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3)

좌파도서관
무정부주의냐, 사회주의냐?
3.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3)

역사는 사회적 생산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며 자기 수중에 생산의 주요한 기능을 장악하고 있는 계급이나 사회적 집단이 결국은 필연적으로 이 생산의 주인으로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여 준다. 여자들이 생산의 주인으로 인정되었던 모권시대가 있었다. 이것은 무엇으로써 설명할 것인가? 그것은 당시의 생산 즉 원시적 농업에 있어서 여성들이 주역을 담당하고 그들이 주되는 활동을 수행한 반면 남자들은 짐승을 찾아 숲속을 돌아다니었다는 것으로써 설명된다. 그 다음에 생산에서 지배적 지위가 남자들의 수중으로 넘어간 부권시대가 되었다. 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는가? 그것은 당시의 생산에서 목축업이 지배적이 되어서, 창, 올가미, 활과 화살 등의 생산도구를 사용하는 남자들이 주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 자본주의적 대규모 생산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 시기에는 노동자가 생산에서 주역이 되기 시작하였으며 주요한 모든 생산기능이 그들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들이 없이는 생산이 하루도 지속될 수 없으며(총파업을 상기하라) 자본가들은 생산에서 무익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산의 방해물로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모든 사회생활이 완전히 파괴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가 머지않아 필연적으로 현대의 생산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 그것의 유일한 소유자, 사회주의적 소유자로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적 소유의 임종의 기도를 올리면서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문제를 결정적으로 제기하는 현대 산업공황은 이 결론을 극히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으며 자본가들의 기생성과 사회주의 승리의 필연성을 뚜렷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해서 역사는 맑스의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의 필연성을 입증하여 준다.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는 감상이나 추상적 “정의”나 노동자들에 대한 사랑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과학적 근거에 입각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는 “과학적 사회주의”라고도 한다.


엥겔스는 벌써 1877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일 … 오늘날의 노동생산물 분배방식이 바야흐로 변혁을 앞두고 있다는 데 대한 우리의 확신이 단지 이 분배방식은 불공정하며 그러므로 정의는 언젠가는 승리해야만 한다는 의식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며 우리는 오랫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이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대 자본주의 생산방식에 의하여 생산된 생산력이나 그에 의하여 조성된 부의 분배제도나 다 그 생산방식 자체와 극심한 모순에 빠지게 되었으며, 그것도 현대사회 전체가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생산과 분배 방식에 변혁이 일어나 모든 계급적 차이를 일소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러한 정도에 이른” 데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주의의 승리의 확신은 법이니 불법이니 하는 탁상공론적인 철학자의 관념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 이 명료한 물질적 사실, 바로 이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반뒤링론≫을 보라.)


이것은 물론 자본주의가 와해되어 가는 것만큼 어느 때든지 자기가 하고만 싶으면 사회주의 제도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무정부주의자들과 기타 소부르주아 사상가들만이다. 사회주의적 이상은 모든 계급의 이상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노동계급의 이상일 따름이다. 또한 이 이상의 실현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지는 것은 모든 계급이 아니라 오직 노동계급만이다. 그런데 이것은 노동계급이 사회의 극히 적은 부분을 이루고 있는 동안은 사회주의 제도의 수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낡은 생산형태들의 파멸, 자본주의적 생산에로 가일층의 집중과 사회의 대다수의 프롤레타리아화 ― 이러한 조건이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직 불충분하다. 사회의 대다수가 이미 프롤레타리아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사회주의는 아직 실현되지 못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데는 이 모든 것 외에도 노동계급의 계급적 의식, 그의 일치단결과 자기 자신의 사업을 지도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갖추자면 또 이른바 정치적 자유, 즉 언론, 출판, 파업, 결사의 자유, 한 마디로 말해서 계급투쟁의 자유가 필요하다. 그런데 정치적 자유는 어디서나 동일하게 보장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계급은 그가 어떠한 조건하에서 투쟁하게 되겠는가, 즉 전제적-농노제적 조건하에서인가(러시아), 입헌군주제적 조건하에서인가(독일),혹은 대부르주아 공화제적 조건하에서인가(프랑스),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 공화제적 조건하에서인가(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요구) 하는 데 무관심할 수 없다. 정치적 자유는 민주주의 공화제에서 가장 훌륭히, 가장 원만하게 보장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정치적 자유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제도하에서 보장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의 전체 지지자들은 반드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가장 좋은 “다리”인 민주주의 공화제가 수립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주의의 강령은 현 조건에서는 두 부분 즉 사회주의를 목표로 하는 최고 강령과 민주주의 공화국을 거쳐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개척할 목적을 가진 최저 강령으로 나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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