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 학살

좌파도서관
베트남 전쟁 기획편

개요

후에 학살(혹은 후에 대학살, Massacre of Hue, Thảm sát Huế Tết Mậu Thân)은 1968년 구정 공세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진 학살이나, 사실상 대다수의 민간인 희생자는 미국과 남베트남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다.

배경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이른바 구정 공세(Tet Offensive)를 감행했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포함한 100개 이상의 남베트남 도시가 기습 공격을 받았다. 미국과 남베트남 연합군은 베트콩의 기습 공격에 잠시나마 밀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막강한 화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여러 지역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공격을 격퇴했다.

구정 공세에는 대략 8만 명 이상의 베트콩과 북베트남군(대부분은 베트콩)이 공격을 감행했었다. 당시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서는 미국 대사관 1층이 베트콩에 의해 점령당했지만, 미군은 단기간에 다시 접수했다. 대사관 공격에서는 베트콩 19명이 전사하고 미군 7명이 전사했다. 그러나 후에의 경우는 달랐다. 과거 응우옌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Hue)에서는 전투가 정말 치열하게 전개됐다.

후에 전투는 대략 5,000명 이상의 공산측 병력이 기습적인 공격을 단행하면서 시작됐는데, 이 전투는 대략 1달 동안이나 전개됐다. 초기 베트콩은 24시간 안에 후에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이후 북베트남 정규군 7,000명 이상이 이상이 가세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후에를 점령하자, 후에를 다시 되찾으려 하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반격을 가했고, 후에는 과거 스탈린그라드 전투한국전쟁 때처럼 양측의 시가전으로 변모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후에를 B-52 폭격기를 동원하여 융단폭격했고, 막강한 화력을 동원한 끝에 1달 만에 후에를 재탈환했다.

학살과 의문점

후에를 재탈환한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소위 공동묘지를 발견했고, 그해 4월 응우옌 반티에우 정권은 후에 전투 당시 공산군에 의한 학살이 있었다는 발표를 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처형된 사람들의 숫자가 수천 명이며, 후에 전투 이후 발견된 공동 묘지와 땅에 파뭍혔던 시신들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공산주의자들이 자행한 만행이라 주장했다. 이후 미국 정부는 베트콩으로부터 확보한 문서에는 2,700명 이상 사살한 것이 확인된다고 주장했으며, 대략 2,800명에서 6,000명이나 되는 남베트남의 민간인이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에 의해 학살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가지 의문점이 있다. 후에 학살에 대한 남베트남 측의 발표는 과연 과장이 없는 것일까? 1달 기간 동안 미군의 폭격으로 죽은 사람에 대해선 왜 말이 없는 것일까? 전투 기간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전투 현장에 휘말렸는데, 단순히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에 의해서만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을까? 이러한 점에 대한 의문점들은 후에 학살을 얘기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지점이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학살

우선 미군이 베트콩 포로 한 명으로부터 획득한 처형자 명단에는 행정 공무원 1,892명, 정치인 48명, 악덕 지주 790명을 제거했다고 나와 있으며, 이걸 합쳐서 2,730명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처형 당했다고 한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도 이 수치를 인용했고, 영어권에서 나온 베트남 전쟁 서적들도 이걸 바탕으로 공산주의자들이 후에에서 학살했다고 기술하기도 한다. 후에 탈환 이후 돈 오버도퍼(Don Oberdorfer)나 마크 리보(Mark Riboud) 같은 서방 측 인사들은 후에에서 공산주의자에 의해 3,000명 내지는 4,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 당했다고 주장했으며, 미국 정부기관 인사인 더글라스 파이크(Douglas Pike)는 더 나아가 5,7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윌리엄 색스비(William Saxbe) 상원의원은 대략 7,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고 1972년에 주장했다.

이렇듯 대부분의 서방 자료들은 후에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학살이 벌어졌으며, 그 숫자가 대략 수천 명이나 된다고 주장한다. 보통의 경우 공산주의자들에 의학 학살 수치를 2,500명에서 6,000명 정도로 잡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산의 대부분 출처는 위에 상술된 베트콩 측 문서를 제외한다면, 남베트남의 티우 정부의 발표나, 미국에서 가공한 자료들이라는 점에서 과장과 각색 및 조작이 의심되는 지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베트남 전쟁이 종결된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남베트남 인사들이 주장하는 수치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서 마릴린 B. 영(Marilyn B. Young)은 랜 오클랜드(Len Ackland)의 자료를 인용하며, 현실에 가장 근접한 사망자 추정치가 300~400명 정도라고 주장했다. 마릴린 B. 영에 따르면, 대부분의 학살 희생자들은 남베트남 정부나 미국인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베트남 학자 응오빈롱(Ngo Vinh Long)은 수천 명이 아닌 710명 정도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다.

의외로 조명되지 않은 점이라고 하자면 후에(Hue)에서의 베트콩의 임무는 도시에 있는 남베트남 정부의 행정부를 파괴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혁명적인 행정부”를 세우는 것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월맹군 학살을 운운하기 바쁜 이들은 이런 것 조차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확증편향이 반복되고 있는 셈.

미국과 남베트남 측의 과장과 여론조작

후에 사건의 참된 교훈은 평화적이고 정치적인 통제가 완벽한 상황에서 사이공 정권과 협력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기본정책은 사이공측 탄압기구 핵심 인물이 아니라면 결코 보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핵심인물의 경우에도 그들이 혁명군에 대한 저항을 포기함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에서 구제될 수 있다.
- 미국 대외정책론 p.412
여기서 우리는 브레스트럽이 인용한 후에의 대량학살에 관한 수많은 기사들이 300~400명의 공무원이 살해되었다는 공식적인 발표를 다루고 있고, 결국 그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가레스 포터는 이는 대량학살이지만, "전투 중에 숨진 민간인의 1/10에 불과"히며 따라서 "주요 기사 같지는 않았다"고 논평했다. 그는 "후에의 대량학살이 주요 기사가 된 것은 미 대사관이 홍보관인 더글라스 파이크의 공론화 때문이며, 그는 1969년 말에 미대사관의 요청으로 사이공의 엘스워스 벙커에게 이 문제를 다룬 책자를 보냈다."고 덧붙였다. 파이크의 글은 공개되자마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의심스러운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표준적인 관점의 근거가 되었다.
- 여론조작 p.513

마릴린 B. 영이나 응오빈롱처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한 학살의 수치를 의심한 학자들은 여럿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역사학자 가레스 포터(Gareth Porter)와 에드워드 허만(Edward Herman) 그리고 노엄 촘스키(Noam Chomsky) 등을 들 수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가레스 포터는 <Myth of The Massacre of Hue>라는 글에서 소위 더글라스 파이크가 내놓은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비판했다. 포터는 미국이 주장한 처형자 명단 문서에 대해 반박했다. 포터에 따르면, 이 문서 상에는 어느 부분에도 민간인이 처형되었다는 주장이나 또 그럴만한 암시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심지어 그 문서는 베트콩의 처형자 명단으로 미국 측이 활용한 자료는 "2,730명이라는 숫자가 전투중에 죽거나 다친 적군의 숫자를 포함하고 있으며, 베트남 측 단어 'diet(제거)'이나 'te(테)' 등을 면밀히 살피지 않고 선전용을 위해 악용됐다."고 포터는 반박했다. 또한 포터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수백 명을 처형했다는 근거도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즉 가레스 포터에 따르면 후에 ‘학살’ 사건에 대한 세부적인 연구에서 베트콩에 비우호적이었던 인사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였다는 공식적인 주장은 완벽한 조작인 것이다.

당시 후에의 비밀경찰 책임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 명단에서 즉시 처형될 이름은 후에 시 비밀경찰 간부들 뿐이며, 그밖의 명단은 재교육 시켜야할 대상"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포터는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민간인을 처형시킬 의도가 있음을 보여주는 어떠한 포획문서도 지금까지 나온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후에 탈환 이후 발견된 대무덤도 위에서 설명한 조작된 문서 만큼이나 신빙성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촘스키와 허만에 따르면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민간인들이 후에 탈환 과정에서 미국과 남베트남측의 무차별한 화력동원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미군의 폭격이 얼마나 파괴적이었는지는 아래의 '미국과 남베트남 측의 과장과 여론조작'을 통해 보도록 하자.

의도적으로 은폐되는 미군 폭격에 의한 학살

영국의 사진기자 필립 존스 그리피스(Philip Jones Griffiths)는 현장 취재를 통해 후에 탈환으로 발생한 수천 명의 민간인 희생자들은 미국의 무차별적인 화력 사용으로 죽임을 당한 뒤 공산주의자에 의한 학살의 희생자로 탈바꿈되었다고 증언했다.
- 여론조작 p.371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도시를 재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게시하자, 또 다른 유혈극이 일어났다. 미 해병대가 시가전을 벌이는 것을 보도함에 따라, CBS 텔레비전 특파원인 존 로렌스는 어니스트 치트햄 중령에게 미 해병대와 게릴라 사이에 갖힌 민간인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날지 질문했는데, “나는 현재 나쁜 놈들로 여겨지는 그 무고한 이들이 민간인들이라 생각한다.”라고 치트햄은 대답했다.
- Kill Anything That Moves p.103
후에 시를 재점령하기 위해 미군은 대포와 폭격기를 활용하여 도시와 그 인근 지역을 타격했다. 무수한 파편들과 네이핌탄, 탱크용 포탄과 화염방사기에 쓰였던 107mm 무반동포 대량살상무기의 활용은 시간이 지날수록 극대화됐다. 이러한 무기들은 민간인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미국사 교수인 가브리엘 콜코의 책 “전쟁의 구조”에 따르면, 후에 시는 미군 폭격기로 인해 도시의 80%가 파괴됐고, 수천 명의 민간인들도 전장에서 마찬가지로 희생됐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측의 문서에 따르면 그들은 죽은 병사들과 함께 수많은 민간인의 시신을 공동묘지에 뭍어야만 했다.
- Anatomy of War p.287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동원할 수 있는 화력을 후에 탈환에 쏟아부었다. 당시 후에를 들렸던 미 공군차관 타운센드 후프스(Townsend Hoopes)에 따르면, 미군의 폭격으로 후에의 80%가 파괴됐고, 최소 2,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짓뭉개진 폐허 속에 묻혔다고 했다. 후에 탈환 이후 미국국제개발처는 폐허로 변한 도시에서 대략 4,000명의 민간인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추정했으며, 그 대부분은 미국이 무차별적으로 사용환 화력의 희생자였다. 후에에서는 17,134채의 가옥 중에서 9,776채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3,169채 이상이 크게 파손된 것으로 집계됐다. 최소 70% 이상이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된 것이다. 미해군 군함은 7,679개의 포탄을 후에에 투하했고, 미 해병대의 전투기는 수십차례나 출격했으며 네이팜 폭탄과 500파운드나 되는 폭탄을 인구 거주 지역에 투하했다. 미군은 모두 합쳐 600톤의 폭탄과 대포와 탱크 대포로 포격을 퍼부었으며, 지상병력이 시가전을 벌이는 동안 엄청난 폭발로 도시를 파괴했다.

<Kill Anything That Moves>의 저자 닉 터스(Nick Turse)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도시를 재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게시하자, 유혈극이 벌어졌으며 필연적으로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가 속출했다고 책에서 주장했다. 터스에 따르면 최소 3,800명 이상의 후에 시민이 미군의 폭격이나 전투로 죽거나 실종되었고, 11만 6,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노숙자가 되었으며, 도시의 3/4 이상이 파괴되거나 극심하게 손실됐다. 당시 특파원 로버트 셰플린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동안 내가 본 그 어떤 것도 절망과 파괴 면에서는 후에 도시에서 본 것 만큼 끔찍하지 않았다"고 했으며, CBS 텔레비전 특파원인 존 로렌스는 어니스트 치트햄 중령에게 미 해병대와 게릴라 사이에 갖힌 민간인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날지 질문했는데, "나는 현재 나쁜 놈들로 여겨지는 그 무고한 이들이 민간인들이라 생각한다."라는 치트햄 중령의 대답을 들었다.

그 외에도 이탈리아 저널리스트인 오리아나 팔라치(Oriana Fallaci)는 후에 전투 당시 후에에 있었던 프랑스인 신부의 증언을 인용하면서, 대략 8,000명의 민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되었으며, 1,1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후에 탈환 이후 남베트남군에 의해 보복당해 살해당했고 주장했다. 남베트남군에 의한 학살은 <Vietnam A History>라는 미국의 대표적인 베트남 전쟁 서적 저자인 스텐리 카노(Stanley Karnow) 또한 인정하며, 이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후에에서 있었다고 한다.

2017년 PBS에서 방영했던 베트남 전쟁 다큐멘터리에서는 비록 공산당에 의한 학살을 인정하지만, 후에 전투 과정에서 폭격으로 파괴된 잔해에서 6,000명의 민간인이 죽어있었다고 언급했다. 조셉 커민스의 <전쟁 연대기>라는 책에선 후에 전투 당시 희생된 민간인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희생된 3,000명을 포함하여 대략 1만 명의 후에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나온다. 즉 최소 7,000명 이상은 미군의 폭격과 화력으로 희생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미국의 역사학자 가브리엘 콜고는 위 인용문에 나오는 필립 존스 그리피스와 마찬가지로 후에 전투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민간인들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학살로 둔갑됐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촘스키와 허만의 주장대로 미군의 폭격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한 처형보다 압도적으로 훨씬 많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비단 후에 학살의 희생자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후에 학살과 마찬가지로 <타임>과 <뉴스위크> 등의 미국 언론들은 구정 공세 당시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를 전부 다 베트콩의 책임으로 전가했다. 예를들어 <뉴스위크>는 '베트콩의 공포의 한 주'라는 1968년 2월 12일자 제목의 기사에서 "베트콩 테러리스트 일당이 사이공의 민간인을 처형했다."고 설명했지만, 언론들은 "인구밀집지역에 폭탄과 총탄을 퍼붓고 무차별적인 교차사격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안전을 위해 도시로 탈출한 집 없는 난민의 수를 두 배로 증가시킨 것"을 전 부다 베트콩의 탓으로 돌렸다. 미국이 학살하고 파괴한 결과를 놓고 오히려 베트콩을 비난하는 미국 정부의 선전방침을 액면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남베트남군과 자경단의 보복 학살

결론

후에 전투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한 처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증거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한 후에에서의 학살은 그 숫자가 심각하게 미국과 남베트남에 의해서 과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자행한 처형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는 앞으로도 조사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후에 전투 당시 대부분의 민간인 희생자는 도시의 3/4를 파괴한 미군의 융단 폭격과 함포사격을 포함한 막강한 화력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희생이 상당 부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한 학살로 여론조작되고 둔갑됐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과 과거 여순항쟁 시기 좌익들의 테러가 어떻게 과장이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았을 때, 후에 학살 또한 좌익이 저지른 것은 심각하게 과장됐고 여론조작됐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상조사를 하게되면 오히려 더 불리해질 주체는 제국주의 세력이지, 반공주의자들이 희망사항으로 바라고 있는 잔혹한 공산당이 아니다.

참고문헌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학살론을 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가?

Little Evidence of 1968 Tet Massacre in Hue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허만, 임채정(역), 『미국 대외정책론』, 일월서각, 1985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역),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허만, 정경옥(역),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조셉 커민스, 김지원(역), 『전쟁 연대기 II』, 니케북스, 2013

Marilyn B. Young, 『The Vietnam Wars 1945-1990』, Harper Prennial, 1991

Gabriel Kolko, 『Anatomy of a War』, The New Press, 1994

Nick Turse, 『Kill Anything That Moves』, PICADOR,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