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주의의 기초/이론(1):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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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분류:레닌주의의 기초 {{책자 |번호 = 6 |배경색 = #cd0000 |글씨색 = #ffd900 |제목 = 레닌주의의 기초 |장 이름 = III. 이론(1) |이전 장 = 레닌주의의 기초/방법 |다음 장 = 레닌주의의 기초/이론(2) |내용 = 이 주제에서 나는 세 가지 질문을 받는다. a)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대한 이론의 중요성; b) 자생성 이론에 대한 비판; c)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 '''1) 이론의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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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대한 이론의 중요성;
) 프롤레타리아 운동에서의 이론의 중요성


b) 자생성 이론에 대한 비판;
) 자연생장성 “이론”에 대한 비판


c)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
) 프롤레타리아 혁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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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레닌주의의 중요한 요지가 맑스주의의 명제를 행동으로, 그것을 ‘실행’으로 옮긴 것이라는 의미에서 레닌주의가 이론보다 실천을 우위에 둔다고 생각한다. 이론에 관한 한, 레닌주의는 다소 그것에 무관심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플레하노프가 이론, 특히 철학에 관해 레닌이 ‘무관심’하다고 여러 번 비웃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의 많은 레닌주의적인 실천적 노동자들이, 특히 상황이 그들에게 부과하는 막대한 양의 실천적 작업 때문에 이론에 커다란 호의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나는 레닌과 레닌주의에 대한 이러한 매우 기묘한 의견이 대단히 잘못된 것이고 진실에 대해 전혀 어떤 관계도 없다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실천적 노동자들이 이론을 무시하려는 시도는 레닌주의의 전체 정신에 반하며 사업에 심각한 위험으로 가득차 있음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레닌주의는 이론보다 실천을 우위에 둔다고 생각한다. 즉 레닌주의의 중요한 의미는 맑스주의 명제를 행동으로 옮기며 그 명제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한다. 레닌주의가 이론에 무관심하다는 주장이다. 알다시피 쁠레하노프는 레닌이 이론, 특히 철학에 “무관심”하다고 여러 번 조롱한 바 있다. 또 오늘날 레닌주의자인 많은 활동가들이 정세가 요구하는 방대한 실천적 임무 때문에 이론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레닌과 레닌주의가 이론을 무시한다는 괴상한 의견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고 사실과도 전혀 맞지 않다. 또 활동가들이 이론을 무시하려는 경향은 레닌주의의 정신에 전적으로 반하는 것이며 사업을 매우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이론은 모든 나라에서 노동계급 운동의 경험을 일반적인 측면에서 취한 것이다. 물론 실천의 길이 혁명이론에 의해 조명되지 않았을 경우 실천이 어둠 속을 헤매게 되듯이, 이론이 혁명적 실천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면 이론은 목적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이론이 혁명적 실천과 불가분의 연관 위에서 단련된다면 그것은 노동계급운동에서 거대한 힘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론, 그리고 이론만이 운동에 확신을, 방침을 결정할 힘을, 그리고 주위의 사건의 내적 연관에 대한 이해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론, 단지 이론만이 실천을 도와 현재 제계급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가뿐만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그들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가를 역력히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레닌 말고는 이 잘 알려진 논제를 수없이 반복해서 말한 사람은 없다:
이론이란 모든 나라의 노동운동 경험을 일반화한 것이다. 혁명 실천 없는 이론은 공허하고, 혁명 이론 없는 실천은 맹목적이다. 이론을 혁명적 실천과의 밀접한 연결 위에 세울 때 이론은 노동운동의 거대한 힘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론, 오직 이론을 통해서만 운동을 확신할 수 있으며 방침을 결정할 수 있고 주위 사물의 내적 연관 속에서 운동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론, 오직 이론을 통해서만 오늘날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제 계급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디로 향해 가는지를 깨달아 실천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레닌만큼 다음의 유명한 명제를 셀 수 없이 말하고 되풀이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용문|혁명 이론 없이는 혁명 운동도 있을 수 없다.<ref>강조추가 -- '''필자의 주'''</ref>(≪레닌 저작집≫ 제4권, p. 390을 보라.)<ref>V. I.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레닌 저작선≫), 홍승기 편역, 거름, p. 145.</ref>)}}


{{인용문|혁명적 이론 없이는 혁명적 운동도 있을 수 없다.<ref>강조 추가 --'''필자의 주'''</ref>(Vol. IV, p. 380를 보라.)}}


레닌은 누구보다도 이론의 막중한 의의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당이 수행하게 된 국제 노동계급의 전위투사의 역할에 비추어 볼 때, 또 우리 당을 둘러싼 국내외 정세의 복잡성에 비추어 볼 때 이론은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레닌은 일찍이 1902년에 우리 당의 이 특수한 역할을 예견하고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할 필요를 절감했다.


레닌은 특히 우리 당과 같은 당이 몰락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선봉투수라는 점과 당이 처한 복잡한 국내외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이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그는 일찍이 1902년에 우리 당의 이러한 특수한 역할을 예견하면서 다음을 지적하는 것이 그 당시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인용문|가장 선진적인 이론에 의해 지도되는 당만이 전위투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레닌 저작집≫ 제4권, p. 380을 보라.)<ref>같은 책, p. 146.</ref>}}




{{인용문|가장 선진적인 이론에 의해 지도되는 당만이 전위투사의 역할을 완수할 수 있다.(Vol. IV, p. 380를 보라.)}}
우리 당의 역할에 대한 레닌의 예언이 이미 실현된 지금, 별도의 증명은 필요 없이 레닌의 이 명제는 각별한 힘과 중요성을 갖는다.




우리 당의 역할에 대한 레닌의 예측이 실현된 지금, 레닌의 이 테제가 특별한 힘과 특별한 중요성을 획득했다는 증거는 거의 필요하지 않다.
레닌이 이론에 부여한 커다란 중요성을 가장 명백히 보여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오직 레닌만이 엥겔스로부터 레닌에 이르는 시기에 이룩한 가장 중요한 과학적 성과를 유물론 철학에 기초하여 일반화하고 맑스주의자들 내부의 반유물론적 조류들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엥겔스는 “자연과학 영역에서 획기적인 발견이 있을 때마다 유물론은 그 형태를 바꾸어야만 한다”<ref> F.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고전철학의 종말≫(≪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제6권), 박종철출판사, p. 258.</ref>고 말하였다.




레닌이 이론에 부여했던 커다란 중요성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내 주는 것은 아마도 레닌 외에는 어떤 사람도 맑스주의자들 사이의 반유물론적 경향에 대해 포괄적인 비판을 가하는 것뿐 아니라 엥겔스의 시대로부터 그 자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의 가장 중요한 성과를 유물론적 철학을 기초로 하여 일반화시키는 매우 중요한 과제를 떠맡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엥겔스는 "유물론은 새로운 위대한 발견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측면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ref>프리드리히 엥겔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카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선집, 2권, 모스크바 1951, 338쪽 참조).</ref> 레닌이 자신의 시대에 이 작업을 수행한 것은 그의 놀라운 저작 『유물론과 경험론 비판』에서 잘 알려져 있다.<ref> V.I. 레닌, 작품집, 4차 러시아판, 14권 참조 </ref> 레닌이 철학에 '무관심하다'고 비난하기를 좋아했던 플레하노프는 그러한 작업을 감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모두 알다시피 바로 레닌이 이러한 시대적 과업을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라는 걸작을 통해 수행하였다. 그리고 철학에 “무관심”하다고 레닌을 조롱하곤 했던 플레하노프는 그러한 과업을 진지하게 책임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2) 자생성의 ‘이론’에 대한 비판. 또는 운동에서 전위의 역할'''
'''2) 자연생장성 “이론”에 대한 비판, 또는 운동에서의 전위의 역할'''




자생성의 ‘이론’은 기회주의 이론이자 노동운동의 자생성을 숭배하는 이론이며 노동계급 전위, 노동계급의 당의 지도적 역할을 실질적으로 거부하는 이론이다.
자생성 “이론”은 기회주의 이론이다. 노동운동에 있어 자생성을 숭배하는 이론이다. 노동계급의 전위, 즉 노동계급당의 지도적 역할을 사실상 부정하는 이론이다.




자생성을 숭배하는 이론은 노동계급 운동의 혁명적 성격에 결정적으로 대립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토대에 대항하는 투쟁 노선을 추구하는 운동과는 상반되며, 오로지 자본주의에서 ‘허용될 있는’ 요구, ‘실현가능한’ 요구의 노선을 따라 진행되는 운동에 지지를 보낸다. 그것은 ‘최소저항 노선’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자생성의 이론은 노동조합주의 이데올로기이다.
자생성을 숭배하는 이론은 노동운동의 혁명적 성격에 매우 적대적이며 자본주의의 토대에 대항하는 투쟁노선에 반대한다. 단지 자본주의에서 “실현될 수 있고” “용납될 있는” 요구들만 제기하는 운동을 선호한다. “최소 저항선”을 전적으로 찬성하는 것이다. 즉 자생성 이론은 노동조합주의 사상이다.




자생성을 숭배하는 이론은 자생적인 운동에 정치적으로 의식적 계획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에 결정적으로 반대한다. 그것은 당이 노동계급의 선두에 서서 나아가는 것에, 당이 대중들을 정치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에, 당이 운동을 지도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것은 운동이 그 자신의 경로를 취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운동이 지니는 정치의식적인 요소에 찬성을 보낸다. 그것은 당이 다만 자생적 운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의 꽁무니를 질질 끌려 다니는 것에 찬성한다. 자생성의 이론은 운동에서 의식적 요소가 갖는 역할을 경시하는 이론이자 ‘대중추수주의’사상이며 모든 기회주의의 논리적 토대이다.
자생성을 숭배하는 이론은 자생적 운동에 의식적, 계획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을 단호히 반대한다. 당이 노동계급의 선두에 서서 나가는 것을 반대한다. 당이 대중을 의식적 계급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반대한다. 운동에 있어 당의 지도를 반대하는 것이다. 자생성 이론은 운동이 스스로 가는 길을 방해하지 않는 정치의식만은 찬성한다. 당이 자생적 운동에 순응하여 뒤꽁무니만 따라다닐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자생성 이론은 운동에서 의식적 요소의 역할을 무시하는 이론이며 “추수주의” 사상이며 온갖 기회주의의 논리적 기반이다.




실제로 제1차 러시아 혁명 이전에 이미 무대에 등장했던 이론은 소위 ‘경제주의자’라 불리워진 그 이론의 신봉자들로 하여금 러시아에서 독립적인 노동자당의 필요성을 부인하고, 차르의 타도를 위한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에 반대하고, 운동에 있어서 순전히 노동조합주의적인 정책을 설교하고, 또 일반적으로 노동운동을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에 내맡겨 버리도록 이끌었다.
자생성 이론은 러시아 1차 혁명 이전에 이미 무대에 나타났다. 이론의 추종자들인 소위 “경제주의자”들은 러시아에서 독자적인 노동자 정당의 필요성을 부정하며 짜르 제도를 전복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반대하였다. 운동에서 노동조합주의 정책을 설교하며 노동운동을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에 완전히 내맡겼다.




옛 이스크라의 투쟁과 레닌의 팸플릿 『무엇을 것인가』에서 "대중추수주의" 이론에 대한 빛나는 비판은 이른바 '경제주의'를 분쇄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노동계급의 진정한 혁명적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  
레닌은 구“이스크라”의 투쟁을 통해 그리고 ≪무엇을 것인가?≫에서 행한 “추수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통해 “경제주의”를 격파하고 러시아 노동계급의 참다운 혁명운동에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투쟁이 없었다면 러시아에서 독립적인 노동자당을 창당하고 혁명의 주역이 되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레닌의 이런 투쟁이 없었다면 러시아에서 독자적인 노동자 정당의 창건이나 혁명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발성을 숭배하는 이론은 러시아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예외없이 제2 인터내셔널의 모든 정당에 다소 다른 형태로 매우 널리 퍼져 있다. 나는 ‘제2 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에 의해 변조된 소위 ‘생산력’ 이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그것은 만사를 정당화시키고 모든 사람을 회유하며, 사람들이 신물이 나서 싫증을 내게 된 후에야 사실을 기록하거나 설명하고, 그것들을 기록하고 나서는 만족해 버린다. 맑스는 유물론은 세계를 설명하는 것에 머무를 수 없으며 세계를 변혁시켜야 한다고 말했다.<ref> 카를 맑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프리드리히 엥겔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고전 독일 철학의 종말, 부록 참조).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Selected Works, Vol. II, Moscow 1951.)</ref> 그러나 카우츠키 일파는 이것에 유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맑스의 정식 첫 부분에 만족한 있고 싶어한다.
그런데 자생성을 숭배하는 이론은 러시아만의 현상은 아니다. 제2 인터내셔널의 모든 정당에 형태를 조금씩 달리하여 예외 없이 펴져 있다. 제2 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이 소위 “생산력” 이론을 비속화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옳다고 하고 모든 사람들을 온순하게 길들인다. 어떤 사실에 대해 사람들이 진저리가 나 지친 이후에나 그 사실 정황을 확인하고 설명한다. 그것도 사실을 확인만 하고는 만사대길이다. 맑스는 “유물론은 세계를 설명하는 데 그칠 수 없으며 세계를 변혁시켜야 한다”<ref>K. 맑스, “포이에프바하에 관한 테제”, ≪독일 이데올로기 1≫, 김대웅 역, 두레, p. 41.</ref>고 말했다. 그러나 카우츠키 일파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맑스의 정식화 첫 부분에 머문 만족한다.




다음은 "이론"의 적용에 대한 수많은 예시 중 하나이다. 제국주의 전쟁 전에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은 제국주의자들이 전쟁을 시작하면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전쟁 직전에 이 정당들은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 구호를 묵살하고, 반대 구호, 즉 "제국주의 조국을 위한 전쟁"을 적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구호 변경의 결과로 수백만 명의 노동자가 죽음으로 내몰렸다고 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노동자 계급에 불충실하거나 배신했다고 비난할만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모든 일은 당연히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었다. 첫째, 국제노총은 전쟁이 아닌 '평화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둘째, 당시 우세했던 "생산적인 힘의 수준"을 고려할 때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잘못’은 ‘생산력’에 있다. 이것이 카우츠키씨의 ‘생산력 이론’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정확한 설명이다. 그리고 그 ‘이론’을 믿지 않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맑스주의자가 아니게 된다. 당의 역할은? 운동에 있어 그것들의 중요성은? 그렇다면 ‘생산력의 수준’과 같은 결정적 요소 앞에서 당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생산력 “이론”을 적용한 숱한 예 가운데 하나를 들어보자. 제국주의 전쟁 전에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은 만일 제국주의자들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전쟁에는 전쟁으로”를 선언하겠다고 으른 적이 있다. 그런데 전쟁 바로 직전에 “전쟁에는 전쟁으로”라는 슬로건을 걷어치우고 “제국주의 조국을 위한 전쟁”이라는 정반대의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와 같이 슬로건을 바꾼 결과 수백만 노동자가 죽어 나갔다. 그러나 카우츠키 일파는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있다거나 누군가 노동계급에 충실하지 못했다거나 노동계급을 배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 당연히 일어날 대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인터내셔널은 전쟁의 도구가 아니라 “평화의 도구”이기 때문이고 둘째, 당시의 “생산력 수준”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비난받아야 할 것”은 “생산력”인 것이다. 이것이 카우츠키 선생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생산력 이론”의 정확한 의미이다. 누구든지 이 “이론”을 믿지 않는다면 맑스주의자가 아니다. 당의 역할이라고? 운동에서 당의 중요성이라고? 그러나 “생산력 수준”과 같은 결정적 요인 앞에서 당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맑스주의의 위조에 대한 유사한 사례는 무수히 많이 인용할 있다.
맑스주의를 이런 식으로 왜곡한 사례는 무수히 있을 것이다.




기회주의의 민낯을 감추기 위해 고안된 가짜 '맑스주의'가 레닌이 러시아 혁명 이전에도 싸웠던 '대중추수주의식'의 유럽식 변종에 불과하다는 증거는 거의 필요하지 않다.
사이비 맑스주의는 자신의 기회주의적 진면목을 숨기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 사이비 맑스주의는 레닌이 이미 제1차 러시아 혁명 이전에 반대하여 투쟁했던 “추수주의” 이론의 유럽식 변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애써 증명할 필요는 없다.




이론적 위조의 철폐가 서구에서 진정한 혁명적 정당이 탄생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는 증거는 거의 필요하지 않다.
당연히 이러한 이론적 왜곡을 타파하는 것이 서구에서 진정한 혁명적 당을 창건하는 선결 조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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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3일 (일) 22:33 기준 최신판


레닌주의의 기초
III. 이론
1절 ~ 2절

이 주제에서 세 가지 문제를 다루겠다.

ㄱ) 프롤레타리아 운동에서의 이론의 중요성

ㄴ) 자연생장성 “이론”에 대한 비판

ㄷ) 프롤레타리아 혁명론


1) 이론의 중요성


어떤 사람은 레닌주의는 이론보다 실천을 우위에 둔다고 생각한다. 즉 레닌주의의 중요한 의미는 맑스주의 명제를 행동으로 옮기며 그 명제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한다. 레닌주의가 이론에 무관심하다는 주장이다. 알다시피 쁠레하노프는 레닌이 이론, 특히 철학에 “무관심”하다고 여러 번 조롱한 바 있다. 또 오늘날 레닌주의자인 많은 활동가들이 정세가 요구하는 방대한 실천적 임무 때문에 이론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레닌과 레닌주의가 이론을 무시한다는 괴상한 의견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고 사실과도 전혀 맞지 않다. 또 활동가들이 이론을 무시하려는 경향은 레닌주의의 정신에 전적으로 반하는 것이며 사업을 매우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이론이란 모든 나라의 노동운동 경험을 일반화한 것이다. 혁명 실천 없는 이론은 공허하고, 혁명 이론 없는 실천은 맹목적이다. 이론을 혁명적 실천과의 밀접한 연결 위에 세울 때 이론은 노동운동의 거대한 힘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론, 오직 이론을 통해서만 운동을 확신할 수 있으며 방침을 결정할 수 있고 주위 사물의 내적 연관 속에서 운동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론, 오직 이론을 통해서만 오늘날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제 계급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디로 향해 가는지를 깨달아 실천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레닌만큼 다음의 유명한 명제를 셀 수 없이 말하고 되풀이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혁명 이론 없이는 혁명 운동도 있을 수 없다.[1](≪레닌 저작집≫ 제4권, p. 390을 보라.)[2])


레닌은 누구보다도 이론의 막중한 의의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당이 수행하게 된 국제 노동계급의 전위투사의 역할에 비추어 볼 때, 또 우리 당을 둘러싼 국내외 정세의 복잡성에 비추어 볼 때 이론은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레닌은 일찍이 1902년에 우리 당의 이 특수한 역할을 예견하고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할 필요를 절감했다.


가장 선진적인 이론에 의해 지도되는 당만이 전위투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레닌 저작집≫ 제4권, p. 380을 보라.)[3]


우리 당의 역할에 대한 레닌의 예언이 이미 실현된 지금, 별도의 증명은 필요 없이 레닌의 이 명제는 각별한 힘과 중요성을 갖는다.


레닌이 이론에 부여한 커다란 중요성을 가장 명백히 보여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오직 레닌만이 엥겔스로부터 레닌에 이르는 시기에 이룩한 가장 중요한 과학적 성과를 유물론 철학에 기초하여 일반화하고 맑스주의자들 내부의 반유물론적 조류들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엥겔스는 “자연과학 영역에서 획기적인 발견이 있을 때마다 유물론은 그 형태를 바꾸어야만 한다”[4]고 말하였다.


모두 알다시피 바로 레닌이 이러한 시대적 과업을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라는 걸작을 통해 수행하였다. 그리고 철학에 “무관심”하다고 레닌을 조롱하곤 했던 플레하노프는 그러한 과업을 진지하게 책임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2) 자연생장성 “이론”에 대한 비판, 또는 운동에서의 전위의 역할


자생성 “이론”은 기회주의 이론이다. 노동운동에 있어 자생성을 숭배하는 이론이다. 노동계급의 전위, 즉 노동계급당의 지도적 역할을 사실상 부정하는 이론이다.


자생성을 숭배하는 이론은 노동운동의 혁명적 성격에 매우 적대적이며 자본주의의 토대에 대항하는 투쟁노선에 반대한다. 단지 자본주의에서 “실현될 수 있고” “용납될 수 있는” 요구들만 제기하는 운동을 선호한다. “최소 저항선”을 전적으로 찬성하는 것이다. 즉 자생성 이론은 노동조합주의 사상이다.


자생성을 숭배하는 이론은 자생적 운동에 의식적, 계획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을 단호히 반대한다. 당이 노동계급의 선두에 서서 나가는 것을 반대한다. 당이 대중을 의식적 계급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반대한다. 운동에 있어 당의 지도를 반대하는 것이다. 자생성 이론은 운동이 스스로 가는 길을 방해하지 않는 정치의식만은 찬성한다. 당이 자생적 운동에 순응하여 뒤꽁무니만 따라다닐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자생성 이론은 운동에서 의식적 요소의 역할을 무시하는 이론이며 “추수주의” 사상이며 온갖 기회주의의 논리적 기반이다.


자생성 이론은 러시아 1차 혁명 이전에 이미 무대에 나타났다. 이 이론의 추종자들인 소위 “경제주의자”들은 러시아에서 독자적인 노동자 정당의 필요성을 부정하며 짜르 제도를 전복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반대하였다. 운동에서 노동조합주의 정책을 설교하며 노동운동을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에 완전히 내맡겼다.


레닌은 구“이스크라”의 투쟁을 통해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행한 “추수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통해 “경제주의”를 격파하고 러시아 노동계급의 참다운 혁명운동에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레닌의 이런 투쟁이 없었다면 러시아에서 독자적인 노동자 정당의 창건이나 혁명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생성을 숭배하는 이론은 러시아만의 현상은 아니다. 제2 인터내셔널의 모든 정당에 형태를 조금씩 달리하여 예외 없이 펴져 있다. 제2 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이 소위 “생산력” 이론을 비속화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옳다고 하고 모든 사람들을 온순하게 길들인다. 어떤 사실에 대해 사람들이 진저리가 나 지친 이후에나 그 사실 정황을 확인하고 설명한다. 그것도 사실을 확인만 하고는 만사대길이다. 맑스는 “유물론은 세계를 설명하는 데 그칠 수 없으며 세계를 변혁시켜야 한다”[5]고 말했다. 그러나 카우츠키 일파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맑스의 정식화 첫 부분에 머문 채 만족한다.


이 생산력 “이론”을 적용한 숱한 예 가운데 하나를 들어보자. 제국주의 전쟁 전에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은 만일 제국주의자들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전쟁에는 전쟁으로”를 선언하겠다고 으른 적이 있다. 그런데 전쟁 바로 직전에 “전쟁에는 전쟁으로”라는 슬로건을 걷어치우고 “제국주의 조국을 위한 전쟁”이라는 정반대의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와 같이 슬로건을 바꾼 결과 수백만 노동자가 죽어 나갔다. 그러나 카우츠키 일파는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있다거나 누군가 노동계급에 충실하지 못했다거나 노동계급을 배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 당연히 일어날 대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인터내셔널은 전쟁의 도구가 아니라 “평화의 도구”이기 때문이고 둘째, 당시의 “생산력 수준”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비난받아야 할 것”은 “생산력”인 것이다. 이것이 카우츠키 선생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생산력 이론”의 정확한 의미이다. 누구든지 이 “이론”을 믿지 않는다면 맑스주의자가 아니다. 당의 역할이라고? 운동에서 당의 중요성이라고? 그러나 “생산력 수준”과 같은 결정적 요인 앞에서 당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맑스주의를 이런 식으로 왜곡한 사례는 무수히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이비 맑스주의는 자신의 기회주의적 진면목을 숨기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 사이비 맑스주의는 레닌이 이미 제1차 러시아 혁명 이전에 반대하여 투쟁했던 “추수주의” 이론의 유럽식 변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애써 증명할 필요는 없다.


당연히 이러한 이론적 왜곡을 타파하는 것이 서구에서 진정한 혁명적 당을 창건하는 선결 조건이 된다.


  1. 강조추가 -- 필자의 주
  2. V. I.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레닌 저작선≫), 홍승기 편역, 거름, p. 145.
  3. 같은 책, p. 146.
  4. F.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고전철학의 종말≫(≪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제6권), 박종철출판사, p. 258.
  5. K. 맑스, “포이에프바하에 관한 테제”, ≪독일 이데올로기 1≫, 김대웅 역, 두레, p.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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