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루시초프의 거짓 공산주의와 그 역사적, 세계적 교훈에 대하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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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시기 = 1964년 7월 14일
|발표시기 = 1964년 7월 14일
|출판사 = 북경 외문출판사
|출판사 = 북경 외문출판사
|출처 = [http://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mao/works/1964/phnycom.htm 영문 출처]<ref>1997년 랄프 마르텐스 </ref>, [https://m.blog.daum.net/mlkorea1917/25 한국어 출처]
|출처 = [http://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mao/works/1964/phnycom.htm 영문 출처]<ref>1997년 랄프 마르텐스 </ref>, [https://m.blog.daum.net/mlkorea1917/25 국문 출처]
|편집자의 주 = ‘인민일보’와 ‘홍기’ 편집부, 중국, 1964년 7월 14일.
|편집자의 주 = ‘인민일보’와 ‘홍기’ 편집부, 중국, 1964년 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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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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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기사 및 논평 번역 자료]][[분류:마오쩌둥주의 자료]]

2022년 5월 25일 (수) 01:50 기준 최신판

제목: 흐루시초프의 거짓 공산주의와 그 역사적, 세계적 교훈에 대하여
부제: 9차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공개장에 대한 논평
저자: ‘인민일보’와 ‘홍기’ 편집부
주제: 마오쩌둥주의, 니키타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발표시기: 1964년 7월 14일
출판사: 북경 외문출판사
출처: 영문 출처[1], 국문 출처


흐루시초프의 거짓 공산주의와 그 역사적, 세계적 교훈에 대하여
9차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공개장에 대한 논평

저자: ‘인민일보’와 ‘홍기’ 편집부


편집자의 주
‘인민일보’와 ‘홍기’ 편집부, 중국, 1964년 7월 14일. 출처는 북경 외문출판사에서 1964년 발행된 팸플릿이다.


머리말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한 이론은 맑스-레닌주의의 정수이다. 혁명이 계속되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것인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계속되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반대될 것인가의 문제는 맑스-레닌주의와 수정주의 부류들 간의 투쟁에서 언제나 핵심이 되었으며 이제는 전 세계의 맑스-레닌주의자와 흐루시초프 수정주의파 사이의 투쟁의 핵심이 되었다.

소련공산당 22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일파들은 ‘평화공존’ 이나 ‘평화이행’과 같은 반혁명적 이론을 완성할 뿐 아니라 쏘련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선언하고, ‘전인민의 국가’, ‘전 인민의 당’과 같은 터무니없는 이론을 제출하여 그들의 수정주의 체계를 완성시켰다.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일파가 22차 소련공산당 당대회에 제출한 강령은 가짜 공산주의 강령이며,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반하는 수정주의 강령이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을 폐지하는 것이다.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일파들은 ‘전인민의 국가’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은폐하여 폐기했다. ‘전인민의 당’을 통해 소련공산당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은폐하여 바꾸었으며, ‘완전한 공산주의 건설’의 뒤로 자본주의의 부활의 길을 열어주었다.

1963년 6월 14일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일반 노선에 관한 제안’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그것은 이론적으로는 터무니없는 것이며, 실천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전인민의 국가’로 바꾸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정당을 ‘전인민의 당’으로 바꿔버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바꿔치기는 공산주의로의 어떠한 이행도 불가능하게 하고 자본주의의 부활을 도울 뿐인, 역사적으로 거대한 퇴보이다.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공개장과 쏘련 언론은 자기정당화의 궤변을 주장하고 있으며, ‘전인민의 국가’와 ‘전인민의 당’에 대한 우리의 비판에 대해 ‘맑스주의에서 한참 이탈한’ 주장이며 ‘쏘비에트 인민의 삶과는 분리되는’ 배신이며, ‘과거로 돌아가는’ 요구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 맑스-레닌주의에서 한참이나 이탈했으며, 소비에트의 삶이란 진정 무엇이며, 누가 진정 소련을 과거로 되돌리기를 원하는지 밝혀보자.

사회주의 사회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란 무엇인가? 계급들과 계급의 투쟁은 사회주의 단계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존재하는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계속되어야 하며 사회주의 혁명은 끝까지 수행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자본가들이 복귀하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해 폐기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맑스-레닌주의의 기본 이론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역사적 경험에 따라 올바르게 답해져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로 대체한 것은 인류 사회의 역사적 발전에서 거대한 도약이다. 사회주의 사회는 계급사회에서 계급이 폐지된 사회로 이행하는 중요한 역사적 시기를 포함한다. 사회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인간은 공산주의 사회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보다 월등히 우수한 체제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부르주아 독재를 대체하며 생산수단의 공적 소유는 그 사적 소유를 대체한다. 억압 받고 착취 받던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배계급이 되고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는 근본적으로 변한다. 단지 소수의 착취자들에 대한 독재를 행하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국가는 노동자 대중들의 광범위한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민주주의를 실현한다. 산업 국유화와 농업 집산화로 사회적 생산력은 왕성하게 발전하고, 생산력은 과거 다른 어떤 사회보다 월등히 높아지는 거대한 전망이 펼쳐진다.

하지만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태어난 사회이며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국면일 뿐이다. 아직 경제적으로나 다른 영역에서 충분히 성숙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반을 지닐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맑스는 다음과 같이 특징지었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려는 공산주의 사회는 스스로의 기반 위에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이는 경제, 도덕, 지식과 같은 모든 측면에서 그러하며, 그것이 발생한 모태로부터 이전 사회의 모반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맑스,《고타강령비판》,

「맑스 엥겔스 선집」, 외국어출판사, 모스크바, 1958, Vol. 2, p. 23

레닌 또한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단계인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는 아직 경제적으로 충분히 성숙할 수 없고 자본주의의 흔적과 전통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지적했다.[2]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와 농민 간의 차이, 도시와 농촌 간의 차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이는 여전히 남아있으며, 부르주아의 권리가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니다. “다른 불평등, ‘기여한 노동에 따른(필요에 따라서가 아니라)’ 소비재의 분배를 포함하는 것”을 한 번에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며 빈부의 차이는 여전히 존재한다.[3]

이러한 차이들, 현상들, 부르주아 권리들의 폐지는 오로지 점진적이고, 장기간에 걸쳐 가능한 것이다. 맑스가 말했던 것처럼, 이러한 차이들이 일소되고 부르주아적 권리가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만 공산주의의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필요에 따라’라는 원칙이 실현될 것이다.

맑스-레닌주의와 소련, 중국과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실천은 사회주의 사회는 매우 긴 역사적 단계를 포함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단계 전반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계급투쟁은 계속되며, 자본주의가 부활하는 위험과 같은 것처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길 사이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가’라는 문제 또한 남아있다.

6월 14일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일반 노선에 관한 제안’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언급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은 뒤 매우 긴 역사적 시기 동안, 계급투쟁은 인간의 의지와는 독립된 객관적 법칙, 권력을 잡기 전과는 단지 형태만이 다른 것으로 계속될 것이다.

10월 혁명 이후 레닌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수없이 지적했다.

a) 전복된 착취자들은 그들이 빼앗긴 “천국”을 되찾기 위해 수많은 방법으로 호시탐탐 노력한다.

b) 쁘띠부르주아적인 환경 속에서 자본주의의 새로운 요소들이 끊임없이, 자발적으로 발생한다.

c) 부르주아적 영향과 쁘띠부르주아지의 만연하고 타락한 영향의 결과로, 정치적 타락과 새로운 부르주아적 요소들이 노동자 계급의 대열과 국가 기구 속에서 형성될 수 있다.

d) 사회주의 사회는 내부에는 끊임없이 계급투쟁이 벌어지고 외부적으로는 전 세계적 자본주의, 제국주의자들의 군사적 개입의 위협과 평화적 붕괴를 기도하기 위한 그들의 전복적 활동들이라는 환경에 놓여있다.

현실은 이러한 레닌의 결론을 확인시켜 주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타도된 부르주아지들과 다른 반동적 계급들은 꽤 오랫동안 강한 상태로 남아있으며, 특정한 부분에서는 상당히 강하다. 그들은 국제적 부르주아지들과 수많은 연관을 맺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을 강화시키려 프롤레타리아트에 고집스럽게 계속 개입하여 한다. 그들은 모든 영역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공공연하게 그리고 은밀하게 투쟁을 벌인다.

사회주의, 소비에트 체제, 공산당과 맑스-레닌주의를 지지하는 간판을 내걸고 있는 척하면서 그들은 사회주의를 훼손하고 자본주의를 재건하려 애쓴다. 정치적으로,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대항 세력으로 오랜 시간 동안 존재하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전복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할 것이다. 그들은 정부기관, 공공기관, 경제부처, 문화와 교육 기구에 슬며시 침투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력에 저항하고 침범하려 한다.

경제적으로, 그들은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모든 인민의 사회주의 소유와 사회주의 집단 소유를 파괴하려 하며, 자본주의 영향력을 강화시키려 한다.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교육 분야에서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관과 대치하여 부르주아 세계관을 두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와 다른 노동하는 인민들을 타락시키려 한다.

농업 집산화는 개인을 집단적 농민으로 변화시켰고, 소작농을 철저히 개조시키는데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그러나 집단적 소유가 전 인민에 의한 소유로 발전하고, 사적 경제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농민들은 소생산자로서의 본질적 성격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주의적 성향이 자연히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며, 부유한 농민이 새로이 성장하는 토대 또한 여전히 존재하며, 농민 간 양극화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

앞서 묘사한 것과 같은 부르주아지의 활동들, 그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문화적, 교육 분야에서의 타락한 영향력, 도시와 농촌의 소생산자들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자본주의적 경향성, 잔존하는 부르주아적 권리와 구사회의 습성들의 영향력들은 전부 노동자 대중과 정당, 정부 기구들, 새로운 부르주아적 요소와 횡령자들, 전 인민의 소유인 국영기업에서의 부패 관리, 문화 교육 기구와 지식인 무리에서의 새 부르주아 지식인들 내에서 지속적인 정치적 후퇴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새 부르주아적 요소와 정치적 타락은 타도되었지만 전멸되지는 않은 과거의 부르주아의 요소와 다른 착취계급의 요소들과 결탁하여 사회주의를 공격한다. 지배적 기관에 침투한 정치적 타락은 특히 위험한데, 그것이 낮은 수준에서 부르주아적 분파들을 지원하고 보호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사회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들은 자국의 부르주아지들, 그리고 국제적 제국주의와 투쟁해야 할 것이다. 제국주의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모든 가능성을 막고 군사적 침입을 하려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평화적인 해체를 야기할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파괴하거나 자본주의 국가로 무너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국제적 계급투쟁은 사회주의 국가 내에서의 반향을 반드시 일으킬 것이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본주의에서의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하나의 전체의 역사적 시대를 나타낸다. 그 시기가 끝나기 전까지, 착취자들은 분명 부활의 희망을 품고 있으며, 그러한 희망은 부활을 시도하는 것이 된다.
-레닌,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선집」, FLPH, 모스크바, Vol. 2, Part 2, p. 61.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계급의 폐지는 길고도 어렵고, 끈질긴 계급투쟁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권력을 타도하고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한 후에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설립한 후에도 (낡은 사회주의와 낡은 사회-민주주의 속물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사라지지 않고, 단지 다양한 양상으로 형태를 바꾸고 보다 강렬해진다.
-레닌, 《헝가리 노동자들에 대한 인사》, 「선집」, FPLH, 모스크바, Vol. 2, Part 2, pp. 210-11.

사회주의 단계 동안 내내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간의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문화 교육적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는 길고도 반복되며, 복잡하고 복합적인 투쟁이다. 이는 바다의 파도처럼 때때로 높아지기도, 가라앉기도 하며, 한때는 매우 조용하지만 한때는 매우 사나워진다. 이는 사회주의 사회의 운명을 결정할 투쟁이다. 사회주의 사회가 공산주의로 발전할 것인지, 아니면 자본주의로 되돌아 갈 것인지는 계속된 투쟁의 결과에 달려있는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계급투쟁의 모습은 필연적으로 공산당에 의해 만들어질 것이다. 부르주아지와 국제적 제국주의 둘 다 이를 이해하고 있으며, 사회주의 국가를 자본주의 국가로 퇴보시키기 위해 우선적으로 공산당을 수정주의 정당으로 퇴보시키려 한다.

과거 부르주아지들이나 새로운 부르주아 부류들, 과거나 새롭게 만들어진 부유한 농민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타락한 분파들은 수정주의의 사회적 기반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들은 공산당 내에서의 첩보원을 찾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부르주아적 영향력의 존재는 수정주의의 내부적 원천이며 제국주의자들의 압박에 항복하는 외부적 원천이다.

사회주의 단계 동안 내내 사회주의 국가의 공산당 내에서는 맑스-레닌주의 사상과 모든 종류의 기회주의 -주로 수정주의인-간의 피할 수 없는 투쟁이 존재한다. 수정주의의 성격이란, 계급의 존재와 계급투쟁에 대한 부정이며, 프롤레타리아트를 공격하는 부르주아지들 옆에 나란히 서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부르주아지 독재로 바꿔치기하려는 것이다.

국제적 노동자 계급의 투쟁 경험에 비춰서, 그리고 계급투쟁의 객관적 법칙에 따라, 맑스주의 설립자들은 자본주의로부터의 이행, 계급사회에서 계급 없는 사회로의 이행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달려 있으며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이르게 된다.
-《바이데마이어에게 보낸 편지, 1852년 3월 5일》, 「맑스 엥겔스 선집」, FLPH, 모스크바, Vol. 2, p. 452.

그는 또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 이행하는 혁명적 시기가 놓여있다. 이에 상응하는 정치적 과도기로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국가일 수밖에 없다.
-맑스, 《고타강령 비판》,「맑스 엥겔스 선집」,FLPH, 모스크바,Vol. 2, pp. 32-33.

사회주의 사회의 발전은 중단 없는 혁명 과정이다.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맑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러한 사회주의는 혁명의 영속성에 대한 선언이며, 전반적으로 계급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필수적인 이행 지점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독재이며, 그들이 서 있던 모든 생산관계에 대한 철폐이며, 이러한 사회적 관계에서 나온 모든 사상들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맑스,《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맑스 엥겔스 선집」, FLPH, Moscow, Vol. 1, p. 223.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레닌은 창조적으로 맑스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사상을 설명하고 발전시켰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계급투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에서의 계급투쟁의 연속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행해지는 계급투쟁이며, 부르주아지들로부터 정치권력을 가져오고 승리하여 부르주아지들은 패배했으나 절멸되지는 않았고, 사라지지 않은 부르주아지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으며 오히려 저항을 강화했다.
레닌,《자유와 평등의 슬로건을 가지고 인민을 기만하는 것》 연설 서문, 노동자농민동맹, FLPH, 모스크바, 1959, p. 302.

그는 또한 말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지난 사회의 세력과 전통에 대한 끈질긴 투쟁 -유혈의, 그리고 무혈의, 폭력적이면서도 평화로운, 군사적이며 경제적인, 교육과 행정상의- 이다.
레닌,《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선집」, FLPH, 모스크바, Vol. 2, Part 2, p. 367.

유명한 저서인 《인민 내부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 및 다른 저서를 통해, 마오쩌둥은 맑스-레닌주의 원칙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역사적 경험의 기반 위에서,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계급과 계급투쟁에 대한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분석을 제공하고 맑스-레닌주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이론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켰다.

마오쩌둥 동지는 유물론적 변증법의 관점으로 사회주의 사회의 객관적인 법칙을 연구하였다. 그는 자연세계와 인간 사회에서 작동하는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이라는 보편적 법칙이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하였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계급 모순은 여전히 남아있고 생산수단의 소유가 사회주의적으로 전환된 뒤에도 계급투쟁은 사멸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두 방향 간의 투쟁은 사회주의 단계 전체에서 존재한다. 사회주의 건설의 성공을 확실히 하고 자본주의로의 후퇴를 방지하기 위해, 정치, 경제, 사상적, 문화적 전선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끝까지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는 한 세대나 두 세대 만에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 다섯에서 열 세대, 심지어 더 긴 기간이 필요하다.

마오쩌둥 동지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두 가지 사회적 모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주로 인민들 사이에서의 모순 그리고 우리와 적 사이에서의 모순, 전자의 모순은 매우 많다. 오직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 유형의 모순을 구별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정확히 다루기 위해 서로 다른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인구의 90퍼센트가 넘는 인민들을 통일시킬 수 있으며, 적은 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 적을 물리칠 수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강고히 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사회주의를 견고히 하고 발전시키도록 하는 기본적인 보증이며, 부르주아지들에 대한 승리이며, 두 가지 방향 속에서 투쟁하는 사회주의의 승리이다.

오직 인간을 해방시킴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궁극적으로 해방될 수가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역사적 과제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내부적, 다른 하나는 국제적인 것이다.

내부적 과제는 주로 모든 착취 계급을 철폐 시키는 것, 사회주의 경제를 최고로 발전시키는 것, 대중들의 공산주의적 의식을 높이는 것, 모든 인민에 의한 소유와 집단적 소유 간의 차이를 없애는 것, 농민과 노동자들,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계급이 다시 나타나는 가능성과 자본주의로의 복귀의 가능성을 없애는 것,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배분하는)’ 이라는 공산주의 사회의 원리를 깨달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국제적인 과제는 주로 국제 제국주의의 공격(군사적 침범과 평화적 수단을 통한 붕괴 공작을 포함한다)을 방어하는 것이 주된 것이고, 모든 국가의 인민들이 제국주의, 자본주의와 착취 체제를 타도시킬 때까지 국제 혁명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과제를 달성하고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기 전까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오늘날의 현실적 상황으로 본다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과제는 어느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달성되기에는 멀었다고 볼 수 있다. 예외 없이 모든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계급과 계급들 간의 투쟁이 존재하고 있으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길 사이의 투쟁, 사회주의 혁명을 끝까지 수행하는 문제와 자본주의 부활을 막아내는 문제가 존재한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여전히 모든 인민에 의한 소유와 집단적 소유 간의 차이를 없애는 것, 농민과 노동자들,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차이를 없애는 것, 모든 계급들과 계급의 차이를 없애는 것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배분하는)’ 라는 공산주의 사회의 원리가 실현되기에는 갈 길이 멀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흐루시초프 수정수의 일파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폐지하는 것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배신일 뿐인 것이다.

소련에 존재하는 계급적대와 계급투쟁

수정주의자 흐루시초프 집단은, 계급적대는 제거되었고 계급투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들 자신들의 주장에만 주로 근거하여, 소련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폐지를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소련의 실제 상황은 어떠한가? 거기에는 진짜로 계급적대와 계급투쟁이 없는가?

위대한 10월 혁명의 승리 이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소련에서 건설되었고, 자본주의 사적 소유는 해체되었으며 전 인민에 의한 사회주의적 집단 소유가 산업 국유화와 농업 집산화를 통해 형성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에서의 거대한 성취는 수십 년 동안 성공적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레닌과 스탈린의 지도력 하의 소비에트 인민과 쏘련공산당에 의해 성취된 역사적으로 너무도 중요한 승리를 이룩했다.

그러나 소련에서 타도된 과거의 부르주아지들과 다른 착취 계급들은 절멸되지 않았고 산업이 국유화되고 농업이 집산화된 뒤에도 살아남았다. 부르주아지들의 정치 사상적 영향력은 남아있었다. 도시와 농촌에서 부르주아적 경향들이 자연스럽게 계속 존재했다. 새로운 부르주아 분자들과 쿨락(Kulak, 부농)들이 여전히 끊임없이 발생했다. 오랜 시기에 걸쳐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 간의 계급투쟁,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방향성 사이의 투쟁이 정치, 경제, 사상적 영역에서 계속되었다.

소련이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사회주의를 건설하였고, 본받을 어떠한 외국의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스탈린이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계급투쟁의 법칙에 대한 이해에서 맑스-레닌주의 변증법을 벗어났기 때문에, 스탈린은 농업이 기본적으로 집산화 된 이후 소련에서 “더 이상 적대적인 계급은 없다” 그리고 “계급갈등에서 자유롭다”고 때 이르게 선언하였다.[4] 사회주의 사회의 내부적 동질성만을 일면적으로 강조하고 그 모순을 간과하여, 자본주의 세력에 대한 투쟁에서 노동자 계급과 대중에게 의지하는 것에는 실패하였고 자본주의 부활의 가능성을 오직 국제 제국주의의 무장 공격과 관련지어서만 생각하였다. 이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잘못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스탈린은 위대한 맑스-레닌주의자로 남아있다. 그가 소비에트 당과 국가를 지도하는 동안, 스탈린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사회주의 방향을 빠르게 수립했고, 맑스-레닌주의 노선을 추구했으며 사회주의 길을 따라 소련의 승리의 전진을 확실히 했다.

흐루시초프가 소비에트 당과 국가의 지도자가 된 이래로, 그는 수정주의 정책의 모든 과정을 밀어부쳐 자본주의 세력의 성장을 크게 촉진하였고, 소련 내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계급투쟁 그리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길 사이의 투쟁을 또 다시 첨예하게 만들었다.

지난 몇 년간의 소비에트 신문 기사를 훑어보면, 소비에트 사회 내에 과거 착취 계급의 수많은 요소들이 존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새로운 부르주아지 세대의 요소가 거대한 규모로 존재하며, 계급 양극화가 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전 인민의 소유인 소비에트 기업 내에서의 다양한 부르주아적 요소들을 살펴보자.

국가 소유의 공장에서 지도적 관리들과 그 무리들은 그들의 지위를 남용하여 공장 설비와 재료를 사적 생산을 위한 “비밀 작업장”을 설치하는 데에 사용하고, 생산물을 불법적으로 판매하고 이권을 나누었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레닌그라드의 군수품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지도적 관리들은 ‘자기 사람들’을 “모든 주요 위치”에 두고 “국영 기업을 사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그들은 군수품이 아닌 물건들을 불법적으로 생산하는 데에 몰두하여 만년필 한가지만을 판매해 3년 동안 120만 구(舊) 루블을 횡령했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는 “1920년대의 네프맨”인 사람, 그리고 “한평생 도둑”으로 지낸 사람이 있었다.
《Krasnaya Zvezda》, 1962년 5월 19일
우즈베키스탄 실크 짜는 공장에서는, 최고 기술자와 최고 회계사, 판매 공급 분야의 책임자, 작업장의 책임자 등이 한패가 되어 그들 모두가 “새로 생겨난 기업가들”이 되었다. 그들은 다양한 불법 경로를 통해 10톤이 넘는 인공, 천연 실크를 구매하여 “회계를 거치치 않는” 상품을 제조했다. 그들은 적합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노동자들을 고용해 “하루 열두시간의 노동”을 강제하였다.
《Pravda Vostoka》, Oct. 8, 1963.
하리코프의 가구 공장의 경영자는 “불법적 니트 의류 작업장”을 설치하였고 공장 내에서 비밀 작업을 계속했다. 이 남자는 “여러 부인과 여러 자동차, 여러 집, 176개의 넥타이, 100여벌의 셔츠, 수많은 양복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한 경마장에서 큰 도박꾼이었다.
《Pravda Ukrainy》, 1962년 5월 18일

이들은 스스로 이 모두를 운영하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공급 담당 국가부서, 상업담당 국가부서와 다른 부서에 있는 관리들과 긴밀하게 협력하여 일했다. 그들은 그들을 보호할 수 있고 그들의 대리인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경찰서와 사법부에 그들 자신의 사람을 두고 있었다. 심지어 국가 기관에서 고위 공직자들이 그들을 지원하고 방패막이가 되었다. 여기 몇 가지 사례가 있다.

그 작업장 최고 책임자는 모스크바 정신신경학진료소에 관련되어 있었고 그의 패거리는 한 개의 “비밀 기업”을 설립했다. 또한 뇌물수수로 “58개의 편물 기계를 취득했”으며 많은 양의 재료를 취득했다. 그들은 “52개 공장, 수공업 제품 협동조합과 집단농장”과 관련되어 있는 기업으로 파고들었고 몇 년 안에 3백만 루블을 벌었다. 그들은 사회주의 자산 절도와 투기에 맞서 싸우기 위한 부서, 회계감사, 조사관, 지도자 및 다른 관리들을 매수했다.
《Izvestia》, 1963년 10월 20일자와 《Izvestia Sunday Supplement》, 1964년 12호
2차 기계 공장 경영책임자와 다른 관리들, 혹은 43명 전부와 함께, 러시아연방에 있는 기계공장경영자는 9백 개가 넘은 직기들을 훔쳐서 최고위 관리들이 불법생산 용도로 그것들을 사용하고 있던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코카서스 그리고 다른 지역들에 팔았다.
《Komsomolskaya Pravda》, 1963년 8월 9일
키르키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40명 이상의 횡령자들과 부패 정치인들 무리는 두 개 공장 통제권을 획득하고 비밀생산을 조직하고 3천만 루블 이상의 가치가 있는 국가 자산을 훔쳤다. 그 무리에는 “추방지에서 탈출했던 거대 쿨락 한 명”뿐 아니라, 공화국계획위원회의장, 무역대표부차관, 7개부서 책임자와 공화국공사위원회 지구책임자, 국가경제위원회와 국가통제위원회가 포함되어 있었다.
《Sovietskaya Kirghizia》, 1962년 1월 9일

이러한 사례들은 그러한 타락자들의 수중에 떨어진 공장들이 명목상으로만 사회주의 기업이고, 실제로는 이러한 타락한 인간들 자신들을 부유하게 하는 자본주의 기업들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동자들과 그런 인간들의 관계는 착취자와 피착취자, 압제자와 피압제자 사이의 관계로 변모했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그런 타락분자들은 철저히 부르주아 요소가 아닌가? 그들과 공모해서 일을 하고, 다양한 종류의 착취에 참여하고, 횡령에 관여하고, 뇌물을 받고, 약탈품을 나누어 갖는 정부기구 내에서의 그들의 공범들 역시 철저히 부르주아 요소가 아닌가?

분명 이들 인간들 모두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적대적이고 부르주아지에 속하는 계급이다.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그들의 행위들은 단언컨대 프롤레타리아트를 공격하는 부르주아지의 계급투쟁이다.

이제 집단농장에서 다양한 쿨락 분자들의 활동을 살펴보자.

몇몇 지도적 위치에 있는 집단농장 관리들과 그들의 무리들은 집단농장 자산을 마음대로 훔치고 투기했으며, 자유롭게 공적자금을 탕진하고 사취했다. 여기 몇 가지 사례가 있다.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집단농장 책임자는 “강권으로 전체 마을을 차지했다”. 이 농장에서 모든 중요한 자리는 “그의 친인척들과 친구들이 차지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필요’를 위해 집단농장의 132,000 루블을” 탕진했다. 그는 차 한 대와 두 대의 모터사이클을 보유했고, 부인을 세명이나 두었는데, 이들 부인들은 각각 ‘자신의 집’이 있었다.
《셀스까야 지즌》, 1962년 6월 26일
쿠르스크 지방에 있는 집단농장 책임자는 농장을 자기의 “세습 사유지”로 간주했다. 그는 회계사, 계산원, 창고 관리책임자, 농학자, 상점 총관리자와 그 밖의 사람들과 공모했다. 서로를 보호막으로 해서, 그들은 “집단농장을 사취했고” 몇 년 내에 10만 루블 이상을 착복했다.
《Ekonomicheskaya Gazeta》, 1963년 35호
우크라이나에 있는 집단농장 책임자는 단조물구매증서를 가지고 그 비용으로 5만 루블 이상을 만들었고 “모형 회계”(model accounts)를 하는 데 능통했던, 여성 회계사와 공모하여 당좌계정어음(cash-account orders)을 개설했다. 그리고 그의 행적은 국가경제공로로 모스크바 전람회에 전시되었다.
《Selskaya Zhizn》, 1963년 8월 14일
알마아타 지방에 있는 집단농장 책임자는 상업투기를 전문적으로 했다. 그는 “우크라이나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천연 주스를 구매하고 잠불(jambul)로부터 설탕과 알콜”을 구매해서 그것들을 가공해서는 많은 지방에 아주 높은 가격으로 와인을 팔았다. 이 농장에서 와인류는 한 해 1백만 리터 이상의 소비량을 만들어 냈다. 그 투기적 상업망은 카자흐스탄쏘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SSR)전역에 퍼졌고 상업투기는 농장의 주요소득원 중 하나가 되었다.
《프라우다》, 1962년 1월 14일
벨로루시에 있는 집단농장 책임자는 자기 자신을 “농장 봉건 소군주”로 여기고는 모든 문제를 “친히” 해결했다. 그는 농장에 살지 않고 도시나 자기 소유의 화려한 빌라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는 항상 “다양한 상업적 권모술수”와 “불법거래”로 바빴다. 그는 외부로부터 가축을 사서는 그것들을 집단농장 생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생산고 수치를 조작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꽤 많은 찬사를 보내는 신문 보도”는 그에 대한 기사를 다루고 그는 “귀감이 되는 지도자”라고 불렀다.
《프라우다》, 1961년 2월 6일

이러한 사례들은 그러한 관리들의 통제 하에 집단농장이 사실상 그들의 사적 자산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한 인간들이 사회주의 집단경제 기업들을 새로운 꿀락 기업으로 변모시켰다. 종종 그들을 제어하는 그들의 상급 조직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집단농장에 대한 그들의 지도력은 압제자가 압제받는 자들에게 가하는, 착취자가 착취 받는 자들에게 가하는 지도력과 똑 같은 것이 되었다. 집단농장의 등에 올라탄 그러한 새로운 착취자들은 백퍼센트 새로운 쿨락이 아닌가?

명백하게도, 그들 모두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적대적이고 농업노동자에게 적대적인 계급에 속하고, 쿨락과 농촌 부르주아 계급에 속한다. 그들의 반사회주의 활동들은 확실히 프롤레타리아트와 농업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계급투쟁이다.

국유기업과 집단농장에서 부르주아 계급 성분들 이외에, 소련에는 도시와 농촌 둘 다에 다른 많은 부르주아 계급이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사적 생산과 판매를 위한 사적 기업을 설립했다; 다른 사람들은 도급업자 무리를 조직하고 공개적으로 국영농장이나 협동농장 기업을 위한 건설 일자리를 떠맡았다; 역시 다른 사람들은 개인 호텔을 개업했다.

레닌그라드에 있는 “소비에트 여성 자본가”는 판매용 나일론 블라우스를 만들기 위해 노동자들을 고용했다. 그리고 그녀의 “하루 소득은 700 신(新)루블 이상 달했다”.
《Izvestia》, 1963년 4월 9일
쿠르스크 지방에서 작업장 소유주는 투기적 가격으로 판매하기 위해 펠트 부츠를 만들었다. 그는 540 쌍의 펠트 부츠, 8킬로그램의 금화, 3,000미터의 높은 등급 직물, 20개 양탄자, 1,200 킬로미터의 모직물과 다른 많은 값비싼 재산을 보유했다.
-소비에츠카야 로시야(Sovietskaya Rossiya) 1963년 10월 9일


곰멜(Gomel) 지방에 있는 개인 기업가는 “노동자들과 장인들을 고용했”으며 2년 동안 12개 공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용광로의 건조와 점검을 위한 계약을 보증 받았다.
-《Izvestia》, 1960년 10월 18일
오랜버그 지방에서는 “수백 개의 개인 호텔과 환적장소(trans-shipment points)”가 있다. 그리고 “집단농장과 국영농장 화폐는 지속적으로 사기꾼 소유자의 주머니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Selskaya Zhizn》,1963년 7월 17일
상업적 투기에 종사하는 몇몇은, 싸게 사서 비싸게 팔거나 먼 곳에서 상품들을 가져와서 비싸게 팔아서 엄청난 이윤을 얻었다. 모스크바에는 농업생산물을 사서 되파는데 종사하는 수많은 투기꾼들이 있다. 그들은 “수 톤의 감귤류 과일, 사과, 야채들을 모스크바에 가지고 와서 투기 가격으로 그것들을 되팔았다”. “이러한 이윤강탈자들은 그들 멋대로 숙소, 저장소와 다른 서비스 기능을 가진 모든 시설을 제공했다”.
《Selskaya Zhizn》, 1963년 6월 17일
크라스노다르(Krasnodar) 지역에서, 한 투기꾼은 자기 자신의 대리점을 설립하고 “12명의 판매원과 두 명의 하역인부를 고용했다”. 그녀는 도시에서 촌락까지 “수천마리의 돼지, 수만 파운드의 훔친 용재 벽돌, 몇 트럭이 되는 유리 제품”과 다른 건축 재료들을 수송했다. 그녀는 그것들을 되팔아서 높은 이윤을 획득했다.
《Ekonomicheskaya Gazeta》, 1963년 27호
다른 사람들은 중개업자와 중간상인으로 특화된다. 그들은 폭넓은 중개망을 가지고 있고 뇌물에 대한 대가로, 그 중개망을 통해 어떤 물건이든 구입할 수 있다. 레닌그라드에는 “무역 장관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모든 재고품을 통제할 수 있고”, “철도에 어떠한 자리도 갖고 있지 않은데도 화차를 처분할 수 있는” 중개업자가 있었다. 그는 “외부로부터 엄격하게 통제하는 재고품들”을 얻을 수 있었다. “레닌그라드에 있는 모든 상점건물들은 그의 사업 수중에 있다.” 상품수송에 대해서, 그는 거대한 “보너스”를 받았는데, 1960년에만 목재 사업 연합으로부터 70만 루블을 받았다. 레닌그라드에서는, 그러한 중개업자의 “총집합체”가 있다.
-《Literaturnaya Gazeta》, 1963년 7월 27일과 8월 17일

이러한 사적 기업가들과 투기꾼들은 가장 적나라한 자본주의 착취에 종사하고 있다. 그들이 부르주아지에 속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적대계급이라는 것이 명확하지 않은가?

실제로 소비에트 언론 그 자체가 이러한 인간들을 “소비에트 자본가들”, “새롭게 태어난 기업가들”, “사적 기업가들”, “새롭게 부상한 꿀락”, “투기꾼들” “착취자들”, 등등으로 부르고 있다. 수정주의자 흐루시초프 도당이 쏘련에서 계급적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주장할 때 자기들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가?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은 단지 소비에트 언론에 출판됐던 일들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인민에게 충격을 추기에 충분하지만, 출판되지 않은, 더 크고, 감춰지고, 은폐되고 있는 더 심각함 경우들이 더 많이 있다. 우리는 쏘련에서 계급적대와 계급투쟁이 존재하는지 마는지의 문제에 대해 위해서 위의 사례를 인용했다. 이들 사례는 쉽사리 입수할 수 있기에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도당조차도 그것들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사례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하는 부르주아지가 억압되지 않은 쏘련내에서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에서, 농업뿐만 아니라 산업에서, 유통영역뿐만 아니라 생산영역에서, 경제부서에서부터 당과 정부기구까지, 그리고 대중들로부터 고위기구에까지 도처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반사회주의 행위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하는 부르주아지의 날카로운 계급투쟁으로 인해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과거와 새로운 부르주아지 요소에 의해 사회주의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당과 국가의 지도력과 맑스-레닌주의 지도력이 남아 있는 한에는 이것에 대해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소련에서, 수정주의자 흐루시초프 도당이 소비에트 당과 국가의 지도력을 강탈하고 특권화 된 부르주아 층이 쏘비에트 사회에서 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에 상황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는 다음번에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소비에트 특권 계층과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일파

최근 소비에트 사회 특권 계층은 부르주아 지식인층뿐만 아니라 당과 정부 기관, 기업과 농장 핵심 지도자 내의 타락한 분자들로 구성되어있다. 이들은 노동자와 농민, 압도적 다수의 지식인과 소련 핵심 인자들과 대립해 있다.

10월 혁명 바로 직후 레닌은 말했다. 부르주아지와 쁘띠부르주아 사상과 타성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전방위적으로 둘러싸고 영향을 미쳤으며, 특정 부분들을 타락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소비에트 관료와 직원들 사이에서 대중과 괴리된 관료주의, 그리고 부르주아 요소들이 발생하도록 했다. 레닌은 또한, 계속해서 일하고 있는 부르주아 전문 기술자들이 고임금을 받는 것은 소비에트 체제를 위해 필요하지만, 한편 그들은 소비에트 체제를 타락시키는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레닌은 강조하기를, 부르주아지와 쁘띠부르주아지 사상이 주는 영향에 끊임없이 맞서 싸우고 광범위한 대중이 정부 업무에 참여하도록 일깨워줘야 하며, 관료주의와 새롭게 형성되는 부르주아지들을 끊임없이 폭로하고 일소하고 부르주아지들이 재생산되고 존재하지 못하게 막는 환경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레닌은 “기관을 발전시키기 위한 체계적이고 단호한 투쟁이 없다면 우리는 사회주의 기초가 형성되기도 전에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강조하였다.[5]

또한 레닌은 파리코뮌에서 취해졌던 임금 정책의 원리를 고수할 것을 중요하게 강조하였다. 모든 공직자들은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에 상응하는 임금을 받도록 하는 것과 부르주아 기술자들만이 높은 임금을 받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10월 혁명 시기부터 쏘비에트 경제 복구 시기까지 레닌의 지침이 대부분은 지켜졌다. 당과 국가 기구, 기업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이들과 전문가들 중 당원들은 노동자들과 대략 동등한 수준으로 임금을 받았다.

당시 공산당과 소련 정부는 모든 기관에 있는 지도적 간부들이 권력을 남용하거나 도덕적, 정치적으로 타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치적 측면과 사상적 측면에서 수많은 조치들을 취했고 분배 체계에도 다양한 조치를 취했다.

스탈린이 지도하는 소련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사회주의의 길과 자본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견고한 투쟁을 고수했었다.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부하린에 대항하는 스탈린의 투쟁은 본질적으로는 공산당 내에 존재하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간의 투쟁 그리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 방향 간의 투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투쟁에서의 승리는 쏘련에서 자본주의를 복원시키려는 부르주아지들의 헛된 희망을 날려버렸다.

스탈린의 죽음 이전에도 특정 그룹에게 이미 높은 임금이 지급되었다는 것과 일부 간부들이 이미 타락하였고 부르주아적 분자가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 보고에서 타락과 부패가 특정 당 기구 내에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기구들의 지도자들은 그 기구를 자기 사람들로 완전히 채워진 작은 공동체로 바꾸었고, “자기 그룹의 이익을 당과 국가의 이익보다 우위에 두었다.” 생산 기업의 일부 경영진들은 “그들에게 책임을 맡긴 기업이 국영기업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그것을 자신의 사적인 영역으로 바꾸려한다.”

“집단농장에서의 일반적인 농작법을 지키려는 대신에”, 일부 당과 소비에트 관리들, 농업부의 일부 간부들은 “집단 농장의 자산을 도둑질한다.” 문화, 예술, 과학 분야에서도 중상행위와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훼손이 나타났고 독점적 “아락체예프 체제[6]”가 과학자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흐루시초프가 소비에트 당과 국가의 지도력을 강탈한 이래로, 소련 내 계급투쟁의 상태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흐루시초프는 부르주아지의 이익에 봉사하고, 소련 내에 자본주의 세력을 빠르게 성장시키는 일련의 수정주의 정책을 수행하였다.

“개인숭배와의 투쟁”이라는 명목으로, 흐루시초프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사회주의 체제를 비난했고 그리하여 실제로는 자본주의로 복귀하는 길을 닦아주었다. 스탈린을 완벽히 부정하면서, 그는 사실상 스탈린이 지켜왔던 맑스-레닌주의를 부정하게 되었고 수정주의가 범람하도록 수문을 열어 주었다.

흐루시초프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는 일한 만큼에 따라”라는 사회주의적 원리를 대신하여 “물질적 보상”으로 바꾸려했다. 그는 노동자, 농민, 평범한 지식인들의 극소수 수입 간 차이를 좁히는 것이 아니라 넓혔다. 흐루시초프는 지도층 내의 타락분자들을 지지했고, 그들이 권력을 남용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도록 해주었고, 소비에트 인민들의 노동의 결과를 착복하도록 격려해 주었다. 그리하여 흐루시초프는 소비에트 사회 내 계급 양극화를 촉진했다.

흐루시초프는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방해했으며, 자본주의의 이윤 원리를 적용시켰고, 자본주의 자유 경쟁을 발전시켰으며, 전인민에 의한 사회주의적 소유를 약화시켰다.

흐루시초프는 사회주의 계획 농업 시스템을 “관료주의적”이고 “불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공격한다. 미국 농장의 거대 경영자들을 배우려고 열성을 보이면서, 흐루시초프는 자본주의적 경영을 장려하고 꿀락 경제를 촉진시키며 사회주의 집단 경제를 약화시키고 있다.

흐루시초프는 부르주아 사상, 부르주아적 자유와 평등과 우애, 인간애를 확산 시키고 있으며 부르주아적 관념론과 형이상학, 부르주아 개인주의, 인간주의, 평화주의 반동적 사상을 쏘비에트 인민들에게 심어주면서 사회주의적 도덕성은 약화시키고 있다. 서양의 썩어빠진 부르주아적 문화가 이제 소련 내에서 유행이 되고 사회주의적 문화는 배척당하고 공격받는다.

“평화공존”이라는 기치 하에 흐루시초프는 미제국주의와 결탁해오고 있으며, 사회주의 진영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해체시키고 있고 억압받는 인민과 민족의 혁명적 투쟁에 반대하며 거대한 힘의 쇼비니즘[7]과 민족 이기주의를 실현하며 노동자 국제주의를 배반해오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한줌 밖에 안 되는 인간들이 획득해 온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들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소련 인민과 전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이익보다 우위에 있다.

흐루시초프가 추구하는 노선은 철두철미한 수정주의 노선이다. 그 노선에 따라 과거 부르주아 요소들이 난립할 뿐 아니라, 소비에트 정당과 국가 내의 지도자들과 국영 기업과 집단 농장의 책임자들과 문화, 예술, 과학, 기술 분야의 수준 높은 지식인들 사이에 새롭게 부르주아적 요소들이 상당수 생겨났다.

지금 소련에서는 새로운 부르주아적 요소들이 전례 없는 수로 생겨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지위 또한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흐루시초프가 권력을 잡기 전까지 그들은 쏘비에트 사회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하지 못했다. 그들의 활동은 여러 측면에서 제약 받았고 그들은 공격당하고는 했다. 하지만 흐루시초프가 당과 국가의 지도력을 하나씩 하나씩 찬탈해 나가게 된 이후, 새로운 부르주아적 요소들이 당, 국가, 경제, 문화 등의 영역 내에 점차 자라나 지배적 위치를 점하게 되었으며 소비에트 사회에서 특권 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특권 계층들은 오늘날 소비에트 사회에서 부르주아지의 주요 구성요소가 되었으며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일당의 주요한 사회적 기반이 된다.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일당은 쏘비에트 부르주아지, 특히 부르주아 특권 계층의 정치적 대리인이다.

수정주의 흐루시초프 일당은 지방 골간부터 중앙까지, 주요 당과 정부 기구부터 경제, 문화, 교육 분야까지 전 국가에 걸쳐 하나씩 하나씩 숙청을 진행하여 간부 그룹을 교체해왔고, 그들이 신뢰하지 않는 이들을 해고하여 핵심 지위에 자신들의 부하들을 두었다.

그 예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를 들 수 있다. 1952년에 열린 제 19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구성원 중 70%가 1956년에 20차 당대회, 1961년에 21차 당대회가 각각 개최되었던 동안에 숙청되었다는 것을 통계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20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구성원들의 대략 50%가 22차 당대회 시기에는 숙청되었다.

또 다른 사례로 지방 조직을 볼 수 있다. 미완성 통계자료에 의하면, 22차 당대회 전 날 “간부들에 대한 혁신”이라는 명분하에 수정주의 흐루시초프 일당은 공화국 연방의 당 중앙위원회의 45%와 지역과 영토의 당 위원회 구성원, 시와 구의 당 위원회의 40%의 직무를 박탈하였다. 1963년에는 또한, 당 위원회를 ‘산업’과 ‘농업’ 분야로 분리한다는 명목 하에 공화국 연방과 지역 당의 중앙위원회 구성원의 절반이 넘는 수를 교체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들을 통하여, 소비에트 특권 계층은 당, 정부 또는 다른 주요 기구들 내에서의 지배력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특권 계층의 구성원들은 대중에 대한 봉사라는 기능을 대중을 지배하는 특권으로 바꿔치기 해 버렸다. 생계와 생산의 수단에 대한 그들의 권력을 얼마 되지도 않는 자신들 일파의 사적 이익을 위한 권력으로 남용하였다.

특권 계층의 구성원들은 소비에트 인민들이 만들어 낸 노동의 결과물들을 빼앗아가고, 쏘비에트 농민과 노동자들이 얻는 수입의 수십 배 또는 백배에 달하는 수입을 챙겨갔다. 그들은 높은 임금, 높은 보상, 높은 로열티, 다양한 형태의 개인 보조금이라는 방식으로 거대한 수입을 얻어갈 뿐 아니라,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이용하여 뇌물과 수뢰를 통해 공유재산을 착복한다. 소련 노동자들과는 완전히 결별하여, 그들은 부르주아지들의 퇴폐적인 삶과 나란히 살게 되었다.

특권계층의 구성원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완전히 타락하였으며, 볼셰비키의 혁명적 전통과는 완전히 이별하여 소비에트 노동계급의 고귀한 이상을 저버리게 되었다. 그들은 맑스-레닌주의및 사회주의와 대립하고 있다. 그들은 혁명을 배반하고 다른 이들이 혁명을 하려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단 하나 그들의 관심은 그들의 경제적 지위와 정치적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들의 모든 활동은 그들의 사적 이득과 특권적 지위에 맞춰져 있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티토 일당이 여전히 ‘사회주의’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지만, 티토 일당이 수정주의의 길을 걷게 되어 유고슬라비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관료적 부르주아 독재로 바꿔버리고, 사회주의적 공적 경제를 자본주의 국가로 바꿔버린 이후 유고슬라비아 인민들과 대립하는 관료적 부르주아지가 점점 생겨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티토 일당이 이미 걸어왔던 길을 흐루시초프 일당이 따라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흐루시초프는 베오그라드[8]를 그의 성지로 이야기하며, 자신이 티토 일당의 경험을 배울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할 뿐 아니라 그와 티토의 일당이 “같은 이념에 속해있으며 같은 이론을 따르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놀랄 일도 아니다.[9]

흐루시초프 수정주의의 결과로, 소비에트 인민의 피와 땀으로 건설된 전 세계 첫 사회주의 국가는 이제 자본주의 복귀라는 유례없는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흐루시초프 일당은 “더 이상 계급 대립과 계급투쟁은 소련 사회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퍼트려 그들이 소비에트 인민들에 대해 행하고 있는 무자비한 계급투쟁의 진실을 감추려 하고 있다.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일당으로 대표되는 쏘비에트 특권 계층은 소비에트 전체 인구에 몇 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소비에트 간부층들 중에서 이들의 수 또한 적다. 총 인구의 90퍼센트를 넘게 차지하고 있는 소비에트 인민들과 쏘비에트 간부층과 공산주의자 절대 다수에 대해 이들은 정반대에 서 있다. 소비에트 인민들과 이들 특권 계층 사이의 모순은 이제 쏘련 사회 내에서 주요 모순이 되었으며, 타협할 수 없는 적대적 계급 모순이 되었다.

레닌이 건설했던 영광스러운 소련 공산당, 사회주의 10월 혁명을 통해 혁명의 신기원을 보여주었던 위대한 소비에트 인민들, 그들은 수많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무장 공격과 백위군을 무찌르며 용기와 정열을 보여주었고, 독일 파시스트와의 대조국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고 전 인류를 구해주었다. 흐루시초프 일당의 지배하에 있을 때조차도 소련공산당의 상당수 당원들과 소비에트 인민들은 레닌과 스탈린에 의해 형성되어 왔던 영광스러운 혁명 전통들을 이행하고 있으며, 여전히 사회주의를 지탱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다.

소비에트 노동자들, 집단 농장 농민들, 지식인들의 광범위한 다수들은 특권 계층에 의해 자행되는 억압과 착취에 대한 불만으로 들끓고 있다. 사회주의를 배반하고 자본주의로 복귀하려는 흐루시초프 일당의 수정주의적 특징을 그 어느 때보다 분명히 그들은 목격하고 있다.

소비에트 간부 그룹층 중에, 여전히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을 고수하고, 사회주의 길을 고수하고 흐루시초프 수정주의에 대해 확고히 반대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소비에트 인민들, 공산주의자, 간부층들의 광범위한 다수는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노선을 반대하고 저지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쓰고 있다. 그리하여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일당들은 그렇게 쉽게 자본주의로 복귀할 수는 없다. 위대한 쏘비에트 인민들은 영광스러운 10월 대혁명의 전통을 지키고, 사회주의의 위대한 업적들을 보존하며,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위한 음모를 박살내기 위해 싸우고 있다.

이른바 전인민의 국가에 대한 반박

소련공산당 22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반대하는 기치를 공개적으로 내걸면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의한 국가를 “전인민의 국가”로 바꿀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소련공산당 강령은 “소련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는 필수불가결하지 않게 되었고,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로써 부상했던 소련 국가는 이제 새로운 현재의 단계라 할 수 있는 국가로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라고 쓰이게 되었다.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국가에 대한 개념은 계급에 대한 개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레닌은 “국가의 두르러진 특징이란 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분리된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10]

국가는 계급투쟁의 무기이며,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기구이다. 모든 국가는 특정 계급의 독재이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국가는 계급을 넘어 서서 존재하거나 모든 인민에게 속한 것으로 존재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그 정치 정당은 그들의 관점을 결코 숨기지 않는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회주의 혁명의 바로 그 목적이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타도하는 것이며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를 설립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한다.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한 이후,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그 정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라는 역사적 과업을 완성하고 계급을 폐지하고 계급 간의 차이를 없애도록 하여 국가가 소멸되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오직 부르주아지와 그 정당만이 대중에게 눈속임을 하기 위한 시도로 국가 권력의 계급적 본성을 감추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며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국가 기구를 마치 “전 인민의 것”이며 “계급을 초월하는” 것으로 묘사하려 애쓰고 있다.

흐루시초프가 소련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를 폐기할 것을 주장했다는 사실과 “전인민의 국가”라는 테제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은 그가 맑스-레닌주의의 국가에 대한 가르침을 부르주아적 기만으로 바꾸어버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맑스-레닌주의자들이 그들의 오류를 비판할 때에, 흐루시초프 일당은 허둥지둥 자신들을 방어하고 이른바 “전인민의 국가”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꾸며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들은 이제 맑스와 레닌이 말한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역사적 시기는 단지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의 첫 번째 단계로 가는 이행기에만 적용이 되는 것이며 그 보다 더 높은 단계에서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더 나아가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는 국가가 소멸하기 이전에 필연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가 끝난 이후에는 “전인민의 국가”라는 또 다른 단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11]

이는 철저한 궤변이다.

고타강령 비판에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의 국가라는 유명한 원리를 발전시켰다. 레닌은 이러한 맑스의 원리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타강령 비판에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는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가는 혁명적 이행의 시기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여 정치적 이행기가 있는데 이때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독재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이러한 원칙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논란이 되지 않았고, 이는 사회주의가 승리를 거두어 완전한 공산주의로 성숙할 때까지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레닌, 《자결권에 대한 토론의 총괄》,「선집」, International Publishers, 뉴욕, 1942, 19권, 269-70쪽

나아가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에 대한 맑스 가르침의 본질은 한 계급의 독재가 부르주아 계급을 전복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계급 없는 사회”인 공산주의를 분리하는 전체의 역사적 시기에서도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완전하게 이해되고 있다.
동일 출처.

맑스와 레닌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 국가가 존재하는 전 역사 시기는, 명백하게도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일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지 공산주의 첫 번째 단계로 이행하는 시기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로부터 “완전한 공산주의” 단계, 모든 계급 간의 차이를 없애고 “계급 없는 사회”가 실현되는, 즉 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까지의 시기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맑스와 레닌이 말한 이행 시기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일 수밖에 없는 것 또한 분명하다.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는 자본주의에서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전 시기에서의 국가 형태이며, 또한 인간 역사에서의 국가의 마지막 형태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소멸은 국가의 소멸을 의미할 것이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맑스는 사회주의와 정치적 투쟁의 전 역사를 통해, 국가는 반드시 사라질 것이며, 국가가 사라지는(국가에서 비국가로의 이행기) 이행 형태는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동일출처, 256-57쪽

역사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는 지역마다, 시기마다 다른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지만, 그 본질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 형태는 틀림없이 굉장히 풍부하고 다양한 정치 형태들을 낳을 수밖에 없지만, 그 본질은 반드시 똑같다. 그것은 바로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이다.
동일출처, 234쪽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종료가 국가의 소멸보다 앞설 것이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뒤를 따라 “전인민의 국가”라는 또 다른 단계가 여전히 나타날 것이라는 주장은 맑스와 레닌의 관점이 전혀 아니고 흐루시초프 수정주의자들이 날조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반(反)맑스-레닌주의 관점에서의 논쟁에서,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일당은 맑스의 문장을 찾아내고 그것을 문맥을 벗어나 인용하여 왜곡하기 위해 무척이나 고심해 왔다. 그들은 고타강령비판에서 맑스가 언급했던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미래의 국가(독일어로 Staatswesen)의 본질을 이미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가 아닌 ‘공산주의 사회의 국가’인 것처럼 멋대로 묘사했다.|M. A. 수슬로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의 보고, 1964년 2월[12]}}

그들은 중국인들(중국 공산당)은 감히 이러한 것을 맑스로부터 인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기쁨에 겨워서 발표했다. 분명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일당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레닌은 수정주의자들이 그러한 문구를 맑스주의를 왜곡하는 데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처럼 보인다. 국가에 대한 그의 맑스주의적 견해에서, 레닌은 그와 관련해 훌륭하게 설명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는 ‘정치적 이행기’이다. 그런데 맑스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미래의 국가(러시아어로는 gosudarstvennost, 독일어로는 Staatswesen)의 본질’을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심지어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국가란 존재하게 될 것인가!! 뭔가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가?” 레닌은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그리고 레닌은 부르주아 국가에서부터 국가가 소멸하기까지 발전하는 과정을 세 단계로 정리했다.

첫 번째 단계 - 부르주아 사회에서,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 부르주아 국가
두 번째 단계 -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시기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필요에 의한 국가이다. -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로서의 국가
세 번째 단계 - 공산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필요가 없게 된다. 국가는 소멸하게 된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일관성과 명확성을 완성하라!!”

레닌의 정리에서는 오로지 부르주아 국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국가, 그리고 소멸하는 국가만이 존재한다. 레닌은 이 정리를 통해 공산주의에 이르게 되면 국가는 소멸하고 국가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아주 모순적이게도,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일당은 또한 자신들의 오류를 옹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로 국가 문제에 대한 레닌이 맑스로부터 인용한 바로 이 단락을 인용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어리석어 보이는 주장을 계속해서 했다.

그 입장과 관련해서 레닌이 언급한 두 단계는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다. 소련에서의 전인민의 국가- 공산주의 첫 번째 국면에서의 국가인 공산주의 국가 체제는 이미 발생했고 발전하고 있다.
"노동자계급 정당에서 전인민 당으로”, 《Partyinaya Zhizn》편집부 기사, 모스크바, 1964년 8호

만약 레닌이 언급했던 두 시기가 쏘련에서 처음으로 이미 과거의 것이 되었다면, 국가는 소멸되어야 할 것인데 도대체 “전인민의 국가”는 어디서 출현하게 될 것인가? 만약 국가가 아직 소멸되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일 것이고, 결코 “전인민의 국가”라는 상태로는 존재할 수가 없다.

"전인민의 국가”에 대한 논쟁에서,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일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가 마치 비민주적인 것처럼 비난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를 “전인민의 국가”로 바꿔야만 민주주의는 더 발전될 수 있고 “전 인민을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로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흐루시초프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를 폐기하는 것으로 “왕성하게 발전하는 일련의 민주주의”의 사례를 만들 수 있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민주주의는 전인민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로 되어야 한다.”고 거창하게 말했다.[13]

이러한 발언은 그들의 창시자 또한 국가 문제에 관한 맑스-레닌주의의 가르침을 완전히 무시하고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것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국가 형태로서의 민주주의 개념은 독재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계급적 개념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계급적 민주주의만이 존재할 수 있다. “전 인민을 위한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가 없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광범위한 인민 다수를 위한 민주주의, 인민을 착취하던 자들과 압제자들을 폭력으로 억압하는 것, 다시 말해 그들을 민주주의에서 배제 시키는 것- 이것은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동안에 민주주의가 겪게 되는 변화이다.
-레닌, 《국가와 혁명》,「선집」, FLPH, 모스크파, 2권, Part 1, 291 쪽

착취 계급에 대한 독재와 노동자 계급의 민주주의 -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두 가지 측면이다.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을 위한 민주주의가 발전되고 전례 없는 수준으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에서 가능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없이 노동자 계급을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는 있을 수가 없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곳에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으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곳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배제한다. 이는 필연적인 것이며,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철저하게 말살될수록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민주주의는 더 성장하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의 시각에서는 이를 보고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사실 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민주주의의 촉진이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폐지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민주주의가 발전할수록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말살될 것이다.

이러한 맑스-레닌주의의 기본 테제를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일당은 부정하고 나섰다. 사실 그들에게는 적들이 독재 지배를 받고 있는 한 민주주의란 없으며,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유일한 길은 적들에 대한 독재를 폐지하고 적들을 억압하는 것을 멈추고 “전 인민을 위한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들의 관점은 배신자 카우츠키의 “순수 민주주의”라는 개념과 근본적으로 같은 형태에서 출발한다.

카우츠키를 비판하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순수 민주주의”는 단지 무식한 빈말에 지나지 않으며 계급투쟁에 대한 이해와 국가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매우 공허한 구절인데, 그 이유는 민주주의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부터 변화 과정에서 소멸되고 익숙한 관례가 될 것이지만 “순수” 민주주의는 결코 되지 않을 것이다.
레닌, 《국가에 대한 맑스주의》, 러시아어판, 모스크바, 1958년, 42쪽

레닌은 또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발전의 변증법적 과정은 다음과 같다: 절대왕정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로;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동일 출처.

즉,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의 소멸과 더불어 프롤레타리아 계급 민주주의는 소멸할 것이다.

분명히 말하면, 흐루시초프가 주장하는 “전인민의 국가”와 더불어 “전 인민을 위한 민주주의”는 속임수이다. 그러므로 부르주아 계급과 낡은 수정주의 노선의 찢겨진 외투를 되찾아, 그것을 기워 입고 거기에 그들 자신의 표식을 부착하는 것에서, 흐루시초프의 유일한 목적은 쏘비에트 인민과 전 세계 혁명적 인민들을 속이고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에 대한 자신의 배반과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를 감추려는 것이다.

흐루시초프의 “전인민의 국가”의 본질은 무엇인가?

흐루시초프는 소련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를 폐기하고 스스로 지향하고 있는 수정주의 일당의 독재, 즉 소비에트 부르주아 계급의 특권계급 독재를 확립했다. 사실상 그의 “전인민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가 아니라 그의 소규모 수정주의 일당이 노동자, 농민, 혁명적 지식인 대중들에 대해 그들의 독재를 행사하는 국가이다.

흐루시초프 일당의 통치 하에서는, 소비에트 노동자 계급을 위한 민주주의는 없다. 거기에는 한 줌도 안 되는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일당과 과거와 현재의 특권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 분자들을 위한 민주주의만이 있을 뿐이다. 흐루시초프의 “전 인민을 위한 민주주의”는 오직 낡고 낡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즉, 소비에트 인민에 대한 흐루시초프 일당의 전재적인 독재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소련에서는, 프롤레타리아 입장을 견지하고, 맑스-레닌주의 입장을 지지하고, 용기 있게 말하고, 저항하고 싸우는 사람들은 그 누구라도 감시받고, 추적을 받고, 소환 당하고 심지어 체포당하고 투옥당하거나 “정신적으로 병든” 것으로 진단받고 “정신병원”에 보내지게 된다.

최근 소비에트 언론은 아주 약간의 불만이라도 표출하는 사람들에 맞서는 “투쟁”과 흐루시초프 농업 정책에 대해 감히 빈정대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타락한 농담가들”에게 맞서 싸우는 “가차 없는 전투”가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이즈베스티야》, 1964년 5월 10일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일당이 파업 중인 노동자들과 저항하는 대중들을 피비린내 나게 억압하는 수많은 기회를 가질 것이라는 것은 특별히 놀랍지 않다.

전인민의 국가를 유지하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를 폐기하는 방식은 흐루시초프 수정주의 일당의 다음과 같은 비밀을 드러낸다. 즉, 그들은 확고하게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에 반대하지만 그것이 없어질 때까지 국가 권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수정주의자 흐루시초프 일당은 국가권력 통제의 거대한 중요성을 안다. 그들에게는 쏘련에서 자본주의 복귀를 위한 길을 닦기 위해 국가권력 통제가 필요하다. 이것이 “전 인민의 국가”와 “전 인민을 위한 민주주의”의 기치를 들어 올리는 흐루시초프의 진짜 목적이다.

각주

  1. 1997년 랄프 마르텐스
  2. 레닌, 《국가와 혁명》, 「선집」, FLPH, 모스크바, 1952, Vol. 2, Part 1, p. 302.
  3. (레닌, 《국가와 혁명》, 「선집」, FLPH, 모스크바, 1952, Vol. 2, Part 1, p.296.
  4. 스탈린,《소련 헌법 초안에 대하여》,「레닌주의의 문제들」, FLPH, 모스크바, 1954, 690쪽
  5. 레닌, 《'식량세에 관한’ 계획 팜플렛》,「선집」, 러시아 4판, 모스크바,32, 301쪽
  6. 편집자 주- 아락체예프-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 시대 말기 10년 동안 잔혹하게 국정을 좌우한 보수적 정치가
  7. 편집자 주 - 극단적 애국주의
  8. 편집자 주 -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9. 흐루시초프, 유고슬라비아의 브로니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1963년 8월 28일
  10. 레닌, 《나로드니키주의의 경제적 내용과 스트루베시의 저서에 대한 비판》, 「선집」, FLPH, 모스크바, 1960, 1권, 419쪽
  11. 《프라우다》 편집진의 논설,「공산주의 건설을 위한 강령」, 1961년 8월 18일
  12. 《New Times》, 영어판. 15호, 1964, 62쪽)
  13. 흐루시초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보고》, 「소련공산당 강령에 대하여」, 소련공산당 22차 당대회에서의 연설, 1961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