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가격 그리고 이윤/생산, 임금, 이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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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5월 4일 (수) 15:17 판 (새 문서: {{책자 | 번호 = 3 | 제목 = 임금, 가격 그리고 이윤 | 장 이름 = 2. 생산, 임금, 이윤 | 이전 장 = 임금, 가격 그리고 이윤/생산과 임금 | 다음 장 = 임금, 가격 그리고 이윤/생산, 임금, 이윤 | 내용 = 웨스턴 씨의 주장은 사실 다음 두 가지 전제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첫째로 국민 생산물의 총량은 고정된 것, 수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불변의 양 또는 크기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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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가격 그리고 이윤
2. 생산, 임금, 이윤

웨스턴 씨의 주장은 사실 다음 두 가지 전제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첫째로 국민 생산물의 총량은 고정된 것, 수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불변의 양 또는 크기라는 것, 둘째로 실질 임금의 총액, 다시 말해 그 임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의 양으로 측정되는 임금의 총액은 고정액, 불변의 크기라는 것이다.


그의 첫째 주장은 명백히 오류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생산물의 가치와 양은 해마다 늘어나며, 국민 노동의 생산력도 해마다 늘어나고, 이 늘어나는 생산물을 유통시키는 데 필요한 화폐량도 끊임없이 변한다. 한 해를 두고 볼 때, 또는 여러 해를 서로 비교해 볼 때 옳은 것은 한 해의 하루하루를 두고 볼 때도 옳다. 국민 생산의 총량이나 크기는 끊임없이 변한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게 아니라 변하며, 인구 변동을 고려하지 않는다 해도 그럴 수밖에 없다. 자본 축적과 노동 생산력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오늘 갑자기 전반적 임금률이 상승한다 해도 이 상승은 그것이 잠재적 결과가 어떠하든간에 그 자체가 생산량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리라는 것은 전적으로 사실이다. 그 상승은 우선 현존 사태에서 출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임금 인상 이전에 국민 생산이 고정적이 아니고 가변적이었다면 임금 인상 뒤에도 그것은 계속 고정적이 아니고 가변적일 것이다.


그러나 국민 생산량이 가변적이 아니라 불변적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 친구 웨스턴 씨가 논리적인 결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근거 없는 주장이 될 것이다. 예컨대 8이라는 숫자가 주어져 있다고 할 때 이 숫자의 절대적 한계 때문에 그 구성 부분의 상대적 한계가 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윤이 6이고 임금이 2라면 임금이 6으로 늘어나고 이윤이 2로 줄어든다 해도 총량은 여전히 8이다. 생산 총량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임금 총액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 친구 웨스턴 씨는 어떻게 이 불변성을 증명하고 있는가? 그것을 단지 주장함으로써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두 측면에서 모두 보아야 하는데 그는 한 측면만으로 몰아가고 있다. 임금 총액이 불변의 크기라면 그것은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없다. 그러므로 만일 일시적으로 임금 인상을 관철하려는 노동자들의 행동이 어리석다면 일시적으로 임금 인하를 관철하려는 자본가들의 행동도 이에 못지않게 어리석을 것이다. 우리 친구 웨스턴 씨도 어떤 상황에서는 노동자가 임금 인상을 관철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임금 총액은 그 본성에서 볼 때 고정된 것이므로 반작용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또 자본가들이 임금 인하를 관철할 수 있으며, 사실상 끊임없이 그렇게 하려고 애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임금 불변의 원리에 따르면 전자의 경우에 못지않게 이 경우에도 당연히 반작용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임금을 떨어뜨리려는 시도나 행동에 대해 노동자가 대항하는 것은 정당하다. 따라서 노동자가 임금 인상을 관철하려고 행동하는 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임금을 낮추려는 데 반대하는 모든 반작용은 임금을 올리려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결국 웨스턴 씨 자신의 임금 불변의 원리에 따르더라도 노동자는 어떤 상황에서는 임금 인상을 위해 단결하고 투쟁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이 결론을 부정한다면 그는 이 결론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전제도 폐기해야 한다. 그는 임금 총액이 불변의 양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설사 임금이 오를 수도 없고 올라서도 안 된다고 하더라도 자본이 내리려고 할 때는 언제든지 임금은 내릴 수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해야 한다. 만약 자본가가 여러분에게 고기 대신에 감자를, 밀 대신에 귀리를 먹이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그의 뜻을 정치경제학의 법칙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복종해야 한다. 만약 어느 한 나라의 임금률이 다른 나라보다 높다면, 예컨대 미국의 임금률이 영국보다 높다면 여러분은 이 임금률의 차이를 미국 자본가와 영국 자본가의 의지의 차이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분명 경제 현상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현상에 대한 연구를 아주 단순화하는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왜 미국 자본가의 의지가 영국 자본가의 의지와 다른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의지의 영역을 벗어나야 한다. 목사라면 내게 하나님이 프랑스에서 바라는 것과 영국에서 바라는 것이 다르다고 말할지 모른다. 내가 그에게 이 의지의 이중성을 설명하기를 요구한다면 그는 뻔뻔스럽게도 나에게 하나님은 프랑스에서는 이런 의지를, 영국에서는 저런 의지를 가진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친구 웨스턴 씨는 분명 모든 추론을 그렇듯 완전히 부정하는 주장을 펼 사람은 결코 아니다.


자본가의 의지는 확실히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얻으려는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자본가의 의지에 관해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힘과 이 힘의 한계, 이 한계의 성격을 구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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