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2):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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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토론 | 기여)
새 문서: {{책자 |번호 = 10 |배경색 = #CD0000 |글씨색 = #FFFFFF |제목 = 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 |장 이름 = 3.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2) |이전 장 = 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1) |다음 장 = 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3) |내용 = 의심할 바 없이 미래의 사회는 전혀 다른 기초 위에 건립될 것이다. 미래의 사회는 사회주의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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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6일 (일) 01:43 기준 최신판

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
3.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2)

의심할 바 없이 미래의 사회는 전혀 다른 기초 위에 건립될 것이다.


미래의 사회는 사회주의 사회이다. 이것은 우선 그 사회에 어떠한 계급도 없으리라는 것 즉 자본가도 없고 노동자도 없으며 따라서 착취도 없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회에는 집단적으로 노동하는 창조자들(Schaffende)만이 있게 될 것이다.


미래의 사회는 사회주의 사회이다. 이것은 또한 그 사회에 가서는 착취가 없어짐과 함께 상품생산과 매매도 없어질 것이며 따라서 그 사회에 가서는 노동력의 구매자와 판매자 즉 고용주와 피고용자가 있을 수 없고 다만 자발적인(freie) 창조자들만이 있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의 사회는 사회주의 사회이다. 이것은 마지막으로, 그 사회에 가서는 임금노동이 없어짐과 함께 생산도구와 생산수단에 대한 온갖 사적소유가 청산될 것이며 그 사회에 가서는 가난한 노동자도, 부유한 자본가도 없게 될 것이며 다만 전체 토지와 지하자원, 전체 삼림, 전체 공장, 전체 철도 등을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창조자들만이 있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보다시피 미래의 생산의 주요 목적은 자본가들의 이윤을 증대시키기 위한 판매용 상품을 생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수요를 직접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이 사회에 가서는 상품생산이요, 이윤을 위한 투쟁이요 하는 것 등은 없어질 것이다.


미래의 생산은 사회주의적으로 조직되고 고도로 발전된 생산이라는 것, 그것은 사회의 수요를 타산하고 사회에 요구되는 수량만큼 생산하게 되리라는 것도 역시 명백하다. 거기에는 생산의 분산성도, 경쟁도, 공황도, 실업도 없을 것이다.


계급이 없고 부자와 가난뱅이가 없는 곳에서는 국가도 필요 없게 되며 또 가난한 사람을 구박하고 부자를 옹호하는 정치적 권력도 필요 없게 된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에 가서는 정치적 권력의 존재가 필요 없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벌써 1846년에 칼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동계급은 발전과정에서 낡은 부르주아 사회를, 계급과 계급적 대립을 배제하는 한 개의 협동체(Assoziation)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그리고 본래의 의미에서의 정권은 벌써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철학의 빈곤≫을 보라.)


그렇기 때문에 1884년에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요컨대 국가는 머나먼 태고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없어도 되었으며 국가와 국가권력을 전혀 모르던 사회가 있었다. 계급으로의 사회의 분열과 필연적으로 연결된 경제적 발전의 특정한 단계에서 국가는 … 필연적인 것으로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계급의 존재가 필연적이 아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산의 실제적인(positives) 장애물로 되는 그러한 생산발전단계에 급속한 발걸음으로 접근하고 있다. 계급의 소멸은 과거에 그 발생이 불가피하였던 것처럼 불가피하다. 계급의 소멸과 함께 국가도 불가피하게 소멸할 것이다. 생산자들의 자발적(freier)이고 평등한 협동(Assoziation)에 기초하여 생산을 새로이 조직하는 사회는 전체 국가기구를, 그때에 그것이 응당 가 있어야 할 곳으로 보낼 것이다. 즉 물레와 청동도끼와 함께 박물관으로. (≪가족, 사적소유 및 국가의 기원≫을 보라.)


이와 동시에 사회주의 사회에는, 여러 가지 정보를 집중하게 된 지방 사무소들과 아울러 공동의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전 사회의 수요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며 다음에는 노동자들 간에 여러 가지 사업을 적절히 배정해야 할 중앙통계국이 필요하게 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대표자협의회(conferences)와 특히 대표자대회(congresses)도 역시 필요하게 될 것이며 그 대회의 결정은 다음 대회까지 소수파로 된 동지들에게는 무조건 의무적인 것으로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발적인(freie) 동지적 노동이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의 전체 수요를 역시 동지적으로 완전히 충족시켜야 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이것은 미래의 사회가 자기의 매개 성원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정도의 노동을 요구할 것인 만큼 그 사회는 또 각자에게 필요한 정도의 생산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수요에 따라! ― 이러한 원칙 위에서 미래의 집단주의(kollektivistisch) 제도는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 노동에 익숙하지 못한 구성원들이 새 생활에 참가하게 되고 생산력도 역시 충분히는 발전하지 못하고 또 “힘든”노동과 “깨끗한” 일이 여전히 남아 있게 될 사회주의의 첫 단계에서는 “각자에게는 수요에 따라”라는 원칙을 실현하기가 물론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는 일시적으로 어떤 다른 중간의 길에 설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미래의 사회가 제 궤도에 들어서고 자본주의 잔재가 근본적으로 청산되는 때에는 상술한 원칙이 사회주의 사회에 적합한 유일한 원칙으로 되리라는 것도 역시 명백하다.


그렇기 때문에 1875년에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산주의 사회의 보다 높은 단계에서, 개인이 노예와 같이 분업에 예속되는 상태가 소멸되고 이와 함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간의 대립이 소멸된 후에야, 노동이 생활을 위한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생활상 제1차적 요구로 된 후에야,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함께 생산력도 장성하게 … 된 후에야, 그때에야 비로소 좁은 부르주아적 권리(민법)의 한계(bürgerliche Rechtshorizont)는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기 깃발에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수요에 따라!’라고 쓸 수 있다. (“고타 강령 비판”을 보라.)


이상이 맑스의 이론에 따른 미래 사회주의 사회의 대체적 모습이다.


이것은 모두 다 좋은 일이다. 그런데 과연 사회주의는 실현될 수 있는가? 사람들이 자기의 “야만적인 습관”을 없애 버릴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또 각자는 수요에 따라 받는다고 하는데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력은 그렇게 하는 데 충분할 만한 수준에 올라서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사회주의 사회는 충분히 발전한 생산력과 인간의 사회주의적 의식과 그들의 사회주의적 계몽을 전제로 한다.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소유는 현대의 생산력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데 미래 사회에 가서는 이런 소유가 없어지리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생산력이 10배나 더 증대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미래의 사회에 가서는 수십만에 달하는 오늘의 기생충들과 실업자들이 취업하여 근로자들의 대열을 보충하게 되며 이것이 생산력의 발전을 크게 촉진하리라는 점도 역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야만적” 감정이나 견해에 대하여 말한다면,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영원불변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사적소유를 인정하지 않던 원시공산주의 시대가 있었는데 그 후에는 사적소유가 사람들의 감정과 이성을 지배하던 개인적 생산의 시대가 닥쳐왔으며 지금은 새 시대, 사회주의적 생산의 시대가 닥쳐오고 있다. ― 그런즉 사람들의 감정과 이성이 사회주의적 염원으로 물들어 간다 해서 놀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래 존재가 인간의 “감정”과 견해를 규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런데 사회주의 제도가 필연적으로 수립된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에 뒤이어 사회주의가 온다는 것은 불가피한가? 혹은 달리 말하면 맑스의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가 단지 감상적인 공상이나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에 대한 과학적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역사는 소유형태가 생산형태에 직접 종속되며 그런 까닭에 생산형태의 변화와 함께 조만간에 소유형태도 불가피하게 변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소유가 공산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던 시기 즉 원시인들이 돌아다니던 산과 들이 개별적인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전체 사람들에게 속하여 있던 시기도 있었다. 왜 그 시기에는 공산주의적 소유가 존재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생산이 공산주의적이었으며 노동이 공동적, 집단적이었으며 따라서 모두가 공동으로 일하였으며 또 서로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이와는 다른 시기 즉 소부르주아적 생산의 시기가 닥쳐왔는데 그때에는 소유가 개인적(사적)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따라서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물론 공기와 햇빛 등을 제외하고는)이 사적소유로 인정되고 있었다. 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는가? 그것은 생산이 개인적 생산으로 되고 사람들이 저마다 외진 곳에서 자기를 위하여 일하게 되었던 까닭이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적 대규모 생산의 시대가 닥쳐왔는데 여기서는 수백 수천의 노동자들이 한 공장의 한 지붕 밑에 모여 공동노동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여러분이 각자 분리된 사람들이 단독으로 일하던 낡은 식의 작업을 보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매개 노동자나 매개 직장의 전체 노동자가 자기 직장의 동료들이나 다른 직장들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한 직장의 작업만 정지되어도 전 공장의 노동자들이 작업을 못 하게 된다. 보다시피 생산과정과 노동은 이미 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사회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 이것은 개개의 공장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개 생산부문 내에서와 여러 부문들 간에서도 볼 수 있다.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하기만 하면 생산이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되며 원유와 석탄의 생산이 중지되면 얼마 후에 전체 공장들이 문을 닫게 된다. 여기에서는 생산과정이 사회적, 집단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점유(占有)의 사적 성격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현대의 집단적 노동은 불가피하게 집단적 소유를 가져오기 때문에 사회주의 제도가 밤이 가면 낮이 오는 것과 같이 자본주의에 뒤이어 불가피하게 닥쳐오고야 말 것은 명백하다.


이와 같이 역사는 맑스의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의 불가피성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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