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의 사건에 대한 국제노동자협회 사무국의 보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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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1936년 7월 19일 이후 안티 파시스트 스페인의 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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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와 그 지속자인 파시즘의 완연한 패배를 보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착취와 계급적 특권이 없는 민주적 정권을 보장할 것이며, 최고로 좋은 의미로의 자유지상주의적 사회로의 길을 활짝 열어줄 것이다.“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와 그 지속자인 파시즘의 완연한 패배를 보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착취와 계급적 특권이 없는 민주적 정권을 보장할 것이며, 최고로 좋은 의미로의 자유지상주의적 사회로의 길을 활짝 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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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7일 (일) 22:18 기준 최신판

제목: 스페인에서의 사건에 대한 국제노동자협회 사무국의 보고
부제: 1936년 7월 19일 이후 안티 파시스트 스페인의 발흥
저자: 국제노동자협회(IWA-AIT)
주제: 스페인 내전, 아나키즘, 반파시스트
출처: https://m.dcinside.com/board/kpd/37659 (흑적기)


스페인에서의 사건에 대한 국제노동자협회 사무국의 보고
1936년 7월 19일 이후 안티 파시스트 스페인의 발흥


스페인이던 어디서건, 민주적 부르주아들은 파시즘을 몰아내는 데에 있어 무능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아사냐 정권은 성직자들과 군인들의 반란을 대비하는 데에 있어 바이마르 공화국이 나치즘에 대비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했다. 한편, 1936년 7월 19일에는 강력한 대중운동이 스페인 군부의 폭동을 막아내는 것을 성공했으며, 만약 반역자 장군들이 사라고사, 팔마, 세비야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다면 그것은 공화국 당국의 실패로 인한 것이었다. 대부분 지역의 반군은 아사냐 정권에서 가장 가차 없이 박해됐던 혁명적 노동자들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인해 격퇴됐다. 스페인 혁명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연합체는 바로 CNT이었다. 그들의 전술은 7월 19일 카탈루냐에서의 승리를 가져왔다. 스페인 경제에 매우 중요한 지역들에서의 노동자들의 승리는 파시즘에 대항한 전쟁을 진지하게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었다.

거리에서의 승리 이후, 인민의 민병대 부대들은 반군에게 점령당했거나 위협을 받고 있는 다른 지역으로 전진했고, 후방에서는 경제생활에 대한 사회변혁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노동조합이었다. 스페인에서의 사회변혁은 아래에서부터 시작됐으며, 이는 노동자들이 지역 경제조직의 방향을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었다. 국가에게 남은 기능은 이미 실현된 사실을 승인하는 것뿐이었다.


아나키스트들과 생디칼리스트들의 위치

그 순간의 가능성을 보고, CNT는 자신들의 목표인 자유지상주의적 공산주의를 즉각 실현하겠다고 선언했다. CNT는 신디케이트와 노동조합을 통해 대규모 중규모 산업시설들을 집산화하는 데에 착수했고, 구 국가체제를 노동조합 통제 하의 새로운 경제, 정치, 문화적 유기체로 교체함을 선언했다. 이 문제에 대한 CNT의 입장은 7월 19일 이전에 확실히 정해져 있었지만, CNT만으로는 이 책무를 이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목표들이 이행될 수 있도록 아나키즘적 노동조합과 사회주의적 노동조합 (CNT와 UGT) 의 혁명적 동맹이 제안되었다. CNT는 UGT가 7월 19일 이전에는 카탈루냐에서 주로 활동하는 노동조합이 아니었으며, 그 이후에는 온건한 프롤레타리아들과 하위중산층 전체의 피난처가 됐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모든 위원회에서 자신들과 동등한 대표권을 부여했다.

마드리드 목전에서 전투가 격화되고 수도를 방어하는 것이 전쟁의 매우 중요한 점이 되었을 때 (사회주의자들과 부르주아들의 정부는 발렌시아로 떠남), CNT는 중앙정부를 대체하는 방위위원회를 형성할 것을 요구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CNT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파시즘에 맞선 인민의 단결을 원했으며, 그러한 연합을 결성하는 것이 자신들의 책무라고 여겼다. 인민의 연합이 파시즘에 맞서는 것을 더 촉진시기 위해 CNT는 스스로의 전술을 제쳐두고 중앙정부에 대표되기로 동의했다. 마드리드의 노동자들은 파시즘으로 향하는 길을 막기 위해 두 번째로 결집했으며, 마드리드는 구원됐다.

7월 19일 이후, CNT는 희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최고의 무장조직들이 전선에서 죽어나갔으며, CNT는 자신들의 사회적 목적을 무조건 즉각 실현하라 주장하지도 않았다. 강력한 혁명조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페인 대부분 지역에서 쉽게 행해질 수 있었던 그들의 독재체제 형성도 하지 않았다. CNT는 CNT를 적대조직으로 간주하며 그렇게 취급하던 다른 반파시스트 조직들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전통적 원칙인 자유와 자유롭고 자발적인 협력에서 일관되게 영향을 받았다. CNT의 사심없음, 다른 자들에 대한 관용적인 면과 일단 양보하려는 자세, 그들의 목표를 향한 압박감은 구체제의 직업 정치인들 (공화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에게 약하다는 표시로 비춰졌으며, 그들은 이를 자신들의 정치적 계획을 밀어붙이고, 노동자들의 경제생활에 대한 직접적 영향력을 줄이고, 오래된 특권들을 부활시키기 위해 이용했다. 그리고 노동자들, 특히 카탈루냐에서는 불만이 커져갔다. 그것이 아나키스트들이 그들의 힘과 이해하려는 의지를 보였던, 5월 3일에서 6일까지 이어진 비극적인 일들의 근원이었다.


CNT가 만든 길

CNT는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전체주의적 국가나 독재적 성향을 갖춘 인물의 몇몇 정당의 책무가 아니라 생산자와 소비자들의 경제조직의 책무라고 여겼다. CNT가 7월 19일 이후로 다른 반파시스트 집단에 대한 이해를 하는 정책을 펼치고 공통의 정책이 실행될 수 있도록 수많은 희생을 했던 것은, 이러한 방식이 자유지상주의적이고 반독재적인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 방식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관용, UGT와의 화해는 건설적인 성향을 띠었고 긍정적 목표를 향해있었다.

“사회주의적인 면에서 국가 경제의 재건을 위해 그렇게까지 열정을 가지고 행동하는 조직은 없다.” 라고 CNT의 발렌시아 지역 기관지인 Fragua Social에서는 썼다.

“집산화의 움직임은 부르주아들이 그들의 경제적 힘을 잃은 순간부터 급격하게 추진되었다.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들은 공장, 사유지, 광산, 운송수단을 장악했다. 이는 노동자들 마음속 성숙한 이념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었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가지게 된 첫 기회에 행정과 국가경제의 방향타를 손에 넣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같은 상황에 놓였지만 스페인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전통이 결여된 또 다른 프롤레타리아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노동조합들에 존재하는 확고한 이념적 기반이 부족했을 것이기에, 그들이 추구해야 할 사회적 목표가 결여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다른 혁명들 (다른 나라들에서의) 때처럼 우리 일반적인 목표의 부재 때문이 아니다. 스페인 프롤레타리아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재건에 있어 초기 단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리의 강력한 대중운동이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의 구체적인 형태로 나아갈 수 있도록 활동을 조직하고 조정해야 한다. 이 책무를 이행하면서 CNT는 한편으로는 산업의 국가적인 연방 현성을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와 군사적인 과제의 달성을 위해 UGT와의 동맹을 체결하는 것을 노력한다. 프롤레타리아는 경제생활을 탄탄하게 조직해야 한다. 고립된 기업들과 특정 지점에 노력을 한정지으려는 시도는 비판받아야 한다. 경제는 산업과 모든 산업들의 협동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우리는 CNT와 UGT 두 다른 노동조합 중 어느 쪽도 그 책무를 홀로 달성할 수 없음 또한 명심해야 한다. 두 단체는 서로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UGT는 CNT에 그들의 의지를 강요할 수 없으며,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는 내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두 가지 형태의 경제구조는 함께 공존할 수 없다.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두 세력들 가운데에서 상호이해를 통해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아냈다. 하지만 이는 전 국가적 차원에서 실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산업들의 연방 창설과 CNT, UGT 간 동맹에 기여함으로서 이베리아 반도 경제의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고 있는데, 이는 지금까지 시도된 모든 사회적 실험과 본질적으로 다르고 우리 사람들의 특별함이라 할 수 있다.”

CNT와 UGT의 협력은 기회주의의 결과가 아닌, 스페인 생디칼리스트들과 아나키스트들의 의지의 표현이다. 그들은 사회혁명을 이루겠다는 목표도, 그들의 자유지상주의적인 열망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 CNT는 1936년 7월 19일 이래로 계속해서 이 길을 밟아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당연하게도 그들의 행보에 장애물을 맞닥뜨렸다. 정치인들의 관료주의와 특권이라는 구체제의 수호자들은 자신들을 자유지상주의 혁명의 반대자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반혁명이 모습을 드러내다

스페인의 혁명적 노동자들에게 파시즘에 맞선 투쟁은 자본가 정권에 맞선 투쟁과 합쳐지기 시작했다. 소위 ‘민주주의 국가’들의 논란 있는 “원조”도, 러시아의 외교적 이득도 CNT의 그런 관점을 돌릴 수는 없었다.

전국의 하류, 중류 부르주아들과 아직 독립하지 못한 장인들, 개량적 조직을 따르는 프롤레타리아들, 그리고 특히나 공산주의자들은 과거의 경제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책을 펼쳐나갔다. 부패한 부르주아 민주정이 파시즘에 맞서는 인민들의 이상으로서 소개되었다. 그리고 파시스트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공화국 당국의 처참한 실패가 일어난 뒤, 중요한 경제 기능을 통제하고 있던 CNT와 UGT 대표들이 참여하고 반파시스트 정당들의 대표들이 종종 참여했던 혁명위원회들은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


모든 권력을 정부로!

좌익, 우익 공화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들고 나오던 슬로건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들은 기나긴 전투와 전투들이 전쟁으로 변모해나가는 것을 이용하여 가장 현대적인 전투 수단과 적절한 군사조직을 만드는 것을 정당화했고, 그것을 노동자들의 혁명적 계획과 구상, 진취성을 막무가내로 제약하는 데에 사용했다. 집산화의 과정에서 남게 된 “쁘띠 부르주아”들에 대한 정의는 더 늘어났다. 농촌의 지주들은 노동자들의 집단농장에 맞서 들고 일어났다. 이러한 다툼들의 예시 중 하나는 발렌시아 정부의 공산주의자 농업부 장관과, CNT와 UGT에 의해 발렌시아 지역의 오렌지 플랜테이션에 형성된 농장 노동자들의 집단농장 간 충돌이었다. 비슷한 사례로 바르셀로나의 CNT조합에 맞서 공급부 장관, 카탈루냐의 혁명적 노동자들이 요구하던 사회화에 반대하고 식료품에 한정된 분배의 사회화를 격렬히 반대하던 제 3 인터내셔널의 추종자들 간 분쟁도 일어났다.


테러 캠페인

이러한 상황은 CNT에 반하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진행됐던 테러 캠페인으로 이어졌다. 중부 (Center) 지역에서는 지난 몇 달간 80명의 아나키스트 동지들이 비겁하게 살해당했다. 마드리드 방위 군정 (이후 폐지됨) 의 공공질서 위원회는 CNT가 다른 곳 보다 강력하지 않은 중부 (Center) 지역에서 가차 없이 CNT에 대한 탄압을 가행했다. 알메리아에서는 민병대 지휘관이었던 아나키스트, 마레토가 투옥된 뒤 수치스럽게 모욕당했다. 그는 5월 3일에서야 겨우 석방되었다. 무르시아에서는 비밀리에 설립된 공산주의자들의 체카가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이미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던 여러 반파시즘적 주민들을 해치웠다. 스페인 대중에게 실질적 영향을 행사한 적이 없고, 스페인인들의 사고방식과는 정반대되는 중앙집권적 이념을 가진 제 3 인터내셔널의 지배욕은 사회주의적 노동조합인 UGT에서 침투의 기회를 찾았다. 발렌시아에 의석을 가지고 있는 UGT 집행위원회는 UGT가 카탈로니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을 문제삼았다. UGT 내에서의 총선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마드리드에서와 같이 아스투리아스에서도 패배했다.

낡은 부르주아 민주정의 수호자들, 즉 자본주의 질서를 선전하는 이들과 CNT를 지지하는 사람들 간의 충돌은 특히 카탈로니아에서 점점 더 폭력적인 양상을 띠었다.


카탈로니아에서의 분쟁 : 피레네 방면에서

이미 3주 동안 계속됐던 지난 카탈로니아에서의 정부의 위기상황 동안 이미 언급된 반대 세력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CNT는 스스로 반대세력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시작했고, 반파시즘 세력의 단결을 위하여 혁명적 노동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몇 가지를 희생시켰다. CNT 조합원들은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임으로서 그들 스스로가 잘 규율되었고 조직되었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동시에 도발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태들이 일어났다.

피레네 방면은 노동자 민병대들로 인해 잘 방어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는 갑자기 노동자 민병대들을 대체하는 병력들로서 수천 명의 병력을 보낸 것이다. 이 병력들 (카라비네로스) 은 몇 달 동안 중앙정부를 통해 신중히 선별되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거의 두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지지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카탈로니아에 도달한 것은 엄청난 충격을 자아냈고, 그들의 전선 배치는 도발행위로 간주되었다. 폭력적인 충돌들이 국경에서 나타났다. CNT와 FAI가 외국인 방문자들조차도 감탄할 정도의 사회, 문화적 성과를 거둔 작고 순수한 아나키스트들의 마을인 푸이그세르다가 새로운 갈등의 중심지가 되었다. 카탈로니아 아나키스트 운동의 대표격 인사 중 하나인 푸이그세르다 인민위원회 위원장 마르틴이 중앙정부의 편에 선 카탈로니아 분리주의자들의 총탄에 쓰러진 것이다.


롤란 코르타다의 죽음

그와 동시에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UGT의 유명한 전투적 활동가였던 롤란 코르타다가 오늘날까지 이어진 모든 수색에도 불구하고 알아내지 못한 누군가들에게 살해당했다. CNT 지역위원회는 성명서를 통해 이와 같은 살인 행위를 비판했다. 그런데 바르셀로나 근교의 몰린스에서 9명의 CNT 조합원이 이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체포됐다. 그들에게서 그 어떤 유죄의 증거도 찾아내지 못하자, 그들은 풀려나게 되었다. 그 뒤로 CNT에 대한 비방이 시작되었다. CNT가 우세했던 농업 중심지에서는 방어를 위한 준비가 시작됐고, 무장된 노동자들에 의해 치안이 유지됐다. 부분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낡은 경찰들이 활동했던 곳에서, 특히 바르셀로나 중심부에서 아나키스트들은 탄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레네 지역에 평온은 다시 돌아왔으며, 바르셀로나의 농업 중심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후, 카탈로니아와 프랑스 국경지대에 배치될 병력을 7월 19일 이전 수준으로 줄이는 것으로 중앙정부와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임의적으로 체포됐던 CNT 조합원들은 석방되었다. 그렇게 잠재적인 갈등은 해결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5월 3일~6일 동안 충돌을 일으켰던 도발행위가 나타났다.

최근 카탈로니아 정부의 장관 구성에서 공공질서와 내부방위에 대한 통제는 좌익 부르주아 정당의 정치인인 아이구아데의 손에 맡겨졌다. 공공질서위원회의 위원장은 공산주의자인 로드리게스 살라스였다. 두 사람 모두 1931년에서 1934년까지 CNT 조합원들을 체포하고 최대한의 유죄판결을 내리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던 정치인이었다. 소인배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과 카탈로니아 분리주의자들은 혁명적 노동자들의 투쟁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에 대한 가장 큰 장애물이라 보았다. 그리고 좌파 부르주아들과 제 3 인터내셔널에 소속되어 있던 카탈로니아 통합사회당 (P.S.U.C) 간의 핵심 원칙 차이는 거의 없었다. 둘 모두 1931년에서 1934년까지 같은 사회적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공화정의 반혁명적 전통을 추구했다. 스페인 치안 안전을 책임지는 조직들에 소속되어 있던 그들의 대표자들은 그들의 정치적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그 힘을 활용했다.

바르셀로나 전화교환국은 CNT와 UGT, 그리고 카탈로니아 정부의 일부 대표단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5월 3일, 아이구아데는 로드리게스 살라스가 지휘하는 강력한 경찰들을 보내어 전화교환국을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경찰들이 건물 위층으로 올라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격렬한 전투가 있었고, 건물 앞에서는 대대적인 시위가 있었으며,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해당 구역의 CNT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동원됐다. “혁명 방위를 위해 거리로!” 와 같은 말들이 그들의 구호였다. 그 즉시 CNT 지역위원회와 정부 사이의 협상장이 조성되었고, 밤중에 서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이구아데와 로드리게스 살라스가 촉발시킨 도발적 행위로 인해 3일 동안 지속된 유혈사태는 카탈로니아 반파시스트 진영의 단결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처음부터 CNT의 태도는 순전히 방어적이었는데, 이는 1936년 7월 이래로 반파시스트 전선을 만들어내고 그 스스로의 큰 희생을 대가로 유지했던 것이 CNT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CNT는 스페인이 가장 위급한 상황 속에서 프랑코, 히틀러, 무솔리니에 맞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스페인 아나키즘 운동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들의 목표와 이상을 보류하기까지 했다.


노동자들과 CNT

5월 3일의 사건들은 카탈로니아의 아나르코-생디칼리슴 운동이 무엇인지 다시금 보여주었다. 7월 19일과 마찬가지로, 수 시간 안에 모든 노동자들이 총동원되었다. 이는 거리에서의 진정한 민중의 의사표명이었다. 도시의 모든 노동자들이 거주하고 노동하는 곳은 CNT의 요새로 전환되었다. 병영, 경찰서, 공화주의 혹은 공산주의 민병대가 있는 곳의 노동자들은 CNT에 지지를 표명하거나 (산스와 산 게르바시오의 경우처럼), 사리아의 공산주의자들의 병영과 같이 중립을 표명했다. 바르셀로나의 노동자들은 CNT와 함께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낡은 경찰들과 부르주아들, 공화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들의 구역과 도심 중심부를 장악하고 있었고, 이는 정확히 그들 정당들의 지지자들이 거주하고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경찰들은 대개 노동자들에 맞서지 않았다. 경찰들 대부분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으며, 대중이 흥분하거나 특정 사건들로 인해 도발행위가 벌어져 유혈사태로 번졌을 때만 극소수의 경찰이 CNT 조합원들과의 싸움에 끌려들어갔다.

총파업은 그 즉시 일어났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는 산업만이 계속 운영되었다. 경찰과 공산주의자들은 몇몇 노동조합 건물을 공격했고, 혁명적 노동자들도 공격받았으며, 노동자들은 경찰 건물, 여러 정당들의 당사들, 개량주의 성향 노동조합의 건물에서 총격을 받았다. CNT 지역위원회 본부는 이 일이 일어나는 며칠 동안 적들의 공격을 받아냈다. 이러한 일들이 있음으로서 CNT는 또 다시 귀중한 동지들을 잃었다. 이탈리아인 아나키스트 베르네리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집에서 체포됐고, 그 다음날 포로가 되어 총살당했다. 1936년 7월 20일, 파시스트들의 총탄에 사망한 프란시스코의 동생 아스카소는 도시 중심부에서 살해당했다. 프란시스코 페레르의 조카는 그의 어머니를 모시고 가던 중 길거리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는 전선에서 부상당하여 지팡이를 짚고 가던 중이었다.

5월 5일에는 위원회가 발렌시아로부터 도착했는데, 이 위원회는 UGT 집행위원회 위원 두 명과 CNT 전국위원회 위원 두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록 이 위원회가 카탈로니아의 다양한 반파시스트 세력과 즉각적으로 교섭하기 시작했지만, 사태를 즉각 진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5월 6일 CNT와 UGT가 노동자들에게 작업을 재개할 것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내건 뒤에는 경찰과 공산주의자들이 CNT 가죽세공노동조합 본부를 타격했으며, 그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것을 파괴했다. 다른 CNT 노동조합 청사들도, 특히나 상수도망이나 유통망을 담당하는 조합의 청사들은 약탈당하거나 파괴되었다. 도시 중심부에서는 다른 반파시스트 조직과 마찬가지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다 허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CNT와 FAI의 조직원들이 체포당하고 무장해제 되어 투옥되기에 이르렀다. 도심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려는 경찰 권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맞섰다. 산스에서는 격렬한 전투 끝에 헌병대 병영들이 점령되었으며, 400명의 경찰병력이 CNT 조합원들에 의해 죄수로서 연행되었다. 병영들에서는 파시스트들과 군주주의자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들은 인도적으로 대우받았고, 평화가 되돌아온 뒤에는 자유를 되찾게 되었는데 이는 CNT가 이런 종류의 사건에서 정규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다시 되돌아온 평온

5월 5일 저녁, CNT 대표 1명, UGT 대표 1명, 좌파 부르주아 정당들 중 하나와 작은 농민정당들 중 하나로 구성된 새로운 카탈로니아 정부가 결성되었다. CNT와 FAI가 내린 명령으로 인해 전투가 중지되고 바리케이드가 해체되자, 발렌시아의 중앙정부는 5000명의 돌격 경비대를 바르셀로나에서 활동하던 카탈로니아 경찰을 대체하기 위해 파견했다.

카탈로니아 자치에 관련된 헌법 조항은 영구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시, 중앙정부가 임시적으로 카탈로니아의 공공질서를 통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아이구아데 장관과 로드리게스 살라스 경찰청장은 해임됐다. 이로서 “공공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CNT와 FAI를 탄압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혁명적 노동자들의 악명 높은 적 두 명은 사라졌다. 경찰력과 반파시스트 순찰대를 통솔하고 발렌시아 중앙정부에 의해 새로 임명된 공공질서를 담당하는 부처의 수장들은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그들의 공직 의무를 다할 것임을 보장했다.

우리는 스페인 공산당과 부르주아 정당들이 편향된 시각으로 스페인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까지 이 일들을 퍼뜨리는 것에 대해 동지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그들이 퍼뜨리는 유언비어에 의하면, “정부에 반대하는” 봉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확신에 가득찬 유언비어는 CNT가 중앙정부는 물론이거니와 카탈로니아 정부에까지 대표단을 파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CNT는 그 자체가 정부의 한 부분이었기에 정부에 맞서 봉기하지도 않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는 CNT의 협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재건해야만 했다. 그 시위와 투쟁은 혁명적 노동자들에 대한 도발행위를 실시하기 위해 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정당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더욱이, 이번 사건은 어떻게 정의하더라도 “무책임한” 선동가들의 짓이 결코 아니었다. 우리의 적들은 CNT의 무장한 전투원뿐만이 아니라 바르셀로나의 노동자들조차도 “무책임” 하다고 성급하게 결론짓고 있다. 5월 3일 오후, 누구든지 이 사태를 목격하고 주목하며, 지난 70년간 스페인 아나키즘 운동에 비방을 가하듯 거짓말을 일부러 하고 있지 않다면, 이번 사태가 자발적인 민중의 움직임이자 우발적으로 일어난 봉기이며, 인민의 격렬한 항의표시였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특정 노동조합에 “트로츠키주의자” 나 파시스트 선동가들이 잠입해있다면서 떠들어대는 자들은, 정작 그들의 확언을 근거하는 그 어떤 사소한 증거도 바르셀로나의 노동자들로부터 찾아낼 수 없었다.


전투가 일어난 날들의 문건들

충돌이 시작되던 때에, CNT와 FAI의 위원회는 카탈로니아의 상황을 묘사하는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주민들에게 발표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카탈로니아에 좋지 않은 분위기가 감돌면서 여러 반파시스트 전선의 동지들과의 신뢰를 유지할 수 없게 됐다. 다른 문제를 제쳐두고서, 전쟁과 혁명에 문제에 있어 카탈로니아 내무부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에 대해 모두에게 알리고자 한다. 혁명이 일어나는 초반에 중앙정부는 법령을 통해 경찰 조직 내에 경찰 세력 안에 있는 파시즘적 요소들을 제거하는 위원회를 만들 수 있도록 했다. 지금 내무부 장관을 맡고 있는 아이구아데가 취임했을 때, 그는 이런 위원회들의 법적인 지위에도 불구하고 위원회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경찰에서 파시스트적 요소가 일관되게 배제되고 있을 때, 카탈로니아에서는 장관과 몇몇 경찰서장, 경찰관들이 협력하여 이러한 모든 조치에 반대했기 때문에 파시스트들이 그들의 직무에 남아있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런 훌륭한 보호조치 덕분에 62명의 헌병대가 제로나 경찰서에서 국경까지 쉽게 도망치는 것을 허용했다. 바르셀로나 경찰서에서는 31명의 경찰관들이 중요한 서류들, 특히 해안 요새화에 대한 서류들을 빼돌려 달아났다. 그런데 이들이 달아나기 몇 달 전, 이들이 이미 파시스트라는 것은 알려져 있었다.”

“마드리드에 소재한 헌병대 중앙사령부는 아우시아스 지역 병영에서 신병 40명이 탈출을 시도했다는 보고를 받은 뒤, 사령부는 카탈로니아 헌병대에서 여전히 현역으로 복무 중에 있는 반동주의 찬동가들과 반동들의 명단을 요구했다. 이러한 자들이 중앙정부의 훈령에 의해 배제되어야 한다고 명령이 내려온 것은 4월 13일이었다. 그러나 카탈로니아의 내무부 장관은 중앙정부가 내린 예편명령을 막았고, 파시스트들이 직위에 남을 수 있도록 용인했다. 동시에 그는 파시스트들을 색출하는 모든 위원회들에 대한 반대 입장을 굳혔다. 한편, 그는 특정 정당들의 지지자들의 지원을 받아, 국가의 억압과 정권의 착취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노동자들을 보호할 최고의 보장책인 CNT와 FAI의 모든 조직원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그 혁명적 힘을 부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했다.


선언문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반파시스트 전선의 자신감 회복을 위하여! 파시즘에 대한 승리를 위하여! 체제적 탄압자인 아이구아데와 로드리게즈에 맞서자! 모든 고위 경찰들에게 죽음을! 사회혁명 만세!“

이 선언문은 CNT와 FAI의 지역위원회, 자유지상주의자 청년단, CNT와 FAI의 바르셀로나 지역위원회가 서명했다.


경찰에 대한 호소

CNT는 노동자들의 적인 아이구아데와 로드리게스 살라스의 통제 아래에 있는 카탈로니아 경찰을 신뢰하지 못하는 중요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한참 충돌이 벌어지는 동안 어떤 두 자유지상주의 단체들은 ”당신들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호소했고, ”이 시위는 당신들을 반혁명적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려는 자들을 향한 것“ 이라고 호소했다. 다음은 방송된 호소문들 중 하나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력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기나긴 거리에서의 무력충돌은 알기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그들은 파시즘과의 투쟁에서 조직원들이 수많은 피와 힘을 쏟아 부은 CNT의 완전한 파괴를 바라고 있다. 그들에게 속지 말라, 경찰관들이여! 당신들도 알고 있듯, 당신들이 근거를 가지고 있듯, CNT와 FAI는 그대들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당신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반파시즘적 대의에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이다. 당신들의 자리는 7월 19일 때와 마찬가지로 민중의 쪽이다.“


CNT 와 FAI, 그리고 트로츠키주의

서로 다른 많은 조직들이 낸 호소문에는 바르셀로나에 평온이 돌아오게 된 뒤에도, 그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반파시스트적 단결을 확립할 필요성에 대한 언급이 대체로 포함되어 있다. 반파시스트 전선에 서 있는 조직에 대한 공격과 고발은 피해가는 편이었다. 5월 3일 바르셀로나에서 일어난 일련의 움직임들은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행동이었고, 몇몇 개인이나 조직의 일은 아니었으며, POUM의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논해보겠다.

공산당은 자신들의 주된 비난대상인 소위 트로츠키주의자 (POUM)에 대해 비난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 POUM은 몇몇 카탈로니아 노동자들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작은 마르크스주의 분파로서, 스탈린주의에 반하는 조직이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공산주의 조직들 사이의 차이점들을 세부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여기지는 않기에, 이 점에 대해서 깊게 논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여러 유기적 형태의 조합주의, 그리고 그 특유의 아나키즘 이념을 통해 CNT는 다른 반파시스트 조직과는 깔끔하고 날카롭게 구분된다.

현재 POUM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1936년까지, 스페인 노동운동이 진보하기 위해서는 아나키즘 운동을 필수적으로 배제해야 한다고 여겼다. CNT와 FAI는 그들과 그 어떤 공통점도 없다. 1936년부터 그 당은 끊임없이 좌경화의 길을 밟았고, 이 내전의 중요성에 대해서 아나키스트들과 기초적인 개념은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세력은 본질적으로 핵심적인 분야에서는 더 이상 동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POUM은 분명 아나르코-생디칼리스트들의 시위에 참여한 것은 맞지만, 그들이 CNT와 함께 도시에서 움직였던 것을 비난하는 모습은 마치 나치가 유대인들을 평화조약, 혁명, 반동 등 모든 것에 대한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는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리는 POUM과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지만, CNT는 그들을 반파시스트 조직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5월 9일, Solidaridad Obrera는 경찰들이 점령한 POUM의 인쇄소를 다시 POUM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며, 이는 이행되었다.

POUM과 함께 움직였던 것,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국제 언론에 퍼진 또 다른 흑색선전이자 비난이다.

이러한 비극적인 헛소문의 또 다른 형식은 이러하다. 이번 사태에서 CNT는 FAI의 아나키스트들에게 통제받는 입장이었는데, CNT가 그 아나키스트들에 반기를 들어 폭력사태를 중단했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완전한 상상일 뿐이다. 5월 3일에서 6일까지 있었던 모든 논의와 토론을 통해 결정된 것들과 작성되고 발표된 선언문들은 바르셀로나의 모든 자유지상주의 운동의 위원회들, CNT 지역위원회와 FAI 지역위원회, 자유지상주의 청년단 지역위원회 등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노동자들의 이 모든 움직임들은 CNT나 FAI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으며, ‘바리다스’ 라고 불리는 도시 노동자 구획으로부터, 인민들 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CNT와 FAI는 거리에서 피비린내 나는 사태가 수그러들 때 까지 노동자들의 대표들과 끊임없이 협상했으며, 종국에는 ”사격 중지“ 라는 공통합의를 내릴 수 있었다. 그 어떤 경우에도 CNT와 FAI 사이의 반대의견이 있을 수는 없었다.


CNT와 FAI에 대한 투쟁가들의 성명

5월 4일 밤, 다양한 반파시스트 조직 대표들의 연설이 방송되었다.

그 중에서도 마리아노.R.벨라스케즈 CNT 전국위원회 서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지들, 아나키스트들, CNT 조합원들, 반파시스트적 노동자들이여. 이 중요한 때에는 7월 19일 때와 같은 태도를 유지하라! 전선에서 절실히 필요로 하는 화약을 단 1온스도 낭비하지 마라! 그대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할 수 없다면, 프랑코는 우리에게 그 자신의 법을 강요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파시즘을 이겨내는 의무 이외의 선택지는 없다. 우리가 이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투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세상은 우리에게 경멸을 표할 것이다.“

세베리노 캄포스 CNT 지역위원회 서기는 5월 10일, Solidaridad Obrera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써냈다.

”우리 카탈로니아의 아나키스트들은 공격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그 누구라도 알 수 있듯, 수세에 놓였으며 방어를 하고 있다. 우리는 후방에서 서로 학살해대는 것이 전선에서 모든 정치적 차이, 노동조합의 다름을 뛰어넘어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를 알고 있으며,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노동자들의 단결을 원한다.“

CNT와 FAI의 잘 알려진 모든 투쟁가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자신들의 주장을 외쳤다. 노동자 구획의 모든 노동자들은 이번 비극적인 사태가 도발행위로 인해 야기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로 인한 깊은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위원회의 결정을 받아들여 바리케이드에서 내려와 노동을 재개했다.


카탈로니아의 현재 상황

서로 다른 반파시스트 조직들 간의 대대적인 싸움은 회피됐다. CNT와 FAI는 그들이 여전히 노동자들이 믿고 있는 유일한 노동자들의 조직이란 것을 충분히 증명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혁명 발전의 적들, 그리고 외세의 비밀요원들에 의해 그들 스스로가 제거되도록 내버려두고자 하는 것 또한 아님을 증명했다.

이 사태의 끝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그 어떤 제재나 처벌도 내려질 수 없고, 내려져서는 안 되며, 내려지도록 해도 안 된다. 하지만 결국에 경찰력에 대한 숙청은 진행되어야 하며, 그 안의 의심스러운 사람들은 배제되어야 한다. 발렌시아 중앙정부가 파견한 경찰병력의 경우에는 모두 반파시스트적 성향을 가진 민병대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은 자원해서 전선에서 싸워왔기에 카탈로니아에서 경찰로서 활동할 자격이 있다. CNT와 FAI는 이전에 ‘Tierra Liberta’ 라는 민병대 부대를 이끌었던 현 카탈로니아 치안당국 수장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일 것이다. 이제 그들은 모든 도발행위가 멈추고, 피해가기를 바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사회혁명에 투신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 칭하는 사람들에 의해 반대당하고 저지당하고 있다. 그렇지만 스페인 사람들이 견뎌낸 거대한 희생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1936년 7월 19일 이전의 정치, 경제적 조건 회복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CNT와 FAI는 인민들에게 본질적인 사회의 변혁과 그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두 조직은 반파시스트 인민들의 공동의 적에 대한 투쟁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그 두 조직의 궁극적 목표는 경쟁이나 폭력으로 실현될 수 없음을 알고 있으며, 지적이고 조직적이면서도 사회-문화적인 창조적 정책의 결실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스페인의 아나키스트 운동은 파괴될 수 없음을 천 번 이상 증명해보였고, 이는 CNT 또한 해당된다. 이들은 수십 년 동안 착취와 억압, 지배의 정권에 맞서 싸워왔다. 스페인의 모든 정부들은 이들을 말살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살인과 체포, 기소도 민중의 자유지상주의적 열망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조용한 음모, 그리고 모든 종류의 국제 언론을 통한, 혹은 국제 언론의 비방 캠페인은 결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파리 주재 스페인 대사인 아라퀴스탄이 그의 힘을 남용하여 군주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의 터무니없는 협력조약에 대해 선전했던 것처럼, 비방하는 사람들은 그 저자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CNT는 그 스스로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으며, 그들이 활동하는 효과는 나날히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원래 소수였던 지역에서의 놀라운 발전도 관찰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전술 또한 개선하고 있다. ”CNT와 UGT, 두 스페인 노동자들의 조직은 서로를 집어삼킬 작정으로 움직여서는 안되며, 합의를 통해 움직여야 한다.“ 라고 말한 오로본 페르난데즈의 충고를 그들은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

혁명적 노동자들의 동맹은 상호이해를 위한 유일한 길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할지 말지에 대한 의문의 여지는 전혀 없다. 이것 이외의 상호이해를 위해 할 수 있는 다른 해결책은 없다.

하지만 상호이해는 어려울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두 조직은 서로를 적으로 여겼으며, 한 조직은 혁명적 대중의 편에 섰고 한 조직은 압제자들 편에 섰기 때문이다. 1933년, 스페인 사회주의자들이 ‘민주주의’ 에 대한 환상을 잃기 시작했을 때 와서야 비로소 몇몇 문제들에 대한 재접근이 가능했다. 그리고 여전히 긍정적 방향의 상호이해를 위해서는 가야 할 길이 멀다.

수많은 부르주아들이 그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두려움과 불안에 떨면서 사회주의적 노동조합으로 피신했다. 스페인에 근거하지 않은 외세가 반파시스트적 스페인과의 연대를 과시하며 이득을 꾀하려 하는 정치적 흐름도 UGT가 퇴보하는 데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NT는 1934년 이래로 CNT조합원들과 함께 같이 탄압을 당했으며, 오늘날에는 프랑코 도적떼들과 함께 맞서고 있는 UGT의 사회주의적 노동자들에게 끊임없이 함께하자 호소하고 있다.


스페인의 핵심적 위치에 있는 CNT

5월 3일부터 5월 6일까지의 비극적인 사태가 있던 이후, Solidad Obrera 바르셀로나 지부는 다음과 같은 글을 펴냈다.

”모든 민중운동은 우리에게 새로운 교훈을 안겨다 준다. 이번에 일어났던 사건들에서 우리는 설령 반대되는 주장이었다 할지라도 카탈로니아 사람들의 저항정신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탈로니아인은 모든 불의에 맞섰다. 아마 이것이 카탈로니아가 이베리아 반도 아나키즘의 요람이면서도 항상 그것을 지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카탈로니아 사람들의 자유지상주의적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전국노동자연합 (CNT) 는 이 반도의 다른 모든 지역에서 그랬듯 이곳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는 인위적으로 이 나라에 이념을 주입하려 시도했던 그 어떤 조직도 성공하지 못한 규모였다. 우리는 이런 사실이 자랑스럽다. 우리가 카탈로니아에 살고 있으며 카탈로니아의 발전과 행복을 염원하고, 편협하고 종파적인 카탈로니아주의자가 아니라면, 우리의 사회혁명으로 그들이 가는 길목을 트고 사람들에게 사회혁명의 가치를 알려야 할 것이다.“

이번 사태가 일어나던 중 CNT와 FAI가 발행한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FAI와 CNT는 독재를 원하지 않으며, 이를 강요하고 도입하려 하지도 않는다. 우리 구성원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있는 한 독재를 허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독재정권에도 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파시즘과 맞서 싸우는 것은 우리가 싸움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인민의 자유를 수호하고 무장한 노동자를 학살하고 싶어 하며 노동자들을 착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권력으로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들 스스로는 파시스트라 부르지 않고, 절대군주정을 되돌리려 하며, 이는 우리 인민의 역사와 전통에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상당한 시간 동안 반파시스트 진영의 단결을 위태롭게 했던 도발행위들에도 불구하고, CNT는 오로본 페르난데즈가 1934년에 이미 확립하고 1936년 5월 대회에서 정한 노선에 변함없이 충실했다. 그는 모든 망설임과 생각의 충돌들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확립해냈고, 그 모든 특수한 이익들 위에 있는 노동자들의 궁극적인 이익을 위해 CNT와 협업하는 사람들 중 회의를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당당히 주장해나갔다. 오로본 페르난데즈는 말했다.

”스페인 부르주아들은 자유주의라는 가면을 집어 던졌다. 유럽에서 보여지고 있는 수많은 반혁명의 예시는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오늘날, 그들은 전체주의 국가의 도움 아래에 경제적, 정치적 독점을 공고히하고자 노력한다. 프롤레타리아들에 맞서 위협적으로 고개를 쳐들고 공격해오는 이 적들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강고한 프롤레타리아들의 연합이 필수불가결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역사 앞에서 무거운 책임을 지고, 우리 스스로를 고립시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고립에서 필연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패배를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는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승리를 노려야 하며,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에 대한 최초의 치명타를 날려야 한다. 단결을 향한 투쟁의 선두에 우리 스스로를 앞세우는 것은, 혁명을 향한 길을 트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색안경을 끼지 않고 교조적 편견 없이 바라본다. 이는 혁명에 대한 것이지, 이런 저런 원칙에 대한 학문적 논의에 대한 것이 아니다. 강령은 하나의 고정된 계명이 아니라 현실의 긴급함과 유동적인 면에 대응할 수 있는 유기적인 형태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강령이 혁명이 일어난 뒤의 자유지상주의적 공산주의의 뿌리내림을 보장하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와 그 지속자인 파시즘의 완연한 패배를 보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착취와 계급적 특권이 없는 민주적 정권을 보장할 것이며, 최고로 좋은 의미로의 자유지상주의적 사회로의 길을 활짝 열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