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프 브로즈 티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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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요시프 브로즈 티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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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3일 (수) 10:13 판


제2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대통령
요시프 브로즈 티토
Јосип Броз Тито
출생
출생
1892년 5월 7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크메로베크
사망
사망
1980년 5월 4일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류블랴나
국적
국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유고슬라비아
약력
약력


개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혁명가이자, 구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대통령.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로서 독자적인 비동맹 중립 노선을 추구하였다.

생애

생애 초기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1892년 현재 크로아티아 지방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했기 때문에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한 티토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발칸 반도를 떠돌아 다니며 기술공으로 돈을 벌며 살았다. 그러던 중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당시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고 티토는 오스트리아군으로 징집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러던 중 티토는 러시아 제국군의 포로로 잡혔고 1917년 포로 수용소에서 러시아 혁명을 목격한다. 러시아 혁명을 목격한 티토는 볼셰비키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1920년 유고슬라비아 지방으로 돌아와 유고슬라비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여러 파업 현장을 돌아다니며 노동자 투쟁에 직접 참가했고 그러던 1928년 유고슬라비아의 국가보안법에 걸려 5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감옥생활을 하던 티토는 감옥에서도 동지들을 만나며 인맥을 넓혔고 1935년 모스크바로 건너갔다. 티토의 모스크바 생활 시기 스탈린대숙청이 있었지만 티토는 살아남았다. 티토는 1939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서기장의 자리에 올랐다.

2차 세계대전 시기

1939년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셰계대전을 일으켰고,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을 점령했다. 그리고 1941년 나치군은 동맹국 이탈리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했고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해버렸다. 이때부터 티토는 나치군과 유고슬라비아의 극우조직 우스타샤에 대항하여 파르티잔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히틀러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한 뒤 얼마 안되어 히틀러는 소련까지 침공한다.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타잔 활동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련을 침공했고 그 시기 티토의 파르티잔은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빨치산 투쟁을 계속 전개해 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군은 티토의 파르티잔을 토벌하기 위해 유고슬라비아에 30만명이나 되는 대군을 투입했다. 이는 독일이 소련군에 맞서는데 있어 나치 독일의 후방을 교란시키고 30만명이라는 대군을 동부전선에 투입시키지 못함으써 수많은 병력 손실을 초래하기까지 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히틀러는 오토 슈코르체니가 이끄는 SS 친위부대까지 투입하여 티토를 죽이려고 했다. 오토 슈코르체니의 SS는 티토를 거의 잡을 뻔했으나 티토는 위기상황에서 부하들과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나치의 티토 사살 계획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티토의 파르티잔은 나치 치하의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나치군과 파시스트 조직인 우스타샤에 대항하여 수많은 전투를 치뤘고 1945년 소련군이 유고슬라비아 내에 들어왔을때 소련군과 연합하여 수도 베오그라드를 점령함으로써 유고슬라비아를 해방시켰다.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 된 후

티토는 비록 공산권 지도자였지만 서방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고 미소냉전기 스탈린과 대립하게 되었다. 실제로 스탈린은 암살자를 보내 티토를 암살하려 했지만 암살에는 실패했고 티토는 "스탈린 동지, 다시 한 번 암살자를 보낸다면 나도 모스크바에 암살자를 보내겠소"라고 쓴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가 된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내의 소수민족들에게 우대정책을 폈다. 반대파를 제거하는데 있어서도 굉장히 유연한 방법을 썻다. 2차대전 시기 티토와 함께 파르티잔 투쟁을 했던 정적 드질라스는 티토를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유언비어도 퍼뜨렸지만 티토는 그를 죽이지 않았고 감옥에만 가뒀다. 다른 정적들의 경우 죽이기 보단 대부분 가택연금을 하는 선에서 끝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세계는 미소 냉전이 격화되었지만 티토는 제3의 외교를 펼치며 서방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1960년대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가장 먼저 해외 자율화에 성공했다. 거기다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에선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이 출판되기 까지 했다.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는 미국을 중심으로한 서방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 대신 제3세계를 중점으로 비핵화와 후진국의 산업화를 추진하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고쳐나가는 첫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

1968년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구정공세와 구정공세로 인한 미국의 반전운동을 지지하고, 소련의 관료체제에 맞서 봉기했던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민중봉기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1974년 티토는 신헌법을 제정하여 종신 대통령이 되었지만 이후 주로 해외 순방을 통한 외교활동을 중시했다. 그러던 1980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