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사회주의 연방 평의회 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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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정책===
정부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연합으로 구성되었지만 쿤을 제외한 모든 인민위원은 전직 사회민주당 당원이었다. 쿤 벨러의 치하에서 공산주의 강령을 전면적으로 채택한 새 정부는 귀족의 직함과 특권의 폐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포고하고 집회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성문화하고 무료 교육을 시행했으며, 소수민족에 대한 언어 및 문화적 권리를 보장했다.
또한 산업 및 상업 기업을 국유화하고 주택, 교통, 은행, 의료, 문화 기관 및 40헥타르가 넘는 모든 토지를 사회화했다. 공산정권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또한 헝가리의 이전 국경을 복원하겠다는 그들의 약속에 크게 의존했다. 정부는 헝가리가 전후 협상에서 잃을 땅의 일부를 되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삼국 협상국과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했다. 공산정권은 헝가리 시골에서는 인기를 얻지 못했으나, 대규모 산업 중심지의 프롤레타리아 대중들 사이에서, 특히 노동계급이 주민의 높은 비율을 대표하는 부다페스트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다.
라코시 마차시가 지휘하는 적위대가 창설되었다. 또한 레닌의 소년들으로 알려진 200명의 무장병력 그룹이 체르니 요제프의 지휘 아래 분견대를 구성했다. 이 부대는 반혁명 운동이 활동할 것으로 의심되는 전국 여러 지역에 배치되었다. 레닌 소년들과 기타 유사한 단체 및 선동가들은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소총 개머리판을 사용하여 종교의식을 해산하는 등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공포에 떨게 했다. 그들은 재판 없이 피해자들을 처형했고, 이로 인해 지역 주민들과 여러 차례 갈등이 발생했으며 그 중 일부는 폭력적으로 변했다. 헝가리 공산주의자들의 상황은 6월 24일 사회민주당의 쿠데타 실패 이후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악화되기 시작했다. 새로 구성된 거르버이 샨도르의 공산주의 정부는 대규모 보복에 의지했다. 혁명재판소는 쿠데타 시도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적색 테러로 이어졌으며, 고도로 산업화된 교외 지역과 부다페스트 대도시 지역의 노동계층 사이에서도 공산정권에 대한 지지가 크게 감소했다.


==결말==
==결말==
5월 말, 협상국 대표가 헝가리에 더 많은 영토 양보를 요구하자 쿤 벨러는 헝가리의 역사적 국경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려고 했다. 헝가리 붉은 군대의 병사들은 부다페스트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원입대자들로부터 모집되었다. 6월, 헝가리 붉은 군대는 상부 헝가리<ref>現 슬로바키아</ref>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신생국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다. 헝가리 붉은 군대는 초기에 약간의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슈트롬펠드 아우렐 대령의 지휘하에 상부 헝가리에서 체코 군대를 축출하고 동쪽에서 루마니아 군대에 맞서 진군할 계획을 세웠다. 헝가리의 이전 국경을 복원하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은 6월 16일, 프레쇼우에서 슬로바키아 평의회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프랑스가 루마니아군이 티산툴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헝가리 정부에 약속했을 때, 쿤 벨러는 상부 헝가리에서 정치적 실패 이후에도 충성을 유지했던 남은 군대를 철수했다. 그러나 붉은 군대가 북쪽에서 후퇴한 후에도 루마니아군은 철수하지 않았다. 쿤 벨러는 1919년 헝가리-루마니아 전쟁으로 사기가 저하된 헝가리 붉은 군대의 나머지 부대를 루마니아 쪽으로 돌리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헝가리와 소련은 부다페스트에서 온 소수의 공산주의 자원입대자들과 두 국가 모두에 대한 지원으로 루마니아와 싸우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전쟁이 지속됨으로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은 쇠퇴하고있었다. 헝가리 북부에서 사기가 저하되어 퇴각한 후, 가장 헌신적인 헝가리 공산주의자들만이 전투에 자원했고, 루마니아군은 7월 30일 헝가리 붉은 군대의 취약한 전선을 돌파했다.
쿤 벨러는 다른 고위 공산당원들과 함께 8월 1일 [[빈]]으로 도망쳤고, 전 문화위원이자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루카치 죄르지를 포함한 소수만이 지하 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해 남았다. 빈으로 도망치기 전에 쿤 벨러와 그의 추종자들은 국립은행의 수많은 예술품과 금 재고를 가져갔다. 부다페스트 노동자 평의회는 [[페이들 줄러]]가 이끄는 새 정부를 선출하였지만, 이 정부는 루마니아군이 8월 6일 부다페스트에 입성하기 전까지 불과 며칠 동안만 지속되었다.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의 몰락과 루마니아 군대의 입성으로 인해 발생한 권력 공백 속에서 기술적으로는 호르티의 지휘를 받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독립적인 준군사조직이 공산주의자, 좌파, 유대인에 대한 백색테러를 자행하였으며,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의 많은 지지자들은 재판 없이 처형당했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2024년 4월 13일 (토) 22:33 판

헝가리 사회주의 연방 평의회 공화국[1]
Magyarországi Szocialista Szövetséges Tanácsköztársaság
국기 국장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Világ proletárjai, egyesüljetek!
상징
상징
국가 인터내셔널가
지리
지리
수도 부다페스트(47.4833°N 19.0333°E)
면적 325,411km²(명목상)
국가정보
국가정보
정치체제 평의회 사회주의 공화국, 미승인국, 잔존국
역사
역사
설립 1919년 3월 21일
임시 헌법 제정 1919년 3월 23일
평의회 선거 1919년 4월 7일-14일
국가 평의회 소집 1919년 6월 14일
벨라 쿤 외무장관 사임 1919년 8월 1일
헝가리 제1공화국 복원 1919년 8월 2일
부다페스트 함락 1919년 8월 3일

개요

헝가리 제1공화국을 계승한 1919년 3월 21일부터 1919년 8월 1일까지 존재한 단명한 공산주의 국가. 언론의 초기 오역으로 인해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이라는 국명은 강한 헝가리 민족적 의미를 피하고 새로운 공산주의 정권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방침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되었다.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은 건국 당시 헝가리 영토의 약 23%만을 통제했던 잔존국이었다. 새로운 체제는 사실상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평의회에 권력을 집중시켰다.

배경

제1차 세계대전과 헝가리 제1공화국

1918년,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은 무너졌고, 과꽃 혁명을 거쳐 헝가리 지역에는 헝가리 제1공화국이 생겨났다. 같은 해 11월 16일에 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고 자유주의자인 카로이 미하이 백작이 대통령이 되었다. 카로이는 정부의 권위를 확립하고 국가를 통제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카로이가 헝가리 총리로 발표되었을 때 왕립 헝가리 방위군 군대에는 여전히 140만 명 이상의 군인이 있었다. 카로이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평화주의 요구에 굴복하여 헝가리 군대에 일방적인 자체 군축을 명령했다. 이는 1918년 11월 2일 전쟁장관 린더르 벨러의 지시에 따라 일어났다. 군대의 일방적인 무장 해제로 인해 헝가리는 특히 취약한 시기에 국방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헝가리의 자체 군축은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루마니아 군대, 프랑스, 세르비아 군대, 새로 창설된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의 헝가리 점령을 직접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다.

공산당의 형성

공산당의 초동 주체는 1918년 11월 4일 한 호텔에서 조직되었으며, 이때 전직 헝가리 전쟁 포로와 기타 공산주의 지지자들이 모스크바 시내에서 중앙위원회를 구성했다. 쿤 벨러가 이끄는 새로 창당된 당의 내부 서클은 11월 16일 모스크바에서 부다페스트로 돌아왔다. 11월 24일 그들은 헝가리의 공산당(Kommunisták Magyarországi Pártja, KMP)을 창설했다. 헝가리 공산당 대신 이 이름이 선택된 이유는 지지자들의 대다수가 당시 헝가리가 아닌 민족 배경의 사람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던 헝가리의 도시 산업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면서 당원을 모집했고, 그 과정에서 헝가리 사회민주당의 많은 당원들을 급진화시켰다. 1919년 2월까지 당원 수는 30,000~40,000명에 달했으며 여기에는 많은 실업자, 전직 군인, 젊은 지식인 및 소수 민족이 포함되었다.

쿤 벨러는 뵈뢰쉬 위샤그(붉은 신문이라는 뜻)라는 신문을 창간하고 카로이의 자유주의 정부를 공격하는 데 집중했다. 이 당은 부다페스트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헝가리가 징집 없이도 영토를 방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쿤은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군대에 맞서 소련 적군의 군사적 지원과 개입을 약속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공산당의 권력 기반은 급속히 확대되었다. 지지자들은 언론과 사회민주당에 대해 공격적인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당을 주요 경쟁자로 여겼는데, 그 이유는 사회민주당이 같은 사회 계층, 즉 도시의 산업 노동자 계층에서 정치적 지지자들을 모집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2월 20일 시위가 폭력적으로 변했고 시위자들이 헝가리 사회민주당의 공식 신문인 니프스자바('인민의 말'이라는 뜻)의 편집실을 공격한 것이었다. 뒤따른 혼란 속에서 경찰 일부를 포함해 7명이 사망했다. 정부는 공산당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일간지 뵈뢰쉬 위샤그를 금지했으며 당 건물을 폐쇄했다. 체포는 특히 폭력적이었고 경찰은 공개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을 구타했다. 이는 부다페스트 프롤레타리아트 대중 사이에서 공산당에 대한 대중적 동정의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3월 1일, 뵈뢰쉬 위샤그는 다시 출판 허가를 받았고 공산당 당사가 다시 열렸다. 지도자들은 감옥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 허용되어 정치 업무를 계속 진행할 수 있었다.

전개

쿠테타

3월 20일, 카로이는 데니스 베링키 총리가 사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빅스 서신[2]의 발표는 정부에 치명적인 것으로 판명되었고, 유의미한 지지가 없었다. 카로이와 베링키는 파리로부터 헝가리 군대에게 전선을 추가로 철수하라고 명령하는 서신을 받았을 때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새로운 군사선은 전후 경계가 될 것이라고 널리 추정되었다. 카로이와 베링키는 해당 통보를 수락하면 헝가리의 영토 보전이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를 거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고 결론지었다. 3월 21일, 카로이는 내각회의에 헝가리 사회민주당만이 대도시, 특히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높은 대중 지지를 받는 정당이기 때문에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집권 연합을 형성하기 위해 사회민주당은 여전히 ​​투옥되어 있는 헝가리의 공산당 지도자들과 비밀 협상을 시작했고, 헝가리 사회당이라는 이름으로 두 정당을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카로이 대통령은 노골적인 반공주의자이었지만 합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카로이는 자신이 사회민주주의 정부라고 믿었던 정부를 지지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정부에 직면하게 되었고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쿤 벨러와 공산주의자들은 3월 20일 밤 마르지트 링 교도소에서 석방되었습니다. 카로이는 새 공산주의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고, 7월에 가까스로 탈출하여 파리로 도망갔다.

사회민주당과 헝가리의 공산당과의 동맹은 산업 노동계급에 대한 입지를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점점 강력해지는 러시아 공산당과의 잠재적인 연결고리를 제공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모델을 따르지만 노동자 평의회의 직접적인 참여 없이, 사회당은 혁명통치평의회라는 기관을 창설했고, 이 정부는 3월 21일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을 선포하고 카로이 대통령을 해임했다. 소련에 라디오를 보내 쿤 벨러는 레닌에게 헝가리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수립되었음을 알리고 소련과 동맹 조약을 맺을 것을 요청했으나 소련은 러시아 내전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거부했다. 3월 23일 레닌은 쿤 벨러에게 사회민주당을 권력에서 제거하여 헝가리를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통치하는 사회주의 국가로 전환시킬 것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공산당은 다음날 정부에서 사회민주당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거르버이 정권

공식적으로는 거르버이 샨도르가 정부를 이끌었지만, 레닌과 친분이 있고 친분이 있는 쿤 벨러만이 외무장관으로서 실권을 쥐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 지도자를 만나 대화한 정부 내 유일한 사람이었고, 쿤은 무선 통신을 통해 크렘린과 연락을 유지했다.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내각구성은 다음과 같다:

직위 명단
국가주석 겸 총리 거르버이 샨도르
내무인민위원 겸
통상인민위원
런들러 예뇌
농림인민위원 시즈마디아 샨도르, 반투스 카로이, 험부르게르 예뇌, 죄르지 니스토르
국방인민위원 포가니 요제프, 피들러 레죄, 호브리히 요제프, 스잔토 벨러
법무인민위원 로나이 졸탄, 라다이 이슈트반
식품인민위원 에르데이 모르, 콘도르 베르나
교육인민위원 쿤피 지그몬드, 루카치 죄르지, 서뮤엘리 티보르, 서바도시 샨도르
외무인민위원 쿤 벨러
노동인민위원 보카니 데죄
독일외교인민위원 칼마르 헨리크
재무인민위원 바르가 오이겐, 렝겔 기울라
선전인민위원 뵘 빌모시

헌법이 선언된 후 인민위원회에서 인사변경이 이뤄졌다. 새로운 내각구성은 다음과 같다.

직위 명단
경제생산인민위원 바르가 오이겐, 라코시 마차시, 헤베시 기울라, 켈렌 요제프, 버야키 페렌츠
국제외교인민위원 겸
철로운행인민위원
런들러 예뇌, 버고 벨러
외무인민위원 쿤 벨러, 포가니 요제프, 아고스톤 페테르

정책

정부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연합으로 구성되었지만 쿤을 제외한 모든 인민위원은 전직 사회민주당 당원이었다. 쿤 벨러의 치하에서 공산주의 강령을 전면적으로 채택한 새 정부는 귀족의 직함과 특권의 폐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포고하고 집회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성문화하고 무료 교육을 시행했으며, 소수민족에 대한 언어 및 문화적 권리를 보장했다.

또한 산업 및 상업 기업을 국유화하고 주택, 교통, 은행, 의료, 문화 기관 및 40헥타르가 넘는 모든 토지를 사회화했다. 공산정권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또한 헝가리의 이전 국경을 복원하겠다는 그들의 약속에 크게 의존했다. 정부는 헝가리가 전후 협상에서 잃을 땅의 일부를 되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삼국 협상국과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했다. 공산정권은 헝가리 시골에서는 인기를 얻지 못했으나, 대규모 산업 중심지의 프롤레타리아 대중들 사이에서, 특히 노동계급이 주민의 높은 비율을 대표하는 부다페스트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다.

라코시 마차시가 지휘하는 적위대가 창설되었다. 또한 레닌의 소년들으로 알려진 200명의 무장병력 그룹이 체르니 요제프의 지휘 아래 분견대를 구성했다. 이 부대는 반혁명 운동이 활동할 것으로 의심되는 전국 여러 지역에 배치되었다. 레닌 소년들과 기타 유사한 단체 및 선동가들은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소총 개머리판을 사용하여 종교의식을 해산하는 등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공포에 떨게 했다. 그들은 재판 없이 피해자들을 처형했고, 이로 인해 지역 주민들과 여러 차례 갈등이 발생했으며 그 중 일부는 폭력적으로 변했다. 헝가리 공산주의자들의 상황은 6월 24일 사회민주당의 쿠데타 실패 이후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악화되기 시작했다. 새로 구성된 거르버이 샨도르의 공산주의 정부는 대규모 보복에 의지했다. 혁명재판소는 쿠데타 시도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적색 테러로 이어졌으며, 고도로 산업화된 교외 지역과 부다페스트 대도시 지역의 노동계층 사이에서도 공산정권에 대한 지지가 크게 감소했다.

결말

5월 말, 협상국 대표가 헝가리에 더 많은 영토 양보를 요구하자 쿤 벨러는 헝가리의 역사적 국경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려고 했다. 헝가리 붉은 군대의 병사들은 부다페스트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원입대자들로부터 모집되었다. 6월, 헝가리 붉은 군대는 상부 헝가리[3]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신생국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다. 헝가리 붉은 군대는 초기에 약간의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슈트롬펠드 아우렐 대령의 지휘하에 상부 헝가리에서 체코 군대를 축출하고 동쪽에서 루마니아 군대에 맞서 진군할 계획을 세웠다. 헝가리의 이전 국경을 복원하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은 6월 16일, 프레쇼우에서 슬로바키아 평의회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프랑스가 루마니아군이 티산툴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헝가리 정부에 약속했을 때, 쿤 벨러는 상부 헝가리에서 정치적 실패 이후에도 충성을 유지했던 남은 군대를 철수했다. 그러나 붉은 군대가 북쪽에서 후퇴한 후에도 루마니아군은 철수하지 않았다. 쿤 벨러는 1919년 헝가리-루마니아 전쟁으로 사기가 저하된 헝가리 붉은 군대의 나머지 부대를 루마니아 쪽으로 돌리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헝가리와 소련은 부다페스트에서 온 소수의 공산주의 자원입대자들과 두 국가 모두에 대한 지원으로 루마니아와 싸우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전쟁이 지속됨으로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은 쇠퇴하고있었다. 헝가리 북부에서 사기가 저하되어 퇴각한 후, 가장 헌신적인 헝가리 공산주의자들만이 전투에 자원했고, 루마니아군은 7월 30일 헝가리 붉은 군대의 취약한 전선을 돌파했다.

쿤 벨러는 다른 고위 공산당원들과 함께 8월 1일 으로 도망쳤고, 전 문화위원이자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루카치 죄르지를 포함한 소수만이 지하 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해 남았다. 빈으로 도망치기 전에 쿤 벨러와 그의 추종자들은 국립은행의 수많은 예술품과 금 재고를 가져갔다. 부다페스트 노동자 평의회는 페이들 줄러가 이끄는 새 정부를 선출하였지만, 이 정부는 루마니아군이 8월 6일 부다페스트에 입성하기 전까지 불과 며칠 동안만 지속되었다.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의 몰락과 루마니아 군대의 입성으로 인해 발생한 권력 공백 속에서 기술적으로는 호르티의 지휘를 받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독립적인 준군사조직이 공산주의자, 좌파, 유대인에 대한 백색테러를 자행하였으며,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의 많은 지지자들은 재판 없이 처형당했다.

참고자료

각주

  1. 통칭 -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2. 빅스 서신(Vix Note) 프랑스 중령이자 연합국 대표인 페르낭 빅스가 보낸 외교서신. 헝가리를 베오그라드 휴전 협정에서 합의한 것보다 더 많은 영토에서 철수하고 철수시키려는 동맹의 의도를 헝가리 제1공화국의 카로이 미하이 정부에 전달했다.
  3. 現 슬로바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