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영국의 정치경제학

좌파도서관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
3. 영국의 정치경제학

유물 사관은 생산, 그리고 생산에 뒤따르는 생산물의 교환이 온갖 사회 제도의 기초를 이룬다는 명제에서 출발하며 역사상의 모든 사회에서 생산물의 분배라든가, 또 이와 함께 계급이나 신분으로 사회가 분열되는 것 등은 무엇이 어떻게 생산되며 그 생산물이 어떻게 교환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 변동과 정치 변혁의 궁극 원인은 인간의 두뇌 속에서, 즉 영원한 진리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늘어가는 이해 속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생산 양식과 교환 방식의 변화에서 찾아야 하며, 철학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경제에서 찾아야 한다. 현존 사회 제도들이 합리적이지 않고 공정하지 않다든가 또는 "이성은 의미 없게 되고 행복은 고통이 되었다."든가 하는 견해가 퍼져 가고 있다는 것은, 생산 양식과 교환 방식에 어느덧 변동이 일어나서 지난 시기의 경제 조건에 적합하던 사회 제도가 이제는 이미 이 변동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징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타난 그 재앙을 없애기 위한 수단도 또한 이 변화된 생산 관계 자체에---많건 적건 발전한 형태로---틀림없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수단을 두뇌 속에서 생각해 낼 것이 아니라, 두뇌의 힘을 빌려 현존하는 생산의 물질적 사실들 속에서 발견해 내야 한다.


그러면 현대 사회주의는 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지금은 거의 모두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현존 사회 제도는 오늘날의 지배 계급인 부르주아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마르크스 이래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라고 불려 오는 부르주아지의 고유한 생산 양식은 봉건 제도 안의 지방·신분적 특권이나 사람들 서로간의 인격·예속적 관계와는 양립할 수 없었다. 부르주아지는 봉건 제도를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부르주아적 사회 제도, 즉 자유 경쟁, 이주의 자유, 상품 소유자의 평등권 등 요컨대 부르주아적 행복의 나라를 수립했다. 이제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자유로이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증기와 새로운 작업기가 낡은 매뉴팩처를 대공업으로 변화시킨 이래 부르주아지의 관리로 조성된 생산력은 유례없는 속도와 미증유의 규모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찍이 매뉴팩처와 그 영향을 받으며 발전한 수공업이 동업 조합이라는 봉건적 질곡과 충돌하게 된 것처럼, 대공업도 더 높은 발전 단계에 이르러서는 자기를 틀어박아 두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라는 좁은 틀과 충돌하게 된다. 새로운 생산력은 이미 그것의 부르주아적 이용 형식을 벗어날 만큼 성장했다. 그리고 생산력과 생산 양식 사이의 이 충돌은 결코 인간의 원죄와 신의 공정성 사이의 충돌처럼 한갖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만 생겨난 충돌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즉 우리 밖에서, 이 충돌을 담당하고 수행하는 그 사람들 자신의 의사나 행동으로부터 독립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현대 사회주의는 이 사실상의 충돌이 사유에 반영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먼저 이 충돌 때문에 직접 고통받는 계급인 노동자 계급의 머리 속에 반영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이 충돌이란 어떤 것인가?


자본주의적 생산이 출현하기 전, 즉 중세에는 생산자가 자기의 생산 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데 기초를 둔 소생산이 곳곳에 존재했다. 즉 농촌에는 자유롭든 예속적이든간에 소농(小農)의 경영이 있었고 도시에는 수공업이 있었다. 노동 수단---토지, 농기구, 작업장, 손도구---은 개인의 노동 수단으로서 오직 혼자 쓰는 것만을 고려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당연히 작고 빈약하고 제한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노동 수단은 일반적으로 생산자 자신의 것이었다. 이 분산된 소규모의 생산 수단을 모으고 통합하여 그것을 생산의 현대적인 강력한 지렛대로 바꾸는 것,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그 담당자인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역할이었다. 부르주아지가 15세기 이래 단순 협업, 매뉴팩처, 대공업 등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생산 단계에 걸쳐 이 역할을 역사적으로 수행해 온 정형을 마르크스는 『자본론』제4편에서 상세히 묘사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마르크스가 같은 책에서 입증한 바와 같이---생산 수단을 각 개인이 사용하는 생산 수단으로부터 사람들의 집단이 공동으로 쓸 수 있는 즉 사회적 생산 수단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그 제한된 생산 수단을 강력한 생산력으로 바꿀 수 없었다. 물레·베틀·조잡한 망치 대신에 방적기·방직기·증기 망치가 나타났으며, 개인 작업장 대신에 수백 수천 노동자의 공동 노동이 필요한 공장이 나타났다. 생산 수단과 마찬가지로 생산 자체도, 일련의 분산적 행동에서 일련의 사회적 행동으로 바뀌었으며, 생산물도 각 개인의 생산물에서 사회적 생산물로 바뀌었다. 현재 공장에서 나오는 실·옷감·금속 제품은 많은 노당자들의 공동 노동의 산물로서, 그것이 마침내 완제품이 되어 나오기까지는 많은 노동자들의 손을 차례로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물품들에 대해서 "이것은 내가 만들었다. 이것은 내 생산물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 안에서 아무런 계획 없이 점점 생겨난 분업이 생산의 기본 형태인 곳에서는, 분업은 반드시 생산물에다 상품의 형태를 부여한다. 이 상품의 상호 교환, 즉 구매와 판매를 통해 개별 생산자들은 자신의 갖가지 욕망을 채울 수 있다. 중세의 현편이 바로 그러했다. 예컨대 농민은 농산물을 수공업자에게 팔고 그에게서 수공업 제품을 사다 썼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 생산자들, 즉 상품 생산자들의 사회에 새로운 생산 양식이 끼어들게 되었다. 이 생산 양식은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자연 발생적이고 무계획적인 분업의 한가운데다가 개별 공장 안에 조직된 계획적 분업을 확립했다. 개인적 생산과 나란히 사회적 생산이 나타났다. 이 둘의 생산물은 같은 시장에서 판매되었고 따라서 가격은 대체로 거의 같았다. 그러나 계획적 조직은 자연 발생적 분업보다 강력했다. 사회적 노동을 적용하는 공장은 분산된 소생산자들보다 생산물을 더 싸게 생산했다. 개별 생산자들의 생산은 한 부문 한 부문씩 연달아 패배당하고, 사회적 생산이 모든 낡은 생산 방식을 변혁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의 이러한 혁명적 성격은 거의 의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상품 생산을 강화하고 확대하려는 수단이 되었다. 사회적 생산은 이미 이전부터 존재해 오던 상품 생산과 상품 교환의 일정한 공간, 즉 상인 자본, 수공업, 임금 노동과의 직접적 연관에서 생겨났다. 사회적 생산 그 자체가 상품 생산의 새로운 형태로서 나타났기 때문에, 상품 생산에 고유한 점유 형태는 이 생산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대로 보존되었다.


중세에 발전한 바와 같은 소상품 생산 형태에서는, 노동 생산물이 누구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혀 제기되지 않았다. 각 생산자들은 자신이 소유한 원료, 때로는 자신이 생산한 원료로 자신의 노동 수단과 자신의 손 또는 자기 가족의 손을 사용하여 생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산자에게는 자신의 생산물을 점유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생산물은 자연히 그의 것이 되었다. 따라서 생산물의 소유권은 자기 자신의 노동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노력이 이용되는 경우에도 그것은 보통 부차적 역할을 하는 데 지나지 않았으며, 또 번번이 임금 이외의 다른 방도로도 보상되었다. 동업 조합의 도제와 직인은 생계를 꾸리고 보수를 얻기 위해서보다는 독립적인 장인 자격을 얻으려고, 즉 자기 자신의 수련과 준비를 위해 일했던 것이다. 그런데 생산 수단이 대규모 작업장과 매뉴팩처에 집중되어 사실상 사회적 생산 수단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회적 생산 수단과 생산물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생산 수단과 생산물처럼 취급되었다. 과거에 노동 수단의 소유자가 생산물을 점유했던 것은, 그것이 일반적으로 자신의 생산물이고 다른 사람의 보조적 노동은 예외였기 때문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생산물이 이미 자신의 생산물이 아니라 순전히 다른 사람의 노동의 생산물인데도 노동 수단의 소유자가 그것을 계속 점유했다. 그리하여 생산 수단을 실제로 가동한 사람, 실제로 이 생산물을 생산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본가가 사회적 노동의 생산물을 점유하게 되었다. 생산 수단과 생산은 본질에서 사회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개별 생산자의 사적(私的) 생산을 전제로 하며, 따라서 각자가 자기 생산물의 소유자로서 그것을 시장으로 가지고 나오는 그러한 점유 형태에 종속되어 있었다. 생산 양식은 이러한 점유 형태의 전제를 폐기하고 있는데도 아직 그러한 점유 형태에 종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생산 양식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성격을 띠게 하는 바로 이 모순에 현대의 모든 충돌의 맹아가 이미 포함되어 있다. 결정적인 모든 생산 부문과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모든 나라들에서 새로운 생산 양식의 지배가 더욱 우세해 가면 갈수록, 따라서 개별 생산자들의 생산을 몰아내 버릴수록,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점유와의 상호 모순 또한 더욱 날카롭게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본가들이 맨 처음 나타났을 때 임금 노동이라는 형태가 이미 존재했다. 그러나 임금 노동은 단지 예외로서 부업·보조·과도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이따금 일용 노동에 고용되는 농업 노동자도 아주 빈약하나마 근근이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의 경작지를 가지고 있었다. 동업 조합의 규약은 오늘의 직인도 미래에는 장인이 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생산 수단이 사회적인 것이 되고 자본가의 손안에 집중되자 사태는 급변했다. 개별 소생산자의 생산 수단과 생산물은 더욱더 가치가 떨어졌으며, 개별 생산자는 자본가에게 고용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전에는 예외로 또는 부업으로 존재하던 임금 노동이 생산 전체에 걸쳐 지배적인 것이 되었으며 기본 형태가 되었다. 이전에는 부업이던 것이 지금은 생산자의 유일한 직업이 되었다. 간혹 고용되던 노동자가 이제는 종신 고용 노동자가 되었다. 게다가 종신 고용 노동자의 숫자도, 이와 함께 진행된 봉건 질서의 붕괴, 봉건 영주에 예속되어 있던 사람들의 이산, 농토에서 농민을 추방하는 운동 등등으로 엄청나게 늘어났다. 한편으로는 자본가들의 손안에 집중된 생산 수단과,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노동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생산자로 완전히 분리되었다.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점유 사이의 모순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상품 생산자들, 즉 개별 생산자들로 이루어진 사회에 끼어들었는데, 그들 사이의 사회적 연계는 그들의 생산물의 교환으로 실현되고 있었다. 그러나 상품 생산에 기초를 둔 사회의 고유한 본질은 생산자들이 자신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지배력을 잃는다는 점이다. 각자는 자신이 우연히 가지게 된 생산 수단으로, 교환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려고 제각기 생산한다. 그 누구도 자신이 생산하는 생산물이 얼마나 시장에 나타날지, 그 생산물에 대한 수요자가 얼마나 될지 알지 못하며, 또 그 누구도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이 실제로 요구되는지, 그 생산물의 생산비가 보상될지, 그리고 도대체 그것이 팔리게 될지 알지 못한다. 사회적 생산을 지배하는 것은 무정부성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생산 형태에도 그러하거니와 상품 생산에도, 내적으로 고유하며 그것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자체의 특수한 법칙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법칙은 무정부성을 박차고 바로 이 무정부 상태 속에서, 이 무정부 상태를 거쳐 관철되어 간다. 이 법칙은 사회적 연관의 유일한 형태인 교환에서 나타나며, 개별 생산자들에게는 하나의 강제적인 경쟁 법칙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 법칙은 처음에는 심지어 생산자들 자신도 모르며, 오직 오랜 경험을 통해 차츰 알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법칙은 생산자들을 무시하고 생산자들에 맞서서, 그들의 생산 형태에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자연 법칙으로서 관철되어 간다. 생산물이 생산자 자신을 지배한다.


중세 사회, 특히 그 처음 몇 세기 동안은 생산이 주로 자체 수요를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주로 생산자 자신과 그 가족의 수유만을 충족시켰다. 농촌에서와 같이 신분적 종속 관계가 존재하던 곳에서는 생산이 봉건 영주의 수요도 충족시켰다. 그러므로 거기서는 어떤 교환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생산물은 상품의 성격을 띨 수 없었다. 농민의 가족은 먹고 입고 쓰는 도구를 포함한 거의 모든 것을 생산했다. 그들이 팔려고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자체 수요와 봉건 영주에게 바치는 공물 이상의 잉여물을 겨우 생산하게 된 뒤부터였으며, 이러한 잉여물이 판매용으로 사회적 교환에 투입되면서 상품이 되었다. 물론 도시의 수공업자들은 처음부터 교환을 위해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들도 자체 수요에 필요한 물건을 대부분 자기 자신이 만들었다. 즉 그들은 채소밭과 조그마한 밭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유림에서 가축을 방목했다. 그 밖에 이 공유림은 그들에게 건축 재료와 연료를 공급해 주었다. 여자들은 아마, 양모 등으로 실을 뽑았다.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 즉 상품 생산은 이제 겨우 생겨나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래서 교환과 시장은 제한되어 있었고, 생산 방식은 정체되어 있었으며, 지방은 외부에 대해 봉쇄되어 있었고, 지방 단위의 범위 안에서 결합되어 있었다. 농촌에는 마르크 공동체, 도시에는 동업 조합이 있었다.


그런데 상품 생산이 확대되고 특히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나타나면서, 이전에는 잠자고 있던 상품 생산의 법칙이 더 공공연하게, 또 더 강력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낡은 연계는 흔들리고 묵은 장벽은 부수어졌으며, 생산자들은 더욱더 분산되고 독립적인 상품 생산자로 바뀌어 갔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은 명백히 드러났으며 더욱더 첨예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을 강화하는 데 쓴 중요한 도구는 무정부성의 정반대물이었다. 그것은 모든 개별 생산 작업장에서 생산을 날이 갈수록 더욱더 사회적 생산으로 조직해 나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을 토대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지난날의 평온함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것은 갖가지 생산 부문에 침투하여 그 부문에서 지난날의 생산 방법을 몰아냈다. 수공업에 침투해서는 지난날의 수공업을 쓸어 없앴다. 일터는 전쟁터가 되었다. 지리상의 대발견과 이에 뒤이어 이루어진 식민지 쟁탈로 판로는 몇 배로 넓어졌고 수공업의 매뉴팩처화가 촉진되었다. 투쟁은 이미 각 지방의 개별 생산자들 사이에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지방 단위의 싸움은 또 전국적 투쟁으로까지, 17세기와 18세기의 상업 전쟁으로까지 발전했다. 마침내 대공업과 세계 시장의 발생은 이 투쟁을 보편화하는 동시에 유례없이 격렬하게 만들었다. 개별 자본가들 사이의 관계에서나 모든 생산 부문들, 또는 모든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나 다 마찬가지로, 존망의 문제는 그것들이 자연적으로든 인위적으로든 유리하게 작용하는 생산 조건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진 자는 용서 없이 없앤다. 이것은 자연에서 사회로---수십 배나 더 난폭하게---옮아 온 다윈의 개체 생존 투쟁이다. 동물의 자연적 상태가 인류 발전의 절정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점유 사이의 모순은 개별 공장들의 생산의 조직화와 전사회의 생산의 무정부상 사이의 대립으로 재생산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본래부터 거기에 내재하는 모순의 이러한 두 가지 현상 형태에서 벗어날 길 없이 '악순환'하면서 운동한다. 푸리에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이 '악순환'이다. 그러나 당시의 푸리에로서는 물론 이 순환의 둘레가 점점 좁아진다는 것, 생산의 운동은 오히려 나선형으로 진행되어 유성의 운동처럼 반드시 중심과 충돌하는 것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아직 볼 수 없었다. 생산의 무정부성이라는 이 원동력은 인류의 대다수를 차츰 프롤레타리아로 바꾸는데, 이번에는 이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결국은 생산의 무정부성을 끝장내고야 만다. 생산의 사회적 무정부성이라는 이 원동력은, 대공업에서 사용하는 기계를 끝없이 개선할 가능성을 개별 산업 자본가에 대한 하나의 강제 법칙, 즉 멸망하고 싶지 않거든 자신의 기계를 끊임없이 개선하라고 명령하는 하나의 강제 법칙이 되게 한다. 그러나 기계의 개선으로 인간 노동의 일정한 양은 필요 없게 된다. 기계의 적용과 보급이 몇몇 기계 노동자가 수백만 손노동자를 내쫓는 것을 뜻한다면, 기계의 개선은 더욱더 많은 기계 노동자들 자신이 내쫓김을 뜻하며, 결국은 노동자의 공급이 노동에 대한 자본의 평균 수요를 뛰어넘게 됨을 뜻한다. 유휴 노동자 대중은 내가 이미 1845년에 이름붙인 바와 같이 진짜 산업 예비군을 형성한다. 이 산업 예비군은 생산이 전속력으로 돌아갈 때는 생산에 이용되다가도, 그 다음에 반드시 뒤따라오는 공황 때에는 길거리로 쫓겨난다. 노동자 계급과 자본 사이의 생존 투쟁에서 항상 족쇄처럼 노동자 계급의 발에 매달리는 이 산업 예비군은, 임금을 늘 자본의 요구에 맞는 수준으로 유지하는 임금 조절기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기계는 노동자 계급을 반대하는 자본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고, 노동 수단은 늘 노동자의 손안에서 생활 수단을 빼앗게 되며, 노동자의 생산물은 자신들을 노예로 만드는 도구가 된다. 그 결과, 노동 수단의 경제적 이용은 동시에 애초부터 노동력의 가장 무자비한 낭비가 되며, 노동의 정상적인 기능 조건을 강제로 빼앗는 것이 된다. 또 노동 시간을 줄이는 데 강력한 수단인 기계는 노동자와 그의 가족 모두의 생명을 자본의 가치 증식을 위한 잠재적 노동 시간으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의 한 부문의 과도한 노동은 이 계급의 다른 부문이 완전한 실업에 빠지는 조건이 되며, 한편 소비자를 찾아 전세계를 헤매는 대공업은 자기 나라 안에서는 노동자 대중의 소비를 기아 상태의 최저 한도에 국한시켜 놓음으로써 자기 나라 안의 시장을 파괴한다. "상대적 과잉 인구, 즉 산업 예비군을 늘 자본 축적의 규모 및 활력과 균형을 이루도록 유지하는 법칙은 헤파이스토스의 망치가 프로메테우스를 바윗돌로 못박아 놓은 것보다 더 튼튼하게 노동자를 자본에 묶어 놓는다. 이 법칙은 자본의 축적에 상응하는 빈곤의 축적을 낳는다. 따라서 한쪽 극에서 부가 쌓이는 것은 동시에 반대쪽 극, 즉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 생산하는 계급측에서 빈곤, 노동의 고통, 예속, 무지, 야수화, 도덕적 타락이 쌓이는 것이다."(마르크스, 『자본론』, 671쪽)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 이와 다른 생산물의 분배 방식을 기대하는 것은, 전지와 연결된 전극이 물을 분해하지 않고 양극에는 산소, 음극에는 수소가 생겨나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극도로 높아진 현대 기계의 생산 능력이 어떻게 하여 개별 산업 자본가들로 하여금 사회 안에서 생산의 무정부성 때문에 자신의 기계를 계속 개선하여 생산력을 계속 높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하나의 강제 법칙이 되는가를 우리는 보았다. 자본가에게는 자기의 생산 규모를 늘릴 수 있는 단순한 가능성 또한 마찬가지로 강제 법칙이 되는 것이다. 대공업의 거대한 팽창 능력---여기에 비하면 가스의 팽창력 같은 것은 어린애 장난감이다.---은 이제 공업을 질·양적으로 확장하려는 욕망, 어떤 반작용도 고려하지 않는 욕망으로 나타난다. 이 반작용을 형성하는 것은 대공업 생산물에 대한 소비, 판로, 시장이다. 그런데 이 시장의 팽창력은 밖으로나 안으로나 훨씬 작은 힘으로 작용하는 완전히 다른 법칙에 의해서 결정된다. 시장의 확장은 생산의 확대에 보조를 맞출 수 없다.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며, 이 충돌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을 곧바로 파괴하지 않는 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새로운 '악순환'을 낳는다.


사실 맨 처음 전반적 공황이 일어났던 1825년부터 공업계 전체와 상업계, 모든 문명 국가들과 또한 그들에 종속되어 있는 어느 정도 미개한 나라들에서 이루어지는 생산과 교환은 대략 10년에 한 번씩 탈선하고 있다. 산업은 정체하고, 시장에는 판로를 발견하지 못하는 생산물 더미가 넘쳐나고, 현금은 유통에서 자취를 감추고, 신용은 끊기고, 공장은 멈추고, 노동자들은 자기가 생활 수단을 너무 많이 생산한 탓으로 온갖 생활 수단을 잃고, 파산에 파산이 잇따르며, 경매가 연달아 일어난다. 침체가 여러 해 동안 계속되어 생산력과 생산물이 많이 낭비되고 파괴되다가 마침내 가격이 어느 정도 폭락해 쌓여 있던 많은 상품이 팔리게 되면서부터 차츰 생산과 교환의 운동이 다시 시작된다. 이 운동은 차츰 빨라져서 평보가 속보가 되고, 공업의 속보는 구보로 넘어가며 이 구보는 또 발광적인 질주가 되어, 공업·상업·신용및 투기를 휩쓰는 하나의 완전한 장애물 경주가 된다. 이러다가 결국은 목숨을 건 몇 차례의 도약 끝에 다시금 공황의 깊은 구렁텅이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 과정이 또다시 되풀이된다. 1825년 이래 우리는 이러한 순환을 이미 다섯 번이나 겪었으며, 현재(1877년) 그것을 여섯번째로 겪고 있다. 이러한 공황의 성격은 아주 선명하게 나타났으므로 푸리에가 최초의 이러한 공황을 과잉에서 오는 공황, 즉 '과잉 공황'(crise plethorique)이라 한 것은 이 공황 전체의 본질을 찌른 표현이었다.


공황 때에는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점유 사이의 모순이 폭력적으로 폭발하기에 이른다. 상품의 유통은 한동안 멈추고, 유통 수단---화폐---은 유통의 장애물이 되고, 상품 생산과 상품 유통의 모든 법칙은 거꾸로 작용한다. 경제적 충돌은 절정에 이른다. 생산 방식이 교환 방식에 반항해 일어선다.


공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의 사회적 조직이 마침내 이 조직과 나란히, 또 그 위에 존재하는 사회 안에서의 생산의 무정부성과 상응할 수 없는 발전 단계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 이 사실은 공황 때에 많은 대자본가들과 더 많은 소자본가들을 파멸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자본의 폭력적 집중으로 말미암아 자본가들 자신에게도 명백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모든 기구는 그 자체가 만들어 낸 생산력의 중압을 받아 멈추게 된다. 그것은 이미 생산 수단이 모조리 자본으로 바뀔 수 없게 되며, 생산 수단들이 사용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되는 한편, 노동자의 예비군도 어쩔 수 없이 이로 인해 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생산 수단, 생활 수단, 자본의 처분 밑에 있는 노동자들, 즉 생산과 일반적 부(富)의 모든 요소가 남아돌아 가게 된다. "과잉이 빈궁과 결핍의 원천이 된다."(푸리에)는 것은 바로 과잉 자체가 생산 수단과 생활 수단의 자본화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 수단이 우선 자본으로, 즉 인간 노동력의 착취 도구로 되지 않고서는 작용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한편으로 하고, 생산과 생활 수단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둘 사이에는 후자를 자본으로 바꾸어야 할 필연성이 마치 유령처럼 서있다. 바로 이 필연성만이 생산의 물질적 공간과 인적 공간이 결합하는 것을 방해하며, 바로 이 팔연성만이 생산 수단의 작용을, 즉 노동자가 노동하고 생활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한편으로는 더 이상 생산력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력 자체가 이러한 모순을 청산하고 자본으로서의 모든 속성에서 해방되어 사회적 생산력으로서의 성격을 실제로 승인받으려고 더욱 힘차게 돌진하고 있는 것이다.


힘차게 자라나는 생산력이 자본주의적 성격에 반항하게 되고 그 사회의 본성을 승인해야 할 필연성이 커지면서, 자본가 계급 자체가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적 관계 안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더욱 자주 생산력을 사회적 생산력으로서 다루게 된다. 신용의 끝없는 팽창을 수반하는 산업 호경기나 자본주의적 대기업을 파괴하는 공황 자체나 모두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갖가지 주식 회사 형태로 많은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생산 수단과 교통 수단 가운데 어떤 것들, 예컨대 철도와 같은 것은 원래 어떠한 자본주의적 착취 형태도 배제할 만큼 아주 방대하다. 그러나 어떤 발전 단계에 이르면 이 형태도 충분하지 않게 된다. 어떤 한 나라의 같은 산업 부문의 모든 대생산자들은 생산을 통제할 목적으로 트러스트라는 하나의 연합체로 통합된다. 그들은 생산되어야 할 총액을 정하고 그것을 서로간에 할당하며, 또 미리 결정된 판매 가격을 적용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이러한 트러스트는 일단 부진한 상태에 빠지기만 하면 대부분 허물어지기 때문에 그것들은 더욱더 집중화된 사회화를 가져온다. 즉 한 산업 부문 전체가 하나의 완전한 통일성을 갖춘 대주식 회사로 되어, 국내 전쟁은 이 한 회사의 국내 독점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예컨대 1890년에 영국 알칼리 생산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이 생산은 48개의 대공장 모두를 합동한 뒤 단일한 중앙이 지도하는 자본금 1억 2000만 마르크의 단 한 회사의 손안으로 넘어갔다.


트러스트에서는 자유 경쟁이 독점으로 돌아서고, 자본주의 사회의 무계획적 생산은 닥쳐올 사회주의 사회의 계획적 생산 앞에 굴복한다. 물론 처음에는 다만 자본가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서다. 그러나 착취가 이러한 형태를 취하게 되면 그것은 너무나 노골적인 것이 되어 무너지고야 만다. 얼마 안 되는 금리 생활자 무리들이 사회 전체를 공공연히 착취하는 이러한 트러스트들이 지배하는 생산을 오랫동안 감수할 인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트러스트가 있건 없건간에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공식 대표자인 국가는 생산에 대한 지도를 떠맡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국유화의 필요성은 우편, 전신, 철도와 같은 대규모 교통 수단에서 우선 나타난다.


공황이 부르주아지가 현대 생산력을 더 이상 관리해 나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면, 대규모 생산 기업이라든가 교통 수단이 주식 회사나 트러스트의 손안으로 넘어가거나 또는 국가 소유로 넘어간 것은 생산력 관리에 부르주아지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자본가가 하던 모든 사회적 기능을 지금은 고용 사무원들이 하고 있다. 자본가 자신에게는 수입 긁어모으기, 이권 따내기, 그리고 또 각종 자본가들이 서로 자본을 쟁탈하는 증권 거래소 놀음밖에는 다른 아무런 사회적 활동도 남지 않게 되었다. 전에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노동자들을 내쫓았는데 지금은 바로 자본가 자신을 내쫓고 있다. 물론 내쫓긴 그들은 아직 산업 예비군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과잉 인구를 형성할 뿐이다.


그러나 주식 회사라든가 트러스트의 손안으로 옮아 가는 것도, 국유화도 생산력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없애지는 못한다. 이 점은 주식 회사나 트러스트의 경우 아주 명백하다. 한편 현대 국가도 또한 부르주아 사회 자체가 창설한 것으로, 노동자나 개별 자본가들의 침해를 받지 않도록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일반적 외부 조건을 보호하려고 만든 조직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국가는 그 형태가 어떻든 본질은 자본주의적 기관이고 자본가들의 국가이며 이념상의 총자본가다. 그것이 생산력을 더 많이 자기 소유로 장악하면 할수록 더욱더 완전한 총자본가가 될 것이며, 더욱 많은 국민을 착취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자로 프롤레타리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뿌리뽑히기는커녕 오히려 극단으로 이르고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절정에 이르자 번혁이 일어난다. 생산력의 국가 소유는 충돌을 해결하지는 못한나, 그것을 해결할 형식적 수단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오직 현대 생산력의 사회적 본질이 사실상 승인되고 따라서 생산, 점유 및 교환 방식이 생산 수단의 사회적 성격에 적응하게 될 때에만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사회가 사회적 관리를 뺀 다른 어떤 관리 방법으로도 관리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한 생산력을 공공연히, 그리고 직접 장악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지금은 생산자 자신을 거역하며,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자연 법칙으로서 생산 방식과 교환 방식을 주기적으로 뒤흔들어 놓으면서 폭력적으로 또 파괴적으로만 관철되고 있는 생산 수단과 생산물의 사회적 성격이 그때에는 생산자에 의해 완전히 의식적으로 이용되어 혼란과 주기적 파탄의 원인이 아니라 생산 자체의 가장 강력한 지렛대가 될 것이다.


사회적으로 작용하는 힘도 자연의 힘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고려하지 않는 한 맹목적으로, 폭력적으로,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그 작용·방향·영향을 파악한다면, 그것을 더욱 우리의 의사에 복종시키고 그것을 이용해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것은 오직 우리들 자신에 좌우된다. 오늘날의 강력한 생산력으로 말하자면 특히 그렇다. 우리가 이 생산력의 본질과 성격을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한---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그 옹호자들이 이를 방해하고 있다.---생산력은 우리를 거역하고 우리를 반대해 작용하며, 이미 상세히 서술된 바와 같이, 그 동안 그것은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나 일단 그 본질이 파악되자마자 그것은 연합된 생산자들에게 장악되어 악마 같은 명령자에서 온순한 하인으로 바뀔 수 있다. 둘 사이의 차이는 벼락이 칠 때 번개불에 담긴 전기의 파괴력과 전신이나 아크등의 길들인 전기 사이의 차이와 마찬가지며, 화재의 불과 사람에게 유익한 불 사이의 차이와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생산력이 마참내 인식된 그 본질에 알맞게 다루어질 때에는, 생산의 사회적 무정부성은 없어지고 사회 전체와 그 개별 성원의 수요를 충족시킬 것을 목적으로 생산이 사회적이고 계획적으로 조절될 것이다. 그때에는 생산물이 우선 생산자를 노예화하고 다음에는 점유자까지도 노예화하는 자본주의적 점유 방식은 없어지고, 현대적 생산 수단의 본질 자체에 기초를 둔 새로운 점유 방식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즉 한편으로는 생산을 유지하고 늘리는 수단인 생산물을 사회가 직접 점유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생활과 향락의 수단인 생산물을 개인이 직접 점유하는 새로운 점유 방식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국민의 대다수를 더욱더 프롤레타리아로 바꿈으로써, 자멸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변혁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세력을 만들어 낸다. 사회화한 대생산 수단을 더욱더 국유화하지 않을 수 없게 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자체가 그것을 변혁할 길을 제시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우선 생산 수단을 국유화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자기 자신을 끝장내며 그와 함께 모든 계급 차별과 계급 대립, 따라서 국가로서의 국가도 끝장낸다. 지금까지 계급 대립 속에서 운동해 왔고 또 하고 있는 사회에는 국가가 필요했다. 즉 착취 계급의 외적 생산 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조직체가 필요했으며, 따라서 특히 해당 시기의 생산 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억압 조건(노예제, 농노제 또는 봉건적 예속제, 임금 노동제)에 피착취 계급을 폭력적으로 얽매어 두기 위한 조직체가 필요했다. 국가는 사회 전체의 공식 대표자였고, 사회 전체가 눈에 보이는 하나의 단체로 집약된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그러했던 것은 오직, 국가가 해당 시기에 스스로 사회 전체를 대표했던 계급의 국가인 한에서만 그러했다. 즉 고대에는 노예 소유자인 자유민들의 국가였으며, 중세에는 봉건 귀족의 국가였으며, 현대에 와서는 부르주아지의 국가인 것이다. 국가가 마침내 사회 전체의 대표자가 되면, 그 자체가 쓸모 없게 된다. 억압해야 할 모든 사회 계급은 없어지고, 계급 지배와 함께 오늘날의 생산의 무정부성에서 비롯된 개체 생존 투쟁과 이러한 투쟁에서 일어나는 충돌과 폭력도 없어지게 되면 그때에는 억압해야 할 아무것도 남지 않으며 억압하기 위한 특별한 힘으로서의 국가도 필요 없게 될 것이다. 국가가 참으로 사회 전체의 대표자로 등장하는 최초의 행위---사회의 이름으로 생산 수단을 장악하는 것---는 동시에 국가로서의 마지막 독자적인 행위다. 그때에는 사회 관계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간섭은 한 분야 한 분야씩 점점 필요 없게 되어 가다가 자기 스스로 잠들고 만다. 인간에 대한 관리 대신에 물건에 대한 관리와 생산 과정에 대한 지도가 나타난다.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멸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인민 국가라는 문구, 한동안 선동 수단으로서 존재할 수는 있었으나 결국 과학과 양립할 수 없는 이 문구는 바로 이를 근거로 하여 평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는 하루아침에 폐지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무정부주의자들의 요구도 또한 이를 근거로 하여 평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역사 무대에 등장한 이래, 개인이나 어떤 학파를 막론하고 사회가 모든 생산 수단을 장악하는 것을 미래의 막연한 이상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실제 조건이 갖추어질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역사적 필연성이 되었다. 다른 온갖 사회 진보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계급들의 존재가 정의니 평등이니 하는 것과는 모순이라는 의식이나 또는 계급을 없애려는 단순한 의욕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새로운 경제적 조건의 의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가 계급들로, 즉 착취 계급과 피착치 계급,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으로 분열된 것은 종래의 충분하지 못한 생산 발전이 낳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사회적 총노동으로 생산되는 생산물의 총량이 모든 이의 필수적인 생활 수단 총량을 겨우 뛰어넘는 정도인 동안, 따라서 노동이 대다수 사회 성원의 모든, 또는 거의 모든 시간을 뺴앗는 동안, 그 사회는 어쩔 수 없이 계급들로 분열된다. 전적으로 강제 노동에 종사하는 이 방대한 다수와 함께, 직접적인 생산 노동에서 해방되어 노동 관리·국가 사무·재판·과학·예술 등과 같은 사회의 공동 사무를 맡아보는 계급이 형성된다. 따라서 분업의 법칙이 바로 계급 분열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계급들이 형성될 때 폭력·약탈·강제·기만이 적용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며, 또 권력을 빼앗은 지배 계급이 근로 계급을 희생시켜 자기의 지위를 다지며 사회에 대한 지도를 대중에 대한 강화된 착취로 바꾸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처럼 계급 분열에는 역사적 정당성이 어느 정도 있기는 했지만 단지 특정 시기, 특정 사회적 조건에서만 그러했던 것이다. 그것은 생산이 충분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 것인 만큼 현대의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면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사실 사회 계급의 소멸은 비단 이러저러한 지배 계급의 존재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온갖 지배 계급의 존재, 따라서 계급 분열 자체도 하나의 시대 착오로 만들고 하나의 폐물로 만드는 역사 발전 단계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계급의 소멸은, 특정한 사회 계급이 생산 수단과 생산물을 점유하며 그와 함께 정치 지배권도 점유하고 교육과 정신적 지도를 독점하는 것이 필요 없게 될 뿐만 아니라 경제·정치적 그리고 정신적 발전에 장애가 되는 그러한 높은 생산 발전 단계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지금 그러한 단계에 이르렀다. 부르주아지의 정치·정신적 파산은 그들 자신에게까지도 거의 비밀이 아니며, 그들의 경제적 파산도 10년마다 규칙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공황이 닥칠 때마다 사회는 자기가 이용할 수 없는 생산력과 생산물의 중압 때문에 허억이며, 또 소비자가 부족한 탓에 생산자는 아무것도 소비할 수 없다는 불합리한 모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현대 생산 수단의 고유한 팽창력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채워 놓은 질곡을 타파한다. 생산 수단에서 이 질곡을 벗겨버리는 것이야말로 곧 생산력으로 하여금 계속 또 언제나 급속히 발전하게 하며 따라서 또 생산 자체를 실제로 끝없이 성장시키는 단 하나의 전제 조건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화는 비단 생산에 대한 현존하는 인위적 장애물을 없앨 뿐만 아니라,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생산의 동반자로서 공황 때에 절정에 이르곤 하는 생산력과 생산물의 대대적인 낭비와 파괴 또한 없애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현재 지배 계급과 그 정치 대표자들의 터무니 없는 사치와 낭비를 없앰으로써, 전체를 위해 많은 생산 수단과 생산물을 절약하게 한다. 사회적 생산에 의해 사회의 모든 성원에게 충분하고도 나날이 개선되는 물질적 생활 조건뿐만 아니라 그들의 육체·정신적 능력을 전면적이고도 자유롭게 발전시키고 활용하게 해 줄 가능성, 지금 비로소 그러한 가능성이 달성되었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사회가 일단 생산 수단을 장악하게 되면 상품 생산이 없어지고 따라서 생산자에 대한 생산물의 지배도 없어질 것이다. 사횢거 생산의 무정부성은 계획적이고 의식적인 조직으로 대체된다. 개체 생존 투쟁은 끝난다. 그리하여 인간은 비로소---어떤 의미에서는 궁극적으로---동물계를 벗어나며, 야수적인 생존 조건에서 참으로 인간적인 생존 조건으로 넘어간다. 인간을 둘러싸고 지금껏 그들을 지배해 온 생활 조건을 이제는 인간이 지배하고 통제하게 되어, 인간은 처음으로 자연에 대한 현실적이며 의식적인 지배자가 된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사회적 결합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간을 지배하는 외적인 자연 법칙으로서 인간에 대립해 오던 인간 자신의 사회적 행동 법칙이, 이제는 인간의 의해 아주 능숙하게 적용될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지배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자연과 역사에 의해 위로부터 강요된 것으로서 인간에게 대립해 오던 인간의 사회적 결합이 이제는 인간 자신의 자유로운 일이 된다. 지금까지 역사를 지배해 오던 객관적이며 외적인 힘이 인간 자신의 통제를 받게 된다. 바로 이 순간부터 비로소 인간은 완전히 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의 역사를 창조하기 시작할 것이며, 이 순간부터 비로소 인간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사회적 원인들은 인간이 바라는 결과를 더욱더 훌륭히 가져오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필연의 왕국으로부터 자유의 왕국으로 인류가 비약하는 것이다.


결론으로서 우리가 논술한 발전 과정을 간단히 종합하자.


1.중세 사회 소규모의 개인 생산, 생산 수단은 개인용으로 마련된 것이어서 원시적이며 불편하고 조악하며 비효율적이었다. 생산자 자신이나 그의 봉건 영주가 생산물을 직접 소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 직접 소비를 초과하는 잉여물 생산이 있는 경우에만 이 잉여물이 판매되어 교환되게 된다. 따라서 상품 생산은 겨우 발생 과정에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상품 생산은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을 맹아로 내포하고 있다.


2.자본주의 혁명 우선 단순 협업과 매뉴팩처에 의해서 수행된 공업의 변혁. 종래 흩어져 있던 생산 수단이 대작업장으로 집중된다. 따라서 또 개인적 생산 수단이 사회적 생산 수단으로 바뀌나 그것은 대체로 교환 방식에까지는 미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진다. 종래의 점유 형태는 여전히 작용한다. 자본가가 등장한다. 그는 생산 수단의 소유자로서 생산물도 점유하여 그것을 상품으로 바꾼다. 생산은 사회적 행위가 되나, 교환과 그와 동시에 생산물의 점유는 여전히 개인적 행위, 개개인의 행위로 남는다. 사회적 노동의 생산물이 개별 자본가에 의해 점유된다. 바로 이것이 기본 모순이며, 여기로부터 현대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그 모든 모순이 흘러 나온다. 이 모순들은 대규모 공업에서 특히 선명하게 나타난다.

(ㄱ) 생산자와 생산 수단의 분리, 노동자들은 평생토록 임금 노동을 해야 할 운명에 놓인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대립.

(ㄴ) 상품 생산을 지배하는 법칙이 대대적으로 발현되고 그 작용이 강화된다. 걷잡을 수 없는 경쟁. 각 개별 공장 안의 사회적 조직과 생산 전체의 사회적 무정부성 사이의 모순.

(ㄷ) 한편으로는 기계의 개선. 이것은 경쟁으로 말미암아 각 공장주에 대해 하나의 강제 법칙이 되며, 동시에 또한 공장으로부터 노동자의 축출이 끊임없이 격화하는 것을 뜻한다. 즉 산업 예비군이 생겨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의 끝없는 확장. 이것 또한 각 공장주에 대해 하나의 강제적인 경쟁 법칙이 되었다. 이 둘로부터는 생산력의 유례없는 발전, 수요에 대한 공급의 초과, 과잉 생산, 시장의 범람, 10년마다 되풀이되는 공황, 악순환. 즉 한편에서는 생산 수단과 생산물의 과잉을 보게 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자리와 생활 수단을 잃은 노동자의 과잉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도 생산과 사회 복지라는 두 축은 결합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 형태는, 생산력과 생산물이 미리 자본으로 바뀌는 조건에서가 아니면 생산력이 작용하는 것도 생산물이 유통되는 것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산력과 생산물의 과잉이 바로 그 자본화를 방해한다. 이 모순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커진다. 즉 생산 양식이 교환 방식에 반역한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사회적 생산력을 더 이상 관리해 나갈 능력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ㄹ) 생산력의 사회적 성격의 부분적 승인, 자본가 자신의 어쩔수 없는 승인, 생산과 교통의 거대 기구가 처음에는 주식 회사 소유로, 다음에는 트러스트 소유로, 그 다음에는 국가 소유로 된다. 부르주아지는 필요 없는 계급이 되고 그들의 사회적 기능은 모두 고용 사무원들이 수행한다.


3.프롤레타리아 혁명 모순의 해결.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적 권력을 장악하고, 이 권력의 힘으로 부르주아지의 손안에서 벗어나고 있는 사회적 생산 수단을 사회 전체의 소유로 만든다. 이러한 행위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생산 수단을 자본이라는 종래의 속성에서 해방하며 그것의 사회적 본질이 완전히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도록 한다. 이제부터는 예정된 계획에 의한 사회적 생산을 할 수 있게 된다. 생산의 발전으로 각종 사회 계급이 더 이상 계속 존재하는 것이 하나의 시대 착오가 된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이 사라짐에 따라 국가의 정치적 권위도 시들어 버린다. 드디어 자기 자신의 사회적 존재의 주인이 된 인간은 그 결과로 자연의 주인,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된다. 즉 자유롭게 된다.

이러한 세계 해방의 위업을 수행하는 것, 이것이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이다. 이 변혁의 역사적 조건, 따라서 또 그 본성 자체를 연구하여 이 위업을 수행할 사명을 지닌 오늘의 피억압 계급에게 그들 자신의 위업의 조건과 본질을 깨우쳐 주는 것,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이론적으로 표현하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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