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주의의 기초/방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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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이름 = II.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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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 = 레닌주의의 기초/이론
|다음 장 = 레닌주의의 기초/이론(1)
|내용 = 나는 이미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다른 한편으로는 레닌 사이에 제 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가 지배하는 전체 기간이 있다고 말했다. 정확성을 위해 내가 염두에 둔 것은 기회주의의 형식적 지배가 아니라 실제 지배라는 점을 덧붙였다. 형식적으로는, 제2인터내셔널은 ‘충성스러운’ 맑스주의자들과 ‘정통파’−카우츠키 등에 의해 지도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 활동은 기회주의 노선을 추종했다. 기회주의자들은 그들의 순응적인 프티부르주아적 속성 때문에 스스로 부르주아지에 순응했다. ‘정통파’는 또한 ‘당내 평화’를 위하고 기회주의자들과 ‘연합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순응했다. 따라서 부르주아지의 정책과 ‘정통’의 정책 간의 연계는 긴밀해졌고 결과로 기회주의는 유례없이 위세를 떨쳤다.
|내용 = 위에서 맑스 엥겔스로부터 레닌에 이르는 사이에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가 온전히 지배한 시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기회주의가 형식적으로 지배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지배한 시기이다. 형식적으로는 “충실한” 맑스주의자이며 “정통파”인 카우츠키 등이 제2 인터내셔널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기회주의적 노선이 제2 인터내셔널의 주요 활동을 지배하였다. 기회주의자들은 타협하려는 소부르주아적 본성으로 말미암아 부르주아지에게 순응하였다. “정통파”는 “통일 유지”요, “당내 평화”요 하면서 기회주의자들과 타협하였다. 그래서 부르주아지의 정책과 “정통파”의 정책이 서로 연결되었다. 결과 기회주의가 궁극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가 비교적 평화롭게 발전하던 시기, 말하자면 제국주의의 파국적 모순이 아직 그토록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노동자들의 경제 파업과 노동조합이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발전하던 시기, 선거 운동과 의회 단체들이 '어지러울 정도로' 성공을 거두던 전쟁 전의 시기였다. 합법적인 형태의 투쟁이 하늘을 찌를 듯 찬사를 받았을 때, 그리고 자본주의가 합법적인 수단에 의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되었을 때, 즉 제2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이 안주하며 혁명, 프롤레타리아 독재, 대중의 혁명적 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성향이 없었을 때를 이야기한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가 비교적 평화롭게 발전하던 시기였다. 말하자면 전쟁 이전 시기로 제국주의의 파국적 모순이 아직 낱낱이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경제적 파업과 노동조합은 다소간 “정상적으로” 발전하였다. 선거투쟁과 국회의원단은 “현기증 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투쟁의 합법적 형태가 찬미되었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합법적인 수단으로 “죽이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한마디로 말해 제2 인터내셔널은 편하게 살고 있었다. 혁명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혁명적 대중교육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완전한 혁명이론 대신에 모순된 가설과 단편적 이론이 있었고, 그것은 대중들의 실제적 혁명투쟁으로부터 유리되어 진부한 도그마로 변질되었다. 물론 체면치례로 맑스의 이론이 언급되었지만, 그것은 맑스의 이론으로부터 그것의 생생한 혁명적 정신을 박탈한 것이었을 뿐이다.
이들은 정연한 혁명적 이론 대신에 모순투성이의 가정과 단편적 이론을 내세웠다. 이것은 대중의 살아 움직이는 혁명적 투쟁과 유리되었고 낡아 빠진 도그마로 변하였다. 물론 겉으로는 맑스의 이론을 말하였지만 그 목적은 맑스의 이론에서 혁명적 정수를 거세하기 위함이었다.


혁명적 정책 대신에, 무기력한 속물근성과 정치적 타협, 의회주의적 외교술과 의회주의적 음모가 있었다. 물론 체면치례로 ‘혁명적’ 결의안과 슬로건이 채택되었으나 서류함에 처박혀 묵살되어 버렸을 뿐이다.


이들은 혁명적 정책을 실시하는 대신에 속물근성으로 맥 빠진 채 우유부단하였고, 야비한 정치적 타협, 의회주의적 흥정과 권모술수를 획책하였다. 물론 겉으로는 “혁명적” 결의안와 슬로건을 채택하였다. 하지만 그 목적은 그 결의안과 슬로건을 서류함 속에 파묻어 묵살하기 위함이었다.


당이 자신의 오류를 논거로 하여 정확한 혁명적 전술을 훈련받고 교육받는 대신에, 그럴싸하게 꾸며지거나 베일에 가려져 있던 난처한 문제들을 고의적으로 회피하고 있었다. 물론 외관상 논쟁중인 문제를 토론하는 것에 대한 반대는 없었지만 그것은 일종의 ‘유연한’ 결의로 매듭짓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과오를 교훈으로 삼아 옳은 혁명적 전술로 당을 교육하고 훈련할 대신에 절실한 문제를 그럴듯한 말로 얼버무리거나 감추어 일부러 회피하였다. 물론 겉으로는 절실한 문제를 토론하는 데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 목적은 소위 “탄력적인” 결의안으로 적당히 해치우려는 데 있었다.


이러한 것이 제2인터내셔널의 외형이자, 그것의 사업방식, 그것의 병기고였다.


이러한 것이 바로 제2 인터내셔널의 진면목이고 활동 방식이며 무기들이었다.


한편, 제국주의전쟁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식적 전투의 새로운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낡은 투쟁방식들은 금융자본의 전지전능한 권력 앞에서 부적합하고 무기력하다는 것이 명백하게 입증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제국주의 전쟁과 노동계급이 혁명적으로 전투해야 할 새로운 시기가 다가왔다. 낡은 투쟁 방법은 금융자본의 무한권력과 투쟁하기에는 적당하지 않고 무기력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활동 전체, 사업방식 전반을 철저히 조사하고 모든 속물근성, 편협성, 정치적 음모, 변절, 사회 배외주의와 사회평화주의를 축출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녹슬고 낡은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무기를 만들기 위해 제2 인터내셔널의 전체 무기고를 조사해야했다. 이러한 사전작업 없이는 자본주의와의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었다. 이 작업이 없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향후 혁명적 전투에서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거나 심지어 완전히 무장하지 못할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제2 인터내셔널의 활동 전체와 사업 방식 전반을 재검토하고 속물적 우유부단, 편협성, 권모술수, 변절, 사회쇼비니즘과 사회평화주의를 몰아내는 것이 필요하였다. 제2 인터내셔널의 무기들을 모두 점검하여 녹쓸고 낡은 것은 모조리 버리고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내야 했다. 사전준비 없이 자본주의와의 전쟁에 나선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모한 짓이다. 사전준비 없이는 새로운 혁명전투에 직면해서 노동계급이 무장력의 부족을 느끼거나 심지어 완전히 무장해제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제2 인터내셔널의 아우게이아스 마구간을 전반적으로 정비하고 청소한 영광은 레닌주의에 돌아갔다.


제2 인터내셔널의 아우게이아스 마구간<ref>아우게이아스 마구간은 아우게이아스 왕이 3,000마리의 말을 기른 마구간을 말한다. 매우 더러운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30년 동안 청소하지 않은 아우게이아스 마구간을 헤라클레스가 하루 만에 청소한다.</ref>을 전반적으로 혁신하고 대청소하는 영광은 레닌주의의 어깨 위에 떨어졌다.


이것이 레닌주의의 방법이 탄생하고 발전한 조건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레닌주의의 방법이 생겨나고 단련되었다.


이러한 방법의 필요조건은 무엇인가?


레닌주의 방법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제2인터내셔널의 이론적 도그마를 대중들의 혁명적 투쟁과 생생한 실천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검증하는 것−말하자면 이론과 실천 간의 손상된 통일을 회복시키는 것과 그것들 사이의 균열을 해소시키는 것, 왜냐하면 오직 이러한 방법으로써만 혁명이론으로 무장된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건설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제2 인터내셔널의 교조적인 이론을 대중의 혁명투쟁과 살아있는 실천이라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 검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파괴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회복하고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혁명 이론으로 무장한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적 당을 창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제2인터내셔널 정당들의 정책을 (신뢰할 수 없는) 슬로건과 결의 아니라 그들의 행위, 그들의 활동에 의해 검증하는 것. 왜냐하면 오직 이 방법으로써만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신뢰가 획득되고 신뢰를 받을 만한 자격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 제2 인터내셔널 정당의 정책을 믿을 수 없는 슬로건이나 결의안이 아니라 활동과 활동의 결과에 근거해서 검증하는 것이다. 정책은 활동과 그 결과에 근거해야만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신뢰를 얻을 수 있으며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혁명투쟁을 위해 대중을 훈련시키고 준비시키기 위해 모든 당사업을 새로운 혁명노선에 따라 재조직하는 것. 왜냐하면 오직 이 방법으로써만 대중이 혁명투쟁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모든 당 사업을 대중이 혁명을 준비하고 훈련하도록 하는 새로운 혁명적인 방침으로 재조직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대중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로, 프롤레타리아 정당 내부의 자기비판, 당 자신의 오류를 기초로 한 교육과 훈련. 왜냐하면 오직 이 방법으로써만 당의 정예 간부와 지도자가 훈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프롤레타리아 당들이 내부로부터 자기비판을 하는 것이다. 즉 자체의 과오를 교훈으로 삼아 훈련 교육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당의 참된 간부와 참된 지도자를 육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레닌주의 방법의 기초이자 실체이다.


이것이 레닌주의 방법의 기본이며 본질이다.


이 방법은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었는가?


이 방법이 실제 문제에 어떻게 적용되었을까?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들은 그들이 항상 출발점으로 삼는 많은 이론적인 도그마들을 갖고 있다. 이 중 몇 개를 살펴보자.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들이 항상 이론적 출발점으로 삼는 많은 이론적 도그마가 있다. 그중 몇 개를 살펴보자.


첫번째 도그마: 프롤레타리아트 권력획득조건과 관련하여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국가 내에서 다수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권력을 잡을 수 없고 또 잡아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 터무니없는 명제는 이론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없으므로 아무런 증거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치고,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의 신사양반들에게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그런데 주민의 소수를 차지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근로대중의 광범한 다수를 자신의 주위에 결집시키는 기회를 갖게 되는 역사적 상황이 발생(전쟁⋅농업공황)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경우에 왜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아서는 안 되는가? 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의 정면을 돌파하고 종말을 앞당기기 위해 국내외적인 유리한 상황을 활용해서는 안 되는가? 마르크스는 지난 세기의 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독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뒷받침할 수 있는, 말하자면 "제2차 농민전쟁"1이 가능하다면 "훌륭하게" 진행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 당시 독일의 프롤레타리아의 수가 예컨대 1917년 러시아보다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실제 경험은 제2 인터내셔널의 영웅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 도그마가 프롤레타리아에게 중요한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대중의 혁명적 투쟁의 실천적 경험이 이 쓸모없는 도그마를 반박하고 분쇄한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첫 번째 도그마: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장악할 조건에 관한 것이다. 기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자기 나라에서 다수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에는 권력을 잡을 수 없고 잡아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을 논증할 어떠한 증거도 제출된 바 없다.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이 황당한 명제를 입증할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레닌은 제2 인터내셔널 신사 양반들에게 이렇게 대응한다. 가령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만일 주민의 소수를 이루는 프롤레타리아가 대다수의 근로대중을 자기 주위에 결집시키는 역사적 정세(전쟁, 농업공황 등등)가 조성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에 왜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아서는 안 되는가? 왜 프롤레타리아가 자본 전선을 돌파하여 전반적으로 종말을 가속하는 유리한 국내외 정세를 이용해서는 안 되는가? 일찍이 맑스는 1850년대에 이른바 “농민전쟁의 재판”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뒷받침될 수 있었더라면 독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훌륭하게” 되었을 것<ref>K. 맑스, ≪맑스 엥겔스 저작 선집≫ 제2권, 박종철출판사, p. 512.</ref>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당시 독일의 프롤레타리아 수가 예컨대 1917년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수보다 비교적 적었던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가 아닌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실천적 경험이 제2 인터내셔널의 영웅들이 즐기는 이런 도그마가 프롤레타리아에게는 하등의 실제적 의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대중은 혁명투쟁의 실천을 통해 이 낡아 빠진 도그마의 잘못을 증명하고 쳐부셔 버린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두 번째 도그마: 만일 국가 행정을 조직할 수 있는 적절한 수의 훈련된 문화적 행정적 간부가 부족하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장악할 수 없고, 먼저 자본주의 조건 아래에서 훈련을 받아야 하며, 그 후에만 권력을 잡을 수 있다. 레닌은 응수한다: 그런데 왜 순서를 바꾸면 안 되는^가. 즉 먼저 권력을 잡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에 유리한 조건을 창출하고 그런 연후에 7리그의 걸음걸이로 나아가 근로대중의 문화적 수준을 향상시키고 노동자들 가운데에서 지도자와 행정가와 같은 수많은 간부를 훈련시키면 안 되는가? 러시아의 경험은 노동자층으로부터 뽑힌 지도간부들이 자본의 지배 아래에서보다 프롤레타리아의 지배 아래에서 백배 더 신속하게 또한 효과적으로 계발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분명히 대중들의 혁명투쟁의 실제적 경험은 기회주의자들의 이러한 이론적 도그마 또한 가치 없이 타파하고 있지 않은가?


두 번째 도그마: 프롤레타리아트가 나라를 관리할 준비된 문화 간부와 행정 간부를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다면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선 자본주의의 조건하에서 간부를 육성한 다음에야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레닌의 대응은 이렇다. 가령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반대로 우선 권력을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먼저 조성하면 왜 안 되는가? 유리한 조건에서 근로 대중의 문화 수준을 높이고 노동자 출신의 수많은 지도 간부와 행정 간부를 육성하는 일을 급속히 추진하면 왜 안 되는가? 러시아에서의 경험은 노동자 출신의 지도 간부들이 자본의 지배하에서보다 프롤레타리아 권력하에서 백배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자라난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대중은 혁명투쟁의 실천을 통해 이러한 교조적 이론 역시 사정없이 쳐부셔 버린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세 번째 도그마: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총파업이라는 방법을 택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론적으로 불건전하고(엥겔스의 비판을 보라) 실천적으로 위험하며(그것은 국가의 정상적인 경제생활과정을 교란시킬지도 모르고, 노동조합의 재원을 고갈시킬지도 모른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의 주요형태인 의회주의적 투쟁형태의 대안으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좋다. 레닌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그런데 첫째로, 엥겔스는 모든 류의 총파업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직 총파업의 특정 종류, 즉 무정부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투쟁 대신에 주장하던 경제적 총파업을 비판했다. 이것이 정치적 총파업 방식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둘째로, 의회투쟁의 형태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요한 투쟁형태라는 것은 어디서, 누구에 의해 증명된 적이라도 있었던가? 혁명운동사도 의회투쟁이 단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회외적인 투쟁을 조직화하기 위한 학교이자 보조수단이며, 자본주의하에서 노동계급운동의 근본문제는 힘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직접적 투쟁과 총파업, 그들의 봉기에 의해서 해결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셋째로, 정치적 총파업 방식이 의회투쟁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누가 제안했던가? 언제 어디서 정치적 총파업의 지지자들이 의회적 형태를 의회외적 투쟁형태로 대체하려고 했던가? 넷째, 러시아의 혁명은 정치적 총파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극히 중요한 학교이자 자본주의의 아성을 공격하는 전야에 프롤레타리아트의 광범위한 대중을 동원하고 조직하는 불가결한 수단이라는 점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속물들은 정상적 경제생활과정의 교란이나 노동조합재원에 대해 비탄해마지 않는가? 분명히 혁명투쟁의 실제적 경험은 기회주의자들의 이러한 도그마마저 박살내고 있지 않은가?


세 번째 도그마: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총파업이라는 방법을 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 총파업은 이론적으로 근거가 희박하고(엥겔스의 비판) 실천적으로 위험하며(그것은 국가의 경제생활의 정상적인 진행을 교란시킬 수 있으며 노동조합의 기금을 고갈시킬 수 있다) 또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요한 계급투쟁 형태인 의회투쟁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레닌주의자들은 이렇게 대응한다. 좋다. 그런데 먼저 엥겔스는 총파업의 모든 종류를 비판한 것이 아니다. 일정한 종류의 총파업만을 비판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투쟁 대신에 내세운 경제적 총파업만을 비판했다. 이것과 정치적 총파업을 택할 수 없다는 것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둘째로, 의회투쟁 형태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주된 투쟁 형태라는 것을 누가 어디서 증명했단 말인가? 혁명운동의 역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의회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회 밖에서의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학교이거나 보조수단에 불과하지 않는가? 또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운동의 기본 문제는 힘으로,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직접적인 투쟁으로, 총파업으로, 봉기로 해결해 오지 않았는가? 셋째로, 어느 누가 정치적 총파업이 의회투쟁을 대체한다고 하였단 말인가? 어느 곳에서 그리고 언제 정치적 총파업 지지자들이 의회 밖에서의 투쟁으로 의회투쟁을 대체하려고 시도했단 말인가? 넷째로, 러시아 혁명은 정치적 총파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가장 위대한 학교임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자본주의 아성을 공격하는 전야에 프롤레타리아트를 광범위하게 동원하고 조직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수단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정치적 총파업이 경제생활의 정상적인 진행을 교란한다느니 노동조합의 기금을 탕진한다느니 하는 속물적 한탄을 하는 것인가? 혁명투쟁의 실천적 경험은 역시 기회주의자들의 이러한 도그마도 분명히 박살내 버리지 않는가?


등등..


다른 것들도 역시 이와 같다.


레닌이 "혁명 이론은 교리가 아니다"라고 말한 이유, "진정한 대중적이고 진정한 혁명적 운동의 실천 활동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만 최종적인 형태를 취한다"('좌익' 공산주의3), "이론은 실천에 봉사해야 한다"('민중의 친구'란 무엇인가4), "실천이 제기하는 질문에 이론은 반드시 대답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 실천의 결과에 의해 검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레닌은 “혁명적 이론은 … 도그마가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대중적이고 참으로 혁명적인 운동의 실천 활동과 긴밀한 연결 속에서만 최종적으로 형성된다”(≪좌익 소아병≫)라고 하였다.<ref>V. I.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김남섭 역, 돌베개, 1992, p. 19. (이하 인용된 모든 번역은, 역자가 다시 번역한 것이다.)</ref> 이론은 실천에 이바지해야 하며 “이론은 실천이 제기하는 문제에 답해야 하기” 때문이며(≪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ref> V. I. 레닌, ≪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 김우현 역, 벼리, 1988, p. 170.</ref> 이론은 반드시 실천의 결과에 의해 검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2 인터내셔널 정당의 정치적 구호와 정치적 결의에 관해서는, 화려한 혁명적 구호와 결의를 사용하여 반혁명적 행위를 은폐하는 이들 정당의 정치적 관행이 얼마나 완전히 거짓이고 완전히 부패했는지 깨닫기 위해 "전쟁 반대"라는 슬로건의 역사를 회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 모두는 바젤 대회에서 제2 인터내셔널의 화려한 시위를 기억한다. 제국주의자가 감히 전쟁을 시작해야한다면 반란의 모든 공포와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이라는 위협적인 구호로 제국주의자를 위협했다. 그러나 얼마 후 전쟁 직전에 바젤 결의안이 비둘기처럼 사라지고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 조국의 영광을 위해 서로를 몰살시키자는 새로운 구호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혁명적 구호와 결의는 행동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한 한 푼의 가치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기회주의적 정치가들의 지독한 천박성과 레닌주의의 방법이 지닌 완벽한 위대성을 이해하려면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시킨 레닌주의 정책을 전쟁기간 동안의 ‘제2인터내셔널’이 취한 변절적 정책과 대조해 보기만 해도 된다.


제2 인터내셔널 정당들의 정치적 슬로건과 정치적 결의에 관해서는 “전쟁에는 전쟁으로”라는 슬로건의 이력을 돌이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슬로건은 제2 인터내셔널 정당들의 실천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들은 화려한 슬로건이나 결의로 자신의 반혁명적 행동을 위장한다. 제2 인터내셔널은 바젤 대회<ref>제2 인터내셔널의 바젤 대회는 1912년 11월 24‒25일에 개최되었다. 대회는 발칸 전쟁과 임박한 세계대전의 위협에 관련하여 소집되었다. 국제 정세와 전쟁에 반대하는 공동행동이라는 문제만이 토론되었다. 대회는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선언문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과 힘을 사용하여 전쟁의 위험에 반대하는 혁명 투쟁에 나설 것과 “전쟁에는 전쟁으로”를 선언하라고 노동자에게 호소하였다.</ref>에서 보란 듯이 시위를 벌였다. 제국주의자들이 감히 전쟁을 시작한다면 끔찍한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들이 제출한 슬로건은 무시무시한 “전쟁에는 전쟁으로”였다. 그러나 얼마 후 전쟁이 임박하자 바젤 결의를 묵살하고 새로운 슬로건을 제시했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조국의 영광을 위해 서로 죽이라는 슬로건이다. 이것을 누가 잊어버리겠는가? 혁명적 슬로건이나 결의가 행동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한 푼의 가치도 없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는가? 전쟁 당시 제2 인터내셔널의 배신적 정책과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시키라는 레닌의 정책을 비교해 보라. 기회주의 정상배들이 얼마나 너절한지, 레닌주의 방법이 얼마나 위대한지 능히 알 수 있다.


이 시점에서 레닌의 저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의 한 구절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는데,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 K. 카우츠키가 정당을 행동이 아닌 종이 슬로건과 문서로 판단하려는 기회주의적 시도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여기서 레닌의 저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의 한 구절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레닌은 제2 인터내셔널의 지도자 카우츠키가 당을 실제 행동이 아니라 종이 위에 쓰인 구호나 문서로 판단하려는 기회주의적 시도를 하는 것을 호되게 질책했다.


"카우츠키는 슬로건을 내세우면 입장이 바뀌는 것처럼 가장함으로써 전형적인 쁘띠부르주아적이고 속물적인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전체 역사는 이러한 환상을 반박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항상 국민을 속이기 위해 온갖 종류의 '슬로건'을 발전시켜 왔고 지금도 발전시키고 있다. 요점은 그들의 진정성을 시험하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비교하고, 이상주의적이거나 허황된 문구에 만족하지 않고 계급 현실로 내려가는 것이다."(제23권, 377쪽 참조).
{{인용문|카우츠키는 마치 슬로건만 제출하면 사태가 변하는 듯이 생각하면서 … 전형적인 소부르주아적이고 속물적인 정책을 추구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전체 역사는 이런 환상의 잘못을 드러낸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인민을 속이기 위해 온갖 ‘구호’를 제출하여 왔다. 저들의 속셈을 검토하고, 말과 행동을 비교해 봐야 한다. 문제는 관념적이며 기만적인 빈말에 만족하지 말고 계급적 실체까지 파고들어 가야 한다. (≪레닌 저작집≫ 제23권, p. 377을 보라.)<ref> V. I.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허교진 역, 소나무, 1991, p. 88.</ref>}}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이 자기비판에 대한 두려움, 실수를 감추고, 성가신 질문을 덮어버리고, 기만적인 잘난 척으로 자신의 단점을 은폐하는 습관, 살아있는 사고를 무디게 하고 당이 자신의 실수로부터 혁명적 훈련을 이끌어내는 것을 막는 습관, 레닌이 조롱하고 비웃었던 습관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레닌은 "좌익" 공산주의라는 팸플릿에서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자기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제2 인터내셔널의 당은 자기비판을 두려워하며 잘못을 숨긴다. 곤란한 문제는 얼버무리고 만사가 잘되고 있다고 속이면서 결점은 숨긴다. 이것은 생기 있는 사상을 무디게 하며 당이 잘못을 통해 훈련되는 것을 방해한다. 레닌이 조롱하고 호되게 질책한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레닌은 소책자 ≪좌익 소아병≫에서 프롤레타리아 당의 자기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정당이 자신의 실수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정당이 얼마나 진지한지, 그리고 실제로 계급과 투쟁하는 대중에 대한 의무를 어떻게 이행하는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방법 중 하나이다.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원인을 규명하고, 그 실수를 초래한 상황을 분석하고, 그 실수를 바로잡는 수단을 철저히 논의하는 , 그것이 진지한 정당의 의무이며, 그것이 의무를 수행하는 방식이며, 계급과 대중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방식이다"(제25권, 200면 참조).  
{{인용문|당 자신의 오류에 대한 당의 태도는 당이 참으로 진실한가와 자기 계급과 근로대중에 대한 의무를 실제 문제로 수행하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규준의 하나이다. 오류를 솔직히 시인하는 것, 오류의 원인을 밝혀내는 것, 오류를 낳게 한 환경을 철저히 분석하는 것, 오류를 시정할 수단을 주의 깊게 연구 토의하는 ―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당의 징표이다. 이것이야말로 당이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방식이다. 이것이야말로 계급 및 대중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방식이다. (≪레닌 저작집≫ 제25권, p. 200을 보라.)<ref>V. I.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p. 60.</ref>}}




어떤 사람은 당이 자신의 오류를 드러내고 자기비판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당에 대항하는 적에 의해 이용될지^도 모르므로 당에 위험하다고 말한다. 레닌은 그런 주장은 사소하고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 당이 아직 유약하고 소규모였던 1904년 이미 레닌은 그의 팜플렛 「일보전진, 이보후퇴」에서 이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 물론 그들은 우리 당의 약점과 결점을 다룬 나의 팜플렛으로부터, 고립된 구절들을 뽑아내어 이를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 애쓸 것이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 성가신 것들에 동요되지 않을 만큼, 그리고 그런 것들에 아랑곳없이 자기비판작업과 또 노동계급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의심의 여지없이 필연적으로 극복되어질 그들 자신의 결점에 대해 가차 없는 폭로작업을 계속할 만큼 이미 전투 속에서 충분히 단련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당이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고 자기비판하면 당에 위험하다고 한다. 당의 적들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닌은 이런 반대 의견은 어리석고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간주했다. 레닌은 우리 당이 아직 약소했을 때인 1904년에 소책자 ≪일보전진 이보후퇴≫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이러한 것은 일반적으로 레닌주의 방법의 특징이다.
{{인용문|그들<ref>즉 맑스주의자의 적들 -- '''필자의 주'''</ref>은 우리의 논쟁을 보고 고소해 하며 기뻐 날뛴다. 그들은 우리 당의 결함과 단점을 다룬 나의 소책자에서 앞뒤 문맥과 상관없이 개별적 구절을 뽑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당원은 이미 투쟁 속에서 강철같이 단련되었다. 이런 사소한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비판을 수행하며 자신의 결함을 냉철하게 폭로해 갈 것이다. 이 결함들은 노동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확실하게 그리고 반드시 극복될 것이다. (≪레닌 저작집≫ 제6권, p. 161을 보라.)<ref>V. I. 레닌, ≪일보전진 이보후퇴≫, 홍수천 역, 풀무질, 1995, p. 15.</ref>}}




레닌의 방법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맑스 자신에 따르자면 ‘본질적으로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맑스의 교의에 이미 주요한 점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레닌의 방법에 시종일관 가득 차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정신이다. 그러나 레닌의 방법이 단순히 맑스의 방법의 복원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실 레닌의 방법은 단지 복원일 뿐 아니라 맑스의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방법, 즉 유물변증법의 구체화이자 가일층의 발전이기도 하다.
대체로 이상과 같은 것이 레닌주의 방법의 특징들이다.
 
 
레닌의 방법적 원리는 기본적으로 맑스의 가르침에 이미 있다. 그 가르침은 맑스의 말대로 “본질적으로 비판적이며 혁명적인”<ref>K. 맑스, ≪자본론≫ 제1권(상), 김수행 역, 2015, p. 19.</ref> 것이다. 레닌의 방법은 바로 이 비판적이며 혁명적인 정신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다. 그러나 레닌의 방법이 맑스의 방법을 단순히 복원한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사실 레닌의 방법은 맑스의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방법, 즉 유물 변증법을 복원한 것일 뿐 아니라 구체화하고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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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3일 (일) 18:46 기준 최신판


레닌주의의 기초
II. 방법

위에서 맑스 엥겔스로부터 레닌에 이르는 사이에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가 온전히 지배한 시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기회주의가 형식적으로 지배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지배한 시기이다. 형식적으로는 “충실한” 맑스주의자이며 “정통파”인 카우츠키 등이 제2 인터내셔널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기회주의적 노선이 제2 인터내셔널의 주요 활동을 지배하였다. 기회주의자들은 타협하려는 소부르주아적 본성으로 말미암아 부르주아지에게 순응하였다. “정통파”는 “통일 유지”요, “당내 평화”요 하면서 기회주의자들과 타협하였다. 그래서 부르주아지의 정책과 “정통파”의 정책이 서로 연결되었다. 그 결과 기회주의가 궁극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가 비교적 평화롭게 발전하던 시기였다. 말하자면 전쟁 이전 시기로 제국주의의 파국적 제 모순이 아직 낱낱이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경제적 파업과 노동조합은 다소간 “정상적으로” 발전하였다. 선거투쟁과 국회의원단은 “현기증 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투쟁의 합법적 형태가 찬미되었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합법적인 수단으로 “죽이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한마디로 말해 제2 인터내셔널은 편하게 살고 있었다. 혁명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혁명적 대중교육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이들은 정연한 혁명적 이론 대신에 모순투성이의 가정과 단편적 이론을 내세웠다. 이것은 대중의 살아 움직이는 혁명적 투쟁과 유리되었고 낡아 빠진 도그마로 변하였다. 물론 겉으로는 맑스의 이론을 말하였지만 그 목적은 맑스의 이론에서 혁명적 정수를 거세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혁명적 정책을 실시하는 대신에 속물근성으로 맥 빠진 채 우유부단하였고, 야비한 정치적 타협, 의회주의적 흥정과 권모술수를 획책하였다. 물론 겉으로는 “혁명적” 결의안와 슬로건을 채택하였다. 하지만 그 목적은 그 결의안과 슬로건을 서류함 속에 파묻어 묵살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과오를 교훈으로 삼아 옳은 혁명적 전술로 당을 교육하고 훈련할 대신에 절실한 문제를 그럴듯한 말로 얼버무리거나 감추어 일부러 회피하였다. 물론 겉으로는 절실한 문제를 토론하는 데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 목적은 소위 “탄력적인” 결의안으로 적당히 해치우려는 데 있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제2 인터내셔널의 진면목이고 활동 방식이며 무기들이었다.


이런 가운데 제국주의 전쟁과 노동계급이 혁명적으로 전투해야 할 새로운 시기가 다가왔다. 낡은 투쟁 방법은 금융자본의 무한권력과 투쟁하기에는 적당하지 않고 무기력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제2 인터내셔널의 활동 전체와 사업 방식 전반을 재검토하고 속물적 우유부단, 편협성, 권모술수, 변절, 사회쇼비니즘과 사회평화주의를 몰아내는 것이 필요하였다. 제2 인터내셔널의 무기들을 모두 점검하여 녹쓸고 낡은 것은 모조리 버리고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내야 했다. 사전준비 없이 자본주의와의 전쟁에 나선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모한 짓이다. 사전준비 없이는 새로운 혁명전투에 직면해서 노동계급이 무장력의 부족을 느끼거나 심지어 완전히 무장해제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제2 인터내셔널의 아우게이아스 마구간[1]을 전반적으로 혁신하고 대청소하는 영광은 레닌주의의 어깨 위에 떨어졌다.


이러한 환경에서 레닌주의의 방법이 생겨나고 단련되었다.


레닌주의 방법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제2 인터내셔널의 교조적인 이론을 대중의 혁명투쟁과 살아있는 실천이라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 검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파괴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회복하고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혁명 이론으로 무장한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적 당을 창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제2 인터내셔널 정당의 정책을 믿을 수 없는 슬로건이나 결의안이 아니라 활동과 활동의 결과에 근거해서 검증하는 것이다. 정책은 활동과 그 결과에 근거해야만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신뢰를 얻을 수 있으며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 모든 당 사업을 대중이 혁명을 준비하고 훈련하도록 하는 새로운 혁명적인 방침으로 재조직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대중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프롤레타리아 당들이 내부로부터 자기비판을 하는 것이다. 즉 자체의 과오를 교훈으로 삼아 훈련 교육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당의 참된 간부와 참된 지도자를 육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레닌주의 방법의 기본이며 본질이다.


이 방법이 실제 문제에 어떻게 적용되었을까?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들이 항상 이론적 출발점으로 삼는 많은 이론적 도그마가 있다. 그중 몇 개를 살펴보자.


첫 번째 도그마: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장악할 조건에 관한 것이다. 기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자기 나라에서 다수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에는 권력을 잡을 수 없고 잡아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을 논증할 어떠한 증거도 제출된 바 없다.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이 황당한 명제를 입증할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레닌은 제2 인터내셔널 신사 양반들에게 이렇게 대응한다. 가령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만일 주민의 소수를 이루는 프롤레타리아가 대다수의 근로대중을 자기 주위에 결집시키는 역사적 정세(전쟁, 농업공황 등등)가 조성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에 왜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아서는 안 되는가? 왜 프롤레타리아가 자본 전선을 돌파하여 전반적으로 종말을 가속하는 유리한 국내외 정세를 이용해서는 안 되는가? 일찍이 맑스는 1850년대에 이른바 “농민전쟁의 재판”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뒷받침될 수 있었더라면 독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훌륭하게” 되었을 것[2]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당시 독일의 프롤레타리아 수가 예컨대 1917년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수보다 비교적 적었던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가 아닌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실천적 경험이 제2 인터내셔널의 영웅들이 즐기는 이런 도그마가 프롤레타리아에게는 하등의 실제적 의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대중은 혁명투쟁의 실천을 통해 이 낡아 빠진 도그마의 잘못을 증명하고 쳐부셔 버린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두 번째 도그마: 프롤레타리아트가 나라를 관리할 준비된 문화 간부와 행정 간부를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다면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선 자본주의의 조건하에서 간부를 육성한 다음에야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레닌의 대응은 이렇다. 가령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반대로 우선 권력을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먼저 조성하면 왜 안 되는가? 유리한 조건에서 근로 대중의 문화 수준을 높이고 노동자 출신의 수많은 지도 간부와 행정 간부를 육성하는 일을 급속히 추진하면 왜 안 되는가? 러시아에서의 경험은 노동자 출신의 지도 간부들이 자본의 지배하에서보다 프롤레타리아 권력하에서 백배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자라난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대중은 혁명투쟁의 실천을 통해 이러한 교조적 이론 역시 사정없이 쳐부셔 버린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세 번째 도그마: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총파업이라는 방법을 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 총파업은 이론적으로 근거가 희박하고(엥겔스의 비판) 실천적으로 위험하며(그것은 국가의 경제생활의 정상적인 진행을 교란시킬 수 있으며 노동조합의 기금을 고갈시킬 수 있다) 또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요한 계급투쟁 형태인 의회투쟁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레닌주의자들은 이렇게 대응한다. 좋다. 그런데 먼저 엥겔스는 총파업의 모든 종류를 비판한 것이 아니다. 일정한 종류의 총파업만을 비판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투쟁 대신에 내세운 경제적 총파업만을 비판했다. 이것과 정치적 총파업을 택할 수 없다는 것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둘째로, 의회투쟁 형태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주된 투쟁 형태라는 것을 누가 어디서 증명했단 말인가? 혁명운동의 역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의회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회 밖에서의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학교이거나 보조수단에 불과하지 않는가? 또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운동의 기본 문제는 힘으로,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직접적인 투쟁으로, 총파업으로, 봉기로 해결해 오지 않았는가? 셋째로, 어느 누가 정치적 총파업이 의회투쟁을 대체한다고 하였단 말인가? 어느 곳에서 그리고 언제 정치적 총파업 지지자들이 의회 밖에서의 투쟁으로 의회투쟁을 대체하려고 시도했단 말인가? 넷째로, 러시아 혁명은 정치적 총파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가장 위대한 학교임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자본주의 아성을 공격하는 전야에 프롤레타리아트를 광범위하게 동원하고 조직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수단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정치적 총파업이 경제생활의 정상적인 진행을 교란한다느니 노동조합의 기금을 탕진한다느니 하는 속물적 한탄을 하는 것인가? 혁명투쟁의 실천적 경험은 역시 기회주의자들의 이러한 도그마도 분명히 박살내 버리지 않는가?


다른 것들도 역시 이와 같다.


바로 이 때문에 레닌은 “혁명적 이론은 … 도그마가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대중적이고 참으로 혁명적인 운동의 실천 활동과 긴밀한 연결 속에서만 최종적으로 형성된다”(≪좌익 소아병≫)라고 하였다.[3] 이론은 실천에 이바지해야 하며 “이론은 실천이 제기하는 문제에 답해야 하기” 때문이며(≪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4] 이론은 반드시 실천의 결과에 의해 검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2 인터내셔널 정당들의 정치적 슬로건과 정치적 결의에 관해서는 “전쟁에는 전쟁으로”라는 슬로건의 이력을 돌이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슬로건은 제2 인터내셔널 정당들의 실천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들은 화려한 슬로건이나 결의로 자신의 반혁명적 행동을 위장한다. 제2 인터내셔널은 바젤 대회[5]에서 보란 듯이 시위를 벌였다. 제국주의자들이 감히 전쟁을 시작한다면 끔찍한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들이 제출한 슬로건은 무시무시한 “전쟁에는 전쟁으로”였다. 그러나 얼마 후 전쟁이 임박하자 바젤 결의를 묵살하고 새로운 슬로건을 제시했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조국의 영광을 위해 서로 죽이라는 슬로건이다. 이것을 누가 잊어버리겠는가? 혁명적 슬로건이나 결의가 행동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한 푼의 가치도 없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는가? 전쟁 당시 제2 인터내셔널의 배신적 정책과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시키라는 레닌의 정책을 비교해 보라. 기회주의 정상배들이 얼마나 너절한지, 레닌주의 방법이 얼마나 위대한지 능히 알 수 있다.


여기서 레닌의 저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의 한 구절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레닌은 제2 인터내셔널의 지도자 카우츠키가 당을 실제 행동이 아니라 종이 위에 쓰인 구호나 문서로 판단하려는 기회주의적 시도를 하는 것을 호되게 질책했다.


카우츠키는 마치 슬로건만 제출하면 사태가 변하는 듯이 생각하면서 … 전형적인 소부르주아적이고 속물적인 정책을 추구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전체 역사는 이런 환상의 잘못을 드러낸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인민을 속이기 위해 온갖 ‘구호’를 제출하여 왔다. 저들의 속셈을 검토하고, 말과 행동을 비교해 봐야 한다. 문제는 관념적이며 기만적인 빈말에 만족하지 말고 계급적 실체까지 파고들어 가야 한다. (≪레닌 저작집≫ 제23권, p. 377을 보라.)[6]


제2 인터내셔널의 당은 자기비판을 두려워하며 잘못을 숨긴다. 곤란한 문제는 얼버무리고 만사가 잘되고 있다고 속이면서 결점은 숨긴다. 이것은 생기 있는 사상을 무디게 하며 당이 잘못을 통해 훈련되는 것을 방해한다. 레닌이 조롱하고 호되게 질책한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레닌은 소책자 ≪좌익 소아병≫에서 프롤레타리아 당의 자기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당 자신의 오류에 대한 당의 태도는 당이 참으로 진실한가와 자기 계급과 근로대중에 대한 의무를 실제 문제로 수행하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규준의 하나이다. 오류를 솔직히 시인하는 것, 오류의 원인을 밝혀내는 것, 오류를 낳게 한 환경을 철저히 분석하는 것, 오류를 시정할 수단을 주의 깊게 연구 토의하는 것 ―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당의 징표이다. 이것이야말로 당이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방식이다. 이것이야말로 계급 및 대중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방식이다. (≪레닌 저작집≫ 제25권, p. 200을 보라.)[7]


어떤 사람들은 당이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고 자기비판하면 당에 위험하다고 한다. 당의 적들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닌은 이런 반대 의견은 어리석고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간주했다. 레닌은 우리 당이 아직 약소했을 때인 1904년에 소책자 ≪일보전진 이보후퇴≫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8]은 우리의 논쟁을 보고 고소해 하며 기뻐 날뛴다. 그들은 우리 당의 결함과 단점을 다룬 나의 소책자에서 앞뒤 문맥과 상관없이 개별적 구절을 뽑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당원은 이미 투쟁 속에서 강철같이 단련되었다. 이런 사소한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비판을 수행하며 자신의 결함을 냉철하게 폭로해 갈 것이다. 이 결함들은 노동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확실하게 그리고 반드시 극복될 것이다. (≪레닌 저작집≫ 제6권, p. 161을 보라.)[9]


대체로 이상과 같은 것이 레닌주의 방법의 특징들이다.


레닌의 방법적 원리는 기본적으로 맑스의 가르침에 이미 있다. 그 가르침은 맑스의 말대로 “본질적으로 비판적이며 혁명적인”[10] 것이다. 레닌의 방법은 바로 이 비판적이며 혁명적인 정신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다. 그러나 레닌의 방법이 맑스의 방법을 단순히 복원한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사실 레닌의 방법은 맑스의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방법, 즉 유물 변증법을 복원한 것일 뿐 아니라 구체화하고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1. 아우게이아스 마구간은 아우게이아스 왕이 3,000마리의 말을 기른 마구간을 말한다. 매우 더러운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30년 동안 청소하지 않은 아우게이아스 마구간을 헤라클레스가 하루 만에 청소한다.
  2. K. 맑스, ≪맑스 엥겔스 저작 선집≫ 제2권, 박종철출판사, p. 512.
  3. V. I.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김남섭 역, 돌베개, 1992, p. 19. (이하 인용된 모든 번역은, 역자가 다시 번역한 것이다.)
  4. V. I. 레닌, ≪인민의 벗이란 무엇인가≫, 김우현 역, 벼리, 1988, p. 170.
  5. 제2 인터내셔널의 바젤 대회는 1912년 11월 24‒25일에 개최되었다. 대회는 발칸 전쟁과 임박한 세계대전의 위협에 관련하여 소집되었다. 국제 정세와 전쟁에 반대하는 공동행동이라는 문제만이 토론되었다. 대회는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선언문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과 힘을 사용하여 전쟁의 위험에 반대하는 혁명 투쟁에 나설 것과 “전쟁에는 전쟁으로”를 선언하라고 노동자에게 호소하였다.
  6. V. I.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허교진 역, 소나무, 1991, p. 88.
  7. V. I.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p. 60.
  8. 즉 맑스주의자의 적들 -- 필자의 주
  9. V. I. 레닌, ≪일보전진 이보후퇴≫, 홍수천 역, 풀무질, 1995, p. 15.
  10. K. 맑스, ≪자본론≫ 제1권(상), 김수행 역, 2015, p.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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