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주의의 기초/방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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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레닌주의의 기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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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레닌주의의 기초 | |제목 = 레닌주의의 기초 | ||
|장 이름 = II. 방법 | |장 이름 = II. 방법 | ||
|내용 = | |이전 장 = 레닌주의의 기초/레닌주의의 역사적 근원 | ||
|다음 장 = 레닌주의의 기초/이론(1) | |||
|내용 = 위에서 맑스 엥겔스로부터 레닌에 이르는 사이에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가 온전히 지배한 시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기회주의가 형식적으로 지배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지배한 시기이다. 형식적으로는 “충실한” 맑스주의자이며 “정통파”인 카우츠키 등이 제2 인터내셔널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기회주의적 노선이 제2 인터내셔널의 주요 활동을 지배하였다. 기회주의자들은 타협하려는 소부르주아적 본성으로 말미암아 부르주아지에게 순응하였다. “정통파”는 “통일 유지”요, “당내 평화”요 하면서 기회주의자들과 타협하였다. 그래서 부르주아지의 정책과 “정통파”의 정책이 서로 연결되었다. 그 결과 기회주의가 궁극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 |||
이 시기는 자본주의가 비교적 평화롭게 발전하던 시기였다. 말하자면 전쟁 이전 시기로 제국주의의 파국적 제 모순이 아직 낱낱이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경제적 파업과 노동조합은 다소간 “정상적으로” 발전하였다. 선거투쟁과 국회의원단은 “현기증 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투쟁의 합법적 형태가 찬미되었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합법적인 수단으로 “죽이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한마디로 말해 제2 인터내셔널은 편하게 살고 있었다. 혁명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혁명적 대중교육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 |||
이들은 정연한 혁명적 이론 대신에 모순투성이의 가정과 단편적 이론을 내세웠다. 이것은 대중의 살아 움직이는 혁명적 투쟁과 유리되었고 낡아 빠진 도그마로 변하였다. 물론 겉으로는 맑스의 이론을 말하였지만 그 목적은 맑스의 이론에서 혁명적 정수를 거세하기 위함이었다. | |||
이들은 혁명적 정책을 실시하는 대신에 속물근성으로 맥 빠진 채 우유부단하였고, 야비한 정치적 타협, 의회주의적 흥정과 권모술수를 획책하였다. 물론 겉으로는 “혁명적” 결의안와 슬로건을 채택하였다. 하지만 그 목적은 그 결의안과 슬로건을 서류함 속에 파묻어 묵살하기 위함이었다. | |||
이들은 자신의 과오를 교훈으로 삼아 옳은 혁명적 전술로 당을 교육하고 훈련할 대신에 절실한 문제를 그럴듯한 말로 얼버무리거나 감추어 일부러 회피하였다. 물론 겉으로는 절실한 문제를 토론하는 데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 목적은 소위 “탄력적인” 결의안으로 적당히 해치우려는 데 있었다. | |||
이러한 것이 바로 제2 인터내셔널의 진면목이고 활동 방식이며 무기들이었다. | |||
이런 가운데 제국주의 전쟁과 노동계급이 혁명적으로 전투해야 할 새로운 시기가 다가왔다. 낡은 투쟁 방법은 금융자본의 무한권력과 투쟁하기에는 적당하지 않고 무기력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 |||
제2 인터내셔널의 활동 전체와 사업 방식 전반을 재검토하고 속물적 우유부단, 편협성, 권모술수, 변절, 사회쇼비니즘과 사회평화주의를 몰아내는 것이 필요하였다. 제2 인터내셔널의 무기들을 모두 점검하여 녹쓸고 낡은 것은 모조리 버리고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내야 했다. 사전준비 없이 자본주의와의 전쟁에 나선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모한 짓이다. 사전준비 없이는 새로운 혁명전투에 직면해서 노동계급이 무장력의 부족을 느끼거나 심지어 완전히 무장해제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 |||
제2 인터내셔널의 아우게이아스 마구간<ref>아우게이아스 마구간은 아우게이아스 왕이 3,000마리의 말을 기른 마구간을 말한다. 매우 더러운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30년 동안 청소하지 않은 아우게이아스 마구간을 헤라클레스가 하루 만에 청소한다.</ref>을 전반적으로 혁신하고 대청소하는 영광은 레닌주의의 어깨 위에 떨어졌다. | |||
이러한 환경에서 레닌주의의 방법이 생겨나고 단련되었다. | |||
레닌주의 방법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 |||
첫째, 제2 인터내셔널의 교조적인 이론을 대중의 혁명투쟁과 살아있는 실천이라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 검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파괴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회복하고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혁명 이론으로 무장한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적 당을 창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
둘째, 제2 인터내셔널 정당의 정책을 믿을 수 없는 슬로건이나 결의안이 아니라 활동과 활동의 결과에 근거해서 검증하는 것이다. 정책은 활동과 그 결과에 근거해야만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신뢰를 얻을 수 있으며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 |||
셋째, 모든 당 사업을 대중이 혁명을 준비하고 훈련하도록 하는 새로운 혁명적인 방침으로 재조직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대중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
넷째, 프롤레타리아 당들이 내부로부터 자기비판을 하는 것이다. 즉 자체의 과오를 교훈으로 삼아 훈련 교육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당의 참된 간부와 참된 지도자를 육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 |||
이것이 레닌주의 방법의 기본이며 본질이다. | |||
이 방법이 실제 문제에 어떻게 적용되었을까? | |||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들이 항상 이론적 출발점으로 삼는 많은 이론적 도그마가 있다. 그중 몇 개를 살펴보자. | |||
첫 번째 도그마: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장악할 조건에 관한 것이다. 기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자기 나라에서 다수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에는 권력을 잡을 수 없고 잡아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을 논증할 어떠한 증거도 제출된 바 없다.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이 황당한 명제를 입증할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레닌은 제2 인터내셔널 신사 양반들에게 이렇게 대응한다. 가령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만일 주민의 소수를 이루는 프롤레타리아가 대다수의 근로대중을 자기 주위에 결집시키는 역사적 정세(전쟁, 농업공황 등등)가 조성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에 왜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아서는 안 되는가? 왜 프롤레타리아가 자본 전선을 돌파하여 전반적으로 종말을 가속하는 유리한 국내외 정세를 이용해서는 안 되는가? 일찍이 맑스는 1850년대에 이른바 “농민전쟁의 재판”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뒷받침될 수 있었더라면 독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훌륭하게” 되었을 것<ref>K. 맑스, ≪맑스 엥겔스 저작 선집≫ 제2권, 박종철출판사, p. 512.</ref>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당시 독일의 프롤레타리아 수가 예컨대 1917년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수보다 비교적 적었던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가 아닌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실천적 경험이 제2 인터내셔널의 영웅들이 즐기는 이런 도그마가 프롤레타리아에게는 하등의 실제적 의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대중은 혁명투쟁의 실천을 통해 이 낡아 빠진 도그마의 잘못을 증명하고 쳐부셔 버린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 |||
두 번째 도그마: 프롤레타리아트가 나라를 관리할 준비된 문화 간부와 행정 간부를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다면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선 자본주의의 조건하에서 간부를 육성한 다음에야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레닌의 대응은 이렇다. 가령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반대로 우선 권력을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먼저 조성하면 왜 안 되는가? 유리한 조건에서 근로 대중의 문화 수준을 높이고 노동자 출신의 수많은 지도 간부와 행정 간부를 육성하는 일을 급속히 추진하면 왜 안 되는가? 러시아에서의 경험은 노동자 출신의 지도 간부들이 자본의 지배하에서보다 프롤레타리아 권력하에서 백배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자라난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대중은 혁명투쟁의 실천을 통해 이러한 교조적 이론 역시 사정없이 쳐부셔 버린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 |||
세 번째 도그마: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총파업이라는 방법을 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 총파업은 이론적으로 근거가 희박하고(엥겔스의 비판) 실천적으로 위험하며(그것은 국가의 경제생활의 정상적인 진행을 교란시킬 수 있으며 노동조합의 기금을 고갈시킬 수 있다) 또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요한 계급투쟁 형태인 의회투쟁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레닌주의자들은 이렇게 대응한다. 좋다. 그런데 먼저 엥겔스는 총파업의 모든 종류를 비판한 것이 아니다. 일정한 종류의 총파업만을 비판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투쟁 대신에 내세운 경제적 총파업만을 비판했다. 이것과 정치적 총파업을 택할 수 없다는 것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둘째로, 의회투쟁 형태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주된 투쟁 형태라는 것을 누가 어디서 증명했단 말인가? 혁명운동의 역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의회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회 밖에서의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학교이거나 보조수단에 불과하지 않는가? 또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운동의 기본 문제는 힘으로,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직접적인 투쟁으로, 총파업으로, 봉기로 해결해 오지 않았는가? 셋째로, 어느 누가 정치적 총파업이 의회투쟁을 대체한다고 하였단 말인가? 어느 곳에서 그리고 언제 정치적 총파업 지지자들이 의회 밖에서의 투쟁으로 의회투쟁을 대체하려고 시도했단 말인가? 넷째로, 러시아 혁명은 정치적 총파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가장 위대한 학교임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자본주의 아성을 공격하는 전야에 프롤레타리아트를 광범위하게 동원하고 조직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수단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정치적 총파업이 경제생활의 정상적인 진행을 교란한다느니 노동조합의 기금을 탕진한다느니 하는 속물적 한탄을 하는 것인가? 혁명투쟁의 실천적 경험은 역시 기회주의자들의 이러한 도그마도 분명히 박살내 버리지 않는가? | |||
다른 것들도 역시 이와 같다. | |||
바로 이 때문에 레닌은 “혁명적 이론은 … 도그마가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대중적이고 참으로 혁명적인 운동의 실천 활동과 긴밀한 연결 속에서만 최종적으로 형성된다”(≪좌익 소아병≫)라고 하였다.<ref>V. I.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김남섭 역, 돌베개, 1992, p. 19. (이하 인용된 모든 번역은, 역자가 다시 번역한 것이다.)</ref> 이론은 실천에 이바지해야 하며 “이론은 실천이 제기하는 문제에 답해야 하기” 때문이며(≪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ref> V. I. 레닌, ≪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 김우현 역, 벼리, 1988, p. 170.</ref> 이론은 반드시 실천의 결과에 의해 검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
제2 인터내셔널 정당들의 정치적 슬로건과 정치적 결의에 관해서는 “전쟁에는 전쟁으로”라는 슬로건의 이력을 돌이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슬로건은 제2 인터내셔널 정당들의 실천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들은 화려한 슬로건이나 결의로 자신의 반혁명적 행동을 위장한다. 제2 인터내셔널은 바젤 대회<ref>제2 인터내셔널의 바젤 대회는 1912년 11월 24‒25일에 개최되었다. 대회는 발칸 전쟁과 임박한 세계대전의 위협에 관련하여 소집되었다. 국제 정세와 전쟁에 반대하는 공동행동이라는 문제만이 토론되었다. 대회는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선언문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과 힘을 사용하여 전쟁의 위험에 반대하는 혁명 투쟁에 나설 것과 “전쟁에는 전쟁으로”를 선언하라고 노동자에게 호소하였다.</ref>에서 보란 듯이 시위를 벌였다. 제국주의자들이 감히 전쟁을 시작한다면 끔찍한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들이 제출한 슬로건은 무시무시한 “전쟁에는 전쟁으로”였다. 그러나 얼마 후 전쟁이 임박하자 바젤 결의를 묵살하고 새로운 슬로건을 제시했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조국의 영광을 위해 서로 죽이라는 슬로건이다. 이것을 누가 잊어버리겠는가? 혁명적 슬로건이나 결의가 행동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한 푼의 가치도 없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는가? 전쟁 당시 제2 인터내셔널의 배신적 정책과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시키라는 레닌의 정책을 비교해 보라. 기회주의 정상배들이 얼마나 너절한지, 레닌주의 방법이 얼마나 위대한지 능히 알 수 있다. | |||
여기서 레닌의 저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의 한 구절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레닌은 제2 인터내셔널의 지도자 카우츠키가 당을 실제 행동이 아니라 종이 위에 쓰인 구호나 문서로 판단하려는 기회주의적 시도를 하는 것을 호되게 질책했다. | |||
{{인용문|카우츠키는 마치 슬로건만 제출하면 사태가 변하는 듯이 생각하면서 … 전형적인 소부르주아적이고 속물적인 정책을 추구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전체 역사는 이런 환상의 잘못을 드러낸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인민을 속이기 위해 온갖 ‘구호’를 제출하여 왔다. 저들의 속셈을 검토하고, 말과 행동을 비교해 봐야 한다. 문제는 관념적이며 기만적인 빈말에 만족하지 말고 계급적 실체까지 파고들어 가야 한다. (≪레닌 저작집≫ 제23권, p. 377을 보라.)<ref> V. I.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허교진 역, 소나무, 1991, p. 88.</ref>}} | |||
제2 인터내셔널의 당은 자기비판을 두려워하며 잘못을 숨긴다. 곤란한 문제는 얼버무리고 만사가 잘되고 있다고 속이면서 결점은 숨긴다. 이것은 생기 있는 사상을 무디게 하며 당이 잘못을 통해 훈련되는 것을 방해한다. 레닌이 조롱하고 호되게 질책한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레닌은 소책자 ≪좌익 소아병≫에서 프롤레타리아 당의 자기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 |||
{{인용문|당 자신의 오류에 대한 당의 태도는 당이 참으로 진실한가와 자기 계급과 근로대중에 대한 의무를 실제 문제로 수행하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규준의 하나이다. 오류를 솔직히 시인하는 것, 오류의 원인을 밝혀내는 것, 오류를 낳게 한 환경을 철저히 분석하는 것, 오류를 시정할 수단을 주의 깊게 연구 토의하는 것 ―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당의 징표이다. 이것이야말로 당이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방식이다. 이것이야말로 계급 및 대중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방식이다. (≪레닌 저작집≫ 제25권, p. 200을 보라.)<ref>V. I.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p. 60.</ref>}} | |||
어떤 사람들은 당이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고 자기비판하면 당에 위험하다고 한다. 당의 적들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닌은 이런 반대 의견은 어리석고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간주했다. 레닌은 우리 당이 아직 약소했을 때인 1904년에 소책자 ≪일보전진 이보후퇴≫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 |||
{{인용문|그들<ref>즉 맑스주의자의 적들 -- '''필자의 주'''</ref>은 우리의 논쟁을 보고 고소해 하며 기뻐 날뛴다. 그들은 우리 당의 결함과 단점을 다룬 나의 소책자에서 앞뒤 문맥과 상관없이 개별적 구절을 뽑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당원은 이미 투쟁 속에서 강철같이 단련되었다. 이런 사소한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비판을 수행하며 자신의 결함을 냉철하게 폭로해 갈 것이다. 이 결함들은 노동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확실하게 그리고 반드시 극복될 것이다. (≪레닌 저작집≫ 제6권, p. 161을 보라.)<ref>V. I. 레닌, ≪일보전진 이보후퇴≫, 홍수천 역, 풀무질, 1995, p. 15.</ref>}} | |||
대체로 이상과 같은 것이 레닌주의 방법의 특징들이다. | |||
레닌의 | 레닌의 방법적 원리는 기본적으로 맑스의 가르침에 이미 있다. 그 가르침은 맑스의 말대로 “본질적으로 비판적이며 혁명적인”<ref>K. 맑스, ≪자본론≫ 제1권(상), 김수행 역, 2015, p. 19.</ref> 것이다. 레닌의 방법은 바로 이 비판적이며 혁명적인 정신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다. 그러나 레닌의 방법이 맑스의 방법을 단순히 복원한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사실 레닌의 방법은 맑스의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방법, 즉 유물 변증법을 복원한 것일 뿐 아니라 구체화하고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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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 내 각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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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3일 (일) 18:46 기준 최신판
레닌주의의 기초 | ||||||||||||||
◀ | II. 방법 | ▶ | ||||||||||||
위에서 맑스 엥겔스로부터 레닌에 이르는 사이에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가 온전히 지배한 시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기회주의가 형식적으로 지배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지배한 시기이다. 형식적으로는 “충실한” 맑스주의자이며 “정통파”인 카우츠키 등이 제2 인터내셔널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기회주의적 노선이 제2 인터내셔널의 주요 활동을 지배하였다. 기회주의자들은 타협하려는 소부르주아적 본성으로 말미암아 부르주아지에게 순응하였다. “정통파”는 “통일 유지”요, “당내 평화”요 하면서 기회주의자들과 타협하였다. 그래서 부르주아지의 정책과 “정통파”의 정책이 서로 연결되었다. 그 결과 기회주의가 궁극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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