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마르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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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도서관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7월 14일 (목) 14:1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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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나의 혁명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근거가 없었는지, 나의 주관적이고 정치적인 낭만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사회적 높이 앞에서 얼마나 왜소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1892년, 마르토프

율리우스 마르토프 또는 율리 오시포비치 세데르봄(러시아어: Ю́лий О́сипович Цедерба́ум)은 러시아의 혁명가로, 멘셰비키 좌파의 이론적 지도자였다.

본래 오스만 제국 태생으로, 1873년 콘스탄티노플의 유대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오데사에서 수학하던 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박해받았고, 나로드니키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1891년, 대기근의 영향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다.

1895년부터 레닌과 협력하여 이스크라 창간에 공헌하였으나, 1903년 니콜라이 바우만에 대한 처벌 문제[1]로 대립하게 되었다.

10월 혁명 당시, 멘셰비키 우파 세력이 2차 소비에트 의회를 탈퇴하였을 때에도 잔류를 결정하였으나, 볼셰비키가 완전히 권력을 잡자 독일 베를린으로 망명한다.

베를린에서 그는 멘셰비키 조직을 다시 규합하기 위해 신문을 발행하는 한편, 백군에 맞서 적군을 지지하되 볼셰비키에 대한 비판을 유지하였다. 그러던 1923년, 지병이 악화되어 독일 바덴에서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 바우만은 동료 혁명가와 불륜을 저질렀고, 이에 대한 책임을 상대 여성에게 떠넘겼다. 얼마 가지 않아 여성은 자살하였다. 마르토프는 바우만에 대한 강한 처벌을 요구하였다. 이후 바우만은 레닌을 따르다 1905년 혁명에서 군주주의자에게 맞아 살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