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변증법적 방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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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
1. 변증법적 방법 (1)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운동한다. …


생활이 변하며 생산력이 성장하여 낡은 관계가 무너진다.

칼 맑스


맑스주의는 사회주의의 이론일 뿐만 아니라 전일한 세계관이며 철학체계이다. 맑스의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는 이 체계에서 논리적으로 흘려 나온다. 이 철학체계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주의를 서술한다는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도 서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이 체계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그 방법이 변증법적이며 그 이론이 유물론적인 까닭이다.


변증법적 방법이란 무엇인가?


사회생활은 끊임없는 운동과 발전 상태에 있다고들 한다. 이것은 물론 옳은 말이다. 생활을 그 어떤 불변하는, 굳어버린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생활은 결코 한 수준에 머물려 있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한 운동, 파괴와 창조의 영원한 과정 속에 있다. 그런 까닭에 생활에는 항상 새것과 낡은 것, 자라나는 것과 죽어 가는 것, 혁명적인 것과 반혁명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변증법적 방법은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생활이 끊임없는 운동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우리는 생활을 운동 속에서 고찰하여야 하며, 생활이 어디로 움직이는가를 문제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생활이 끊임없는 파괴와 창조의 풍경을 보여 준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우리의 임무는 생활을 파괴와 창조 속에서 고찰하며 생활에서 무엇이 파괴되고 무엇이 창조되는가를 문제시하는 데 있다.


생활 속에 태어나서 나날이 자라나는 것은 무적이며 그의 전진 운동을 멈출 수 없다. 즉 일례로 생활에서 노동계급이 계급으로서 태어나 날로 자라난다면 지금 노동계급이 아무리 약하고 수가 적다하더라도 결국은 노동계급이 승리하고야 말 것이다. 어째서인가? 그것은 노동계급이 자라나며 강해지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생활에서 늙어가며 무덤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은 지금 거대한 힘을 가졌다 하더라도 반드시 패배하고야 말 것이다. 즉 일례로 부르주아가 점차 자기의 지반을 잃어버리고 나날이 퇴보한다면 지금 그가 아무리 강하고 수가 많다 하더라도 결국 그는 패배하게 될 것이다. 어째서인가? 그것은 부르주아가 계급으로서 쇠퇴하고 약하여지며 늙어가며 생활에서 무용지물로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변증법적 명제가 나온다. 즉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것 다시 말해서 날로 자라나는 그 모든 것은 합리적이며 날로 쇠퇴되는 모든 것은 비합리적이며 따라서 패배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나의 실례를 들어 보자. 지난 세기 80년대에 러시아의 혁명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일대 논쟁이 벌어졌었다. 나로드니크는 주장하기를, “러시아의 해방”을 담당할 만한 주력은 농촌과 도시의 소부르주아라고 하였다. 왜 그런가를 맑스주의자들은 그들에게 물었다. 나로드니크는 말하기를, 농촌과 도시의 소부르주아는 지금 다수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까닭이라고 하였다.


맑스주의자들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농촌과 도시의 소부르주아가 지금 다수를 이루고 있으며 실제로 가난한 것만은 사실 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겠는가? 소부르주아가 다수를 이루고 있은 지는 이미 오래지만 그러나 이때까지 노동계급의 지원 없이는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아무런 진취성도 발휘하지 못하였다. 어째서인가? 그것은 소부르주아가 계급으로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날이 와해되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분해되는 까닭이다. 다른 한편, 가난하다는 것도 여기서는 물론 결정적 의의를 가지지 못한다. “거지들”은 소부르주아보다 더 가난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러시아의 해방”을 담당할 수 있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어느 계급이 지금 다수를 이루며 어느 계급이 더 가난한가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계급이 더 강해지며 어느 계급이 쇠퇴되어 가는가 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노동계급은 끊임없이 나타나고 강해지며 사회생활을 앞으로 추진시키고 자기 주위에 모든 혁명적 요소를 집결시키는 유일한 계급인 것만큼 우리의 임무는 현재의 운동에서 노동계급을 주력으로 인정하고 그 대열에 들어서며 그의 선진적 지향을 자기의 지향으로 삼는 것이다.


맑스주의자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렇듯 맑스주의자들은 생활을 변증법적으로 고찰하였는데 나로드니크는 형이상학적으로 논의하였다는 것이 명백하다. 나로드니크는 사회생활을 한자리에 머물려 있는 것으로 보았다.


변증법적 방법은 이렇듯 생활을 발전으로 본다.


그러나 운동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프롤레타리아가 가슴을 쭉 펴고 무기고를 습격하며 반동을 공격하여 나선 “12월 사변” 때와 같은 사회생활의 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평화적” 발전의 조건 하에서 개별적으로 파업을 일으키고 자그마한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데 그치고 있은 그 이전 시기의 운동도 역시 사회적 운동이라고 불러야 한다.


운동에는 여러 가지 형식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변증법적 방법은 운동에 두 가지 형식 즉 진화적 형식과 혁명적 형식이 있다고 말한다.


선진 분자들이 자기의 일상 사업을 자연발생적으로 계속하며 낡은 제도에 사소한 양적 변화를 일으키는 경우에 그 운동은 진화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진분자들이 낡은 제도를 근본적으로 쓸어버리고 생활에 질적 변화를 일으키며 새로운 제도를 만들기 위하여 서로 단결하고 같은 사상으로 뭉쳐 적진을 공격해 나서는 경우에 그 운동은 혁명적이다.


진화는 혁명을 준비하고 그 토대를 닦아 주며 혁명은 진화를 완성하고 더욱더 그 활동을 촉진한다.


자연에도 비슷한 과정이 있다. 과학의 역사는 변증법적 방법이 진정한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천문학을 비롯하여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어느 부문에서나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변화하고 발전한다는 사상을 확증하여 주고 있다. 따라서 자연의 모든 것은 반드시 운동과 발전의 관점에서 고찰하여야 한다. 이것은 변증법의 정신이 전체 현대과학을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운동의 형태에 대하여 말한다면 즉 변증법에 따라 사소한 양적 변화가 결국 커다란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에 대하여 말한다면 이 법칙은 자연의 역사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멘델레예프의 “원소주기율”은 양적 변화에서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 자연의 역사에서 얼마나 큰 의의를 가지고 있는가를 명백히 보여 준다. 생물학에서 신다윈주의 다음에 나타난 신라마르크주의의 이론도 같은 것을 증명하여 준다.


우리는 엥겔스가 자기의 저서 ≪반듀링론≫에서 충분히 해명한 기타 사실들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겠다.


이와 같은 것이 변증법적 방법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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