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주의의 기초/방법

좌파도서관
Karl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23일 (일) 03:48 판


레닌주의의 기초
II. 방법

위에서 맑스, 엥겔스로부터 레닌에 이르는 사이에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가 온전히 지배한 시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기회주의가 형식적으로 지배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지배한 시기이다. 형식적으로는, 제2인터내셔널은 ‘충성스러운’ 맑스주의자들과 ‘정통파’−카우츠키 등에 의해 지도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 활동은 기회주의 노선을 추종했다. 기회주의자들은 그들의 순응적인 쁘띠부르주아적 속성 때문에 스스로 부르주아지에 순응했다. ‘정통파’는 또한 ‘당내 평화’를 위하고 기회주의자들과 ‘연합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순응했다. 따라서 부르주아지의 정책과 ‘정통’의 정책 간의 연계는 긴밀해졌고 그 결과로 기회주의는 유례없이 위세를 떨쳤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가 비교적 평화롭게 발전하던 시기였다. 말하자면 전쟁 이전(以前) 시기로 제국주의의 파국적 제 모순이 아직 낱낱이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경제적 파업과 노동조합은 다소간 “정상적으로” 발전하였다. 선거투쟁과 국회의원단은 “현기증 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투쟁의 합법적 형태가 찬미되었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합법적인 수단으로 “죽이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한마디로 말해 제2 인터내셔널은 편하게 살고 있었다. 혁명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혁명적 대중교육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완전한 혁명이론 대신에 모순된 가설과 단편적 이론이 있었고, 그것은 대중들의 실제적 혁명투쟁으로부터 유리되어 진부한 도그마로 변질되었다. 물론 체면치례로 맑스의 이론이 언급되었지만, 그것은 맑스의 이론으로부터 그것의 생생한 혁명적 정신을 박탈한 것이었을 뿐이다.


혁명적 정책 대신에, 무기력한 속물근성과 정치적 타협, 의회주의적 외교술과 의회주의적 음모가 있었다. 물론 체면치례로 ‘혁명적’ 결의안과 슬로건이 채택되었으나 서류함에 처박혀 묵살되어 버렸을 뿐이다.


당이 자신의 오류를 논거로 하여 정확한 혁명적 전술을 훈련받고 교육받는 대신에, 그럴싸하게 꾸며지거나 베일에 가려져 있던 난처한 문제들을 고의적으로 회피하고 있었다. 물론 외관상 논쟁중인 문제를 토론하는 것에 대한 반대는 없었지만 그것은 일종의 ‘유연한’ 결의로 매듭짓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제2 인터내셔널의 진면목이고 활동 방식이며 무기들이었다.


이런 가운데 제국주의 전쟁과 노동계급이 혁명적으로 전투해야 할 새로운 시기가 다가왔다. 낡은 투쟁 방법은 금융자본의 무한권력과 투쟁하기에는 적당하지 않고 무기력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제2 인터내셔널의 활동 전체와 사업 방식 전반을 재검토하고 속물적 우유부단, 편협성, 권모술수, 변절, 사회쇼비니즘과 사회평화주의를 몰아내는 것이 필요하였다. 제2 인터내셔널의 무기들을 모두 점검하여 녹쓸고 낡은 것은 모조리 버리고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내야 했다. 사전준비 없이 자본주의와의 전쟁에 나선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모한 짓이다. 사전준비 없이는 새로운 혁명전투에 직면해서 노동계급이 무장력의 부족을 느끼거나 심지어 완전히 무장해제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제2 인터내셔널의 아우게이아스 마구간을 전반적으로 정비하고 청소한 영광은 레닌주의에 돌아갔다.


이러한 환경에서 레닌주의의 방법이 생겨나고 단련되었다.


레닌주의 방법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제2인터내셔널의 이론적 도그마를 대중들의 혁명적 투쟁과 생생한 실천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검증하는 것−말하자면 이론과 실천 간의 손상된 통일을 회복시키는 것과 그것들 사이의 균열을 해소시키는 것, 왜냐하면 오직 이러한 방법으로써만 혁명이론으로 무장된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건설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제2 인터내셔널 정당의 정책을 믿을 수 없는 슬로건이나 결의안이 아니라 활동과 활동의 결과에 근거해서 검증하는 것이다. 정책은 활동과 그 결과에 근거해야만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신뢰를 얻을 수 있으며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 모든 당 사업을 대중이 혁명을 준비하고 훈련하도록 하는 새로운 혁명적인 방침으로 재조직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대중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프롤레타리아 당들이 내부로부터 자기비판을 하는 것이다. 즉 자체의 과오를 교훈으로 삼아 훈련 교육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당의 참된 간부와 참된 지도자를 육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레닌주의 방법의 기본이며 본질이다.


이 방법이 실제 문제에 어떻게 적용되었을까?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들이 항상 이론적 출발점으로 삼는 많은 이론적 도그마가 있다. 그중 몇 개를 살펴보자.


첫번째 도그마: 프롤레타리아트 권력획득조건과 관련하여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국가 내에서 다수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권력을 잡을 수 없고 또 잡아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 터무니없는 명제는 이론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없으므로 아무런 증거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치고,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의 신사양반들에게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그런데 주민의 소수를 차지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근로대중의 광범한 다수를 자신의 주위에 결집시키는 기회를 갖게 되는 역사적 상황이 발생(전쟁⋅농업공황)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경우에 왜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아서는 안 되는가? 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의 정면을 돌파하고 종말을 앞당기기 위해 국내외적인 유리한 상황을 활용해서는 안 되는가? 마르크스는 지난 세기의 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독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뒷받침할 수 있는, 말하자면 "제2차 농민전쟁"[1]이 가능하다면 "훌륭하게" 진행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 당시 독일의 프롤레타리아의 수가 예컨대 1917년 러시아보다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실제 경험은 제2 인터내셔널의 영웅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 도그마가 프롤레타리아에게 중요한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대중의 혁명적 투쟁의 실천적 경험이 이 쓸모없는 도그마를 반박하고 분쇄한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두 번째 도그마: 만일 국가 행정을 조직할 수 있는 적절한 수의 훈련된 문화적 행정적 간부가 부족하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장악할 수 없고, 먼저 자본주의 조건 아래에서 훈련을 받아야 하며, 그 후에만 권력을 잡을 수 있다. 레닌은 응수한다: 그런데 왜 순서를 바꾸면 안 되는가? 즉 먼저 권력을 잡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에 유리한 조건을 창출하고 그런 연후에 7리그의 걸음걸이로 나아가 근로대중의 문화적 수준을 향상시키고 노동자들 가운데에서 지도자와 행정가와 같은 수많은 간부를 훈련시키면 안 되는가? 러시아의 경험은 노동자층으로부터 뽑힌 지도간부들이 자본의 지배 아래에서보다 프롤레타리아의 지배 아래에서 백배 더 신속하게 또한 효과적으로 계발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분명히 대중들의 혁명투쟁의 실제적 경험은 기회주의자들의 이러한 이론적 도그마 또한 가치 없이 타파하고 있지 않은가?


세 번째 도그마: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총파업이라는 방법을 택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론적으로 불건전하고(엥겔스의 비판을 보라) 실천적으로 위험하며(그것은 국가의 정상적인 경제생활과정을 교란시킬지도 모르고, 노동조합의 재원을 고갈시킬지도 모른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의 주요형태인 의회주의적 투쟁형태의 대안으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좋다. 레닌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그런데 첫째로, 엥겔스는 모든 류의 총파업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직 총파업의 특정 종류, 즉 무정부주의자[2]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투쟁 대신에 주장하던 경제적 총파업을 비판했다. 이것이 정치적 총파업 방식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둘째로, 의회투쟁의 형태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요한 투쟁형태라는 것은 어디서, 누구에 의해 증명된 적이라도 있었던가? 혁명운동사도 의회투쟁이 단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회외적인 투쟁을 조직화하기 위한 학교이자 보조수단이며, 자본주의하에서 노동계급운동의 근본문제는 힘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직접적 투쟁과 총파업, 그들의 봉기에 의해서 해결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셋째로, 정치적 총파업 방식이 의회투쟁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누가 제안했던가? 언제 어디서 정치적 총파업의 지지자들이 의회적 형태를 의회외적 투쟁형태로 대체하려고 했던가? 넷째, 러시아의 혁명은 정치적 총파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극히 중요한 학교이자 자본주의의 아성을 공격하는 전야에 프롤레타리아트의 광범위한 대중을 동원하고 조직하는 불가결한 수단이라는 점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속물들은 정상적 경제생활과정의 교란이나 노동조합재원에 대해 비탄해마지 않는가? 분명히 혁명투쟁의 실제적 경험은 기회주의자들의 이러한 도그마마저 박살내고 있지 않은가?


등등..


레닌이 "혁명 이론은 교리가 아니다"라고 말한 이유, "진정한 대중적이고 진정한 혁명적 운동의 실천 활동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만 최종적인 형태를 취한다"[3], "이론은 실천에 봉사해야 한다"[4], "실천이 제기하는 질문에 이론은 반드시 대답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 실천의 결과에 의해 검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2 인터내셔널 정당의 정치적 구호와 정치적 결의에 관해서는, 화려한 혁명적 구호와 결의를 사용하여 반혁명적 행위를 은폐하는 이들 정당의 정치적 관행이 얼마나 완전히 거짓이고 완전히 부패했는지 깨닫기 위해 "전쟁 반대"라는 슬로건의 역사를 회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 모두는 바젤 대회[5]에서 제2 인터내셔널의 화려한 시위를 기억한다. 제국주의자가 감히 전쟁을 시작해야한다면 반란의 모든 공포와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이라는 위협적인 구호로 제국주의자를 위협했다. 그러나 얼마 후 전쟁 직전에 바젤 결의안이 비둘기처럼 사라지고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 조국의 영광을 위해 서로를 몰살시키자는 새로운 구호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혁명적 구호와 결의는 행동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한 한 푼의 가치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기회주의적 정치가들의 지독한 천박성과 레닌주의의 방법이 지닌 완벽한 위대성을 이해하려면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시킨 레닌주의 정책을 전쟁기간 동안의 ‘제2인터내셔널’이 취한 변절적 정책과 대조해 보기만 해도 된다.


이 시점에서 레닌의 저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의 한 구절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는데,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 카를 카우츠키가 정당을 행동이 아닌 종이 슬로건과 문서로 판단하려는 기회주의적 시도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카우츠키는 슬로건을 내세우면 입장이 바뀌는 것처럼 가장함으로써 전형적인 쁘띠부르주아적이고 속물적인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전체 역사는 이러한 환상을 반박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항상 국민을 속이기 위해 온갖 종류의 '슬로건'을 발전시켜 왔고 지금도 발전시키고 있다. 요점은 그들의 진정성을 시험하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비교하고, 이상주의적이거나 허황된 문구에 만족하지 않고 계급 현실로 내려가는 것이다."(제23권, 377쪽 참조).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이 자기비판에 대한 두려움, 실수를 감추고, 성가신 질문을 덮어버리고, 기만적인 잘난 척으로 자신의 단점을 은폐하는 습관, 살아있는 사고를 무디게 하고 당이 자신의 실수로부터 혁명적 훈련을 이끌어내는 것을 막는 습관, 레닌이 조롱하고 비웃었던 습관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레닌은 "좌익" 공산주의라는 팸플릿에서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자기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정당이 자신의 실수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정당이 얼마나 진지한지, 그리고 실제로 계급과 투쟁하는 대중에 대한 의무를 어떻게 이행하는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방법 중 하나이다.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원인을 규명하고, 그 실수를 초래한 상황을 분석하고, 그 실수를 바로잡는 수단을 철저히 논의하는 것, 그것이 진지한 정당의 의무이며, 그것이 의무를 수행하는 방식이며, 계급과 대중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방식이다"(제25권, 200면 참조)


어떤 사람은 당이 자신의 오류를 드러내고 자기비판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당에 대항하는 적에 의해 이용될지도 모르므로 당에 위험하다고 말한다. 레닌은 그런 주장은 사소하고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 당이 아직 유약하고 소규모였던 1904년 이미 레닌은 그의 팜플렛 「일보전진, 이보후퇴」에서 이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물론 그들[6]은 우리 당의 약점과 결점을 다룬 나의 팜플렛으로부터, 고립된 구절들을 뽑아내어 이를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 애쓸 것이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 성가신 것들에 동요되지 않을 만큼, 그리고 그런 것들에 아랑곳없이 자기비판작업과 또 노동계급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의심의 여지없이 필연적으로 극복되어질 그들 자신의 결점에 대해 가차 없는 폭로작업을 계속할 만큼 이미 전투 속에서 충분히 단련되어 있다.


이러한 것은 일반적으로 레닌주의 방법의 특징이다.


레닌의 방법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맑스 자신에 따르자면 ‘본질적으로 비판적이고 혁명적’[7]인 맑스의 교의에 이미 주요한 점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레닌의 방법에 시종일관 가득 차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정신이다. 그러나 레닌의 방법이 단순히 맑스의 방법의 복원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실 레닌의 방법은 단지 복원일 뿐 아니라 맑스의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방법, 즉 유물변증법의 구체화이자 가일층의 발전이기도 하다.


  1. 이는 카를 맑스가 1856년 4월 16일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진술을 언급한 내용이다.(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Selected Works, Vol. II, Moscow 1951, p. 412 참조.).
  2.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글 "바쿠닌주의자들의 활동"을 참조하라.(F. 엥겔스, "Die Bakunisten an der Arbeit", Der Volksstaat, 105, 106, 107호, 1873년 참조).
  3. V.I.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Works, 4th Russ. ed., Vol. 31, p. 9 참조).
  4. V.I. 레닌, 인민의 벗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어떻게 싸우는가(Works, 4th Russ. ed., Vol. 1, pp. 278-79 참조).
  5. 제2 인터내셔널의 국제 바젤 회의는 1912년 11월 24~25일에 개최되었다. 발칸 전쟁과 세계 대전의 임박한 위협과 관련하여 소집되었으며, 국제 정세와 전쟁에 대한 공동 대응이라는 단 한 가지 문제만 논의되었다. 이 대회는 노동자들에게 프롤레타리아 조직과 힘을 활용하여 전쟁의 위험에 맞서 혁명적 투쟁을 벌이고 "전쟁에 대한 전쟁"을 선포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6. 맑스주의의 반대자들 -- 필자의 주
  7. 카를 맑스, 『자본』 제1권 독일어판 서문을 보라(카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선집』 제1권, 모스크바 1951년, 4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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