 8시간 노동일과 10~15%의 임금인상을 쟁취했다. 힐레와 디트리치의 대규모 아마포 직조 공장에서도 1만 명 남짓한 노동자들이 9주 동안 계속된 파업 뒤에 노동시간을 1시간 줄였으며 임금을 5~10% 올렸다. 여러 가지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결과들이 바르샤바, 로즈, 소스노비츠의 모든 근대 산업부문들에서도 나타났다. 러시아에서는 더 나았다. 8시간 노동일은 1904년 12월에 바쿠의 일부 석유 노동자들만이 쟁취했지만 1905년 5월에는 키예프 지방의 설탕 노동자들이, 1905년 1월에는 사마라 지방의 인쇄 노동자들이(이들은 벌금 폐지와 성과급 piece-work 인상을 함께 쟁취해 냈다), 2월에는 페테르스부르크의 군용 의학기구를 생산하는 공장과 가구 공장, 탄약통 생산공장의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을 쟁취하였다. 나아가 8시간 노동은 블라디보스톡의 광산에도 도입되었고, 3월에는 정부의 비축물을 다루는 국영 기계 공장의 노동자 들이, 5월에는 티플리스의 전철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을 쟁취했다. 같은 달 모로소프의 대규모 면직물 공장에서 8시간 30분 노동을 쟁취했다. 11월에는 오렐시 전체의 민간 인쇄 공장의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일을 쟁취했다.(그와 함께 이들은 노동자와 고용주가 대등한 대표권을 갖는 조정기구를 설립했을 뿐 아니라 시급 20% 인상과 도급률 100% 인상을 쟁취했다.) 9시간 노동이 (2월에) 철도 작업장 전체와 정부, 육군과 해군의 많은 작업장에, 베르디안스크의 많은 공장들과, 폴타바와 무스크의 모든 인쇄소에 도입되었다. 9시간 30분 노동이 니콜라예프의 조선소, 기계 공장과 주물 공장에 도입되었고, 6월에 바르샤바 웨이터들의 총파업이 있은 뒤 수많은 카페와 레스토랑에도 9시간 30분 노동이 도입되었다.(그와 함께 1년에 2주 동안의 휴가와 20~40%의 임금인상을 쟁취했다.) 로즈와 소스노비치, 리가, 코프노, 도르파트, 민스크, 하르코프의 거의 모든 공장들과 오데사의 빵집들, 키쉬네프의 기계 공장, 페테르스부르크의 몇몇 제련 공장들, 코프노의 성냥 공장들(여기서는 10%의 임금인상과 함께), 모든 국영 선박과 항만에서 10시간 노동이 채택되었다. 임금인상은 일반적으로 노동시간 단축에 견주면 보잘것없었으나 언제나 더욱 중요했다. 바르샤바에서 는 1905년 3월 중순에 시 공업국이 임금을 전체적으로 15% 인상할 것임을 고시했다. 직물 공업의 중심인 이바노보 - 보즈노센스크에서는 임금인상률이 7~15%에 이르렀고, 코프노에서는 노동자들 가운데 73%가 임금이 올랐다. 오데사의 몇몇 빵집과 페테르스부르크의 네바 조선소 등에서는 최저임금제가 도입되었다. 이러한 양보 조치들이 다시 곳곳에서 거두어들여졌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되풀이되 는 분쟁의 원인만 제공했을 뿐이며, 복수를 위한 훨씬 더 뜨거운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1905년 봄 파업 때는 그 자체가 끝없이 확산되고 한데 얽혀 있는 일련의 경제투쟁의 서곡이 되었으며, 이 경제투쟁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겉보기에는 혁명이 정체한 때에, 러시아 전쟁터에서 바깥 세계로 아무런 충격적인 소식도 전해지지 않는 때에, 서유럽인들이 러시아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기사에 실망해 신문을 내팽개치는 때에, 실제로는 혁명의 거대한 지하작업이 날마다 시간마다 바로 제국의 심장부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쉼없이 드세지는 경제투쟁은 급속하고 압축적인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가부장적이고 비체계적인 노동 방법의 원시적 축적 단계에서 매우 현대적이고 문명화된 단계로 옮겨 가게 만들었다. 현재 러시아 산업의 실제 노동일은 러시아의 공장법(11시간의 법적 노동시간)뿐 아니라 독일의 실제 노동일보다 더 짧다. 독일의 사회 입법에서는 다다를 수 없는 목표라고 공표된 10시간 노동이 대부분의 러시아 대규모 공업에서 일반적이다. 더욱이 독일에서 그렇게도 많이 바라고 있는, 그리고 기회주의 전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수난으로 가득 찬 의회주의의 고인 물로 모든 거센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하려 한 ‘산업 입헌주의’가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폭풍우 속에서, 그리고 혁명 그 자체에서 정치적 ‘입헌주의’와 함께 이미 탄생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단순히 생활 수준이나 노동자계급 문화 수준을 전반적으로 상승시킨 것만이 아니다. 항구적인 복지 수준에서 볼 때 물질적 생활 수준은 혁명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 모순과 대조로 가득 찬 혁명은 놀랄 만한 경제적 승리와 자본가들의 가장 잔혹한 보복 행위를 함께 불러온다. 오늘의 8시간 노동이 내일은 대대적인 직장폐쇄와 몇 백만 명의 실질적인 기아 상태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급속한 밀물과 썰물의 시기에는 지속적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적‧문화적 성장이다. 이것은 갑작스레 진행되고, 정치투쟁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제투쟁에서도 거스를 수 없는 진보로 나아가는 데 완벽한 보장책을 준다. 그리고 그뿐이 아니다. 심지어 고용주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도 바뀐다. 1월 총파업과 뒤이은 1905년 파업 뒤부터 자본가의 ‘가부장’ 원칙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모든 기간산업의 중심지들에 있는 대규모 공장에서 노동자위원회가 세워진 것만으로도 고용주들은 그것과 협상하여 모든 문제들을 결정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1월 총파업 뒤에 겉보기에 ‘무질서한’ 파업과 ‘비조직적인’ 혁명적 행동이 열광적인 조직화 작업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 노동조합의 운명을 놓고 문 앞에서 잘 맞는 시계를 들고 지키는 그런 관료적 틀에 박힌 사람들을 역사는 멀리서 비웃고 있다. 언젠가는 일어날 독일의 대중파업에서 절대 무너지지 않는 요새로 되어야 할 튼튼한 조직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오히려 러시아에서는 대중파업을 통해 이미 그런 조직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독일 노동조합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진귀한 도자기가 깨지듯 혁명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조직이 산산조각 날까 봐 두려워하고 있지만, 러시아 혁명은 완전히 반대되는 그림을 보여 주고 있다. 파도 속에서 솟아오르는 비너스처럼, 회오리바람과 폭풍으로부터, 대중파업과 시가전의 불꽃 속에서 새롭고 젊으며 강력하고 활기찬 노동조합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럼 여기서 다시 한 번 제국 전체에서 가장 전형적인 보기를 하나 들어 보자. 1906년 2월말에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열린 러시아 노동조합 2차 회의에서 페테르스부르크 노동조합 대표자는 짜르 제국 수도의 노동조합 조직 발전에 대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퐁 조합을 싹 쓸어 버린 1905년 1월 22일이 전환점이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경험을 통하여 조직의 중요성과 그들 자신만이 이러한 조직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맨처음 노동조합인 인쇄공 조합은 1월 운동과 직접 관련을 맺으며 생겨났다. 임금률을 정하는 일을 하려고 임명된 위원회가 규약을 마련했고, 7월 19일에 조합이 첫 출발을 했다. 바로 이 때쯤 사무직 노동자들과 장부계원들의 조합이 생겨났다. 거의 공개적으로 존재했던 이러한 조합들 말고도 1905년 1월부터 10월까지 반합법 조합들과 비합법 조합들이 생겨났다. 보기를 들면 반합법 조합에는 보조약사들과 상업 노동자들의 조합이 있다. 비합법 조합들 가운데는 4월 24일에 처음 비밀모임을 가졌던 시계제조공들의 조합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전체 공개모임을 가지려 했던 모든 시도들은 경찰과 상업회의소 모습을 띈 고용주들의 끈덕진 저항으로 끝내 꺾이고 말았다. 이러한 불운도 조합의 존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조합 집행부 모임과는 따로 6월 9일과 8월 14일에 조합원들의 비밀집회가 열렸다. 1905년에 재봉사 70명이 참석한 숲 속 집회에서 남녀 재봉사들의 조합이 세워졌다. 조합 결성 문제가 토의된 뒤에 규약을 만들 임무를 떠맡은 위원회가 뽑혔다. 조합의 합법적 지위를 획득하려는 위원회의 모든 시도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조합 활동은 선동과 개별 작업장의 신입 회원들을 가입시키는 데 한정되었다. 구두제조공들의 조합도 마찬가지 운명에 놓였다. 7월에 도시 언저리에 있는 숲 속에서 비밀 야간 집회가 있었다. 100명이 넘는 구두제조공들이 참석했다. 노동조합 운동의 중요성과 서구 노동조합의 역사, 러시아에서 노동조합의 임무에 관한 보고서가 낭독되었다. 그리고는 노동조합 결성을 결정하였다. 규약을 제정하고 전체 구두제조공들의 집회를 열기 위한 12인위원회가 선임되었다. 규약은 작성되었으 나, 그 사이에 규약을 인쇄하고 총회를 열 수는 없었다.

이러한 시도들은 처음 출발할 때 맞닥뜨리는 어려움이었다. 그 다음에는 10월 사건들과 제2차 총파업, 짜르의 10월 30일 선언, 그리고 일시적인 ‘입헌 시대’(constitution period)가 뒤따랐다. 노동자들은 눈앞에 닥친 조직화 작업에 정치적 자유가 필요했기에 아주 열성적으로 정치적 자유의 물결에 스스로를 내던졌다. 일상적인 정치 집회 말고도 숱한 논쟁들이 벌어지고 클럽이 만들어졌으며 여기에 곧바로 보조를 맞추어 노동조합 운동이 발전하였다. 10월과 11월에 40개의 새로운 노동조합이 페테르스부르크에 생겨났다. 요즈음 ‘중앙사무국’(central bureau), 즉 노동조합평의회가 세워졌고 여러 노동조합 신문들이 생겨났다. 11월 뒤에는 중앙기관지 '노동조합'도 발간되었다. 페테르스부르크에 관한 위의 보고는 또한 모스크바, 오데사, 키예프, 니콜라예프, 사라토프, 보로네츠, 사마라, 니즈니 노브고로드 등 러시아의 모든 대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폴란드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더했다. 서로 다른 도시의 노동조합들은 서로 접촉하려고 노력했고, 협의회가 열렸다. ‘입헌 시대’가 끝나고 1905년 12월에 반동이 밀어닥쳐 얼마 동안 노동조합의 공개적이고 폭넓은 활동을 멈추게 했지만 노동조합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노동조합은 비밀조직으로 활동하면서 때때로 아주 공개적인 임금 투쟁을 벌였다. 노동조합 활동에서 합법‧비합법 조건이 독특하게 결합한 것은 대단히 모순적인 혁명적 상황에 조응하여 생겨난 것이었다. 그러나 투쟁의 한가운데서 조직화 작업은 철저하면서도 전혀 현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더욱 널리 확산되었다. 보기를 들어, (1906년 7월의) 마지막 총회에서 1만 조합원을 5명이 대표했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사회민주주의 노동조합들은 일상적인 규약을 제정했고 조합원 카드와 잘 들러붙는 스티카 등을 인쇄했다. 그리고 1905년 6월에는 바리케이드에서 싸웠고 12월에는 시가전을 벌이라는 소식이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오기만을 기다렸던 바로 그 사람들인 바르샤바와 로즈의 제빵공, 구두제조공, 기계공, 인쇄공 들이 한 차례의 대중파업과 또 다른 대중파업 사이에, 감옥과 직장폐쇄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고 적들에게 포위된 조건 속에서 노조 규약을 꼼꼼하게 검토하고 진지하게 토론할 수 있는 시간과 열의를 갖게 되었다. 어제와 내일의 이 바리케이드 전사들은 집회에서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심하게 꾸짖었고 당에서 탈퇴하겠다고 그들을 위협했다. 그 까닭은 불행하게도 노조 조합원증이 - 끊임없이 경찰의 탄압을 받으며 몰래 인쇄해야 했으므로 - 원하는 사람들에게 제때 공급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빨리 인쇄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조에 대한 이러한 열성과 진지함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보기를 들면, 1906년 7월초 2주 동안 에카테리노슬라프에 15개의 신규 노동조합들이 생겨났고 코스트로마에는 6개, 키예프, 폴타바, 스몰렌스크, 체르카시, 프로스쿠르보에서는 5~6개의 노동조합들이 생겨났다. 가장 조그만 지방도시들에서도 노동조합이 생겨났다. 이 해[1906년] 6월 4일에 모스크바 노동조합 평의회 회기 중에, 개별 노조 대표자들의 보고가 있은 뒤 다음과 같은 사항이 결정되었다. “지금은 대중파업을 벌이기에 알맞은 때가 아니기 때문에 노동조합들 은 조합원들을 훈련하고 거리 시위를 자제해야 한다. 정부 쪽에서 도발해 올 것이 예상되므로, 대중들이 거리로 몰려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노조 평의회는 어느 때든 한 노동조합이 파업을 시작하면, 다른 노동조합들은 모든 임금 투쟁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제 대부분의 경제투쟁들을 노동조합이 지도하고 있었다. 따라서 1월 총파업 뒤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거대한 경제투쟁이 혁명의 드넓은 배경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정치선동과 혁명의 외면적 사건들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고립된 투쟁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와, 이제 거대한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행동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차례로 불타 올랐다. 메이데이 시위에서는 바르샤바에서 예상치 못한 전면 총파업이 벌어져 무방비 상태의 군중들과 군인들 사이의 유혈 충돌로 끝났다. 로즈에서는 6월에 군대가 대중 행진을 해산시키자 야만적인 군대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이 10만 노동자들의 시위로 발전했다. 이 시위는 군대와 또 다른 충돌을 일으켰고, 마지막으로 6월 23~25일에는 짜르 제국에서 맨처음 바리케이드 전투를 벌이는 것으로 발전했다. 마찬가지로 6월에 오데사 항구에서는 전함 포쩸킨호 의 갑판에서 벌어진 사소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흑해함대 수병들이 처음으로 거대한 반란을 일으키자 이것은 오데사와 니콜라예프에서 곧바로 폭력적인 대중파업 형태로 발전했다. 더 나아가 이 수병들의 반란은 크론슈타트, 리바우, 블라디보스톡에서 대중파업과 수병들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10월에 페테르스부르크에서는 8시간 노동을 도입하려는 장엄한 실험이 있었다. 노동자 대표 총평의 회[19]는 혁명적인 방식으로 8시간 노동을 성취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이란 정해진 날에 페테르스부르크 전체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넘게 일하지 않을 것임을 고용주에게 통고하고 8시간이 지나면 작업장을 떠나야 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생생한 선동이 이루어졌고 프롤레타리아트는 그것을 열렬히 받아들여 실천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커다란 희생이 뒤따랐다. 보기를 들어 8시간 노동은 지금까지 11시간 노동을 해 왔고 여전히 성과급 체제에 있는 직물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이 엄청나게 줄어드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그들은 기꺼이 이를 받아들였다. 일주일 안에 페테르스부르크의 모든 공장과 작업장에서 8시간 노동이 이루어졌다. 노동자들은 너무나도 기뻤다. 고용주들은 처음에는 넋을 잃었으나 곧 자신들의 이익을 방어할 준비를 했다. 어디서나 그들은 공장을 폐쇄하겠다는 위협으로 맞섰다. 몇몇 노동자들은 협상에 동의했고 어떤 곳에서는 10시간 노동을, 어떤 곳에서는 9시간 노동을 얻어 냈다. 그러나 페테르스부르크 프롤레타리아트의 선진 부분인 대규모 국유 기계 공장의 노동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직장폐쇄로 한 달 동안 4만 5천에서 5만 명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려는 운동은 대대적인 직장폐쇄라는 커다란 걸림돌에 부딪혔던 12월 총파업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 사이에 제국 전체를 휩쓴 엄청난 규모의 제2차 총파업이 불리긴 두마안(案)[20]에 대한 응답으로 10월에 일어났다. - 이 총파업에서는 철도원들의 파업이 절정이었다. 이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트의 2차 행동은 본질적으로 1월의 1차 행동과는 이미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정치의식의 요소가 이미 훨씬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한 확실히 여기서도 대중파업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은 연금을 둘러싼 경영주와 철도원들 사이의 갈등 같은 사소하고 언뜻 보기에 우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뒤이은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총봉기는 명백히 정치적 목표에 따라 일어난 것이었다. 1월 총파업의 서곡이 짜르에게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행진이었다면, 10월 총파업 슬로건은 짜리즘의 입헌적 희극을 패배시키는 것이었다! 곧바로 총파업이 승리하고 짜르가 10월 30일 선언[21]을 했지만 10월 총파업은 1월의 경우처럼 저절로 후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새롭게 획득한 표면적 정치 자유를 밑바탕 삼아 열렬한 행동으로 돌진해 나아갔다. 시위와 집회, 새로운 신문의 발행, 공개토론이 이어졌고, 이것이 피로 물든 대학살로 끝나면 곧 새로운 대중파업과 시위들이 이어졌다. - 이것이 11~12월 사건들이 지닌 격렬한 모습이었다. 11월에는 페테르스부르크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발의하여 최초의 대중파업 시위가 유혈 사태와 폴란드와 리보니아에 대한 계엄 선포에 맞선 항의 시위로 준비되었다. 짧은 입헌 시대와 끔찍한 각성이 있은 뒤 격동은 마침내 12월에 제국 전체에 걸친 3차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그 과정과 결과가 앞의 두 경우와 전혀 달랐다. 1월의 경우처럼 정치적 행동이 경제적 행동으로 전화한 것도 아니었고, 10월의 경우처럼 급격한 승리를 얻어 낸 것도 아니었다. 진짜 정치적 자유를 가진 짜르 고문단은 더 이상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고, 혁명적 행동은 처음으로 절대주의의 물리적 폭력이라는 강력한 벽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전진해 온 경험의 논리적이고 내적인 발전에 따라서 대중파업이 이번에는 공공연한 봉기와 무장 바리케이드, 모스크바 시가전으로 전화하였다. 모스크바의 12월 사건들은 정치적 행동과 대중파업 운동에서 상승곡선의 맨꼭대기에서 처음 혁명의 마지막 해를 마감하였다. 모스크바 사건들은 러시아 혁명운동에서 논리적 발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줌과 아울러 전체 혁명운동의 미래도 함께 보여 준다. 즉, 혁명운동의 끝은 공공연한 전면 봉기인데, 이것은 일련의 예비적‧부 분적 반란이라는 학교 말고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생겨날 수 없다. 따라서 한동안은 어떤 부분에서는 겉보기에 ‘패배’로 끝나고, 하나하나 떼어 놓고 보면 ‘미성숙’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1906년은 두마 선거와 두마 사건의 해였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강력한 혁명적 본능과 상황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짜르의 모든 입헌적 광대 짓거리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자 다시 몇 달 동안 자유주의가 무대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1904년 상황이 다시 나타나, 행동이 아닌 연설의 시대가 또다시 온 것으로 보이며, 프롤레타리아트는 한동안 노동조합 투쟁과 조직화 작업에 더욱 힘을 쏟으려고 그늘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더 이상 대중파업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고 자유주의자들의 수다스러운 말잔치가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드디어 철의 장막은 찢겨지고 배우들은 쫓겨나고 있다. 그리고 자유주의의 불화살은 연기와 덧없는 증기 말고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두마를 요구하는 시위와 자유로운 발언의 시대가 다시 열림으로써, 대중파업을 호소하는 러시아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의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다. 정치적 대중파업의 역할은 완전히 소진되어 버렸다. 그와 함께 대중파업은 아직 전면적인 인민 봉기로 전환하지 못하고 있다. 자유주의자의 이야기(episode)는 과거이지만, 프롤레타리아 트의 이야기(episode)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무대는 한동안 텅빈 채로 남아 있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상호작용

우리는 앞에서 러시아 대중파업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검토해 보았다. 이러한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기 만 해도 독일의 대중파업 논쟁에서 나타난 그런 모습과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최고위원회의 결정과 일련의 계획에 따라 무미건조한 정치적 행동을 벌인다는 엄격하고 공허한 도식 대신에, 우리는 혁명이라는 커다란 틀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천여 개의 정맥으로 혁명의 모든 부분과 연결되어 있는, 피와 살을 가진 살아 있는 생명체를 여기서 보게 된다. 러시아 혁명이 우리에게 보여 준 것처럼, 대중파업은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모든 국면, 혁명의 모든 단계와 요소들을 반영하는 그러한 변화무쌍한 현실이다. 대중파업의 적용 가능성, 대중파업의 효과, 대중파업을 일으키는 요인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혁명이 이미 곤란한 형세에 빠지게 되었을 때, 그리고 확실하게 무엇을 기대할 수 없게 된 바로 그곳에서 대중파업은 갑자기 새롭고 넓은 혁명 전망을 펼쳐 준다. 그것은 때로 제국 전체를 드넓은 바다와 같이 흘러가며, 때로는 수많은 실개천으로 흩어진다. 그것은 때로 신선한 샘물처럼 땅 속에서 솟아나기도 하고 땅 속으로 아주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정치파업과 경제파업, 개별 산업부문의 총파업과 개별 도시의 총파업, 평화적 임금 투쟁과 가두의 대량학살, 바리케이드 전투 - 이 모든 것은 서로 뒤엉키며, 서로 나란히 진행되기도 하고 서로 엇갈리기도 하며 서로 뒤섞여 흘러가기도 한다. 대중파업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변화하는 현상들의 바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의 운동 법칙은 명확하다. 그 법칙은 대중파업 그 자체나 대중파업의 기술적인 (technical) 세부 항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정치적‧사회적 힘 관계에 있다. 대중파업은 단지 혁명투쟁의 형태이며, 당의 발전과 계급 분화, 반혁명의 조건 속에서 투쟁하고 있는 세력들 사이의 관계 - 이 모든 것이 아주 다양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고 거의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파업투쟁에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 - 를 완전히 교란시킨다. 그러나 파업 행동 그 자체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파업 행동은 단지 그 형태와 규모, 효과만을 변화시킬 뿐이다. 대중파업은 혁명의 약동하는 맥박이며 혁명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다. 다시 말해서 대중파업은, 러시아 혁명에서 나타났듯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효과를 높이려고 머리에서 쥐어짜 낸 교묘한 방법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운동 방식이며, 혁명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현상 형태이다. 이제 대중파업의 문제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될 몇 가지 일반적 측면을 검토해 보자. 1. 대중파업을 일회적인 고립된 행동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대중파업은 몇 년 동안, 아마도 몇 십 년 동안 지속된 계급투쟁의 모든 시기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개념이다. 대중파업에 관한 도식에서는, 지난 4년 동안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아주 다양한 대중파업들 가운데서 밋밋한 계획에 따라 시작되고 끝나 버리며 단기적인 개별 행동인 순수한 정치적 운동이라는 하나의 부차적인 파업들 - 순전히 시위적 파업(demonstration strikes) - 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우리는 러시아에서 5년 동안 일어난 모든 과정 속에서 그저 몇몇 시위적 파업들만을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개별 도시에 한정되어 있었다. 해마다 5월 1일에 바르샤바와 러시아의 로즈에서 벌였던 메이데이(May Day) 총파업은 아직 커다란 규모로 작업 거부를 하여 이날을 경축하는 수준까지는 되지 못했다. 1905년 9월 11일의 바르샤바 대중파업은 사형당한 마르틴 카스프르자크를 기리는 추모 행사였다. 1905년 11월 페테르스부르크 대중파업은 폴란드와 리보니아에 대한 계엄 선포에 맞서는 항의 시위였다. 1906년 1월 22일에 바르샤바, 로즈, 첸토콘과 돔브로와 탄광지대, 그리고 러시아의 몇몇 도시에서 벌어진 대중파업은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일어난 대학살을 애도하려는 행사였다. 또한 1906년 7월 티플리스의 총파업은 군인 반란과 관련되어 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병사들을 동정하는 시위로서 벌어졌다. 마지막으로, 똑같은 원인으로 1906년 9월 레발에서 군사재판 심리 동안에 대중파업이 벌어졌다. 그 밖에 다른 모든 크고 작은 대중파업과 총파업들은 시위적 파업이 아니라 전투적 파업이었다. 그 파업들은 대부분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고, 모두가 특수하고 지역적이며 우연한 원인에서 비롯했으며, 어떠한 계획도 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났다. 또한 저절로 거대한 운동으로 성장했으며, 그러고나서는 ‘질서 있는 후퇴’를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때로는 경제투쟁이나 시가전으로 전화했으며 때로는 저절로 무너져 내렸다. 이처럼 일반적인 모습을 볼 때 순수하게 정치적인 시위성 파업은 거대한 평면의 작은 점처럼 아주 부차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두드러진 특징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즉 시위적 파업은 전투적 파업과는 달리 당 규율과 목적의식적 지도, 정치적 사고의 총체를 보여 주며, 따라서 대중파업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성숙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운동의 출발점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기를 들어 맨처음 사회민주당의 결정에 따라 일으킨 사례로 1905년 5월 1일에 벌어진 바르샤바의 놀랄 만큼 철저했던 전면 파업은 폴란드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아주 중요한 경험이었다. 또 같은 해에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일어난 동조 파업은 러시아에서 의식적으로 계획된 대중 행동 가운데 첫 실험으로서 커다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1906년 1월 17일 함부르크 동지들이 벌인 ‘시험적인 대중파업’은, 수많은 쟁의 무기를 활발하게 쓴 첫 보기임과 아울러 함부르크 노동자계급 투쟁에서 전투적인 기운과 열망이 매우 성공적이고 설득력 있었던 두드러진 시도인데, 앞으로 독일 대중파업 역사에서 큰 몫을 차지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독일에서 대중파업의 시대는 그것이 진지하게 시작되기만 한다면, 저절로 5월 1일의 실질적인 총파업으로 이어질 것이 확실하다. 메이데이 축제는 자연히 대중파업의 지원을 받아 최초의 거대한 시위라는 명예로운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런 뜻에서 쾰른 노동조합대회 때 ‘절름발이 말’(lame horse)이라는 이름을 얻은 메이데이 축제는 여전히 그 앞에 위대한 미래가 있고,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혁명투쟁이 착실하게 발전함에 따라 그러한 시위의 중요성은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다. 예정된 계획과 당의 명령에 따라 시위적 파업이 실현되게끔 촉진하는 객관적인 계기들 - 즉 정치의식의 성장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훈련 - 바로 시위적 대중파업을 실현할 수 없게 만든다. 오늘날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 대중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전위는 대중파업을 더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농담할 기분이 아니며 이제는 오직 진지한 투쟁과 그 결과만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1905년 1월에 거대한 대중파업이 맨처음 벌어졌을 때는 시위적 요소가 뜻하지 않게도 본능적이고 자연발생적인 모습을 띠며 여전히 커다란 역할을 했지만, 8월에 두마를 해산한 것에 항의하는 시위로서 대중파업을 요구했던 러시아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의 시도는 훈련된 프롤레타리아들이 나약하고 불철저한 행동과 단순한 시위를 단호하게 반대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2. 그러나 덜 중요한 시위적 파업이 아니라, 오늘날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실제로 떠맡은 전투적 파업에 주목한다면, 경제적 계기와 정치적 계기를 따로 분리할 수 없음을 훨씬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또한 현실은 이론의 도식과는 다르며, 순수한 정치적 대중파업이 논리적으로는 가장 성숙하고 높은 단계의 노동조합 총파업에서 비롯하지만 동시에 그것과는 별개라는 식의 현학적 설명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1896~97년에 페테르스부르크 직물 노동자들 이 벌인 최초의 거대한 임금 투쟁에서부터 요즈음 1905년 12월에 일어난 거대한 총파업에 이르기까지 대중파업은 경제적인 영역에서 정치적인 영역으로 느끼지 못할 만큼 슬그머니 옮겨 간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영역과 정치적인 영역 사이에 분리선을 거의 그을 수 없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거대한 대중파업 하나하나는 이른바 러시아 대중파업의 모든 역사를 작은 규모로 되풀이하며 순전히 경제적이거나, 어떻게든 부분적인 노동조합 투쟁에서 시작해 여러 단계를 거쳐 정치적 시위로 나아간다. 1902년과 1903년에 남부 러시아에서 거대한 대중파업이 터졌을 때, 우리가 본 것처럼 바쿠에서는 실업자 징계를 둘러싼 갈등에서 생겨난 것이고, 로스토프에서는 철도 작업장 임금 분쟁에서 생겨난 것이며, 티플리스에서는 노동시간을 줄이려는 상업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생겨난 것이다. 오데사에서는 어느 조그만 공장의 임금 분쟁에서 비롯한 것이다. 1905년 1월의 대중파업은 푸틸로프 공장의 노사 분쟁에서 발전한 것이고, 10월 파업은 연금 기금을 위한 철도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발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12월 파업은 우체국과 전신소 노동자들이 단결권을 목표로 한 투쟁을 벌인 데서 발전한 것이었다. 대체로 운동의 발전이란 최초의 경제적 단계가 생략된 상황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시위의 모든 단계를 관통하는 빠른 속도와 파업이 전진하면서 다다르는 절정 속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그러나 운동은 한 방향으로만, 즉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도 움직인다. 모든 중요한 정치적 대중 행동은 그 절정에 다다르고 나서는 일련의 경제적 대중파업들을 낳는다. 그리고 이런 법칙은 하나하나의 대중파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 일반에도 적용된다. 정치투쟁이 확산되어 명확해지고 강화됨에 따라, 경제투쟁은 후퇴하기는커녕 오히려 확산됨과 아울러 더욱 조직화되고 강화된다. 이 두 가지 투쟁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정치투쟁의 모든 활발한 공격과 승리는 경제투쟁에 강력한 자극을 준다. 이것은 정치투쟁의 활발한 공격과 승리가 노동자들에게 처지 개선을 위한 싸움으로 시야를 넓혀 주고 또 싸우려는 충동을 강화시킴과 아울러 노동자들의 투쟁 정신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치 행동의 물결이 고양된 뒤에는 언제나 수많은 경제투쟁의 싹을 틔우는 기름진 퇴적물이 남고, 또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에 맞선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이 휴지기를 맞이할 때마다 노동자들을 지탱해 준다. 말하자면,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에 언제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노동자계급 역량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이다. 바로 이 저수지에서 정치투쟁은 늘 새로운 힘을 끌어내며 동시에 곳곳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칠 줄 모르는 경제적 공병(工兵)들을 각각의 첨예한 갈등으로 이끌어 간다. 그로부터 대규모 정치투쟁들이 뜻하지 않게 폭발한다. 한마디로 경제투쟁은 운동을 하나의 정치적 초점에서 다른 초점으로 나아가게 하는 장치이다. 정치투 쟁은 경제투쟁의 토양을 주기적으로 기름지게 한다. 여기서 원인과 결과는 끊임없이 자리를 바꾼다. 그러므로 우리는 러시아에서 대중파업이 벌어지는 동안에 이 두 가지 투쟁, 즉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현학적인 도식들이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완전히 분리되거나 서로 부정하는 것이 전혀 아니며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서 서로 얽혀 있는 두 측면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이 두 요소의 통일이 바로 대중파업인 것이다. 만약 거짓된 이론이 ‘순수하게 정치적인 대중파업’을 추출해 내려고 대중파업을 고상한 논리로 해부한다면, 모든 해부가 그렇듯이 이러한 해부를 통해 현상을 생생한 본질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상을 죽이게 될 것이다. 3. 마지막으로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대중파업이 혁명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러시아 대중파업의 역사는 러시아 혁명의 역사이다. 확실히 독일 기회주의의 대표자들은 ‘혁명’이라는 말을 들을 때, 곧바로 유혈 사태와 시가전, 또는 그때 치러야 할 대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논리적 결론은 다음과 같다. 대중파업은 반드시 혁명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우리가 감히 그것을 벌일 수는 없다. 사실 우리는 러시아에서 거의 모든 대중파업들이 마침내 짜르 체제의 무장 호위대와 충돌하게 되며, 거기에서 이른바 정치파업이 대규모 경제투쟁과 비슷하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혁명은 유혈 사태와는 다르며 그 이상의 어떤 것이다. 혁명을 완전히 거리의 혼란과 폭동, 즉 ‘무질서’로 보는 경찰의 해석과는 달리, 과학적 사회주의는 혁명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사회 계급관계가 철저하게 뒤집힌다는 측면을 본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러시아 혁명과 대중파업 사이에는 대중파업이 일반적으로 유혈 사태로 끝난다는 천박한 사고와는 전혀 다른 연관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러시아 대중파업의 내적 메커니즘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작용은 혁명적 시기에 한정되어 있다. 혁명적 시기의 격렬한 분위기 속에서만 노동과 자본 사이의 부분적이고 사소한 갈등이 일반적인 폭발 상태로 발전할 수 있다. 독일에서는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가장 야만적인 충돌이 해마다 매일이다시피 일어나지만 개별 행정구역이나 개별 도시, 심지어 개별 공장의 경계를 뛰어넘는 투쟁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페테르스부르크의 조직 노동자에 대한 처벌, 바쿠의 실업, 오데사의 임금 투쟁, 모스크바의 단결권을 위한 투쟁 같은 일들이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로 늘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급작스럽게 전면적인 계급 행동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들이 확실히 정치적 색채를 띠는 하나의 대중파업으로 성장할 때에도 그들은 결코 전면적인 폭발 상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뜨거운 공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프롤레타리아트가 전혀 동원되지 않는 상태에서 쉬 사그라들어 버린 네덜란드 철도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이에 대한 명확한 증거다. 그리고 거꾸로, 계급사회의 사회적 기반과 벽이 흔들거려 끊임없는 교란 상태에 빠져드는 혁명적 시기에만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계급 행동이 단 몇 시간 안에 지금까지 무감각하게 남아 있던 노동자계급의 모든 부문을 수동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격렬한 경제투쟁으로 곧바로 나타난다. 갑자기 정치적 행동에서 오는 전기충격으로 행동하기 시작한 노동자들은, 곧바로 그들의 경제적 노예 상태에 대항해 투쟁하려고 주위에 있는 무기를 잡는다. 정치투쟁의 격렬한 의사 표시는 그들로 하여금 뜻밖의 강렬함으로 자신들을 옭아맨 경제적 사슬의 무게와 압력을 느끼게 한다. 보기를 들어 독일에서는 가장 격렬한 정치투쟁 - 선거 투쟁 또는 관세법을 둘러싼 의회 투쟁 - 이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임금 투쟁의 진행 양상과 강도에 눈에 띌 정도의 직접 영향을 거의 끼치지 못했지만,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정치적 행동은 곧바로 경제투쟁을 격렬하게 벌어지게 했으며 투쟁 지역을 확산시켰다. 그래서 혁명은 먼저 경제투쟁이 정치투쟁으로 급격히 변화하고, 정치투쟁이 경제투쟁으로 급격히 변화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조건들을 만들어 내며 그러한 변화는 대중파업 속에서 나타난다. 천박한 도식에서는 대중파업과 혁명 사이의 관계를 단순히 대중파업의 마지막 국면인 거리의 유혈 충돌에서만 보지만,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어느 정도 진지하게 살펴보면, 정확히 그 반대의 관계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에서는 대중파업이 혁명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혁명이 대중파업을 산출하는 것이다. 4. 앞에서 얘기한 것을 이해하는 데는 대중파업에서 의식적인 지도와 주도권 문제를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대중파업이 하나의 고립된 행동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모든 시기를 뜻하며, 또 이 시기가 혁명의 시기라면, 대중파업은 가장 강력한 사회민주당의 최고위원회가 결정을 내렸더라도 마음대로 벌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이 명백하다. 사회민주당이 자기 멋대로 혁명을 일으키고 취소할 수 없는 것처럼, 사회민주당이 최고의 열성과 조급성을 보이는 것만으로는 활기 있고 강력한 대중운동인 진정한 대중파업의 시기를 만들 수 없다. 당 지도부의 결정과 당 규율에 따라 스웨덴의 대중파업이나 오스트리아 파업, 심지어는 1월 17일 함부르크 대중파업과 같은 일회적인 짧은 시위가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위들은 실제적인 혁명적 대중파업 시기에 일어나는 시위들과는 다르다. 이것은 외교적으로 긴장된 때에 외국 항구에서 벌이는 판에 박힌 시위가 해상의 전쟁과는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순전히 규율과 열정에 기대어 만들어 낸 대중파업은 기껏해야 에피소드 역할, 즉 노동자계급의 전투적 분위기의 징후 역할을 할 뿐이고, 거기에는 평화로운 시기의 조건들이 반영될 뿐이다. 물론 혁명적 시기에도 대중파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이 이러저러한 방식으 로 대중파업을 일으켜야 한다. 또한 노동자들의 결의와 결단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주도권과 더 광범위한 지도는 마땅히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가장 조직되고 계몽된 핵심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혁명적 시기가 이미 시작되었는데도 대부분의 투쟁들이 한 도시에 머무를 때, 이러한 주도권과 지도의 범위는 대부분 개별 투쟁과 개별 파업에만 적용된다. 그래서 우리가 보아 왔듯이, 보기를 들어 사회민주당은 이미 몇몇 경우에 바쿠, 바르샤바, 로즈,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대중파업을 직접 호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반적인 운동에 적용해 보면 이러한 성공은 매우 드문 편이다. 더 나아가 주도권과 의식적인 지도에는 아주 명확한 한계가 있다. 혁명기에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지도기관이 어떤 원인과 계기들이 대중의 폭발로 이어질까 하는 것을 예측하고 계산하기란 아주 어렵다. 또한 여기에서 주도권과 지도는 자기 멋대로 명령을 내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가장 민첩하게 적응하고 대중의 분위기에 될 수 있는 대로 긴밀하게 접촉하는 데 있다. 우리가 본 것처럼, 자발성의 요소는 추동력으로서, 또는 억제하는 영향력으로서 모든 러시아 대중파업에서 빠짐없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아직 어리고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투쟁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서 수없이 중요한 경제적인,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일반적이고 지역적인, 물질적이고 심리적인 여러 요소들이 서로 반작용하여 어느 한 행동도 수학 문제처럼 조정되고 해결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회민주당을 선두로 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도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지라도, 혁명은 공개적인 영역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기동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토대가 끊임없이 부서지고 바뀌며 무너지는 가운데 벌어지는 투쟁이다. 간단히 말해서 러시아 대중파업에서 자발성의 요소는 두드러진 역할을 했는데, 이것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혁명이 어느 누구에게도 학교 선생 역할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러시아를 볼 때, 혁명은 사회민주당이 대중파업을 명령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며 언제나 우스꽝스런 방식으로 그들의 손아귀에서 지휘봉을 빼앗거나 그들의 손아귀에 쥐어 주는 것을 보게 된다. - 우리는 독일 논쟁의 이론적 도식에서, ‘지도부’가 풀어야 할 주된 임무로 여겨졌던 대중파업에 관한 모든 문제들이 혁명 속에서 저절로 해결되는 것을 본다. 여기서 지도 문제는 곧 ‘식량 조달’, ‘비용 계산’, ‘희생’의 문제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손에 연필을 쥐고 앉아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노동운동의 상층 지도위원들 사이에서 조용하고 은밀한 모임을 가지면서는 해결할 수 없다. 대중파업 운동에 드는 비용을 계산하거나 조정하는 일이 민사 소송에서 비용을 미리 계산하는 것처럼 쓸데없는 일임을 깨닫는 순간에, 그리고 혁명이 거대한 인민대중을 무대 전면으로 끌어낼 때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확실히 러시아의 지도조직들은 힘닿는 대로 직접 닥쳐오는 희생을 끝까지 견뎌 내려고 했다. 보기를 들어 8시간 노동 쟁취 운동 뒤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대규모로 직장이 폐쇄되는 상황에서 용기 있는 희생이 몇 주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혁명의 대차대조표에서 이 정도는 바닷물 가운데 물 한 방울과 같은 것이다. 실제로 진정한 대중파업의 시기가 시작되는 바로 그때에 이 모든 ‘비용 계산’은 단지 양동이로 바닷물을 재 보려는 일로 바뀌어 버린다. 그리고 모든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대중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진정 끔찍한 가난과 고통의 바다이다. 혁명적 시기는 어마어마한 크기로 대중의 이상주의(idealism)를 한꺼번에 작동시켜 그때에 어쩔 수 없이 닥쳐오는 온갖 어려움을 대중들이 느끼지 못하게 만들면서 심각한 고통들을 해결한다. 자신이 희생될 경우에 받을 수 있는 보조금의 정확한 액수를 미리 보장받지 않고는 메이데이에도 작업을 중단하려 하지 않을 노동조합주의자의 심리를 가지고는 혁명도 대중파업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혁명적 시기의 세찬 폭풍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보조금을 요구하는 신중한 가장에서 삶 그 자체가 최고의 선물이며 물질적 안녕이 투쟁 사상에 견주어 거의 아무것도 아닌 ‘혁명적 낭만주의자’로 바뀌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대중파업의 지도가 대중파업을 시작하라는 명령이라는 뜻에서, 그리고 그 비용을 계산하 고 헤아린다는 뜻에서 혁명적 시기 그 자체의 문제라고 한다면, 대중파업의 지도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사회민주당의 의무이자 그 지도기관들의 의무가 된다. 대중파업의 기술적인 측면과 그 메커니즘에 대해 머리를 굴리는 대신에 사회민주당은 혁명적 시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 지도를 책임져야 한다. 투쟁에 실마리와 방향을 제시하는 것, 투쟁의 모든 국면과 모든 순간에 이미 풀려나 움직이는 프롤레타 리아트의 모든 힘을 당의 투쟁대오 속에서 실현되도록 정치투쟁 전술을 계획하는 것, 사회민주당의 전술이 단호함과 예리함에 바탕을 두고 결정되고 그 단호함과 예리함이 실제 힘 관계의 수준 밑으로 내려가지 않으며 오히려 그 힘 관계에 앞서도록 하는 것 - 이것이 대중파업 시기에 지도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도는 어느 정도 저절로 기술적인 지도로 바뀐다. 사회민주당의 일관되고 단호하며 선진적인 전술은 대중들 속에 안정감과 자기확신, 투쟁의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를 과소평가한 것에 뿌리를 둔 유약하고 머뭇거리는 전술은 대중에게 해롭고 혼란스러운 결과를 불러일으킬 따름이다. 첫 번째 경우에 대중파업은 ‘자발적으로’ 그리고 ‘시기 적절하게’ 일어난다. 두 번째 경우에 대중파업은 지도부가 직접 대중파업을 호소해도 여전히 효과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은 이 두 경우의 뚜렷한 보기를 보여 주고 있다.

독일에 적용될 수 있는 러시아 노동자계급 운동의 교훈

이제 러시아 대중파업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들이 독일에 얼마나 적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사회적‧정 치적 조건들과 노동운동의 역사적 상황이 독일과 러시아는 아주 다르다. 언뜻 보기에는 앞에서 설명했던 러시아 대중파업의 내적 법칙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고려할 필요조차 없는 러시아만의 특수한 조건의 산물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러시아 혁명에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내적 연관이 있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통일은 대중파업 시기에 실제 사실로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러시아 절대주의의 결과가 아닐까? 가장 단순한 파업조차 정치 범죄로 다루어져 모든 형태의 노동운동이 가로막혀 있는 상태에서 모든 경제투쟁이 정치투쟁으로 발전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보아도 아주 당연하다. 나아가 거꾸로, 처음 정치혁명이 터지고 난 뒤에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고용주들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은 지금까지 러시아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이 매우 낮았고 아직까지 자신들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어떠한 경제투쟁도 벌이지 않아 왔던 상황의 당연한 결과이다. 처음 어느 정도까지는 비참한 조건에서 일해야 했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이 처음으로 절대주의의 숨막히는 분위기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자마자 젊은이와 같은 열정으로 자신들의 상황을 개선해 나갔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러시아 대중파업에서 두드러진 자생성과 초보성뿐만 아니라 그 격렬한 혁명과정도 러시아의 정치적 후진성과 특히 동양의 전제주의를 타도해야 했기 때문에 그랬다고 설명하거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조직과 규율이 모자란 탓으로 설명하는 일이 있다. 노동자계급이 30년이나 되는 정치적 삶을 경험했고 3백만 당원을 거느린 강력한 사회민주당이 있으며 25만의 선발된 병력이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있는 나라의 정치투쟁이나 대중파업이 중세에서 근대 부르주아 질서로 막 도약한 반(半)야만적인 단계의 나라처럼 격렬하고 초보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아무래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생각들이 형식적인 법률책에서 한 나라의 사회적 조건이 얼마나 성숙했는지 알아내려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이러한 생각에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하나하나 검토해 보자. 첫째로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경제투쟁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이다. 사실 러시아에서 일어난 파업과 임금 분쟁은 1890년대 이래로 점점 더 일상화되었고 심지어 러시아령 폴란드에서는 1880년대 이래로 그러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동자들을 위한 시민의 권리를 획득했다. 물론 이러한 파업과 임금 분쟁에는 자주 경찰의 야만적인 탄압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이러한 투쟁은 보통 일어나는 일이었다. 보기를 들어 일찍이 1891년에 바르샤바와 로즈에서는 상당한 파업기금이 모였고, 이 해에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열정이 페테르스부르크와 그 밖의 러시아 곳곳에서 몇 년 뒤에 성행할 ‘경제적인’ 환상을 폴란드에 한때 유행시켰다. 이와 마찬가지로 짜르 제국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 이전에 구제받아 마땅한 빈민의 생활 수준에 있었다는 생각에도 많은 과장이 섞여 있다. 정치투쟁에서처럼 경제투쟁에서도 가장 적극적이고 열정적이 었던 대도시 대규모 산업에 고용된 여러 노동자 계층은, 삶의 물질적 조건을 놓고 볼 때 독일 프롤레타리아 계층과 견주어 수준 차이가 거의 없었다. 높은 임금을 받는 몇몇 직업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도 있었고 심지어 더 높은 임금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노동시간의 길이에서 두 나라 대공업 사이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사실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물질적‧문화적 노예 상태에 처해 있었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로 정당화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조금만 살펴봐도 알 수 있듯이, 혁명 그 자체와 그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실천한 뛰어난 역할들과 모순된다. 구제받아 마땅한 빈민은 이처럼 정치에서 성숙하고 사상에서 뛰어난 혁명을 이루어 낼 수 없다. 투쟁의 선두에 서 있는 페테르스부르크와 바르샤바, 모스크바 와 오데사의 산업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의회주의와 질서정연한 노동조합적 실천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트가 반드시 지녀야 할 것으로, 심지어 유일한 문화적 학교로 여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문화적‧정신적으로 서구적 유형에 근접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근대적 자본주의의 대규모 발전과 십오 년 동안 경제투쟁을 고무하고 지도해 온 사회민주당이 발휘한 지적 영향력은 부르주아적 합법 질서라는 보호막 없이도 문화적으로 중요한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독일 노동자계급의 실질 생활 수준을 조금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러시아와 독일의 차이는 더 적어진다. 러시아에서 거대한 정치적 대중파업은 처음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광범한 층에서 일어났고 그들을 열병 같은 경제투쟁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독일에는 지금까지도 노동조합의 따스한 햇빛이 거의 비치지 않는 노동자계급의 완전한 후진 부분이 일상적 임금 투쟁 수단을 써서 사회적 노예 상태에서 스스로를 끌어올리려는 시도를 아직껏 한 번도 하지 않았거나 시도했더라도 실천하지 못했지 않았는가? 광부들의 빈곤을 생각해 보자. 평온한 보통 때에도, 독일 의회주의의 단조로움에서 빚어 내는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이고, 심지어 노동조합주의의 이상향이라는 영국도 - 광산 노동자들의 임금 투쟁은 전형적이고 초보적인 특성을 띠는 대중파업인데, 때때로 폭력적으로 터져나오는 것 말고는 다르게 벌어질 수가 없다. 이것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적대가 너무나 날카롭고 격렬해서 평화롭고 체계적이며 부분적인 노동조합 투쟁이라는 형태로는 적대관계가 해소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준다. 가장 격렬한 태풍의 중심에 있으며 폭발적인 토양을 갖고 있는 광산 노동자들의 비참한 조건은, ‘정상적’ 시기에서조차 모든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정치적 대중 행동과 날마다 살아가는 사회 생활의 일시적 균형을 파괴하는 강력하고 급작스런 충격을 일으키며 곧바로 격렬한 경제적‧사회적 투쟁으로 폭발할 수밖에 없다. 덧붙여 직물 노동자들의 빈곤도 생각해 보자. 이 부문에서도 몇 년에 한 번씩 포크트란트를 휩쓸었지만 참담한 패배로 끝나 버린 대체로 성과가 없었던 임금 투쟁이 일어났다. 이 투쟁들은 트러스트화한 직물 자본에 엄청나게 집중된 임금노예들에게 정치적 혼란기와 강력하고 대담한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투쟁기에 자신들의 불만을 터뜨려야 한다는, 격렬하지만 어렴풋한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이번에는 폭풍의 진정한 핵인 가내공업 노동자들과 기성복제조 노동자들, 전기 노동자들의 빈곤을 생각해 보자. 독일의 정치 분위기가 혼란스러워질수록 이 부문의 노동자들이 폭력적인 경제투쟁을 일으키리라는 것은 점점 더 확실해지고, 프롤레타리아트가 평온한 시기에 투쟁을 하는 일은 점점 더 뜸해질 것이다. 이 부문의 노동자들이 싸움에 실패하면 할수록 언제나 자본은 그들로 하여금 이를 갈면서 노예의 굴레로 되돌아가도록 점점 더 야만스럽게 강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모든 범주의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상적인’ 상황에서 자신들의 조건을 개선하려고 평화적인 경제투쟁에 참여하거나 단결의 권리를 이용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먼저, 철도 노동자들과 우편 노동자들의 뚜렷한 빈곤을 보기로 들어 보자. 정부에 고용된 이들 노동자들은 의회적이고 입헌적인 독일 상황에서도 러시아와 같은 상태, 즉 절대주의가 강력하게 힘을 발휘하고 있던 혁명 전의 러시아 상태에 있다. 이미 1905년의 위대한 10월 파업 때에 러시아 철도 노동자들은 공식적인 절대주의 체제였던 러시아에서 운동의 경제적‧사회적 자유에 관한 한 독일인들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러시아 철도 노동자들과 우편 노동자들은 폭풍 같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실상 단결권을 획득했고, 비록 일시적으로 재판과 희생이 계속되었지만 이러한 것들이 노동자들 사이의 통일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독일의 반동과 함께 철도와 우편 노동자들의 노예 같은 복종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고 그것은 무엇으로도 없앨 수 없는 바위라고 추측한다면 이것 또한 잘못된 심리학적 추정일 것이다. 심지어 독일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유럽 전체에서 거의 유례가 없을 정도의 냉담한 분위기에도 아랑곳없이 완전히 만족하면서 독일 노동조합 투쟁의 결과를 전망할 정도로 기존 상황에 길들어졌을 때조차도, 획일화된 국가노예들이 오랫동안 당해 온 억압과 가슴 속 깊이 묻어 둔 분노는 반드시 산업 노동자들의 총반란과 함께 터져나올 것이다. 그리고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가 대중파업을 수단으로 삼아 새로운 정치 권리를 거머쥐거나 기존 권리들을 방어하고자 할 때, 철도와 우편 노동자들의 대군은 필연적으로 특별한 굴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마침내 독일에서 자신들에게만 더 짐지워진 러시아 절대주의 같은 굴레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려고 일어설 것이다. 계획과 처방에 따라 거대한 대중운동들을 펼치려는 현학적인 사고에서는 독일에서 대중파업을 ‘감히 생각하기’ 앞서 반드시 철도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사건들이 진행되는 자연스런 과정은 이것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오로지 자연발생적이고 강력한 대중파업 투쟁을 통해서만 우편 노동자들과 철도 노동자들을 위한 단결권이 획득될 수 있다. 그리고 독일의 현재 조건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편화된 정치적 대중 행동의 영향과 압력 속에서 갑자기 그 해결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수가 많고 가장 중요한 농업 노동자들의 빈곤을 보자. 영국의 노동조합이 모두 공업 노동자들로만 구성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영국 국민경제의 독특한 성격과 영국의 경제적 삶에서 농업이 크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독일에서는 노동조합 조직이 만약 공업 노동자들로만 이루어져 있고 수많은 농업 노동자들에게는 다가가기 어려운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잘 조직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프롤레타리아트의 조건들 가운데 취약하고 부분적인 모습만을 드러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농촌의 상태는 바뀌거나 움직일 수 없는 것이며,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지칠 줄 모르는 교육 작업과 더 나아가서는 독일 전체의 계급정치도 농업 노동자들의 외적 수동성을 쉼없이 잠식해 들어가고 있지는 않으며,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일반적인 계급 행동도 그것이 내건 목표가 무엇이든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를 투쟁으로 끌어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치명적인 착각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 견주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경제적으로 낫다는 주장은,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산업과 부문들에서 눈을 돌려, 노동조합 투쟁의 외부에 존재할 뿐 아니라 그들의 특수한 경제 상태 때문에 노동조합의 일상적인 게릴라전이라는 협소한 틀 속으로 억지로 쑤셔 넣을 수 없는 광대한 프롤레타리아 집단을 생각할 때 크게 달라진다. 우리는 거기에서 잇따라 중요한 영역들을 보게 된다. 그 영역들에서는 날카로운 적대감이 절정에 다다랐고, 타오르기 쉬운 재료들이 풍부하게 쌓여 있다. 또 수많은 ‘러시아적 절대주의’가 아주 노골적인 형태로 존재하며 그 속에서 경제적으 로 자본에 대한 가장 초보적인 인식이 처음으로 형성된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트가 전면적으로 정치적 대중파업을 벌일 때에는 이 모든 중요한 문제들이 반드시 지배체제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도시 프롤레타리아트가 벌이는 인위적으로 조직된 시위, 즉 단순히 규율과 당 지도부의 지휘봉에 따라 실행되는 대중파업 투쟁이 일단 벌어지면 광범위한 인민대중은 냉담하고 무관심한 상태로 남게 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적 상황에서 생겨나는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강력하고 앞뒤 가리지 않는 전투적 행동은 주변 계층들한테 확실한 영향을 끼쳐, 보통 때에는 일상적 노동조합 투쟁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을 궁극적으로는 격렬한 전면적 경제투쟁으로 이끌어 간다. 그러나 다른 한편, 독일의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된 전위에게로 되돌아가서 러시아 노동자계급 이 추구했던 경제투쟁의 목표들을 염두에 둔다면, 가장 구태의연한 독일의 노동조합이 스스로를 합리화하 는 것처럼 러시아에서는 노동자가 아직 미숙한 상태라고 얕잡아보는 경향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1월 22일 뒤에 러시아 파업들에서 가장 중요한 일반적인 요구인 8시간 노동은 확실히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다다를 수 없는 강령은 아니며,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에 바람직하고 장기적인 이상이다. 이것은 또한 ‘가부장권’ 강령을 위한 투쟁, 모든 공장들에 노동자위원회를 도입하려는 투쟁, 성과급제를 폐지하려는 투쟁, 수공업에서 가내노동을 폐지하려는 투쟁, 일요일 휴무를 철저하게 지키려는 투쟁, 단결권을 인정받으려는 투쟁 등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렇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투쟁에서 경제적인 목표들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매우 현실적인 것이고 노동자들의 삶에서 매우 절실한 문제들을 건드리고 있다. 그러므로 독일에서는 뜻에 따라 골라 벌이는 순전히 정치적인 대중파업이라는 것은 반드시 단지 생기 없는 이론적 도식이 될 뿐이다. 만일 대중파업이 혁명의 세찬 소용돌이에서 자연스럽게 도시 노동자계급의 결정적인 정치투쟁을 낳는다면, 대중파업은 러시아와 똑같이 자연스럽고 정확하게 초보적인 경제투쟁의 시기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격렬한 정치투쟁의 시기, 즉 대중파업 시기에는 경제적 이해를 위한 투쟁은 간단히 밀려나고 질식될 것이라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두려움은, 사건의 진행에 대한 완전히 터무니없고 유치한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독일에서도 혁명적인 시기에는 노동조합 투쟁의 성격이 바뀔 것이고, 노동조합들이 현재 벌이고 있는 게릴라전은 애들 장난에 지나지 않게 될 정도로 그 잠재력들이 발전해 나갈 것이다. 다른 한편 대중파업의 이 같은 초보적인 경제적 격렬함으로부터 정치투쟁은 늘 새로운 충격과 신선한 힘을 얻을 것이다. 현재 러시아에서 파업의 추동력이며 이른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행동의 조정 메커니즘인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상호작용 은 마땅히 독일에서도 대중파업 조건의 결과일 것이다.

승리를 위해 필수적인 조직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의 협력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에서는 대중파업 문제와 관련된 조직 문제가 본질에서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많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태도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아직 대중파업처럼 그렇게 위험한 일을 무릅쓰면서까지 우리 힘을 시험해 볼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못하다.’ 이제 이러한 태도는 전혀 조리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이하게 숫자를 따져 보면서 프롤레타리아트가 투쟁을 하기에 ‘충분히 강력한’ 때를 결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30년 전에 독일 노동조합은 조합원 5만 명을 갖고 있었다. 명백히 그러한 규모로는 도저히 대중파업을 생각할 수 없는 수치였다. 15년 뒤에 노동조합은 네 배나 강력해졌고 조합원 수는 23만 7천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프롤레타리아 조직이 대중파업을 벌이기에 충분히 성숙했는가 하고 오늘날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질문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전혀 그렇지 않으며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의 수가 먼저 몇 백만에 이르러야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오늘날 노동조합원 수는 이미 200만 명에 이르고 있으나,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견해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으며 끝내 그럴 것이다. 알게 모르게 퍼진 가정에 따르면 대중파업을 벌일 만큼 ‘충분히 강력’하려면 모든 독일 노동자계급이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조직에 포괄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되고 나면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낡은 공식에 따라 대중파업이 ‘필요 없다’고 선언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내적인 모순을 안고 있으며, 또 순환논법에 빠져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완전한 유토피아이다. 이들은 노동자들이 직접 모든 계급투쟁에 뛰어들기에 앞서 그들이 모두 조직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발전 그리고 부르주아 국가의 상황과 조건 때문에 보통 상황에서는 어떠한 부문들 -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며 가장 중요할 뿐 아니라 가장 하층에 존재하고 자본과 국가가 가장 억압하는 부문들 - 도 격렬한 계급투쟁을 벌이지 않고서는 조금도 조직할 수 없게 한다. 차티즘 운동의 초기를 뺀다면 백 년 동안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어떠한 ‘낭만적이고 혁명적인’ 오류나 유혹도 없이 끈기 있게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일을 해 온 영국에서조차, 프롤레타리아트 안에서 좀더 높은 보수를 받는 소수를 조직했을 뿐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투쟁조직들이 그렇듯이 노동조합도 투쟁이 아닌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스스로를 계속 유지할 수 없다. 더욱이 부르주아 의회제 시기의 고인 물 속에서 벌어지는 개구리와 생쥐 사이의 싸움 같은 그러한 투쟁이 아니라 대중파업이라는 험난한 혁명적 시기의 투쟁을 통해서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다. 엄격하고 기계적이며 관료적인 사고로는 투쟁이란 조직 역량이 어느 단계에 오른 조직의 산물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생생한 변증법적인 설명은 조직을 투쟁의 산물로 파악한다. 우리는 이미 러시아에서 이러한 현상의 장엄한 본보기를 보았는데, 러시아에서는 대개 완전하게 조직되지 못한 프롤레타리아트가 1년 반 동안 격렬하게 혁명적 투쟁을 벌이면서 광범위한 조직적 부속물의 망(network)을 창출해 냈다. 이러한 종류의 또 다른 보기는 독일 노동조합의 역사에서도 발견된다. 1878년에 독일 노동조합의 조합원 수는 5만 명에 이르렀다. 오늘날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이러한 조직은 위에서 말한 대로 폭력적인 정치투쟁을 시작하기에는 전혀 ‘역량이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그때의 취약했던 독일 노동조합들은 투쟁 - 즉 사회주의자 탄압법[22] 에 대항한 투쟁 - 을 벌였고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힘을 다섯 배로 키울 만큼 ‘충분히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폐지된 뒤, 그러니까 1891년에 조합원 수는 17만 7,669명이었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조합이 이길 수 있게 했던 방법은 평온하고 꾸준하며 중단 없는 과정을 생각하는 그런 관념과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조합은 처음에 싸움으로 완전히 황폐화했으나, 곧 또 다른 물결이 일어나 새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조직에 걸맞는 독특한 성장 방법이다. 즉 투쟁 속에서 스스로를 검증하고 투쟁을 통해서 힘을 키워 나가는 것이다. 독일 상황과 노동자계급 내부의 서로 다른 부문들의 조건을 더욱 꼼꼼하게 검토해 보면, 앞으로 다가올 격렬한 정치적 대중투쟁의 시기는 독일 노동조합이 두려워하듯 노동조합이 위험스럽게 무너져 버리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조합 세력 범위가 지금까지 전혀 생각도 못 했던 크기로 확대되는 전망을 열어 줄 것이다. 이러한 세력 확대는 아주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또 다른 문제가 남아 있다. 조직된 노동자들만으로 순수한 정치적 계급 행동으로서 대중파업을 벌이려는 계획은 전혀 이루어질 수 없다. 만약 하나의 대중파업 또는 여러 대중파업들과 대중투쟁이 성공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진정한 인민대중의 운동이 되어야 한다. 즉 가장 광범위한 프롤레타리아트가 투쟁으로 이끌려야 한다. 이미 의회적인 형태 속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력이 소규모의 조직된 집단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지향을 갖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둘러싸고 있는 광범위한 주변층에 의존한다. 만일 사회민주당이 겨우 몇 십만의 당원을 가지고 선거에 들어간다면 얻는 게 하나도 없을 것이다. 비록 어디에서나 전체 유권자 가운데 대부분을 당 조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사회민주당의 경향이라 할지라도, 사회민주당의 30년 경험에서 보면 득표 수가 당 조직의 성장을 통해서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거 투쟁을 통해서 그때그때마다 획득된 새로운 노동자 층들이 조직화 작업을 위한 기름진 토양을 형성한다. 여기에서 는 조직이 투쟁 병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투쟁이 조직에 새로운 충원군을 제공한다. 이러한 설명은 의회 투쟁보다는 직접적인 정치적 대중 행동에 훨씬 더 잘 적용될 것이 명백하다. 노동자계급의 조직된 핵인 사회민주당이 전체 노동자계급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전위이며 노동운동의 정치적 선명성, 그 힘, 그리고 통일성이 이 조직에서 나온다고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운동을 조직된 소수의 운동으로 보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거대한 계급투쟁은 가장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와 협력에 의존해야만 한다. 이러한 협력을 고려에 넣지 않고, 잘 훈련된 소수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탁월하게 연출된 행군을 하면 된다는 사상에 기초한 계급투쟁 전략은 비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파업과 정치적인 대중투쟁은 독일에서 조직된 노동자들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으며, 당 중앙위원회의 정규적인 ‘지시’로 계산해 낼 수도 없다. 이러한 경우에, 그러니까 정확히 러시아 경우처럼 대중파업과 정치적인 대중투쟁은 ‘규율’과 ‘훈련’에 의존하거나 지지와 비용 문제를 가장 용의주도하게 해결할 수 있게끔 사전에 조정하는 것에 의존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정서와 상태에 따라 가장 광범위한 미조직 노동자 집단들을 투쟁으로 획득하고 끌어당길 수 있는 진정으로 혁명적이고 단호한 계급 행동에 의존한다. 일반적으로 미조직 프롤레타리아 대중과 그들의 정치적 성숙도를 과소평가하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서 조직의 역할을 더욱 과장하거나 잘못 평가하게 된다. 혁명적 시기와 극도로 불안정한 계급투쟁의 폭풍우 속에서,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에서 나타나는 전체적인 교육 효과와 사회민주당의 영향력이 인민대중의 가장 광범위한 부분들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평화적인 시기에는 조직된 사람들의 목록과 선거 통계조차도 머리를 어지럽게 할 따름이다. 우리는 이미 러시아에서 약 2년에 걸쳐 일어났던 프롤레타리아트의 거대한 총파업이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의 아주 사소한 부분적 갈등과 정부기관이 저지르는 하찮은 야만적 행동에서 비롯한 것임을 보았다. 물론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에 모두가 이 점을 알고 또 믿는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이 뜻하는 것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감정과 계급본능이 살아 있으며 매우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소수 노동자 집단의 부분적인 모든 문제를 일반적이고 계급적인 문제로 곧바로 인식했으며, 그 영향에 대하여 번개처럼 재빨리 단일하게 대응했던 것이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에서는 가장 폭력적인 노동조합 투쟁도 노동자계급의 일반적인 투쟁을 거의 일으키지 않았지만 - 그들은 투쟁을 하는 경우에 단지 조직된 부분만이 행동한다 - 러시아에서는 가장 사소한 분쟁도 세찬 폭풍우를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 가장 어리고 가장 훈련받지 못했으며 거의 교육받지 못했고 여전히 조직에서 취약한 러시아 프롤레타 리아트의 계급본능이 조직되고 훈련받았으며 계몽된 독일이나 그 밖의 서구 여러 나라 노동자계급들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게으른 서방’과 견주어 ‘젊고 기력이 있는 동방’이 지닌 독특한 장점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혁명적 대중운동의 결과로 보아야 마땅하다. 계몽된 독일 노동자의 경우 사회민주주의가 심어 놓은 계급의식은 이론적이고 잠재적인 것이다. 부르주아 의회주의가 지배적인 시기에는 대개 그러한 계급의식이 직접적인 대중 행동으로 표출될 수 없다. 이 계급의식은 선거 투쟁 동안 선거구들에서 동시에 벌어진 400건의 활동들과 수많은 부분적 경제파업 등을 모두 아우르는 관념이다. 대중 스스로가 정치투쟁의 장에 나타나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이 계급의식이 실천적이고 능동적인 성격을 띤다. 그러므로 혁명 시기의 1년은 30년의 의회 투쟁과 노동조합 투쟁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인위적으로 줄 수 없는 그러한 ‘훈련’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제공했다. 물론 이러한 생생하고 적극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감정은 혁명 시기가 끝나고 부르주아 의회주의 입헌국가가 들어선 뒤에는 상당히 약해지거나 은폐되고 잠재된 상태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전투가 더 격렬하게 벌어지는 때에는 생생한 혁명적 감정과 실천력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광범위한 층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또한 더 빠르고 더 깊게, 더욱 정력적으로 사회민주주의의 교육 활동이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진행될 것이다. 이러한 교육 작업과 독일 정부가 지금 실행하고 있는 모든 정책이 미치는 도발적이고 혁명적인 효과는, 현재 정치적으로 우둔해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노동조합의 조직화 노력에 여전히 무감각한 상태로 남아 있는 모든 집단들이 갑작스럽게 사회민주주의의 깃발을 뒤따르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시기에 나타날 것이다. 혁명적 시기의 6개월이면 10년 동안 공개 시위를 벌이고 유인물을 배포해도 결코 할 수 없었던 미조직 대중들에 대한 훈련 작업이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독일의 상황이 혁명적 시기를 위한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을 때, 오늘날 미조직 상태에 있는 후진 부분들은 투쟁 속에서 자신들이 가장 급진적이고 가장 열정적인 요소이며 남에게 질질 끌려다닐 필요가 없음을 입증해 보일 것이다. 만약 독일에서 대중파업이 일어난다면, 투쟁 가능성을 발전시켜 나갈 사람들은 가장 잘 조직된 노동자들 - 특히 인쇄공들 - 이 아니라 가장 조직력이 뒤떨어지거나 완전히 미조직된 노동자들 - 광산 노동자, 직물 노동자, 그리고 아마도 농업 노동자 들 - 일 것임은 거의 확실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러시아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분석할 때처럼 지도의 고유한 임무와 관련하여, 그리고 대중파업에서 사회민주당의 역할과 관련하여 독일에서도 똑같은 결론에 다다랐다. 이제 노동조합 과 당의 명령에 따라 인위적으로 발생하는 시위적 대중파업이라는 현학적인 도식을 버리고 절정에 이른 계급적 적대감과 정치적 상황에서 초보적인 에네르기를 가지고 솟아오르는 인민들의 운동이라는 생생한 그림 -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대중투쟁과 대중파업으로 전진하는 운동 - 으로 눈을 돌려 보자. 그러면 사회민주당의 임무가 대중파업을 기술적으로 준비하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전체 운동에 대한 정치적 지도라는 점이 자명해진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가장 잘 계몽되고 계급의식적인 전위이다. 그들은 팔짱을 낀 채 숙명론적 방식으로 ‘혁명적 상황’이 오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그렇게 하려 하지도 않는다. 또한 그들은 구름 위에서 무언가 떨어지리라 기다리는 것처럼 자생적인 인민들의 모든 운동들을 기다리고만 있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늘 그렇듯이 지금도 사물의 발전을 촉진하고 사태의 진행을 가속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언제 어디서나 자기 멋대로 대중파업 ‘구호’를 불쑥 내거는 식으로는 될 수 없다. 오히려 이 일은 무엇보다 먼저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광범한 층에게 혁명적 시기의 필연성과 혁명적 시기를 구성하는 내적인 사회적 요인들, 그리고 그 정치적 결과들을 설명해 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만약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가장 광범한 프롤레타리아 층들을 정치적 대중 행동으로 획득하거나 거꾸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대중운동의 진정한 지도권을 거머쥐고 유지한다 면, 즉 정치적 의미에서 그들이 전체 운동의 지도자가 된다면 그때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최대한의 명확함과 일관성, 단호함을 가지고 다가올 투쟁의 시기에 그들의 전술과 정치적 목표들을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혁명에서 대중파업의 역할

우리는 러시아 대중파업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미리 계획해 둔 전술의 인위적 산물이 아니라 현재의 혁명에 기초한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현상임을 보았다. 그렇다면 러시아에서 이처럼 혁명의 새로운 현상 형태를 가져온 요인들은 무엇일까? 러시아 혁명은 절대주의를 폐지하고 근대 부르주아 의회제 입헌국가를 만드는 것을 또 하나의 과제로 하였다. 그것은 형태상으로는 [1848년의]독일 3월혁명이나 18세기말의 프랑스대혁명이 해결해야 했던 과제와 완전히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형태상으로 비슷한 혁명들이 발생한 조건과 역사적 환경은 오늘날의 러시아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그들 서방의 부르주아 혁명과 현재 동방의 부르주아 혁명 사이에 자본주의가 아주 빠르게 발전하였다는 점이다. 서유럽 국가들뿐만 아니라 절대주의 러시아에서도 이러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대공업은 근대적인 계급 분화, 첨예한 사회적 불평등, 대도시의 근대적 생활, 근대적 프롤레타리아트를 창출하고 러시아에서 지배적인 형태, 즉 사회 발전에서 결정적인 생산양식이 되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붕괴되어 가는 국제 환경 속에서 러시아의 계급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 혁명을 하는 두드러지게 모순적인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제 부르주아지는 서구에서 일어났던 기존의 혁명들에서처럼 혁명에서 지도적인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쁘띠부르주아에 둘러싸여 조직되어 있지 못하고 부르주아 군대에 복무하고 있다 해도, 혁명에서 지도적이고 주도적인 요소는 계급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이다. 대부르주아 계층들 가운데 일부는 공공연히 반혁명적이고 일부는 미약하게나마 자유주의적이다. 단지 농촌의 쁘띠부르주아와 도시의 쁘띠부르주아 인텔리들만이 명확히 저항적이고 심지어 혁명적인 성향을 띠기도 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혁명에서 지도적 역할을 할 운명을 걸머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적대가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 그들 자신의 특수한 계급 이해에 대한 매우 선진적인 의식을 가지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환상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투쟁을 시작했다. 이처럼 모순된 상황은, 이러한 형식상의 부르주아 혁명에서는 절대주의에 대한 부르주아 사회의 적대감이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적대감에 좌우된다는 사실,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절대주의와 자본주의적 착취에 맞서 똑같은 비중을 가지고 벌어진다는 사실, 혁명적 투쟁의 강령은 정치적 자유와 8시간 노동 쟁취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인간적 생활을 위한 물질적 기준에 동일한 비중을 두는 데로 집중된다는 사실 등에서 나타난다. 러시아 혁명의 양면성은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밀접한 통일, 그리고 이 둘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대중파업을 통해 적절하게 표현된 러시아 사태 진행에서 두드러진 특성이다. 한편으로 혁명적 대중의 정치적 훈련과 그들에 대한 지도를 부르주아 정당이 떠맡고, 다른 한편으로 혁명이 단순히 낡은 정부의 타도 문제에만 한정되었던 기존의 부르주아 혁명에서는 단기간의 바리케이드 전투가 혁명투쟁에 알맞은 형태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노동자계급의 의식이 혁명투쟁 과정에서 계몽되 고 있고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세력을 정비하고 스스로를 지도해야 하며, 혁명이 자본주의적 착취뿐만 아니라 낡은 국가권력에도 대항해서 진행된다. 그와 함께 대중파업은 낡은 국가권력을 무너뜨리고 타도하며 자본주의적 착취를 저지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가장 광범위한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투쟁으로 끌어들이는 가장 자연스러운 수단이 되었다. 도시의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이제 러시아에서 혁명의 심장이 되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대중 정치투쟁을 벌이려면 프롤레타리아트가 먼저 하나의 대중으로 결집되어야만 한다. 그러려면 그들은 공장과 작업장, 광산과 주물 공장의 한계를 벗어나야 하며 자본주의의 일상적 멍에가 그들에게 강요한 분열과 퇴보를 극복해야 한다. 대중파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위대한 혁명투쟁의 초기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우며 충격적인 투쟁 형태이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대립이 더욱 발전하면 할수록 대중파업은 더욱 효과적이고 결정적인 것이 된다. 앞서 일어났던 부르주아 혁명들에서 주된 투쟁 형태였던 바리케이드 전투와 국가 무장력에 맞서 일으키는 공공연한 충돌은 오늘날의 혁명에서는 단지 프롤레타리아 대중투쟁의 전과정에서 절정이 나 한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와 함께 독일 사회민주당의 기회주의자들 - 베른슈타인이나 다비드 같은 작자들 - 은 혁명의 새로운 유형으로 계급투쟁의 문명화와 완화를 예언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사실 이들은 쁘띠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좇아 계급투쟁의 문명화와 약화를 바람직하게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계급투쟁이 완전히 의회 안의 경쟁으로 오그라들고 가두투쟁은 간단하게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역사는 더 심오하고 훌륭하게 해결책을 발견했다. 물론 혁명적 대중파업이 나타난다고 결코 거친 가두투쟁이 사라지거나 필요없는 것이 되어 버리지는 않지만, 그것을 오랫동안의 정치투쟁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계기 정도로 축소시킴과 아울러 혁명적 시기와 가장 정확한 의미에서 거대한 문화적 작업을 서로 결합시킨다. 여기서 문화적 작업이란 야만적인 형태의 자본주의 착취와 ‘문명화’를 통해서 전체 노동자계급의 물질적이고 지적인 수준이 상승됨을 뜻한다. 우리는 앞에서 대중파업이 절대주의에서 비롯한 러시아의 특수한 산물이 아니고, 자본주의 발전과 계급관계의 현재 단계에서 비롯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보편적 형태라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세 개의 부르주아 혁명들 - 프랑스대혁명, 독일의 3월혁명, 그리고 현재의 러시아 혁명[23] - 은 자본주의의 번영과 종말이 보이는 발전의 연속적인 사슬을 이루고 있다. 프랑스대혁명에서는 아직 완전하게 분화하지 못한 부르주아 사회 내부의 모순들이 오랫동안의 폭력적 투쟁을 위한 공간을 주었고, 혁명의 열기 속에서 처음으로 싹트고 무르익은 온갖 적대감들이 방해받거나 억제됨 없이 격렬한 급진주의 정신 속에서 거세게 휘몰아쳤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는 가운데 일어난 반세기 뒤의 독일 부르주아 혁명은 이미 자본과 노동 사이의 이해가 대립하고 있으며 힘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두 가지 측면에서 방해받았다. 그 혁명은 부르주아지와 봉건 지주의 타협 속에서 질식되어 짧고 비참한 에피소드로 끝나 버렸다. 다시 반세기 뒤, 현재의 러시아 혁명은 이미 절정을 넘어선 역사과정의 한 지점에 서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정점 가운데 다른 측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지점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으로 또다시 질식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격렬한 사회적 투쟁들을 새롭고 긴 시기까지 확대시킨다. 그리고 이 새롭고 긴 시기에는 절대주의 타도라는 낡은 과제는 혁명 그 자체가 창출한 많은 새로운 과제들에 견주면 사소한 것으로 되어 버린다. 현재의 혁명은 절대주의 러시아의 특수한 사건들 속에서 국제적인 자본주의 발전의 일반적 성과들을 실현하고 있으며, 낡은 부르주아 혁명들의 마지막 계승자라기보다는 서방에서 일련의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선구자로서 나타나고 있다. 가장 후진적인 나라가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부르주아 혁명이 지체되어 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독일과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한층 더 나아간 계급투쟁의 길과 방법들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러시아 혁명을 한 편의 훌륭한 연극, 또는 특수하게 ‘러시아적인’ 어떤 것으로 여기거나 기껏해야 투사들의 영웅주의, 즉 투쟁의 가장 부차적인 장식물들을 찬양하는 데 그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독일 노동자들이 러시아 혁명을 그들 자신의 문제로서, 즉 단순히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의 국제적 연대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역사의 한 장으로 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점이 훨씬 더 중요하다. 독일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의회주의자들은, 혁명적 대중투쟁을 하기에는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너무 유약하고’ 독일의 조건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들은 명백히 독일의 계급관계의 성숙도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을 재는 잣대가 독일 노동조합 관련 통계나 투표 숫자가 아니라 러시아 혁명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 속에 있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는다. 7월왕정과 파리의 6월전투 상황에서 프랑스의 계급대립이 무르익었음이 [1848년]독일 3월혁명에, 그리고 그 과정과 좌절에 정확히 반영되어 있듯이, 오늘날 독일에서 계급대립의 성숙은 러시아 혁명의 사건들과 그 위력 속에 반영되어 있다. 독일 노동운동 관료들이 사무실 책상서랍에서 그들의 힘과 성숙도에 관한 정보를 뒤지고 있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이 찾고 있는 것이 위대한 역사적 혁명으로 눈앞에 놓여 있음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생각해 볼 때 러시아 혁명은 국제 노동운동,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 독일 노동운동의 힘과 성숙함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러시아 혁명에서 그저 - 프롬 동지나 엘름 동지 등이 바라는 대로 - 극단적인 투쟁 형태의 사용이나 대중파업이라는 교훈만을 이끌어 내고, 그럼으로써 단순히 제국의회 선거권을 폐지하는 경우에 대비하는 예비 병력으로 자신을 깎아내리면서 대중파업은 의회를 방어하려는 소극적 수단이라는 교훈만을 이끌어 낸다면, 러시아 혁명은 통탄스럽고 터무니없이 보잘것없 는 성과를 낳은 셈이다. 우리에게서 제국의회에 대한 선거권을 빼앗아 간다면, 우리는 저항할 것이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보기를 들어 예나에서 엘름 동지가 했던 것처럼 당통 식의 영웅인 체하는 태도를 보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회적 권리를 가장 온건한 방법으로 방어하는 것은, 러시아 혁명에서처럼 무엇보다 끔찍한 대중의 희생이 자극제로 필요한, 태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혁신이라기보다 모든 야당의 가장 단순한 첫 번째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방어만으로 혁명적 시기에 프롤레타리아 정책 모두를 충족시킬 수는 없다. 그리고 한편으로 보통선거권의 폐지가 독일에서 곧바로 대중파업 투쟁을 벌일 만한 상황을 불러일으킬 것인지 확실하게 예측하기 어려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독일에서 격렬한 대중투쟁의 시기가 닥쳐올 것이 확실하다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단순히 의회 방어에 기초하여 전술을 계획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독일에서 대중파업이 일어나게 만드는 원인과 계기를 미리 파악하는 것은 사회민주당의 능력 밖의 일이다. 왜냐하면 당 대회 결의만으로는 역사적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할 일은 투쟁이 일단 벌어지면 그 투쟁의 정치적 목적을 명확히 해 주고, 그 투쟁의 정치적 목적을 단호하고 일관된 전술로서 공식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처방을 마련하면서 그 역사적 사건들을 저지할 수는 없으나, 명확하거나 헤아릴 수 있는 사건들의 결과를 미리 내다보고 그것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양식을 조정할 수는 있다.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몇 년 동안 눈여겨보아 왔던 최초의 정치적 위협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권리인 보통선거권을 광범위한 인민대중에게서 빼앗아 갈 반동 쿠데타였다. 이 만일의 사태가 엄청나게 중요한데도,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쿠데타 뒤에 공공연한 인민들의 운동이 곧바로 일어날 것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숱한 상황과 요인들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독일의 첨예한 상황과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 혁명과 앞으로 새롭게 태어날 러시아에 대한 여러 국제적 반응들을 고려할 때, 보통선거권 폐지가 가져올 독일 정치의 파국만으로는 권리를 지키려는 투쟁을 멈추게 할 수 없을 것임이 자명하다. 쿠데타에는, 짧든 길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기본적으로 격분하여 저항하는 인민대중 일반이 커다란 정치적 대가를 치르는 사태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식량 소요, 인위적으로 일으킨 육류 파동, 끝없는 군국주의와 ‘해군 지상주의’에 드는 비용, 식민 정책의 부패, 쾨니히스베르크 재판의 민족적 수치, 사회 개혁의 중단, 철도 노동자들과 체신 공무원들 그리고 농업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 사태, 광산 노동자들에 대한 기만과 조롱, 로브타우(Lobtau) 판결과 전체적인 계급별 재판 체계, 야만적인 직장폐쇄 체계 등이 그 대가들이다. 간단히 말하면 모두 30년에 걸친 융커귀족과 거대한 트러스트 자본의 연합지배가 내리누르는 중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4]그러나 한번 공이 굴러가기 시작하면, 사회민주당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결코 그것을 다시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대중파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러시아 혁명의 교훈과 본보기들이 독일에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버릇이 있다. 그 이유로 그들은 먼저 러시아가 동방의 전제주의에 서 근대적인 부르주아 법질서로 나아가는 거대한 첫 발걸음은 내딛어야만 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또한 그들은 러시아에서 혁명의 격렬함과 폭력성은 낡은 정치 질서와 새로운 정치 질서 사이의 형식 차이로 충분히 설명된다고 얘기한다. 독일에는 사회적인 대립이 그렇게 초보적인 격렬함으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필수적인 형식들과 입헌국가의 보장이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단 독일에서 공개적인 정치투쟁이 일어난다면 역사적으로 규정된 투쟁 목표조차도 현재의 러시아와 아주 다를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독일에 부르주아적 법질서가 오랫동안 존재해 왔고, 따라서 부르주아적 법질서가 완전히 고갈되어 끝장날 때가 되었으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사라질 때가 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이상 독일에서 부르주아 혁명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독일에서 공개적이고 정치적인 대중투쟁의 시기에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마지막 목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독일의 현재 조건과 이러한 과제 사이의 거리는 동방의 전제주의와 부르주아적 법질서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더 크므로, 이러한 과제는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거대한 사회적 투쟁을 통해서 이룩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제시한 전망에는 커다란 모순이 없는가? 한편으로 정치적 대중투쟁의 궁극적인 시기에는 무엇보다 먼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가장 후진적인 부분들 - 농업 노동자, 철도 노동자, 우편 노예 들 - 이 단결권을 얻을 것이며, 착취라는 가장 나쁜 군더더기를 없애야 한다. 다른 한편, 이 시기의 정치적 임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장악이다! 한편에는 가장 직접적인 이익, 즉 노동자계급의 물질적 향상을 위한 노동조합의 경제투쟁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사회민주당의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 확실히 이러한 것들은 아주 커다란 모순들이지만, 우리의 논리적 판단에서 비롯하는 모순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발달에서 비롯하는 모순이다. 자본주의는 아름다운 직선처럼 발전하 는 것이 아니라 번개처럼 지그재그로 발전한다. 다양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아주 다양한 발전 단계들을 보이고 있듯이, 각각의 나라 내부에서는 동일한 노동자계급의 서로 다른 계층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역사는 후진적인 나라들과 가장 선진적인 계층들이 한데 뭉쳐서 대중 전체가 빽빽하게 열을 지어 체계적으로 전진할 수 있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지 않는다. 역사는 그 조건이 성숙되자마자 가장 잘 준비된 부분들을 폭발시키는데, 그때 혁명적 시기의 격렬함 속에서 잃어버렸던 터전은 회복되고 불균등한 것들은 균등하게 된다. 모든 사회적 진보의 속도는 단숨에 두 배로 빨라지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에서 모든 발전 단계와 노동계급의 서로 다른 계층들의 모든 이해관계들이 사회민주주의적 인 혁명강령으로 통일되었으며, 수많은 부분적 투쟁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거대한 공동 계급 행동 속에서 통일되었다. 조건이 무르익으면 독일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사회민주당의 임무는 가장 후진적인 발전 국면이 아니라 가장 선진적인 발전 국면에 맞추어 당의 전술을 조정하는 일일 것이다.

노동조합들과 사회민주당이 공동행동할 필요성

언젠가 닥쳐올 대투쟁 때에 독일 노동자계급이 바라는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요구는, 철벽 같은 단호함과 전술의 일관성, 가장 뛰어난 실천력, 그리고 될 수 있으면 프롤레타리아 대중 가운데 지도적인 사회민주주의적 부분과 굳게 단결하는 일이다. 그러나 거대한 대중 행동을 준비하기 위한 나약한 처음 시도들은 이와 관련하여 심각한 결함을 보였다. 노동운동에서 두 개의 조직, 곧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이 완전히 분리하고 독립한 것이 그것이다. 독일 자체의 조건뿐만 아니라 러시아 대중파업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어떠한 대규모 대중투쟁일 지라도 그것이 단순히 일회적인 시위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전투적 행동이 되게 하려면, 그것을 이른바 정치적 대중파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독일에서 그러한 대중투쟁에는 노동조합 이 사회민주당만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생각하듯이 사회민주당은 취약한 조직력 때문에 125만 노동조합원의 협력 말고는 기댈 데가 없으며, 노조 지도자들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훨씬 더 근본적인 동기 때문이다. 즉 공공연한 계급투쟁 시기에 모든 직접적인 대중 행동은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경제적이라는 이유에서다. 만일 독일에서 어느 때 어떤 이유에서든 대중 행동이 대규모 정치투쟁이나 대중파업으로 벌어진다면, 그때는 강력한 노동조합 투쟁 시대가 독일에서 시작된 것이고 사태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그 운동에 동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에 아랑곳없이 진행될 것이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운동에서 비켜 서 있든 또는 운동에 저항하려고 하든, 그들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결과는, 비슷한 경우의 당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상황의 소용돌이 속으로 간단히 휩쓸려 버릴 것이고, 대중의 경제적‧정치적 투쟁들은 그들 없이도 진행될 것이다. 사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분리와 독립은 그것이 비록 역사적으로 규정된 것이라 할지라도 의회주의 시기의 인위적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으로 부르주아 사회의 평화적이고 ‘정상적인’ 과정에서 경제투 쟁은 각각의 기업에서 벌어지는 수없이 많은 개별 투쟁들로 나뉘어지고 각각의 산업부문에서 분산된 투쟁으로 벌어진다. 다른 한편, 정치투쟁을 대중 자신의 직접 행동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의 형식에 따라 대의적인 방식으로 법적 대의기구가 벌인다. 혁명적 투쟁의 시기가 시작되자마자, 즉 대중이 투쟁의 현장에 나타나자마자 경제투쟁이 여러 부분으로 분해되거나 정치투쟁이 간접적인 의회 형식으로 분해되는 일들이 중단된다. 혁명적 대중 행동 속에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은 하나이며, 노동운동에서 두 개의 분리되고 완전히 독립된 조직인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 사이의 인위적인 경계는 간단히 사라진다. 그러나 혁명적 대중운동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또한 지금 의회제 시기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계급투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부르주아 사회 안에서 자본가적 착취를 제한하면서 동시에 부르주아 사회 그 자체와 함께 착취를 폐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하나의 계급투쟁이 있을 뿐이다. 계급투쟁의 이 두 측면들이 의회주의 시기에는 기술적인 이유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데,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나란히 함께하는 행동이 아니라 단지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한 투쟁의 두 국면, 두 단계를 이룰 뿐이다. 노동조합 투쟁은 노동운동의 직접적인 이해를 포함하지만 사회민주주의적인 투쟁은 미래의 이해를 포함한다. 공산당 선언에서 얘기하고 있듯이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집단에 따른 다양한 이해들, 즉 민족적 또는 지역적인 이해들에 반대하여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통된 이해를 대표한다. 그리고 다양한 계급투쟁 발전 단계에서 그들은 전체 운동의 이해, 즉 프롤레타리아 해방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대표한다. 노동조합은 단지 다양한 집단의 이해와 노동운동 발전의 한 단계만을 대표한다.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과 노동자계급 해방의 이해를 대표한다. 그러므로 사회민주당에 대한 노동조합 의 관계는 전체에 대한 부분의 관계이며 노동조합 지도자들 사이에서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동등한 권위’ 이론이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켰을 때, 그것은 노동조합주의 그 자체의 본질과 노동자계급의 자유를 위한 대투쟁에서 노동조합이 하는 역할을 근본적으로 오해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이 따로따로 행동하고 그들이 ‘동등한 권위’를 갖고 있다는 이론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며,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 즉 그것은 사회민주당의 정치투쟁이 의회 투쟁으로 나타나는 부르주아 사회의 평화적이고 ‘정상적인’ 시기에 대한 환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 투쟁이 완전히 부르주아적인 사회 질서의 토대 위에서 벌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회주의적인 투쟁은 노동조합 투쟁을 보완하는 다른 한 짝이다. 노동조합 투쟁이 경제적인 개혁을 하려는 노력인 것과 마찬가지로 의회주의적 투쟁은 그 본성상 정치적인 개혁을 하려는 노력이다. 노동조합 투쟁이 현재를 위한 경제적인 노력을 대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회주의적인 투쟁은 현재를 위한 정치적 노력이다. 의회주의적인 투쟁은 전체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한 국면, 한 단계이며 전체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목표는 노동조합 투쟁이나 의회주의 투쟁 모두를 넘어서는 것이다. 사회민주당의 정책과 관련하여, 의회주의 투쟁은 또한 정확히 노동조합 투쟁이 그런 것처럼 전체 가운데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는 의회주의 투쟁과 노동조합 투쟁을 부르주아 사회 질서의 폐지를 목표로 하는 하나의 계급투쟁 속에 포괄하고 있다. 더욱이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이 ‘동등한 권위’를 갖고 있다는 이론은 단순히 이론의 오해나 혼동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계급 정치투쟁을 의회적 경쟁으로 왜소화하고 사회민주당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정당에서 쁘띠부르주아적인 개량주의 정당으로 바꾸기를 열망하는 사회민주당 안의 기회주의 진영의 잘 알려진 경향을 표현한 것이다.[25]만일 사회민주당이 노동조합이 주장하는 ‘동등한 권위’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오랫동안 기회주의 경향의 대표자들이 이룩해 내고자 노력했던 그러한 변질을 간접적이고 은밀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독일에서는 그러한 상황 변화가 노동운동 안에서 일어나기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 힘들다. 노동조합이 단순히 사회민주주의의 한 부분이라는 이론적 개념은 사실 독일에서는 실천적으로 세 가지 방향에서 그 고전적 표현을 발견한다. 첫째, 독일 노동조합은 사회민주주의의 직접적 산물이다. 독일에서 현재의 노동조합 운동의 출발점을 만든 것은 사회민주주의였으며, 노동조합이 그처럼 엄청난 수준에 이를 수 있게 한 것도 사회민주주의였다. 그리고 요즈음까지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그 조직에서 가장 적극적인 선진 분자들을 제공한 것도 바로 사회민주주의였다. 둘째, 또한 독일 노동조합은 사회민주주의 교의가 노동조합 실천의 정신이라는 점에서 사회민주주의 의 산물이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이 계급투쟁 이념 덕분에 모든 부르주아적이고 종파주의적인 노동조합에 대한 그들의 우월성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의 실천적 성공과 힘은, 노동조합이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실천했고 그리하여 편협한 사회주의의 수준을 넘어선 결과이다. 독일 노동조합의 ‘실천적 정치’의 힘은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적‧경제적 연관을 더 깊이 통찰한 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은 완전히 그들의 실천이 뿌리를 두고 있는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회민주주의에 대립되는 몇몇 ‘노동조합 이론’에 동조하여 노동조합을 사회민주 주의적 이론에서 해방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노동조합 자체와 노동조합의 미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단지 자살행위일 뿐이다.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에서 노동조합의 실천을 분리시키는 것은 독일 노동조합이 모든 종류의 부르주아적 노동조합에 대한 자신의 우월성을 곧바로 잃어버리는 것을 뜻하며, 지금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그저 어리석은 경험주의의 수준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차츰 그들의 수적인 힘에 대한 현실 통찰력을 잃어버렸다손 치더라 도, 노동조합은 사회민주주의 운동과 사회민주주의적인 선동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사실 많은 영역에서 노동조합 선동은 사회민주주의 선동보다 앞서 있었으며, 어디서나 노동조합 활동은 당 활동을 위한 길을 열었다. 효과라는 측면에서 보면, 당과 노동조합은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서로 보완적이었다. 그러나 독일에서 계급투쟁 모습이 대체로 뚜렷해지고 더욱 깊이 자리잡아 감에 따라 이러한 모습은 변화하였다. 많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의기양양하게 그들의 125만 조합원에 흠뻑 빠져, 사회민주당 평당원들이 노동조합 발전 전망에 관해 비관적이었던 10년 또는 20년 전 시대를 회상하면서 아직 50만의 힘도 갖고 있지 못한 사회민주당의 빈약한 당세를 업신여기는 데 익숙해 있다. 그들은 이러한 두 가지 사실 - 엄청나게 조직된 노동조합의 세력과 조직력이 약한 사회민주당의 세력 - 사이에는 어느 정도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고 본다. 몇 백만 노동자들은 바로 그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있기 때문에 당 조직에 가입하고 있지 않다. 이론에 따르면, 모든 노동자들은 이중으로 조직되어야 하고 두 종류의 집회에 참석해야 하며 이중의 회비를 내야 하고 두 종류의 노동자 신문을 읽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려면, 더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 노동운동에 대한 순수한 의무감에 기초하여 언제나 시간과 돈을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이상주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 조직에 속해야만 할 수 있는 실질적 당 생활에 대한 더 높은 수준의 열정과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당 생활이 충만되고 매력적이며,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이 높은 대도시의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 가운데 가장 계몽되고 지적인 소수한테만 현실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한 지역의 정치 생활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수도에서 사건들이 벌어지는 과정을 단순히 반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당 생활이 빈약하고 단조로울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경제적 생활 수준이 대부분 비참한 상태에 있는 변두리와 중소도시, 나아가 대도시의 광범한 노동대중들 사이에서도 이중적인 조직 형태를 확고하게 뿌리내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중들 가운데 사회민주주의에 귀기울이고 있는 노동자들의 경우, 그러한 문제는 노동조합에 가입함 으로써 해결된다. 투쟁 자체의 성격에 따라 그들의 경제투쟁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관계는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충족될 수 없다. 그가 때때로 자기 생활 수준에 압박을 받으면서 내는 조합비는 그에게 직접적이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가져다 준다. 그러나 그의 사회민주주의적 경향은 그가 특수한 당 조직에 소속하지 않고서도 여러 종류의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즉 의회 선거에 투표하거나 사회민주주의적인 공개 집회에 참여함으로써, 사회민주당 의원의 의회 연설문을 읽고 그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당 기관지를 읽음으로써 그럴 수 있다. 이러한 연관 속에서 베를린에서 사회민주당에 대한 투표자 수나 "전진"(Vorwärts)지의 구독자 수와 당 조직원 수를 견주어 보라! 그리고 보통 노동자로서, 복잡하고 미묘한 이른바 ‘두 개의 정신’이라는 이론을 이해할 수는 없으나, 사회민주주의적인 지향을 갖고 있는 노동자들이 심지어 노동조합 속에서도 사회민주주의적으로 조직되 어 있다고 느낀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결정적인 것이다. 비록 노동조합 중앙위원회가 공식적인 당 기관은 아니지만, 모든 도시의 노동자들은 공적인 생활에서 동지이며 사회민주주의자로, 제국의회나 지방의회, 또는 지역 대표자로, 그리고 믿을 만한 사회민주당 사람으로, 선거위원회의 성원으로, 당 편집자이며 비서나 단순히 대변자이자 선동가로 알려져 있는 동료들을 자신의 노동조합을 이끄는 가장 적극적인 지도자들로 인정한다. 더 나아가 그는 사회민주당의 선동 속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자본주의적 착취, 계급관계 등에 관한 똑같은 사상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노동조합 선동 활동에서 그대로 듣는다. 사실 노동조합 집회에서 가장 사랑받는 연설가는 바로 이러한 사회민주당원이다. 아울러 이러한 모든 것은 평범한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에 조직되어 있는 그 또한 노동자당의 구성원이며, 사회민주주의적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바로 여기에 독일 노동조합들이 독특하게 새로운 힘을 보충하는 원천이 있다. 중앙의 노동조합은 겉보기에 중립성을 가진 듯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사회민주주의적인 실체 때문에 현재의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부르주아 정당들이 노동조합의 정치적 ‘중립성’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만들었던 여러 노동조합들 - 카톨릭 노동조합이나 히르쉬-둔커 노동조합들 - 이 공존해 있는 상황의 결과이다. 기독교나 카톨릭, 복음주의, 또는 종교적 전통에서 자유로운 노동조합에 소속될 완전한 선택의 자유가 있는 독일 노동자들이 ‘자유노조’를 선택하거나, 또는 ‘중립성’ 노조에서 탈퇴하여 ‘자유노조’에 가입할 때에는 노동자들이 단지 중앙 노동조합이란 공공연한 근대적 계급투쟁 조직이며, 독일에서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적인 노동조합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많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가슴 속에 있는 ‘중립성’이라는 현상은 노동조합에 조직된 대중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노동조합 운동의 행운이다. 만일 중립성이라는 현상, 즉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노동조합의 소외와 분리가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눈에 확실하게 현실로 나타난다면, 노동조합은 곧바로 현재 경쟁하고 있는 다른 부르주아 조합들에 대한 모든 장점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와 함께 그들의 새로운 힘의 충전과 생생한 불길도 잃어버릴 것이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이미 두루 알려진 사실들로 증명된다. 노동조합이 정당에 대해서나 정치에서 ‘중립성’을 내세우는 것은 사회민주주 의가 대중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는 나라에서, 그리고 노동자 조직에 대한 비난이 쏟아져 대중의 눈에는 그 조직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보다는 해를 준다고 생각되는 나라, 즉 무엇보다도 무지한 상태에 있으며 부르주아적인 지향을 갖고 있는 대중 속에서 노동조합의 병력을 충원해야 하는 나라에서만 대중을 끌어들이는 수단으로서 크게 쓸모가 있다. 지난 세기 전체를 통해서, 그리고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는 그러한 나라 가운데 가장 좋은 보기는 영국이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당의 상황이 전혀 다르다. 사회민주당이 가장 강력한 정당이고 3백만이 넘는 프롤레타리아 대군에게서 새로운 활력을 얻는 나라에서, 사회민주당의 부정적인 효과를 들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조직은 반드시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독일에서 그저 사회민주당의 득표 수와 노동조합 조직의 현황을 견주어 보는 것만으로도, 독일 노동조합이 영국처럼 그들의 병력을 무지하고 부르주아 의식을 가진 대중에게서가 아니라 이미 사회민주당을 따라 자각하고 계급투쟁 사상에까지 다다른 프롤레타리아 대중에게서 충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이러한 사고를 강하게 거부하고 있으며 - 이것이 ‘중립성 이론’의 요체이다 - 노동조합을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신병 학교로 여긴다. 노조 지도자들에겐 모욕적이긴 하지만 현실적 으로 독일에서는 입에 발린 이 같은 잘못된 가정은 실제로는 완전히 반대되는 환상이다. 독일에서는 사회민주주의가 노동조합을 위한 신병 학교이다. 더욱이 몇몇 경우와 약간의 지역을 빼고 노동조합 조직 활동이 대부분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은 대체로 그 땅을 사회민주주의라는 쟁기로 갈아 엎지 않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풍성한 가을걷이에 앞서 노동조합의 씨앗과 씨 뿌리는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붉은’ 사회민주주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노동조합 조직의 수를 사회민주주의 조직의 수와 견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민주당 에 투표한 대중의 수와 견준다면 - 이것이 유일하게 올바른 방식이다 - 이 문제에 대한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견해와는 상당히 다른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즉 ‘자유노조’가 오늘날 실제로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 가운데 오로지 소수만을 대표하고 있으며, 심지어 125만 조합원을 갖고 있는데도 사회민주당을 따라 이미 각성된 대중 가운데 절반도 아직 그들의 대열로 끌어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사실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결론은 다가올 독일 대중투쟁에서 반드시 이룩해야 할 노동조합 운동과 사회민주주의적인 노동운동의 완전한 통일이 실제로 이미 있었다는 사실이다. 노동조합 운동과 사회민주주의적인 노동운동은 광범위한 대중 속에 하나가 되어 있다. 이 광범위한 대중이야말로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조합의 토대를 함께 이루며, 대중의 계급의식은 운동의 이러한 두 측면을 하나의 정신적인 통일체로 결합시킨다. 그리하여 이른바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조합주의 사이의 대립은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조합 관료들의 특정 부분 사이의 대립으로 축소된다. 이와 함께 그것은 노동조합 지도자들 가운데 특정 부분과 노동조합에 조직된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노동조합 안에서 벌이는 대립이다. 지난 15년 동안, 특히 1895년에서 1900년 사이의 엄청난 경제적 번영기에 독일에서 노동조합 운동이 빠르게 성장하여 노동조합이 완전하게 독립하였고 노동조합들의 투쟁 방법이 특화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상임 노동조합 관료제가 도입되었다. 이러한 모든 현상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 15년 동안 노동조합이 성장한 것의, 그리고 독일의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평온의 자연스런 역사적 산물이다. 비록 특정한 결점들과 분리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이 현상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악이다. 그러나 발전의 변증법에서는 노동조합을 성장시키는 이러한 필연적인 수단이 오히려 노동조합 발전이 특정 단계에 이르고 조건이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걸림돌로 변화하는 상황이 나타난다. 노동조합 지도자로서 해야 할 특화된 전문적인 행위는 당연히 본질상 편협한 시야와 평화적인 시기의 분절된 경제투쟁과 깊은 관계가 있다. 따라서 노동조합 관료들은 너무나 쉽게 관료주의와 편협한 전망으로 이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관료주의와 편협한 전망은 노동조합 운동의 미래에 가장 치명적일 수 있는 일련의 경향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무엇보다도 먼저 조직에 대한 과대평가가 그것이다. 조직은 수단에서 차츰 무엇보다도 중요한 실질적인 목표로 바뀌어 가고, 투쟁 성과들은 여기에 종속되어야 한다. 또한 이 때문에 노동조합의 안정을 해칠 걸림돌들과 위험들을 피하게 해 주는 평화를 드러내 놓고 받아들일 필요가 생겨난다. 나아가 노동조합 투쟁 방법 그 자체와 전망 그리고 성공을 과대평가한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열중하고 있는 경제적인 게릴라 전쟁의 그럴듯한 임무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사소한 경제적인 성취, 모든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에 최고의 가치를 두게 하고, 그리하여 더 커다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면서 전체 상황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만, 많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동전의 다른 측면은 강조하지 않는 대신에 오히려 지난 15년 동안 이룩한 일에 대해서만 자랑스럽게 말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다. 다른 측면이란 토지에 대한 고리대, 세금과 관세 정책, 집세를 터무니없이 올려 버린 지주의 탐욕 등, 간단히 말해서 15년 동안의 노동조합 투쟁 성과물들을 크게 무력화시킨 부르주아 정책의 객관적 경향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생활 수준이 한꺼번에 크게 낮아졌다는 점이다. 노동조합 활동의 중요성과 절대적인 필연성을 강조하지만 이러한 활동의 한계와 그에 대한 비판에 중점을 두는 사회민주주의의 총체적 진리에서 일상적 투쟁의 적극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는 노동조합의 부분적 진리가 나온다. 마지막으로 부르주아적 사회 질서가 노동조합 투쟁에 강요하는 객관적 한계를 숨기면서부터, 노동운 동의 궁극적인 목표와 관련하여 이러한 한계를 지적하는 모든 이론적 비판에 대한 적대가 생겨난다. 터무니없는 아첨과 끝없는 낙관주의가 모든 ‘노동조합 운동의 동료’의 임무로 여겨진다. 그러나 사회민주 주의적인 관점에서 비판 없는 의회주의적 낙관주의에 맞서듯 비판 없는 노동조합 낙관주의에 맞서 벌이는 투쟁이 있다. 사회민주주의적인 이론에 대항한 전선이 마침내 형성되었다.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적 인 논리에 맞서는 가운데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지 않는 노동조합 투쟁을 통하여 경제적인 진보의 끝없는 전망을 열어 줄 ‘새로운 노동조합 이론’을 암중모색하고 있다. 사실 그러한 이론이 한동안 있었다. 독일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 사이에 쐐기를 박은 채 노동조합을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바꾸려고 충동질하 는 분명한 의도에서 퍼뜨린 좀바르트 교수의 이론이 그것이다. 이러한 이론 경향과 깊은 관련을 맺으면서 노동조합 지도자와 평조합원 대중 사이의 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동료들로 구성된 지역위원회를 통한 지도 대신에, 대부분 밖에서 충원된 노동조합 관료들이 관료적으로 규제하는 사무적인 지도가 나타난다. 그에 따라 중요한 결정에 대한 주도권과 권한은 노동조합의 전문가들에게 넘어간다. 말하자면 평조합원 대중에게는 규율에 대한 복종이라는 소극적인 덕목만이 있을 뿐이다. 관료제의 이러한 어두운 측면은 요즈음 새로 도입한 지역당 서기제에서 보는 것처럼 당에 대해서도 틀림없이 상당히 위험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만일 사회민주주의적인 대중들이 이러한 서기들은 단순히 결정을 실행하려고 기관에 남아 있는 것이지, 어떠한 방식으로도 그들을 지역 당 생활을 이끄는 사람이나 지정된 지도 책임자로 여길 수 없다는 사실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아주 쉽게 그러한 결과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체의 성격 때문에, 그리고 정치투쟁의 특징 때문에, 노동조합에서처럼 사회민주당의 관료주의가 뿌리내리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보기를 들어 복잡한 세율계약 판정 등과 같은 임금 투쟁에 대한 기술적인 전문화는 조직 노동자 대중이 전체 산업 생활을 올바로 바라보는 것을 자주 가로막는다. 그것은 이들에게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 결과, 노동조합 실천의 전망과 가능성에 대한 모든 이론적 비판을 막으며 이러한 비판을 대중들이 가진 노동조합에 대한 경건한 감정을 위협하는 것으로 평가하는 사고가 두루 퍼졌다. 여기서는 노동자 대중이 오직 노동조합 투쟁의 효율성에 대한 맹목적이고 어린애 같은 신뢰를 통해서만 조직을 획득하고 유지할 수 있다. 사회민주당의 영향력은 현존 질서의 모순 속에서, 그리고 그 모순이 발전하는 복잡한 성격 속에서 대중의 통일과 계급투쟁의 모든 요소와 단계에 대한 대중의 비판적 태도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노동조합의 힘과 영향력은 비판과 결정에 대해 대중은 무능력하다는 이론에 기초해 있다. ‘인민들의 믿음은 유지되어야 한다.’ - 이것이 많은 노동조합 관료들이 노동조합주의가 객관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는 모든 비판을 이 운동의 생명에 대한 공격으로 낙인 찍는 기본 원리이자 행동이다. 마지막으로 노동조합 관료들 사이에서 이러한 전문화와 관료제가 되면서 생긴 결과는 사회민주당과 관련하여 노동조합의 완전한 독립과 ‘중립성’이다. 노동조합 조직의 극단적인 독립은 노동조합이 성장하 는 데 따른 자연적인 현상이며 정치투쟁과 노동조합 투쟁의 형식 사이에서 활동의 기술적 분화가 커지면서 나타난 결과이다. 독일 노동조합의 ‘중립성’은 노동조합 쪽에서 볼 때는 바로 프러시아·독일 경찰국가의 반동적인 노동조합법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성격의 두 측면은 바뀌어 갔다. 경찰이 강요하여 노동조합의 정치적 ‘중립성’이 나타난 데서 이제는 이른바 노동조합 투쟁 자체의 본성에 기초한 필연성 때문에 노동조합이 스스로 중립성 이론을 내세우는 데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단결된 사회민주주의적인 계급투쟁 안에서의 활동 분화와 사회민주주의적 관점과 사회민주주 의 지도부와의 분리에 의존하는 노동조합의 기술적 독립은 이제 이른바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동등한 권위’로 바뀌어 버렸다. 그러나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분리와 동등성이라는 이러한 현상은 주로 노동조합 관료들에게서 구체화되었고 노동조합의 관리 기구를 통해서 강화되었다. 노동조합 관료들의 숙련된 성원들과, 완전히 독립된 중앙위원회, 수많은 전문 출판물, 그리고 노동조합대회 등이 겉보기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회민주당의 관리 기구 즉 당 집행위원회, 당 기관지, 당 협의회 등과 완전히 수평적인 관계가 나타났다는 환상이 생겨났다.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 사이의 이러한 동등성에 대한 환상은 무엇보다도 부분적으로는 아주 비슷한 토의 사항이 사회민주당 협의회와 노동조합대회에서 논의되었으며 똑같은 문제에 대하여 서로 다른, 심지어 정반대로 결정이 내려지는 아주 우스꽝스런 상황으로 이어졌다. 노동운동의 일반적인 이해와 임무를 대변하는 당 협의회와 사회적 문제와 이해관계라는 좀더 좁은 영역을 다루는 노동조합대회 사이의 활동이 자연스럽게 나뉘면서, 노동운동에서 똑같은 일반적 문제와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사회민주당의 전망과 노동조합의 전망이 나뉘는 그릇되고 인위적인 결과가 생겨났 다. 하부의 광범위한 프롤레타리아 대중 속에서는 완전하게 사회민주당과 하나로 인식되는 똑같은 노동조합 운동이 행정적인 상부구조에서는 갑자기 사회민주당과 갈라서고 그 자체가 독자적인 거대한 권력을 갖게 되는 독특한 상황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독일 노동운동은 그 기반과 몸체는 굳건한 대중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꼭대기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이중적인 피라미드라는 독특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다가올 정치적 계급투쟁과 노동조합의 계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독일 노동운동의 완벽한 통일을 앞으로 이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고 성공적인 어떤 방법으로 그 보기를 보여 주면 분명하게 된다. 노동운동에 영향을 끼치는 개별적인 문제에 대하여 사회민주당 지도부와 노동조합 중앙위원회가 산발적이고 주기적인 협상을 벌임으로써 통일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고 의미 없다. 두 가지 형태의 노동운동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집단들은 우리가 본 것과 같은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분리와 독립을 다시 하나로 통합하려고 하는데, 한때 바로 그들이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수평적 관계와 ‘동등한 권위’라는 환상을 퍼뜨렸다. 당 집행위원회와 노동조합 총무위원회가 결합하여 이러한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잇기 어려운 곳에다가 다리를 놓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노동운동의 진정한 통일을 보장하는 것은 지도적인 조직들과 그들 연합체의 우두머리들과 같은 상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부의 조직된 프롤레타리아 대중 속에 있다. 몇 백만 노동조합원의 의식 속에서 당과 노동조합은 실제로 하나이며 둘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위한 사회민주주의적 투쟁을 대표한다. 그리고 당연히 이로부터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 사이에 생겨났던 마찰을 없애고,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의식에 대한 그들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는, 즉 노동조합을 사회민주당에 다시 결합시키는 필연성이 저절로 생겨난다. 이것은 단지 노동조합 본래의 통합으로부터 사회민주당에서 분리하는 데 이르기까지 실제 발전해 온 모습에 대한 종합(synthesis)을 표현한 것일 따름이다. 그 뒤에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 모두 거대한 성장의 시기를 겪으며 다가올 프롤레타리아 대중투쟁 시기를 준비할 것이고 둘 사이의 이해관계 속에서 그들은 반드시 다시 결합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전체 노동조합 조직을 당으로 합병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전체 노동운동과 그것의 부분인 노동조합적 표현 사이의 실제 관계에 맞게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 사이에 통일을 회복하는 문제이다. 반드시 그러한 변혁은 일부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힐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회민주주의적인 노동자 대중이 결정과 실행을 위한 자신들의 능력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것을 배우고 그와 함께 대중 자신들이 실제적인 목소리를 내며 그들의 성숙함을 발휘하는 거대한 투쟁 시기에, 그 지도부들은 단순히 ‘대변인’으로 행동하고 단지 대중의 의지에 대한 해석자일 뿐이다. 노동조합 운동은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불합리한 몇몇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환상 속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에서 승리해 온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의식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노동조합 운동은 사회민주주의의 한 부분이다.

1906년 9월 15일, 페테르스부르크.

각주

  1. 이하 본문에서 계속 나오는 ‘러시아 혁명’은 1905년 혁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론"을 쓴 것은 1906년 여름이었다. (이하 별다른 언급이 없는 한 모든 주는 1986년 런던의 Bookmarks 출판사에서 낸 영어판의 해설 주를 옮긴 것임).
  2. 바쿠닌이 1863년에 제네바에서 결성한 사회주의적민주주의동맹(The Alliance of Socialist Democracy)의 지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3. 이 때 독일 사회민주주의당(SPD)은 거의 백만 당원을 자랑하고 날마다 수십 종류의 기관지들을 출판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사회민주당에는 당 상근자들과 노동조합 상근자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관료제가 있었다. 또 사회민주당은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을 기계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기 조국 폴란드에서 추방되어 독일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냈고, SPD 안의 혁명적 경향을 앞장서 이끄는 당원이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파업론"을, 그 원제인 "대중파업․정당․노동조합"에서 나타나듯이 부분적으로는 당내 논쟁에 이바지하려고 썼다.
  4. 혁명적 사회주의로서의 사회민주주의를 말한다. 1906년 저술된, 즉 1차대전 이전 작품이라 의미 변질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이다.
  5. 마르크스는 ‘룸펜프롤레타리아트’를 (프롤레타리아트, 즉 노동계급과는 달리) 생산과정으로부터 영원히 배제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그들을 ‘고여 있는 요소’라고 불렀다. 그는 ‘부랑자들, 범죄자들, 창녀들 …… 타락한 사람들, 거지들 …… ’을 여기에 포함시켰다.
  6. 국제노동자협회, 곧 ‘제1인터내셔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64년에 세웠다.
  7. 무어인(북아프리카에 거주한 인종)은 마르크스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마르크스의 딸들이 그의 낯이 검다고 붙여준 별명이다.---옮 긴이.
  8.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과 아이스너는 SPD의 두 지도적 당원이다.
  9. 1905년 가을에 예나에서 열린 독일 사회민주당 당 대회에서는 당이 언제나 노동자들의 대중파업 요구를 고려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 대회에서 통과된 ‘예나 결의안’에서는 총파업 요구를 인정했지만, 그것은 정부가 투표권을 제한하려 들 때로 한정된 것이었다.
  10. 예나 대회에 뒤이어 열린 독일노동조합대회(German Trade Union Congress)에서는 심지어 총파업에 대한 이론적 논의조차도 ‘불장난’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금지했다. SPD 당원들이 지도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노동조합회의는 당의 정책과 모순된 입장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1906년 2월에 SPD 당 대회는 예나 대회 결의안과 쾰른 대회에서 채택한 노조의 입장 사이에는 모순된 요소가 없다고 선언했다.
  11.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RSDLP)은 1903년 당 대회에서 두 개 분파 -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 로 분열했다.
  12.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은 1904년 2월에 일어났다. 이 전쟁은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러시아의 패배로 끝났다.
  13. 세르게이 주바토프는 제정 경찰의 모스크바 총수였다. 그는 파업을 막으려고 경찰의 후원을 받는 ‘조합들’로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14. "오스보보쉬데니예"는 해외에서 발행된 러시아 자유주의자 신문이었다. 편집자인 스트루베는 이전에는 사회민주당원이었다.
  15. 8시간 노동과 아울러, 짜르에게 제출된 청원서에는 연설과 언론의 자유, 교회와 국가의 분리, 농민들한테 토지 분배하기, 노동자들의 결사의 자유, 러일전쟁 종전, 제헌의회 소집 요구들이 들어 있었다.
  16. 제정 군대가 군중에게 총을 쏘았고, 그 다음에는 기마병들이 칼을 뽑아 들고 군중에게 돌진했다. 정확한 수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해되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다.
  17. 젬스트보는 귀족과 자유당이 지배하는 농촌 의회였다. 젬스트보는 엄격하게 제한된 권한을 갖고 있었다.
  18. 1905년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5년 12월에 폴란드로 몰래 들어가 1906년 3월에 체포될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로자가 여기에서 파업 규모와 관련하여 제시하는 정보들은 아마 개인적으로 모은 정보들일 것이다.
  19. 페테르스부르크 소비에트.
  20. 불리긴은 제정 내무장관의 이름이었다. 1905년 대중파업에 대한 대응으로 정부는 두마 그러니까 대표제 의회를 설치하겠다고 제의했다. 두마 의원이 선출되는 과정은 아주 비민주적이었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지주는 1인에 한 표, 도시 부르주아지는 3인에 한 표, 농민은 15명에 한 표, 노동자는 45명에 한 표였다.”
  21. 짜르가 혁명을 중지시키려고 한 양보 조치.
  22. 이 법에서는 독일에서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조직들과 출판물들을 금지했고, 오로지 의회 활동만이 허용되었다. 이 법은 1890년에 폐지되었다.
  23. 1905년
  24. 쾨니히스베르크 재판과 로브타우 판결은 그때 유명했던 재판 사건이었다. 그리고 융커들은 극단적인 군국주의와 반(反)민주적인 견해들을 갖고 있기로 유명한 프러시아 토지귀족의 구성원들이다.
  25.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일반적으로 독일 사회민주당 안에 그러한 경향이 있음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기회주의 경향이 요즈음 솔직하게 그들의 진정한 목표와 바람을 공식화한 것은 고마운 일이다. 1909년 9월 10일 마이엔스에서 열린 당 대회에서 다비트 박사가 제출한 다음과 같은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사회민주당은 ‘혁명’이라는 단어를 폭력적인 전복이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평화로운 발전이라는 뜻, 즉 새로운 경제적 원리를 점진적으로 실현한다는 뜻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마이엔스에서 열린 공식 당 대회는 모든 종류의 혁명적 낭만주의를 거부한다. 대회는 정치권력 장악에서 단지 사회민주당의 이념과 요구로 많은 인민대중을 획득하는 것에 주목한다. 권력장악은 폭력적 수단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오직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지적인 선전과 실천적인 개혁 작업이라는 수단을 통해 생각을 혁명화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비합법적인 수단과 혁명에 의존할 때보다 합법적인 수단을 쓸 때 더욱 퍼져 갈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대회는 전술적인 원칙으로서 ‘직접적인 대중 행동’을 거부하며, ‘의회주의적 개량 행동’의 원칙을 강력히 주장한다. 즉 당은 지난날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입법과 점진적인 조직 발전을 통해 그 목표를 성취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개량적인 투쟁 방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제국 전체와 개별 주(州)의 법률 제정에서 재산이 없는 인민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줄이지 않고 완전하게 확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대회는, 다른 모든 수단이 실패할 때 노동자 계급의 합법적인 권리에 대한 공격을 물리치고 더 많은 권리를 획득하려고 어느 시간 동안 그들의 노동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 노동자 계급의 정당한 권리임을 선언한다. 그러나 정치적 대중파업은 단지 엄격하게 법적인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또한 파업 노동자들이 무력에 호소하려는 권력에 적당한 구실을 주지 않을 때에만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대회는 이러한 투쟁 방법을 사용하기 위한 필연적이고 현실적인 준비는 정치조직과 노동조합 그리고 협력조직을 더 많이 확대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단지 이러한 방식으로만 대중파업의 성공적인 실행을 보장할 수 있는 조건들이 광범위한 인민대중 사이에서 창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