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시 모음

좌파도서관
Karl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5월 18일 (수) 13:48 판

나의 삶

나의 삶




체 게바라



내 나이 열다섯 살 때,
나는
무엇을 위해 죽어야하는가를 놓고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그 죽음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이상을 찾게 된다면,
나는 비로소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


먼저 나는
가장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방법부터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득,
잭 런던이 쓴 옛날 이야기가 떠올랐다
죽음에 임박한 주인공이
마음 속으로
차가운 알래스카의 황야 같은 곳에서
혼자 나무에 기댄 채
외로이 죽어가기로 결심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내가 생각한 유일한 죽음의 모습이었다

선택

선택




체 게바라



적의 급습을 받은 동지 하나가
상황이 위급하다며 지고 가던
상자 두 개를 버리고
사탕수수밭 속으로 도망가버렸다
하나는 탄약상자였고
또 하나는 구급상자였다


그런데
총탄에 중상을 입은 지금의 나는
그 두 개의 상자 가운데
하나 밖에 옮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과연,
의사로서의 의무와
혁명가로서의 의무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깊은 갈등에 빠졌다


너는 진정 누구인가?
의사인가?
아니면,
혁명가인가?
지금
내 발 앞에 있는
두 개의 상자가 그것을 묻고 있다


나는
결국 구급상자 대신
탄약상자를 등에 짊어졌다

미래의 착취자가 될지도 모를 동지에게

미래의 착취자가 될지도 모를 동지에게




체 게바라



지금까지 나는 나의 동지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지,
결코 적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오늘 다시 이 총대를 적시며 흐르는 눈물은
어쩌면 내가 동지들을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멀고 험한 길을 함께 걸어왔고
또 앞으로도 함께 걸어갈 것을 맹세했었다
하지만 그 맹세가
하나둘씩 무너져갈 때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보다도
차라리 가슴 저미는 슬픔을 느꼈다
누군들 힘겹고 고단하지 않았겠는가
누군들 별빛 같은 그리움이 없었겠는가
그것을 우리 어찌
세월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비록 그대들이 떠나 어느 자리에 있든
이 하나만은 꼭 약속해다오


그대들이 한때 신처럼 경배했던 민중들에게
한 줌도 안되는 독재와 제국주의의 착취자처럼
거꾸로 칼끝을 겨누는 일만은 없게 해다오


그대들 스스로를 비참하게는 하지 말아다오
나는 어떠한 고통도 참고 견딜 수 있지만
그 슬픔만큼은 참을 수가 없구나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빈 산은 너무 넓구나
밤하늘의 별들이 여전히 저렇게 반짝이고
나무들도 여전히 저렇게 제 자리에 있는데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산은 너무 적막하구나


먼 저편에서 별빛이 나를 부른다
..

행복한 혁명가

행복한 혁명가




체 게바라



쿠바를 떠날 때,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씨를 뿌리고도
열매를 따먹을 줄 모르는
바보 같은 혁명가라고.


나는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 열매는 이미 내 것이 아닐뿐더러
난 아직 씨를 뿌려야 할 곳이 많다고.
그래서 나는 행복한 혁명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