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아
이데아(그리스어: ιδέα) 또는 에이도스(그리스어: εἶδος)는 형태, 형식을 의미하는 말로, 개별 사물의 근저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불변자를 의미한다. 한자어로 원상(原像)[1], 형식(形式)[2], 이념(理念)[3] 등으로 번역되는데, 각 학자의 용법에 따라 다르게 칭해진다.
개요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대화편≫을 통해 전한다. 이데아론의 맹아로 여겨지는 대화편인 ≪라케스≫에서 소크라테스는 ‘개별 사물 모두에 내재해 있으면서 그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추론하고 이것을 이데아라고 칭한다.[4]
각각의 개체에는 각자의 이데아가 존재하는데 이때의 이데아는 특수자에 대한 보편자 또는 종에 대한 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즉, A의 이데아로서 A', B의 이데아로서 B'가 있다고 할 때, B'는 B의 이데아지만, 그것은 B의 보편자로 환원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참새, 독수리, 닭을 조류라고 묶을 때, 후자를 단순히 전자에 대한 이데아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5] 이데아는 단순한 유로 묶어지는 개념이 아니라, 개별 사물의 근저에 존재하는 그것의 본질자이며, 시종일관 자기 동일성을 갖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이데아는 객관적 관념론의 핵심으로, 모든 객관적 관념론 세계관에 강력한 영향력을 남겼다.
근대 변증법의 창시자인 헤겔 역시 형이상학적 불변자로서 절대이념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는 ≪논리의 학≫ 서론에서 절대이념의 원환적 복귀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원환적”이라 함은 외화를 통해 복귀를 해도 풍부해지지 않으며, 그것 그대로 복귀함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헤겔에게서 절대이념 역시 마찬가지로 플라톤적 의미에서의 이데아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파이돈≫
≪파이돈≫에서 이데아는 역시 특정한 개별자에 대한 보편자와 이질적인 것으로 다루어지며, 오히려 개별자라는 범주와 보편자라는 범주 내에서 각각 이데아론이 전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아름다움, 좋음, 올바름, 크기, 경건함 등의 이데아를 언급하는데, 대표적으로 크기에 대해 말할 때, 누군가는 어떠한 것이 크지 않은 것으로, 누군가에게는 어떠한 것이 큰 것으로 보일 수 있음을 언급하며, 경험은 이데아를 인식하는 데 적합하지 않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6]
수학적 지식이 갖는 확실성과 이데아는 ≪파이돈≫에서 구분된다. 예를 들어, 평면기하학에서 정삼각형의 세 각이 60도로 동일하면서, 합이 180도라는 것은, 확실한 지식인 것 같지만, 어떠한 세 각의 합이 180도라는 결론을 내림에 있어서 전제되는 ‘선분’, ‘각’ 등은 감각적 지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유형의 지식은 아니므로, 이데아라고 할 수 없다.[7] 따라서 수학적 지식 역시 완전한 지식이 아님을 강조한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논함에서, 그것이 어떠한 감각적으로 연상되는 것과는 조금도 혼재되지 않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수학적 지식은 이데아가 아닌, 그것과 현상자(eikona)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자로 규정된다.[8]
플라톤은 이데아는 모두에게 관여되어 있는 영혼에 내재해 있는 것이며, 인간이 이데아를 알 수 있는 이유는, 육체와는 질적으로 다른 영혼의 조각이 인간에게 깃들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영혼에 대한 문제는 ≪티마이오스≫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난다.
≪티마이오스≫
≪티마이오스≫에서는 비로소 이데아의 영역인 영(nous)과 영이 머무는 혼(psyche)의 구분이 이루어진다. 혼은 육체에 머물게 되는데, 이러한 점에서 혼은 영과 육을 잇는 매개자 역할을 한다.[9] 플라톤은 여기서 고유한 변증법적 사상을 내비치는데, 바로 혼은 영에서 육으로의 하강이자, 육에서 영으로의 상승이라는 하강과 상승의 운동의 총괄이라는 것이다. 중간자는 영에 근접한 개별 혼을 말한다. 플라톤은 이를 ‘세계영혼’이라고 칭하고 세계영혼이 수학적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세계영혼은 영 그 자체는 아니다.
선(善)의 이데아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망라하여, 모든 것에 관여된 이데아, 이데아의 이데아인 선(善)의 이데아를 말한다. 선의 이데아는 ‘좋음’의 이데아인데, 플라톤은 모든 개별 사물은 그것에 대한 좋고 나쁨이 항상 따라다닌다는 점에서, 바로 이 ‘좋음’과 ‘나쁨’이 모든 사물에 내재해 있는 보편적 이데아임을 주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사과의 이데아와 강아지의 이데아, 그리고 좋음의 이데아가 있다고 했을 때, “사과(의) 강아지”라는 논제는 성립되지 않지만, “좋음(의) 사과”(“좋은 사과”) 또는 “좋음(의) 강아지”(“좋은 강아지”)라는 논제는 항상 성립된다. 좋고 나쁨은 모든 개별 사물에 적용되며, 결국 좋음의 이데아, 즉 선의 이데아가 모든 이데아에 관여하는 이데아로서 최고의 이데아, 곧 신이라는 논리를 전개한다.
나쁨은 그저 선의 결핍으로 이해되며, ‘나쁨의 이데아’는 언급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이데아는 ‘에이도스’(εἶδος, eidos)라고 불리는데, 이는 오늘날 형상(形像), 형식(形式) 등으로 번역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로지 이데아만이 실재일 수 있다는 플라톤의 주장을 비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재를 가능적인 실체로서의 실재와 현실적인 실체로서의 실재로 나눈다. 여기서 가능적인 실체란 가능태, 즉 어떠한 완전현실태로 나아갈 수 있는 질료이며, 그와 반대로 형상은 그러한 가능적인 것이 목적으로 지니는 현실태이다. 그는 사물을 에이도스(또는 이데아)와 질료(ύλη, hyle)의 결합물로 간주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 개념에는 형식이라는 틀에 질료라는 현상자의 결합이라는 규정이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다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도 순수형상이 우월한, 상위의 실재, 즉 현실태로서의 실재임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 개념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불변자이며, 순수형상은 에이도스 자체의 질적 변화가 아니라, 에이도스에서 질료가 떨어져나간 것으로 간주된다.
서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 개념이 지배적인 실재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된 시기는 13세기 이후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신학의 융성기와 겹친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과 ≪영혼에 관한 문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 개념을 차용하였다.
기타
- 이데아와 유사한 사고는 아시아에도 존재한다. 주자학에서의 리(理) 개념은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과 흡사하다. 단, 완전히 정적인 불변자인 이데아와 달리, 주자학에서의 리는 만물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운동과 함께 그것의 동일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각주
- ↑ 현상학 계통에서 이데아는 에드문드 후설의 영향에 따라 원상으로 번역된다.
-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를 당대 '형식'이라는 일반적 뜻을 지닌 에이도스라고 칭하였다. 이데아에 대한 이러한 용법은 서양철학에서 이마누엘 칸트로까지 올라가게 된다.
- ↑ 헤겔은 칸트적 의미에서의 형식과 이데아로서의 개념, 즉 객관적 개념인 이념을 구분하였다. 헤겔에게서 이데아는 후자에 속하며, 전자는 절대이념의 특정한 외화 단계에서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으로 된다.
- ↑ 라케스, 191e10.
- ↑ 라케스에서 플라톤은 개별자에 대한 보편자를 이데아와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 (라케스, 192b10-193b10.)
- ↑ 파이돈, 74d9-75b1.
- ↑ 플라톤은 직선을 말할 때, 곧은 선을 감각적으로 상상해내는 일이 없이는 실제로 수학적으로 사용될 수도, 끌어내어질 수도 없다고 보았다. 이는 선분 일반, 각 등도 마찬가지이다. 플라톤에게 있어 완전한 지식은 어떠한 감각적인 상상이나 가시적인 모형의 요소가 완전히 배제된 것이다.
- ↑ 파이돈, 74c1.
- ↑ 티마이오스, 30a6-30b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