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필드

좌파도서관

킬링필드는 1969년~1979년에 걸쳐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미국크메르 루주가 벌인 학살이다.

1차 킬링필드

1968년 초 미국의 베트남 전쟁 군사 개입이 한창일 때 미군 병력은 55만 명에 이르렀다. “베트남 전쟁을 끝내겠다”는 공약 아래 1969년 1월 미국 대통령이 된 리처드 닉슨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오히려 전선을 캄보디아로 넓혀나갔다. 두 사람은 캄보디아 동부 베트남 접경지대의 ‘호찌민 루트’를 따라 움직이는 북베트남군과 베트남인민해방전선을 겨냥한 대규모 공습을 결정했다. 그에 따라 B-52기들이 캄보디아로 출격했다. 공습은 ‘메뉴’(Menu)라는 은어로 일컬어졌고, 공습작전 이름도 식사 시간과 관련됐다. 아침작전, 점심작전, 스낵작전, 저녁작전 그리고 후식작전 등이다.

1970년 10월 9일에 미국의 지원에 힘입은 론 놀의 쿠데타가 일어나 베트남 전쟁에 휘말리기를 거부하며 중립 노선을 고수했던 시아누크 국왕이 축출되었고, 그는 베이징과 평양을 오가는 망명객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론 놀은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을 묵인했다.

미군의 북베트남 공습은 1973년 1월 파리 평화회담으로 그쳤다. 그러나 캄보디아 공습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공습은 미 의회나 언론, 국민들에겐 비밀이었다. 닉슨 대통령의 사임(1974년 8월)을 몰고 온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져서야 비로소 캄보디아 공습 사실이 알려졌고, 그제야 공습도 멈췄다. 1973년 공습 마지막 6개월 동안에 집중적으로 25만t의 공습이 행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일본에 떨어뜨린 폭탄(16만t)보다 9만t이 많았다.

캄보디아 공습은 키신저의 바람과 달리 공산세력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지 못했다.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당시 캄보디아를 취재했던 영국 저널리스트 윌리엄 쇼크로스는 “크메르루주 세력이 불어난 것은 미국의 군사 개입이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공습으로 가족과 생활 터전을 잃은 캄보디아 농민들은 미국의 지지를 받았던 론 놀 장군의 친미 군사정권에 적개심을 품게 됐다. 그들은 반군세력인 크메르 루주를 위해 기꺼이 총을 들고 나섰다.

미국의 1차 킬링필드 은폐

킬링필드 학살재판을 통해 취약한 정치적 합법성을 국내외로부터 인정받겠다는 캄보디아 훈센 총리의 야심과 킬링필드에 종지부를 찍어 모든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미국의 속셈이 충돌한 채 이루어졌다.

“1969~73년에 벌어진 일들도 재판에 포함시켜야 한다.” 훈센은 막힐 때마다 이 카드를 은근히 뽑아들었지만, UN과 미국 정부는 그때마다 경제지원을 들먹이며 달래기도 하고, 두들겨패기도 하며 결국 자신들 뜻대로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1975~79년의 기간만을 학살재판 대상으로 삼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킬링필드는 1969~73년에 미국이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미국은 이를 숨기기위해 사력을 다했다.

2차 킬링필드

마오이즘을 본떠 1975년 캄보디아 혁명에 성공한 크메르 루주는 화폐통용 금지, 무역 금지 같은 조치들을 취했다. 특히 크메르 루주는 론 놀에 봉사한 이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10만명에 이르는 지식인과 시민들을 처형했고, 1975~79년의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과로와 질병이나 기아로 죽은 이들이 70만~80만명을 웃돌았다.

이때 교사의 80%, 의사의 95%가 죽음을 면치 못했다. 다만 이 극단적 히스테리에는 하노이에서 외국물을 먹고 온 '친베트남파'에 대한 강박적 두려움이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베트남의 남진(南進)을 거드는 내부의 적이라고 여긴 것이다.

킬링필드의 피해

게다가 킬링필드의 피해 또한 과장이 심하다. 불과 3년 남짓에 인구의 4분의 1이 학살되었다는 억측이 만연하다. 인구의 4분의 1이 준 것은 사실이다. 다만 1970년대 전체에 걸쳐 일어난 일이다. 미국의 폭격으로 사망한 인원부터, 베트남이나 태국으로 피난 간 사람들까지 도합한 숫자이다. 과연 5년의 무차별 폭격과 3년의 집단 학살 가운데, 어느 쪽의 인적 피해가 더 컸는지 단언하기 힘들다.

시아누크 시대인 1962년 이래 최근의 1996년에 이르기까지 캄보디아에서는 한번도 인구 센서스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1975년에서 1978년의 기간 동안 어떤 공식적인 통계도 발표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캄보디아 학살 전문가들이 민주 캄푸치아 시대 44개월 동안 2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캄보디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잘못된 사회통계학적 표본조사의 결과였다.

예컨대 이 분야의 연구자들 중 하나였던 영국 런던대학의 스테판 헤더(Stephen Heder)는 1980년 태국 국경의 캄보디아 난민촌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조사 중의 하나를 이끌었고 1천5백 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난민들에 대한 조사는 출생지와 거주지 등에 대한 간단한 설문과 함께 중점적으로는 사망자에 대한 증언에 치중한 것이었다. 증언은 ‘당신이 알고 있는 친척 또는 지인들 중에 몇 명이 (또 왜) 죽었습니까?’ 따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고 증언자들이 허위로 또는 자신의 처지를 과장해서 답변할 수 있다는 농후한 가능성은 배제되었다. 헤더는 이 인터뷰 조사의 결과 민주 캄푸치아 44개월 동안의 사망률을 21%로 추정했다. 혁명 이전 캄보디아의 인구는 대략 710만~78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었으므로 44개월 동안 150만 명에서 16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셈이었다. 이 숫자는 곧 헤더가 주장한 사망자수가 되었다.

벤 키어넌의 연구결과가 100만 명에서 200만 명으로 그 숫자를 늘린 비밀의 해답 역시 인터뷰에 따른 통계의 마술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여러 차례 태국 국경의 난민캠프와 심지어는 프랑스와 미국의 캄보디아 난민들을 대상으로 조사 작업을 벌였고 그들의 증언에 따라 사망자 수는 상승곡선을 그렸다. 적어도 1996년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은 자들의 입을 빌린 이 숫자들은 가장 과학적인 조사결과였으며 해골의 흔적에서 원래의 얼굴을 복원해 낸 인문적 법의학자들의 놀라운 쾌거이기도 했다.

1996년 3월, 1962년 이래 34년 만에 캄보디아에서는 인구 센서스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캄보디아의 인구는 1070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1998년 다시 또 한 번의 인구센서스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는 1142만 명이었다. 비로소 우리는 살아남은 자들의 가장 신빙성 있는 증언을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헤더와 키어넌 등의 연구조사결과를 바탕으로 간단한 숫자놀음을 해보기로 하자. 학살의 광풍이 훑고 지나간 1979년의 캄보디아 인구를 560만 명으로 추산한다면 1998년에 이르러 인구증가율은 100%를 웃도는 것이 된다. 610만 명으로 추산했을 때에는 87.2%의 증가율이다.

20년 만에 100%이거나 혹은 87.2%이거나 어느 쪽이든 일종의 난센스임에는 틀림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남한의 예를 보면 한국전쟁 후 남한이 베이비붐 시대에 접어들었던 1955년에서 1974년까지의 인구는 2천1백50만 명에서 3천4백69만 명으로 61.3%의 인구증가율을 보였다. 이 수치는 인구증가에 있어서 한민족의 역사상 유례가 없던 가장 급격한 인구증가였다. 1979년에서 2000년까지의 남한의 인구증가율은 25.2%에 머물렀다.

하물며 1979년에서 1991년 평화협정까지의 캄보디아는 여전히 전쟁 상태에 있었고 인구는 비상하게 늘기보다는 오히려 정체되거나 줄 수도 있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87.2~100%의 인구증가를 보였다는 것은 인간의 번식력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수치였다. 서구의 캄보디아 학살 전문가들은 이 불가능한 수치를 가능한 수치로 만든 마술사들인 것이다.

참고 자료

  • 킬링필드, 제국의 전쟁이 남긴 지옥의 심장,유재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