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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철은 1943년 고려대 오화섭 교수와 이화여대 박노경 교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여인소극장’이라는 극단의 대표였고 아버지는 진보적인 외국 희곡을 옮기는 영문학 교수였다. 한국전쟁 때 어머니는 | 오세철은 1943년 고려대 오화섭 교수와 이화여대 박노경 교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여인소극장’이라는 극단의 대표였고 아버지는 진보적인 외국 희곡을 옮기는 영문학 교수였다. 한국전쟁 때 어머니는 [[남로당]]의 일원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오세철은 그의 책 《다시, 혁명을 말한다》에서 “가족사는 지금의 나를 형성시키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 ||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61년 그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27세에 연세대 최연소 교수가 된 그는 72년부터 미국의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그곳에서 폭넓은 사회주의 관련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61년 그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27세에 연세대 최연소 교수가 된 그는 72년부터 미국의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그곳에서 폭넓은 사회주의 관련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 ||
1990년에는 [[이우재]], [[김낙중]], [[이재오]], [[김문수]] 등과 함께 [[민중당(1990년)|민중당]] 창당에 참여했다. 여러 조직의 결성·해체를 반복하면서 그는 노동자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을 결성했다. 그는 사노련 활동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2011년 12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학교 밖에서는 ‘사회실천연구소’를 꾸려 나가고 있다. | 1990년에는 [[이우재]], [[김낙중]], [[이재오]], [[김문수]] 등과 함께 [[민중당(1990년)|민중당]] 창당에 참여했다. 여러 조직의 결성·해체를 반복하면서 그는 노동자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을 결성했다. 그는 사노련 활동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2011년 12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학교 밖에서는 ‘사회실천연구소’를 꾸려 나가고 있다. | ||
2014년 2월 27일, 한국경영학회로부터 상남경영학자상을 받았다. 이에 대해 전국좌파연대회의는 수정주의 내지는 부르주아지의 길을 선택한 것이냐는 비판을 가하기도했다.<ref>https://www.beminor.com/bbs/view.html?idxno=111</ref> | 2014년 2월 27일, 한국경영학회로부터 상남경영학자상을 받았다. 이에 대해 전국좌파연대회의는 수정주의 내지는 부르주아지의 길을 선택한 것이냐는 비판을 가하기도했다.<ref>https://www.beminor.com/bbs/view.html?idxno=111</ref> | ||
==입장== | ==입장== | ||
=== | ===[[북한]]에 대한 입장=== | ||
[[마르크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의 아주 기괴한 변종 중 하나로 보며, 수많은 국가자본주의의 한 형태이고, 권력구조 면에선 봉건적인 기이한 형태를 가진 [[파시즘|파시스트]] 국가로 보며 자본주의 체제로라도 이양하게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북한의 핵보유와 3대 세습에도 강하게 비판한다. | [[마르크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의 아주 기괴한 변종 중 하나로 보며, 수많은 국가자본주의의 한 형태이고, 권력구조 면에선 봉건적인 기이한 형태를 가진 [[파시즘|파시스트]] 국가로 보며 자본주의 체제로라도 이양하게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북한의 핵보유와 3대 세습에도 강하게 비판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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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입장=== |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입장=== | ||
중국 혁명 같은 경우는 부르주아 | [[중국 혁명]]같은 경우는 [[부르주아 혁명]]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혁명이었지만 국가자본주의로 나아갔다고 주장한며, [[스탈린]] 체제는 반(反)혁명 세력으로 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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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joongang.co.kr/article/8691356#home 27세 때 최연소 연대 교수 …87년 이한열 사망 계기로 “실천 마르크스주의자” ] | * [https://www.joongang.co.kr/article/8691356#home 27세 때 최연소 연대 교수 …87년 이한열 사망 계기로 “실천 마르크스주의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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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9일 (화) 17:20 기준 최신판
개요
생애
오세철은 1943년 고려대 오화섭 교수와 이화여대 박노경 교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여인소극장’이라는 극단의 대표였고 아버지는 진보적인 외국 희곡을 옮기는 영문학 교수였다. 한국전쟁 때 어머니는 남로당의 일원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오세철은 그의 책 《다시, 혁명을 말한다》에서 “가족사는 지금의 나를 형성시키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61년 그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27세에 연세대 최연소 교수가 된 그는 72년부터 미국의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그곳에서 폭넓은 사회주의 관련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1990년에는 이우재, 김낙중, 이재오, 김문수 등과 함께 민중당 창당에 참여했다. 여러 조직의 결성·해체를 반복하면서 그는 노동자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을 결성했다. 그는 사노련 활동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2011년 12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학교 밖에서는 ‘사회실천연구소’를 꾸려 나가고 있다.
2014년 2월 27일, 한국경영학회로부터 상남경영학자상을 받았다. 이에 대해 전국좌파연대회의는 수정주의 내지는 부르주아지의 길을 선택한 것이냐는 비판을 가하기도했다.[1]
입장
북한에 대한 입장
스탈린주의의 아주 기괴한 변종 중 하나로 보며, 수많은 국가자본주의의 한 형태이고, 권력구조 면에선 봉건적인 기이한 형태를 가진 파시스트 국가로 보며 자본주의 체제로라도 이양하게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북한의 핵보유와 3대 세습에도 강하게 비판한다.
남북문제의 해법으로는 북한은 자본주의의 한 변종으로서 조금 더 잘사는 남쪽의 자본주의 국가인 남한이 협력해야한다고 본다. 북에 강경한 태도를 가지면 오히려 더 큰 변종을 만들어주는 결과를 낳는다고 보았다.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입장
중국 혁명같은 경우는 부르주아 혁명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혁명이었지만 국가자본주의로 나아갔다고 주장한며, 스탈린 체제는 반(反)혁명 세력으로 본다.
NL에 대한 입장
좌파도 진보도 아닌 민족주의 세력으로 보며, '세련된' 스탈린주의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