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 운동

좌파도서관
Karl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5월 10일 (화) 10:24 판 (작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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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지금의 광주광역시에서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민주화 항쟁을 말한다. 전두환 정권의 무력진압과 학살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배경

10.26 사건과 서울의 봄

광주에서의 움직임

서울의 봄은 광주에서도 민주화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전국 대학들의 흐름에 따라 광주 일원의 대학들에서는 학생자치조직이 재건되었으며, 운동권 조직도 보강을 거쳤다. 그 중심에 있던 것이 전남대학교조선대학교였다. 먼저 전남대학교는 전남 운동권의 핵심으로서 반유신 활동을 하다가 제적 및 투옥된 학생과 교수가 많았다. 이들이 돌아오면서 다시금 학교 내 민주화운동이 활발해졌고 1980년 3월 직선제를 통해 총학생회가 부활하였다. 전남대학교 법대 3학년생인 박관현이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대학의 소리」라는 홍보물도 만들어졌다. 조선대학교에서는 복적생과 재학생이 학교의 고질적 문제였던 사학재단 비리를 척결하고자 학원자율화를 위한 운동을 재개했다. 학교가 이를 탄압하자 학생들은 '조선대 민주화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대항하였다. 이외에도 광주교육대학교, 성인경상전문대학교, 동신전문대학교, 조선대학교병설공업전문대학교 등에서도 총학생회 부활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런 학생들의 활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이들의 역량은 그 이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었던 반유신운동과 사회운동, 그리고 문화예술운동 조직들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었다. 대표적인 조직이 녹두서점[1]으로 각 대학의 운동권들을 연결해주는 접석책 역할을 해주었다. 또 김남주, 윤한봉 등이 운영하던 '현대문화연구소'는 운동권의 중요한 싱크탱크 중 하나였다. YMCA, YWCA, 가톨릭농민회 등의 기독교 단체들은 교인들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며 학생들을 지원했고, 70년대에 조직된 문화예술단체들과 청년단체들도 힘을 보태었다. 야학도 중요한 사회운동으로서 학생들이 노동자를 가르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여러 야학 중에서도 들불야학[2]이 가장 유명했다. 이렇게 광주 내에 있었던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들은 학생운동과의 연계를 통해서 시민들과의 접촉을 넓혀갔고, 이는 향후 5.18 민주화 운동에 있어서 적잖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시간이 흘러 1980년 5월이 되자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서울지역에서는 이미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가 이어졌고, 서울역 시위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그 소식을 들은 광주 지역의 대학생들은 5월 14일부터 민족민주화대성회라는 이름으로 시위를 시작했다. 이날 오전 10시경 전남대 운동장에서 60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단과대학별로 집회를 가졌고, 오후 1시부터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광주 시내로 나가 시위를 전개했다. 학생들은 이동하면서 구호를 외치거나 선전물을 뿌리면서 시민들의 참여를 호소하고, 최규하 정부와 전두환, 신현확 등을 규탄하였다. 오후 3시가 되자 시위대열은 전남도청 앞 광장에 도착했고 학생과 시민들을 포함하여 2만여 명의 인파가 광장을 가득 채워 주변 교통이 마비되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분수대에 올라가 사회를 맡았고, 전남대 총학생회는 15개 조항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집회는 다음 날의 시위를 예고하는 박관현의 연설을 마지막으로 오후 6시 30분 즈음에 끝났다.

제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이올시다. 이 우레와 같은 박수와 여러분의 함성이 전 국토와 민족에게 다 들릴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외쳐봅시다. 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대행진을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수습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뜻이며, 꺼지지 않는 횃불처럼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뜻입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 광주시민, 아니, 전남도민, 아니, 우리 민족 모두가 이 횃불을 온 누리에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1980년 5월 16일 민족민주화대성회에서 박관현의 연설

15일 오후 1시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어제의 시위를 재개하기 위해 도서관 앞 광장에 모였다. 1만여 명의 시위대는 곧 대학교를 나가 도청으로 출발하였다. 이번에는 조선대학교와 광주교육대학교 학생들과 각 대학 교수들도 시위대열에 동참했다. 3개 대학의 학생들은 도청으로 행진하는 도중 서로 만나 합류했고 오후 3시 경 도청 앞 분수대에 집결하였다. 학생들은 각 대학별로 시국선언문을 발표했고, 계엄령 해제와 민주화 등을 요구했다. 일부 학생과 시민들은 분수대에 올라와 즉석에서 연설을 하며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내비쳤다. 집회가 끝나기 직전에 다다르자 박관현은 다음 날 "민주화의 횃불을 밝히겠다"면서 횃불시위를 예고하였다. 집회 이후 학생들은 자신들의 모교로 귀환했는데, 그 대열 맨 앞에서는 각 대학 6명의 대표가 대형 태극기를 들고 행진했다. 그 뒤에 50여 명의 교수들이 있었고, 교수진 뒤에는 학생과 시민들이 따라가며 행진하였다. 경찰은 이들을 제압하려 하지 않고 질서 유지를 당부하며 시위 행렬을 자유롭게 놔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민들은 점차 시위대에 호응해주는 경향을 보였다.

16일은 민족민주대성회의 절정에 달한 날이었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집회에는 광주 내 9개 대학에서 온 3만여 명의 학생이 집결해 있었다. 특히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교수들과 함께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가두시위를 벌이면서 도청으로 들어왔다. 오후 3시 30분이 되자 학생과 시민 5만여 명이 전남도청 앞 광장은 물론이고 금남로까지 채운 상태에서 박관현이 개회 연설로 집회를 시작했다. 이 날에는 복학생 정동년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고, 각 대학의 대표는 물론이고 고등학생 대표까지 분수대에 올라와 선언문을 발표하고 연설했다. 일반 시민들도 여기에 호응하여자신들도 분수대에 올라가 하고 싶은 말을 하였으며, 한 학생은 스스로를 '민주시민'이라 지칭하곤 자신이 직접 지은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행진이 종료되자 마지막 순서로 학생들은 '5.16 쿠데타 화형식'을 시행했다. 분수대에는 박정희전두환의 허수아비가 내걸렸고 곧 횃불에 의해 불태워졌다. 시위군중은 박수를 쳤고 박관현은 그 가운데서 마지막 연설을 했다. 그는 3일 간의 집회 기간 동안 수고한 학생, 시민, 경찰에게 감사함을 표했고,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조속히 이루어져야 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만약 정부가 민주화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다시금 학생들은 거리에 나와 투쟁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연설을 끝으로 3일 간의 민족민주화대성회는 막을 내렸다. 집회가 완전히 끝난 후 학생들은 모여 향후 계획을 논의하였다. 여기서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회측은 만일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학교에서 만나자는 행동지침을 내렸다. 학생들은 귀가하면서 집회 때 사용했던 물품들을 정리하고 쓰레기들을 청소하였고, 다음 날 새벽에도 청소를 이어갔다.

전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전개 참조.

사상자 및 실종자

항쟁당시 사망자: 165명

부상후유증 사망자: 376명(추정)

행방불명: 65명

사망자 합계: 606명[3]

부상: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 기타: 1589명

진압과 학살의 책임

평가

전두환의 권력찬탈음모에 맞선 민중항쟁

민주주의의 회복을 외친 민주항쟁

민주적인 공동체 정신을 보여준 시민항쟁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

한국 사회운동의 변환점

미국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

민주언론의 중요성을 일깨운 계기

극우세력의 왜곡과 그에 대한 반박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점

발포명령자 문제

지휘권 이원화 문제

실종자 및 암매장 문제

문화예술

참고 자료

  • <5월 18일 광주>, 김영택, 역사공간, 2010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1~2, 5.18 기념재단, 한얼미디어, 2006
  • <꽃만 봐도 서럽고 그리운 날들> 1~4, 5.18 기념재단, 한얼미디어, 2007~2008
  • <오월의 문화정치>, 천유철, 오월의봄, 2016
  • <그 때 그 자리 그 사람들>, 5.18 기념재단, 여유당, 2007
  • <5.18 민주화운동과 언론투쟁>, 5.18 기념재단, 2014
  • <5.18 10일 간의 야전병원>, 전남대학교병원, 2017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면개정판)>,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창비, 2017
  • <5.18 민중항쟁과 정치,역사,사회> 3, 5.18 기념재단, 2007
  • <광주민중항쟁비망록>, 5.18광주민중항쟁유족회 편, 남풍, 1989
  • <오월의 사회과학>, 최정운, 오월의봄, 2017
  • <5.18 민중항쟁사>,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2001
  • <한국민주화운동사> 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 <부서진 풍경>, 5.18 기념재단, 2000
  • <광주, 여성>,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후마니타스, 2012
  • <정사 5.18> 상, 사회평론, 1995
  • <기억하는 자의 광주>, 이해찬 외, 돌베개, 2010
  • <충정작전과 광주항쟁> 1~2, 김영진, 동광출판사, 1989
  • <한국현대사산책 - 1980년대편> 1,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3
  • <5.18 때 북한군이 광주에 왔다고?>, 안종철, 아시아문화커뮤니티, 2016
  • <5.18 특파원 리포트>, 무등기자협회 편, 풀빛, 1997
  • <5.18 민중항쟁>, 광주광역시/전라남도, 휴먼컬쳐아리랑, 2015
  • <5.18 민중항쟁>, 김진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 <12.12 5.18 실록>, 대한민국재향군인회, 1997
  • 계엄군 측(제11공수여단, 제7공수여단, 제3공수여단, 20사단, 보안사령부, 505보안부대, 전투병과교육사령부 등) 작성 자료
  • 행정기관 측(동구청, 전라남도청 등) 작성 자료
  • 광주지방검찰청, 505보안부대의 사망자 검시 기록
  •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풀빛, 1990
  • <5.18 인류의 유산, 오월의 기록>, 5.18민주화운동기록관, 2017
  • <5.18 위대한 유산/연대>, 5.18 기념재단, 201
  •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1~61,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2013
  • <5.18 관련 사건 조사결과>,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청, 1995
  • <광주는 말한다>, 신복진, 눈빛, 2006
  • <12.12 5.17 5.18 조사결과보고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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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사회과학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던 서점으로 현재의 광주시 동구 장동 로터리에 있었다. 주인은 김상윤과 정현애로 둘 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녹두서점은 광주 일원 운동권의 중요한 아지트로서 운동권 학생들의 주요한 모임 장소였으며, 5.18 당시에도 학생들이 모여들어 논의를 하곤 했다.
  2. 1978년 광주 광천동에서 조직된 야학으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 야학에 참여한 학생들은 강사로 활동하면서 광천동 부근의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던 나이 어린 노동자들을 가르쳤다. 나중에 5.18이 터지자 강사 대부분이 항쟁에 참여했으며, 투사회보를 제작하거나 시민군에 참여하였다. 들불야학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나중에 시민군 대변인을 역임했던 윤상원이다. 그를 포함한 들불야학 7명의 사람들(윤상원, 박기순, 박용준, 박관현, 신영일, 박효선, 김영철)은 들불야학 7열사로 불려지고 있다.
  3.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1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