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가격 그리고 이윤

좌파도서관
Karl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5월 4일 (수) 16:45 판
제목: 임금, 가격 그리고 이윤
부제: Lohn, Preis und Profit
저자: 카를 마르크스
발표시기: 1865년
출처: #


임금, 가격 그리고 이윤
Lohn, Preis und Profit


잉여 가치가 분해되는 다양한 부분

잉여 가치, 즉 상품의 총가치 가운데 노동자의 잉여 노동 또는 불불 노동이 실현되어 있는 부분을 나는 이윤이라고 부른다. 이 이윤이 모두 고용주인 자본가의 손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토지의 독점 때문에 지주는 지대라는 명목으로 이 잉여 가치의 일부를 가져갈 수 있는데, 이 경우에 토지가 농업·건물·철도 또는 그 밖의 어떠한 생산 목적에 이용되는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른 한편, 노동 수단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고용주 자본가에게 잉여 가치를 생산할 수 있게 한다는 사실, 또는 같은 이야기지만 일정량의 불불 노동을 전유할 수 있게 한다는 사실 때문에 결국 노동 수단의 전부 또는 일부를 고용주 자본가에게 빌려 주는 노동 수단의 소유주, 한마디로 말해 화폐 대부 자본가는 이 잉여 가치의 또 다른 부분을 이자라는 명목으로 요구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고용주 자본가 자신에게는 이른바 <산업 이윤 또는 상업 이윤이라 하는 것만 남게 된다.

잉여 가치의 총액을 세 가지 범주의 사람들이 이와 같이 나누는 것은 어떤 법칙에 의해 규정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다. 그렇지만 앞서 서술한 내용으로부터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지대·이자·산업 이윤은 오직 상품의 잉여 가치, 즉 상품 속에 들어가 있는 불불 노동의 다양한 부분에 대한 다양한 이름일 뿐이며, 그것들은 똑같이 이러한 원천에서, 오직 이러한 원천에서만 생기는 것이다. 그것들은 토지나 자본 자체에서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토지와 자본은 그 소유자들로 하여금 고용주 자본가가 노동자에게서 뽑아 낸 잉여 가치 가운데서 자신들의 해당 몫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해 준다. 노동자 자신의 입장에서 자기 잉여 노동의 산물인 잉여 가치, 즉 불불 노동이 전적으로 고용주 자본가의 손안으로 들어가는가 아니면 자본가가 지대나 이자라는 명목으로 제3자에게 잉여 가치의 일부를 지불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고용주 자본가가 자기 자본을 사용할 뿐이고 자신이 지주라고 가정한다면, 모든 잉여 가치는 그의 손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자본가가 잉여 가치 가운데서 궁극적으로 어느 부분을 챙기든간에, 노동자에게서 이 잉여 가치를 직접 뽑아 가는 사람은 바로 고용주 자본가다. 따라서 임금 제도와 생산 체계 전체가 바로 고용주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의 이러한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논쟁에 참여한 여러분들 가운데 일부 사람들이 문제를 모호하게 하고 고용주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 근본적인 관계를 부차적인 문제로 다루려 한 것은 잘못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특정 조건에서는 가격 상승이 고용주 자본가·지주·화폐 대부 자본가에게, 그리고 나아가 세금 징수원에게까지 끼치는 영향은 대단히 불균등할 수 있다고 말한 점은 옳다.

위에서 서술한 내용으로부터 또 하나의 결론이 나온다.

상품의 가치 가운데서 단지 원료와 기계의 가치, 한마디로 소모된 생산 수단의 가치만을 나타내는 부분은 전혀 소득을 형성하지 않고 자본을 보상할 뿐이다. 그러나 이 점을 젖혀놓더라도 상품 가치 가운데서 소득을 형성하는 부분, 즉 임금·이윤·지대·이자의 형태로 지출될수 있는 부분이 임금의 가치·지대의 가치·이윤의 가치 등등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방금 상품 속에 포함된 잉여 가치, 즉 상품 가치 가운데서 불불 노동이 체현되어 있는 부분이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부분으로 분해된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가 이 세 가지 구성 부분의 독립적 가치들이 합해져 구성된다거나 형성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한 시간의 노동이 6펜스의 가치에 체현되어 있고, 노동자의 노동일이 12시간이며, 이 시간의 절반이 불불 노동이라면 그 잉여 노동은 상품에 3실링의 잉여 가치, 즉 아무런 등가물도 치르지 않은 가치를 더하게 될 것이다. 이 3실링의 잉여 가치는 고용주 자본가가 그 비율이야 어떻든간에 지주와 대금업자와 분배할 수 있는 모든 재원이 되는 것이다. 이 3실링의 가치는 이들이 자기들끼리 분배해야 하는 가치의 한계가 된다. 그러나 고용주 자본가가 자신의 이윤을 위해 상품의 가치에 마음대로 가치를 더하고, 또 지주 등등을 위해 또 다른 가치가 더해지고, 그래서 결국 이렇게 마음대로 더해진 가치들이 합해져 총가치를 이루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한 가치가 세 가지 부분으로 분해된다는 것을 세 가지 독립적 가치들이 합해져 그 가치를 형성한다는 것과 혼동함으로써 지대·이윤·이자를 생성시키는 총가치를 어떤 자의적인 크기로 바꾸어 버리는 통속적인 생각은 오류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한 자본가가 실현하는 총이윤이 100파운드라면 우리는 이 액수를 절대적 크기로 여겨 이윤 총액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100파운드가 먼저 지불된 자본에 대해 갖는 비율을 계산한다면, 우리는 이 상대적 크기를 이윤율이라고 부른다. 이 이윤율은 명백히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임금으로 먼저 지불된 자본이 100파운드라고 가정해 보자. 만약 창출된 잉여 가치도 100파운드라면---이것은 노동자의 노동일의 절반이 불불 노동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그리고 이 이윤을 임금으로 먼저 지불된 자본의 가치로 측정한다면, 먼저 지불된 가치가 100이고 실현된 가치는 200이므로 우리는 이윤율이 100%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만약 우리가 임금으로 먼저 지불된 자본뿐만 아니라 먼저 지불된 총자본, 예컨대 그 가운데 400파운드가 원료·기계 등등의 가치를 나타내는 500파운드를 고려한다면, 이윤율은 20%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100파운드의 이윤은 먼저 지불된 총자본의 1/5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윤율을 표현하는 첫째 방식은 오로지 지불 노동과 불불 노동의 실제 비율, 즉 노동에 대한 착취(exploitation:이 프랑스 말을 쓰는 것을 허용해 주기 바란다.)의 실제 정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다른 표현 방식은 흔히 쓰이는 것으로서,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는 사실 적절한 것이다. 어쨋든 이것은 자본가가 노동자에게서 무상 노동을 뽑아 내는 정도를 감춰 주는 데는 대단히 유용하다.

앞으로 내가 언급해야 하는 말 가운데서 이윤이라는 말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간에 잉여 가치를 분배하는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본가가 뽑아 가는 잉여 가치의 총량을 가리키는 말로 쓸 것이며, 또 이윤율이라는 말을 쓸 때는 언제나 임금으로 먼저 지불된 자본의 가치로써 이윤을 측정할 것이다.

이윤·임금·가격의 일반적 관계

상품의 가치에서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용된 원료와 그 밖의 생산 수단을 보상하는 가치를 뺀다면, 다시 말해 상품 속에 포함된 과거의 노동을 나타내는 가치를 뺀다면, 상품 가치의 나머지 부분은 결국 마지막으로 사용된 노동자가 더한 노동량으로 귀착할 것이다. 만약 그 노동자가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12시간의 평균 노동이 6실링에 해당하는 분량의 금으로 결정화된다면, 이 6실링의 추가 가치는 그의 노동이 만들어 낸 유일한 가치다. 노동 시간에 의해 결정되는 이 정해진 가치는 노동자와 가본가가 각기 자신들의 몫이나 배당을 끌어내야 하는 단 하나의 재원이며, 임금과 이윤으로 분할되는 유일한 가치다. 이 가치가 아무리 둘 사이에서 여러 가지 비율로 나뉜다 하더라도 이 가치 자체는 분명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의 노동자 대신에 모든 노동 인구를, 또 1노동일 대신에 예컨대 1200만 노동일을 두고 보더라도 또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오로지 이 한정된 가치, 다시 말해 노동자의 총노동에 의해 측정된 가치만을 분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 쪽이 더 많이 가지면 다른 쪽은 그만큼 적게 가지게 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가 된다. 양이 정해져 있을 때는 언제나 한 부분이 늘어나면 다른 부분은 거꾸로 줄어들기 마련이다. 임금이 변하면 이윤은 그 반대 방향으로 변할 것이다. 임금이 낮아지면 이윤은 늘어나고, 임금이 늘어나면 이윤은 낮아질 것이다. 만약 앞의 가정에서와 같이 노동자가 자신이 만들어 낸 가치의 절반에 해당하는 3실링을 받는다면, 또는 그의 모든 노동일이 절반은 지불 노동으로 절반은 불불 노동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자본가도 또한 3실링을 가질 것이기 때문에 이윤율은 100%가 될 것이다. 만약 노동자가 2실링만을 받는다면, 즉 모든 노동일의 1/3만을 자신을 위해 일한다면, 자본가는 4실링을 얻게 되며 이윤율은 200%가 될 것이다. 만약 노동자가 4실링을 받는다면, 자본가는 2실링만을 가질 것이고 이윤율은 50%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는 상품의 가치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결국 전반적인 임금 인상은 전반적인 이윤율 하락을 낳지만 가치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상품의 시장 가격을 규정하게 되는 상품의 가치는 전적으로 그 상품 속에 고정되어 있는 총노동량에 의해 결정되며, 지불 노동과 불불 노동으로 노동량이 나뉘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예컨대 12시간 동안 생산된 개별 상품 또는 상품 집단들의 가치가 늘 똑같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주어진 노동 시간 또는 노동량에 의해 생산되는 상품의 수나 양은 사용된 노동의 생산력에 달려 있지 그 노동력의 지속 시간, 즉 길이에 달려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수준의 생산력을 가진 방적 노동의 경우에 12시간의 노동일에 12파운드의 면사가 생산될 수도 있지만, 더 낮은 수준의 생산력일 경우 고작 2파운드만이 생산될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12시간의 평균 노동이 6실링의 가치에 체현된다면, 전자의 경우에 12파운드의 면사 값이 6실링일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 2파운드의 면사 값 또한 6실링일 것이다. 따라서 1파운드의 면사 값이 전자의 경우에는 6펜스, 후자의 경우에는 3실링이 될 것이다. 이러한 가격 차이는 사용된 노동의 생산력이 차이 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생산력이 높으면 한 시간의 노동이 1파운드의 면사 속에 체현될 수 있지만, 생산력이 낮으면 6시간의 노동이 1파운드의 면사에 체현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임금이 비교적 높고 이윤율이 낮은데도 면사 1파운드의 가격은 6펜스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임금이 낮고 이윤율이 높은데도, 그 가격은 3실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면사 1파운드의 가격은 거기에 사용된 총노동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총노동량이 지불 노동과 불불 노동으로 분할되는 비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값비싼 노동이 싼 상품을, 값싼 노동이 비싼 상품을 생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이제 역설로 들리지 않게 된다. 그 사실은 곧, 상품의 가치는 그 속에 사용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되며, 이 노동량은 전적으로 사용된 노동 생산력에 달려 있고, 따라서 노동 생산성이 변할 때마다 달라질 것이라는 일반적 법칙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임금을 인상하려는 시도 또는 임금 인하를 막으려는 시도의 중요한 경우

이제 임금 인상이 시도되거나 임금 인하에 저항하려고 하는 중요한 경우들을 깊이 고찰해 보자.

1. 우리는 지금까지 노동력의 가치 또는 더 통속적으로 말해서 노동의 가치는 생활 필수품의 가치 또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만약 어떤 나라에서 노동자의 하루 평균 생활 필수품의 가치가 3실링에 해당하는 6시간 노동이라면, 노동자는 자신의 하루 생계비의 등가물을 생산하려고 하루 6시간을 일해야 할 것이다. 전체 노동일이 12시간이라면, 자본가는 그에게 3실링을 지불함으로써 그의 노동의 가치를 지불할 것이다. 노동일의 절반은 불불 노동이 되어 이윤율은 100%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생산성이 낮아진 결과로, 예컨대 같은 양의 농산물을 생산하는 데 더 많은 노동이 들고, 따라서 평균 일용 필수품의 가격이 3실링에서 4실링으로 올랐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노동의 가치는 1/3, 즉 33과 1/3%가 커질 것이다. 이전의 생활 수준에 따른다면 이 노동자의 하루 생계비의 등가물을 생산하는 데는 이제 8시간의 노동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잉여 노동은 6시간에서 4시간으로 줄어들고 이윤율은 100%에서 50%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것은 단지 늘어난 자기 노동의 가치를 받고자 요구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다른 모든 상품 판매자가 자기 상품의 비용이 늘어났을 때 그 상품의 늘어난 가치를 지불받으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임금이 전혀 오르지 않거나 늘어난 생활 필수품의 가치를 보상하기에 충분치 않을 정도로 오른다면, 노동의 가격 은 노동의 가치 이하로 떨어지고 노동자의 생활 수준은 나빠질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반대 방향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노동 생산성 향상으로 같은 양의 평균 일용 필수품의 값이 3실링에서 2실링으로 떨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해 노동일의 6시간이 아니라 4시간만이 일용 필수품의 가치 등가물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할 수도 있는 것이다. 노동자는 이제 예전에 3실링으로 살 수 있었던 만큼의 필수품을 2실링으로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노동의 가치는 떨어졌으나 그 떨어진 가치로 예전과 같은 양의 상품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윤은 3실링에서 4실링으로, 이윤율은 100%에서 200%로 오를 것이다. 노동자의 절대적 생활 수준은 예전과 다름없다 하더라도 그의 상대적 임금, 나아가 그의 상대적인 사회적 위치는 자본가의 경우와 비교해서 낮아질 것이다. 만약 노동자가 그러한 임금의 상대적 감축에 저항한다면, 그것은 곧 그 자신의 늘어난 노동 생산력에서 얼마만큼의 몫을 가지려는 것일 뿐이며 사회적 등급에서 자신이 예전에 가지고 있던 상대적 위치를 유지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영국의 공장주들은 곡물법이 폐지된 뒤 곡물법 반대 운동 당시에 내걸었던 매우 엄숙한 서약들을 무참하게 위반하고는 임금을 전반적으로 10% 깎았다. 노동자들의 저항은 처음에는 꺾였지만, 내가 여기서 일일이 언급하지 못하는 여러 사정들로 인해 10%의 손실분을 그 뒤 되찾게 되었다.

2. 생활 필수품의 가치, 따라서 노동의 가치는 변하지 않을 수 있으나, 그 화폐 가격은 화폐의 가치가 먼저 변함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더 풍부한 광산을 발견함으로써 예컨대 2온스의 금을 생산하는 데 예전에 1온스의 금을 생산하는 데 들었던 만큼의 노동밖에 들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금의 가치는 절반, 즉 50%로 평가 절하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가 원래 화폐 가격의 2배로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의 가치도 2배로 표현될 것이다. 예전에 6실링으로 표현되던 12시간의 노동은 이제 12실링으로 표현될 것이다. 만약 노동자의 임금이 6실링으로 오르지 않고 여전히 3실링이라면, 그의 노동의 화폐 가격은 그의 노동 가치의 절반밖에 되지 않을 것이며 그의 생활 수준은 몹시 나빠질 것이다. 임금이 올랐어도 금의 가치가 떨어지는 만큼 오르지 못할 경우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마찬가지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노동 생산력에서나, 공급과 수요에서나, 가치에서나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이들 가치의 화폐 명칭 외에는 아무것도 변할 수 없다. 그러한 경우 노동자가 [금의 가치 하락에] 비례하는 임금 인상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실물 대신에 명목으로 지불받는 데 만족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거의 모든 역사는 이렇듯 화폐의 가치가 떨어질 때마다 자본가들이 이 기회를 재빠르게 이용하여 노동자를 속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상당한 규모의 어느 정치 경제학파는 새로운 금광 지대의 발견, 은광 채굴법의 개선, 더 값싼 수은의 공급 등으로 귀금속의 가치가 계속 떨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이것으로써, 대륙에서 임금 인상이 전반적으로 동시에 시도되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3. 지금까지 우리는 노동일에는 어떤 한계가 있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노동일 자체에 어떤 변하지 않는 한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일을 육체적으로 가능한 최대의 길이까지 늘리려는 것은 자본의 변함없는 경향이다. 왜냐하면 노동일이 늘어나는 만큼 잉여 노동이,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이윤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노동일을 늘리는 데 성공하면 할수혹 다른 사람의 노동량을 더 많이 전유하게 될 것이다. 17세기, 심지어 18세기의 초·중반까지도 10시간 노동일이 영국 전역의 표준 노동일이었다. 사실상 영국의 노동 대중에 반대하여 영국의 귀족들이 일으킨 전쟁이었던 반자코뱅 전쟁 중에 자본은 잔칫상을 차려 놓고 노동일을 10시간에서 12·14·18시간으로 늘렸다. 맬더스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심약한 감상주의자가 결코 아닌데도 1815년 무렵에 출간된 소책자에서, 만약 그러한 사태가 계속된다면 국민 생활은 그 뿌리에서부터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언명했다. 새로 발명된 기계가 전면적으로 보급되기 몇 년 전인 1765년 무렵, 『수공업에 관한 시론』이라는 제목의 소책자가 영국에서 나타났다. 노동자 계급의 공공연한 적인 이 익명의 저자는 노동일의 한도를 늘릴 필요가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목적을 위한 여러 수단 가운데서도 그는, 그의 말에 따르면 '공포의 집'이라고 해야 마땅할 노동 수용소를 제안하고 있다. 그러면 이 '공포의 집'을 위해 그가 규정하고 있는 노동일의 길이는 얼마인가? 12시간이다. 이 시간은 1832년에 자본가, 정치 경제학자, 그리고 대신들이 12세 미만의 아동에게 실제로 실시되고 있을 뿐더러 필요하기도 한 노동 시간이라고 선언했던 것과 똑같은 시간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현제도 밑에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자본가에게 그 노동력의 소비를 넘겨주지만 그것은 어떤 합리적 한계를 지닌다. 노동자가 자기 노동력을 파는 것은 그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이지---노동력의 자연스런 소모는 논외로 한다.---그것을 파괴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노동력을 1일 가치 또는 1주 가치로 파는 경우, 1일 또는 1주 동안에 2일분 또는 2주일분의 노동력이 소비되거나 소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1000파운드의 값이 매겨진 기계를 예로 들어 보자. 만약 그 기계를 10년 동안 쓸 수 있다면 기계는 그것이 생산하는 상품의 가치에 해마다 100파운드를 더할 것이다. 만약 5년 동안 쓸 수 있다면 해마다 200파운드를 더할 것이다. 즉 기계의 1년 마모분의 가치는 기계의 소비 기간에 반비례한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노동자와 기계는 구별된다. 기계는 그것이 사용되는 정도와 똑같은 비율로 마모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인간은 단지 산술적으로 작업 시간을 늘릴 때보다 더 큰 정도로 손상되는 것이다.

노동일을 예전의 합리적 수준으로 줄이려 한다면, 또는 표준 노동일의 법제화를 강행할 수 없는 경우에 수탈된 잉여 시간만큼 임금을 올리거나 그 이상으로 올림으로써 과도한 노동을 방지하려 한다면, 노동자는 단지 자기 자신과 그 후대에 대한 의무를 다할 따름이다. 이들은 오직 자본의 전횡적 침탈을 제한할 뿐이다. 시간은 인간 발전의 공간이다. 쓸 수 있는 자유 시간을 갖지 못한 사람, 수면·식사 등등 순전히 신체적인 필요 때문에 중단되는 시간을 빼고는 전생애를 자본가를 위한 노동으로 써 없애는 사람은 부리는 가축보다 못하다. 그는 몸이 망가지고 정신이 황폐해진, 다른 사람의 부를 생산하기 위한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현대 산업의 모든 역사가 보여 주고 있듯이, 자본은 만약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무모하고도 무자비하게 노동자 계급을 극도의 피폐 상태에 빠뜨리려 할 것이다.

노동일을 늘리는 데서 자본가는 더욱 높은 임금을 지불하면서도 노동의 가치 이하로 지불할 수 있다. 그것은 임금 인상분이 착취한 노동량의 증가, 또 이 때문에 빚어진 급속한 노동력 파괴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에 그러하다.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중간 계급 통계학자들은 여러분에게 랭커셔에서 공장 근로자 가족의 평균 임금은 올랐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집안의 가장인 남성의 노동 대신에 그의 아내와 서너 명쯤 되는 자녀가 자본이라는 자거노트의 수레바퀴 밑에 던져져 있다는 사실, 임금 총액의 증가분이 이 가족에게서 착취한 총잉여 노동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공장법이 실시되고 있는 모든 산업 분야에서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노동일에 대해 어떤 한계가 있는 경우에조차 예전 수준의 노동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임금 인상이 필요할 수 있다. 노동 강도를 높임으로써 예전에는 2시간에 지출하던 생명력을 1시간에 지출하도록 할 수도 있다. 이것은 공장법이 실시되고 있는 공업 부문에서는, 기계의 작동 속도가 빨라지고 한 사람이 맡아야 하는 작업기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 만약 노동 강도, 즉 시간당 지출하는 노동량의 증가가 그에 상응하는 노동일의 단축을 가져온다면 노동자는 그래도 얻는 것이 있다. 그러나 만약 이 한계를 넘는다면 그는 어떤 형태로 얻은 것을 다른 형태로 잃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10시간의 노동이 이전의 12시간 노동만큼이나 파멸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노동자가 노동 강도가 세어진 만큼 임금을 올리려고 투쟁함으로써 자본의 그러한 경향을 막으려는 것은 단지 자기 노동의 가치 저하와 자기 종족의 쇠퇴에 저항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4. 여러분은 모두, 여기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이유들로 인해 자본주의적 생산이 주기적 순환을 겪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정지 상태, 활력 증대, 번영, 과잉 생산, 공황, 침체의 과정을 거친다. 상품의 시장 가격과 시장 이윤율은 이러한 국면들을 따라, 때로는 그 평균 수준 이하로 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평균 수준을 넘기도 한다. 순환 과정 전체를 고찰해 보면, 여러분은 시장 가격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면 다음에는 다른 쪽으로 치우쳐져서 계속 상쇄되고 있으며, 그 순환 과정을 평균하여 보면 상품의 시장 가격은 그 가치에 의해 규제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 시장 가격의 하강 국면, 공황과 침체 국면에서는 노동자가 완전히 실직 상태로 내몰리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그의 임금은 떨어진다. 속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설사 시장 가격이 그처럼 떨어지더라도 노동자는 어느 정도의 임금 인하가 필요해졌는지를 자본가에게 따져야 한다. 만약 초과 이윤이 생기는 번영 국면중에 그가 임금 인상을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면, 한 산업의 순환 과정을 평균해 볼 때 그는 자기의 평균 임금, 즉 자기 노동의 가치조차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순환의 불리한 국면에는 노동자의 임금도 반드시 불리한 영향을 받게 되는데도, 순환의 번영 국면에서 그것에 대한 보상을 단념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상품의 가치는 수요와 공급의 끊임없는 변동으로부터 생기는 시장 가격의 끊임없는 변화가 서로 상쇄됨으로써만 실현되는 것이다. 현제도의 기초 위에서는 노동 또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동도 마찬가지의 변동 과정을 거쳐서만 그 가치에 상응하는 평균 가격으로 팔릴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노동을 상품으로 다루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상품 가격을 규제하는 법칙들 밖에 두려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일이다. 노예는 영구히 고정된 양의 생존 수단을 받지만 임금 노동자는 그렇지 않다. 그는 어떤 경우에는, 다른 경우의 임금 하락을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임금 인상을 이루려고 애써야 한다. 만약 노동자가 자본가의 의지와 자본가의 명령을 영구적인 경제 법칙으로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그는 노예가 받는 생존 보장조차 받지 못하면서도 노예의 모든 불행은 함께 나누게 될 것이다.

5. 내가 고찰한 모든 경우에서---이 경우들은 100 가운데서 99를 차지한다.---여러분은, 임금 인상 투쟁은 오직 앞서 이루어진 변화의 뒤를 따라서만 일어난다는 사실, 즉 생산량·노동 생산력·노동 가치·화폐 가치·착취된 노동 시간과 강도에서 앞서 이루어진 변화, 또 수요와 공급의 동요에 의해 좌우되며 산업 순환의 다양한 국면에 상응하는 시장 가격의 동요에서 앞서 이루어진 변화의 필연적인 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았다. 요컨대 임금 인상 투쟁은 앞선 자본의 작용에 대한 노동의 반작용인 것이다. 임금 인상 투쟁을 이러한 모든 사정과 동떨어진 것으로 본다면, 또 임금의 변동만을 보고 그것을 낳는 다른 모든 변동을 간과한다면, 여러분은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하여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자본과 노동의 투쟁과 그 결과

1. 이제까지 나는, 임금 인하에 대한 노동자측의 주기적 저항과 임금 인상을 이루려는 그들의 주기적 시도는 임금 제도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으며, 또 그 저항과 시도는 노동이 상품이 되고 있다는, 그리하여 가격의 일반적 운동을 규정하는 법칙에 종속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강요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더 나아가 나는, 전반적 임금 인상은 전반적 이윤율 하락을 낳기는 하지만 상품의 평균 가격이나 그 가치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결국 이제는 이 끊임없는 자본과 노동의 투쟁에서 노동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둘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일반화해 대답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모든 상품과 같이 노동의 경우에도 시장 가격은 결국 가치와 일치하게 된다. 따라서 노동자는 시장 가격이 어떻게 오르내리든간에, 또 그가 어떻게 행동하든간에 평균적으로 자기 노동의 가치만을 받게 된다. 이 노동의 가치는 노동력의 가치로 귀착하며, 또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생활 필수품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이 생활 필수품의 가치는 다시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노동력의 가치 또는 노동의 가치를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구분하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노동력의 가치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순전히 육체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또는 사회적인 것이다. 노동력 가치의 궁극적 한계는 육체적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해 노동자 계급은 자신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적 존재를 존속시키기 위해 생활과 번식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활 필수품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없어서는 안 될 생활 필수품의 가치는 노동 가치의 궁극적 한계가 된다. 다른 한편, 노동일의 길이 또한 매우 신축적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한계가 있다. 그 한계는 노동자의 육체적 힘에 의해 결정된다. 만약 매일 소모되는 노동자의 생명력이 어떤 한도를 넘으면 그것은 나날이 새롭게 지출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말했듯이 이 한계에는 매우 신축성이 있다. 허약하고 명이 짧은 세대라도 재빨리 새로운 세대로 교체될 수 있다면 일련의 강하고 명이 긴 세대에 못지않게 노동 시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순전히 육체적인 요소 이외에도 노동의 가치는 각 나라의 전통적인 생활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은 단순히 육체적 생활일 뿐 아니라 사람들이 놓여 있고 또 양육되는 사회 조건들로부터 생겨나는 어떤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국인의 생활 수준이 아일랜드 인의 생활 수준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독일 농민의 생활 수준이 리보니아 농민의 수준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역사적 전통과 사회 관습이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에 대해 여러분은 손튼 씨의 저서 『과잉 인구』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그는, 영국 각 농업 지역의 평균 임금은 이 지역들이 농노제 상태에서 벗어날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유리했는가에 따라 오늘날에도 약간씩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노동의 가치에 포함되는 이러한 역사적 또는 사회적 요소는 확대되거나 축소될 수도 있으며, 아니면 완전히 없어져 육체적 한계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고약한 세금쟁이로 놀고 먹던 늙은 조지 로즈의 말을 빌리면 프랑스 이단들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신성한 종교의 안전을 지켜 내려고 일으켰다는 저 반자코뱅 전쟁 시기에, 우리가 이전의 어느 회의 석상에서 매우 우호적으로 다루었던 정직한 영국 농부들은 농업 노동자의 임금을 겨우 육체적인 최소 한계 이하로까지 깎아 내렸지만, 노동자 종족의 육체적인 존속에 필요한 그 나머지 액수를 구민법으로 보충해 주었다. 이것이 곧 임금 노동자를 노예로, 또 셰익스피어의 자랑스런 자영 농민을 빈민으로 만드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여러 나라의 표준 임금이나 노동의 가치를 서로 비교해 보면, 그리고 한 나라의 서로 다른 역사적 시기에 따라 그것을 비교해 보면, 여러분은 설사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가 그대로라고 가정하더라도 노동의 가치 자체는 불변의 크기가 아니라 가변적 크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 비교를 통해 시장 이윤율뿐만 아니라 평균 이윤율도 변동한다는 것이 입증될 수 있다.

그러나 이윤에 관해서 본다면 그 최소 한계를 설정하는 법칙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이윤이 떨어지는 최종 한계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그 한계를 정할 수 없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임금의 최소 한계를 정할 수는 있어도 최대 한계는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노동일의 한계가 주어져 있다면 이윤은 임금이 육체적 최저한의 수준일 때 최대가 되며, 임금이 주어져 있다면 이윤은 노동자의 체력이 닿는 한도까지 노동일을 늘릴 때 최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윤의 최대 한계는 임금의 육체적 최소 한계와 노동일의 육체적 최대 한계에 의해 제한된다. 이 최대 이윤율의 두 가지 한계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변동 폭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윤율의 실제 수준은 오직 자본과 노동의 끊임없는 투쟁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자본가는 끊임없이 임금을 노동자의 육체적 최소 한도까지 낮추려 하는 반면, 노동자는 끊임없이 반대 방향으로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문제는 결국 투쟁하는 두 쪽의 힘의 문제로 귀착한다.

2. 다른 모든 나라들도 마찬가지지만 영국에서의 노동일의 제한을 보더라도, 이 제한은 법률의 개입 없이는 결코 설정되지 않았다. 외부로부터 노동자가 가하는 끊임없는 압력이 없었다면 이 개입도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러한 결과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사적인 협약으로는 달성 될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전반적인 정치 활동의 필요성이야말로 순수한 경제적 행동에서는 자본측이 한층 강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노동 가치의 한계에 관해서 보면, 그것이 실제로 정해지는 것은 언제나 수요와 공급에 좌우된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수요와 공급이란 노동에 대한 자본측의 수요와 노동자측의 노동 공급을 뜻한다. 식민지 나라에서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노동자에게 유리하다. 미국의 임금 수준이 비교적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자본이 아무리 애써도, 임금 노동자가 끊임없이 독립 자영농이 됨으로써 노동 시장이 언제나 텅 비게 되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절대 다수의 미국인에게 임금 노동자의 위치란 얼마 안 있어 반드시 떠나게 될 하나의 견습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식민지의 이러한 사태를 바로잡으려고 모국인 영국 정부는 당분간 이른바 현대 식민지론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임금 노동자가 자영농으로 급속히 바뀌는 것을 막으려고 인위적으로 식민지 토지에 높은 가격을 매긴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제 자본이 모든 생산과정을 지배하고 있는 옛 문명 국가들을 보기로 하자. 예컨대 1849년부터 1859년까지 영국의 농업 임금 인상을 보자. 임금 인상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우리 친구 웨스턴 씨라면 농부들에게 밀의 가치를 오릴라고 충고했겠지만, 그들은 밀의 가치는커녕 밀의 시장 가격조차 올릴 수 없었다. 도리어 그들은 시장 가격이 낮아지는 것을 참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11년 동안 그들은 온갖 종류의 기계를 들이고, 더 과학적인 방법을 채택하고, 경지의 일부를 목장으로 바꾸고, 농장의 규모와 함께 생산의 규모를 늘렸으며, 또 이러한 과정이나 그 밖의 과정을 통해 노동 생산력을 향상시켜 노동에 대한 소유를 줄임으로써 농업 인구를 또다시 상대적으로 남아 돌게 만들었다. 이것이 곧 오래 전부터 정착된 나라들에서 임금 인상에 대해 자본이 빠르든 늦든간에 반작용하는 일반적 방식이다. 리카도가 올바르게 지적한 바와 같이, 기계는 노동과 끊임없이 경쟁하며, 흔히 노동의 가격이 어떤 수준에 이르렀을 때에만 들일 수 잇다. 그러나 기계 사용은 노동 생산력을 높이는 많은 방법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통상의 노동을 상대적으로 남아돌게 만드는 바로 그 발전이 다른 한편으로는 숙련 노동을 단순화하며, 그럼으로써 그 가격을 떨어뜨린다.

같은 법칙은 다른 형태로도 통용된다. 노동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자본은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률에도 불구하고 더욱 가속적으로 축적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스미스가 당시 현대 산업이 아직 유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추론했던 바와 같이, 자본 축적이 가속함으로써 노동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 노동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균형추가 기울 수밖에 없게 되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오늘날의 많은 저술가들은, 영국의 자본이 지난 20년 동안 영국의 인구보다 훨씬 빨리 늘어났는데도 임금은 그렇게 오르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축적이 진전되면서 동시에 자본 구성에서 차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총자본 가운데 고정 자본, 즉 기계·원료와 그 밖의 모든 형태의 생산 수단으로 이루어지는 부분은 임금, 즉 노동을 사는 데 쓰이는 자본 부분에 비해 더 누진적으로 늘어난다. 이러한 법칙은 바튼, 리카도, 시스몽디, 리챠드 존스 교수, 램지 교수, 셰르불리에 및 그 밖의 사람들에 의해 어느 정도 정확하게 진술되어 왔다.

만약 자본의 이 두 요소의 비율이 원래 1:1이었다면 산업이 발전하는 경우에는 5:1이 된다든가 할 것이다. 만약 600의 총자본 가운데서 300이 도구·원료 등에 지출되고 300이 임금에 지출된다면, 300명 대신에 600명의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 내려면 총자본을 배로 늘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총자본 600 가운데 500이 기계·자재 등에 지출되고 오직 100만이 임금에 지출된다면, 300명 대신에 600명의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 내려면 이 자본이 600에서 3600으로 늘어나야 한다. 따라서 산업 발전에서는 노동에 대한 수요가 자본 축적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늘어나나 자본이 늘어나는 것에 비하면 끊임없이 줄어드는 비율로 늘어난다.

이상의 몇 가지 암시로도 현대 산업의 발전 자체가 저울추를 점점 노동자에게는 불리하고 자본가에게는 유리하게 기울게 할 수밖에 없다는 점,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반적 경향은 평균 임금 수준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떨어뜨린다는 점, 다시 말해 노동의 가치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최소 한계까지 떨어뜨린다는 점을 보여 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현제도에서 사태의 경향이 이러하다고 해서, 이것은 노동자 계급이 자본의 침략을 반대하는 저항을 포기해야 하며 자신들의 처우를 일시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가끔씩 주어지는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시도를 중단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만약 노동자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할 수 없는 파탄자의 무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임금 수준을 높이기 위한 노동자의 투쟁은 임금 제도 전체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점, 임금을 인상하기 위한 노동자의 노력은 100 가운데 99가 주어진 노동 가치를 유지하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노동의 가격을 두고 자본가와 싸워야 할 필요성은 자신들을 상품으로 팔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조건에 내재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자본과 일상적으로 충돌하는 데서 비겁하게 물러난다면, 노동자들은 틀림없이 더 커다란 운동을 일으킬 자격을 스스로 빼앗기게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임금 제도와 관련된 전반적인 예속 상태는 아예 젖혀 놓더라도 노동자 계급은 이러한 일상적 투쟁의 궁극적 효과를 과대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결과와 싸우는 것이지 그 결과의 원인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점, 하향 운동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지 그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는 점, 완화제를 쓰는 것이지 질병을 치료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그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침없는 자본의 침략이나 시장의 변화로부터 끊임없이 생겨나는 이 피할 수 없는 유격전에만 전적으로 매달려서는 안 된다. 현체제는 노동자에게 온갖 곤궁을 강요하지만 동시에 사회를 경제적으로 개조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아야 한다. '공정한 노동에 대해 공정한 임금을!'이라는 보수적 표어 대신에 그들은 '임금 제도 철폐!'라는 혁명적 구호를 자신들의 기치에 써넣어야 한다.

이상과 같이, 매우 장황하고도 혹시 지루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주제를 올바르게 다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이 해설을 마치고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제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째, 임금률의 전반적 상승은 전반적인 이윤율 하락을 낳을 것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상품의 가격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둘째,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반적 경향은 평균 임금 수준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낮춘다.

셋째, 노동 조합은 자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중심지로서 훌륭히 활동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노동 조합은 자기 힘을 분별없이 사용한다면 실패한다. 또 일반적으로, 노동 조합은 현제도가 빚어 낸 결과를 반대하는 유격전에만 자신을 국한하고, 이와 동시에 현제도를 변혁하려 하지 않는다면, 또 자신의 조직된 힘을 노동자 계급의 종국적 해방을 위한, 즉 임금 제도를 궁극적으로 철폐하기 위한 지렛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실패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