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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흐주의'''(영어: Machism)는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에른스트 마흐]]의 이론을 추종하는 사상읻다.
'''마흐주의'''(영어: Machism)는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에른스트 마흐]]의 이론을 추종하는 사상이다.


== 에른스트 마흐의 이론==
== 에른스트 마흐의 이론==
실험물리학자였던 그는 모든 이론에 대해서 비판적이거나 회의적이었다. 그는 실험적 사실을 가장 신뢰했으며, 그 다음이 개념, 관찰의 순이었고, 마지막으로 이론에 대해 가장 회의적이었다. 만약에 한 가지 사실을 두 가지 이론이 모두 설명한다면, 어차피 두 이론 모두가 관습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하는 이 중에서 우리의 생각을 더 경제적으로 만들어 주는 이론을 택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마흐가 주창했던 '''생각의 경제성 원리'''였다.
실험물리학자였던 그는 모든 이론에 대해서 비판적이거나 회의적이었다. 그는 실험적 사실을 가장 신뢰했으며, 그 다음이 개념, 관찰의 순이었고, 마지막으로 이론에 대해 가장 회의적이었다. 만약에 한 가지 사실을 두 가지 이론이 모두 설명한다면, 어차피 두 이론 모두가 관습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하는 이 중에서 우리의 생각을 더 경제적으로 만들어 주는 이론을 택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마흐가 주창했던 '''사유경제성 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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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의 마흐주의==
==러시아에서의 마흐주의==
당시 마흐의 사상은 [[알렉산더 보그다노프]],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니콜라이 부하린]]과 같은 [[볼셰비키]] 혁명가들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쳤고, 특히 보그다노프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정신이나 물질 중 어느 하나도 근본적인 것이 아니며 이 둘 모두가 경험의 구성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세상에 대한 주체의 개입을 강조하는 [[경험 일원론]]을 제창했다. 이들은 볼셰비키의 유물론을 인간의 경험과는 무관한 [[물자체]]를 상정하는 [[엠마누엘 칸트]]의 이원론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마흐의 사상은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니콜라이 부하린]]과 같은 [[볼셰비키]] 혁명가들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쳤고, 특히 보그다노프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정신이나 물질 중 어느 하나도 근본적인 것이 아니며 이 둘 모두가 경험의 구성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세상에 대한 주체의 개입을 강조하는 [[경험 일원론]]을 제창했다. 이들은 볼셰비키의 유물론을 인간의 경험과는 무관한 [[물자체]]를 상정하는 [[임마누엘 칸트]]의 이원론이라고 비판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와 같은 견해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의 근간을 흔드는 반동이라고 간주하고, 1909년에 출판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마흐와 러시아 마흐주의자들을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레닌은 외부의 사물은 우리의 감각의 총체가 아니라 우리의 감각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의 지각은 이러한 외부의 존재의 이미지에 다름 아님을 강조했다. 그는 세계는 인간이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단순한 사실이 마흐주의자들의 [[관념론]]을 논박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유물론이 건전한 보통 사람의 소박한 믿음에 근거한다고 강조했다. 레닌은 이 책을 쓰기 위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은 물론 푸앙카레, 오스트발트, 랑제빈, J.J. 톰슨, 리기, 헤르츠, 볼츠만, 로지와 같은 당시 과학자들의 저서와 논문을 찾아 읽었고, 당시 물리학의 발전이 물질이 소멸했다는 관념론이 아니라 [[변증법적 유물론]]을 지지한다고 설파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와 같은 견해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의 근간을 흔드는 반동이라고 간주하고, 1909년에 출판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마흐와 러시아 마흐주의자들을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레닌은 외부의 사물은 우리의 감각의 총체가 아니라 우리의 감각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의 지각은 이러한 외부의 존재의 이미지에 다름 아님을 강조했다. 그는 세계는 인간이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단순한 사실이 마흐주의자들의 [[관념론]]을 논박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유물론이 건전한 보통 사람의 소박한 믿음에 근거한다고 강조했다. 레닌은 이 책을 쓰기 위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은 물론 푸앙카레, 오스트발트, 랑제빈, J.J. 톰슨, 리기, 헤르츠, 볼츠만, 로지와 같은 당시 과학자들의 저서와 논문을 찾아 읽었고, 당시 물리학의 발전이 물질이 소멸했다는 관념론이 아니라 [[변증법적 유물론]]을 지지한다고 설파했다.

2024년 1월 13일 (토) 19:18 기준 최신판

마흐주의(영어: Machism)는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에른스트 마흐의 이론을 추종하는 사상이다.

에른스트 마흐의 이론

실험물리학자였던 그는 모든 이론에 대해서 비판적이거나 회의적이었다. 그는 실험적 사실을 가장 신뢰했으며, 그 다음이 개념, 관찰의 순이었고, 마지막으로 이론에 대해 가장 회의적이었다. 만약에 한 가지 사실을 두 가지 이론이 모두 설명한다면, 어차피 두 이론 모두가 관습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하는 이 중에서 우리의 생각을 더 경제적으로 만들어 주는 이론을 택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마흐가 주창했던 사유경제성 원리였다.


마흐는 경험적으로 검증 불가능한 이론적 언술을 과학에서는 수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통 실증주의자라고 불린다. 또 그는 종종 외부세계에 대한 감각경험과 측정을 강조했다는 점 때문에 도구주의자, 경험론자라고도 불린다. 경험과 관찰을 강조한 마흐의 철학은 논리실증주의 과학철학을 출범시킨 비엔나 서클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비엔나학파는 초기에 스스로를 ‘에른스트 마흐 학회’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마하의 영향은 조지프 슘페터와 같은 경제학자, 알프레트 아들러와 같은 사회과학자들에게도 지대했다.

이론에 대한 마흐의 비판의 칼날은 아이작 뉴턴에까지 미쳤다. 그는 뉴턴이 주장했던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비판하고 부정했으며, 물질의 관성질량(m=F/a)이 뉴턴이 주장했듯이 물체의 고유한 성질이 아니라 그 물체와 우주의 다른 모든 물체의 연관에서 비롯되는 양이라고 주장했다. 마흐의 대담한 주장은 뒤에 학창 시절의 젊은 아인슈타인에게 큰 영향을 미쳐서 아인슈타인이 뉴턴 체계를 허물어버린 상대성 이론을 만들때 영감으로 작용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론에 대한 논문에서 마하를 직접 언급했으며, 자서전에서 “마흐의 타협 없는 의심의 정신과 독립심에서 그의 위대함을 보았다”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이론 체계를 뛰어넘는 더 거대한 이론 체계인 상대성 이론을 세우기 위해 마하의 뉴턴 비판을 수용했다. 따라서 그는 모든 이론을 거부한 마흐의 인식론을 “구태의연한 것”으로 간주했다. 반면에 모든 이론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마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상대성 이론의 원조 격으로 간주되는 데에도 상당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인식의 기초로서 인간의 감각을 강조한 마흐는 1886년에 출판되고 1901년에 개정된 <감각의 분석>에서 물리적, 생리적, 심리적 감각을 총체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각과 지식의 총체가 물리적, 생리적, 심리적 감각 요소들의 복합체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마흐에 의하면 색깔, 소리, 온도, 시공간만이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이나 물질 등도 전부 감각 요소들의 복합체에 불과한 것이었다.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외부적인 감각 요소들은 인간의 내적인(즉 심리적인) 감각 요소들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이것들에 의해서 변형되기도 했다. 이런 상호작용 때문에 마하의 감각 철학에서 주체와 객체의 구별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러시아에서의 마흐주의

당시 마흐의 사상은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니콜라이 부하린과 같은 볼셰비키 혁명가들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쳤고, 특히 보그다노프는 관념론유물론이원론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정신이나 물질 중 어느 하나도 근본적인 것이 아니며 이 둘 모두가 경험의 구성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세상에 대한 주체의 개입을 강조하는 경험 일원론을 제창했다. 이들은 볼셰비키의 유물론을 인간의 경험과는 무관한 물자체를 상정하는 임마누엘 칸트의 이원론이라고 비판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와 같은 견해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의 근간을 흔드는 반동이라고 간주하고, 1909년에 출판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마흐와 러시아 마흐주의자들을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레닌은 외부의 사물은 우리의 감각의 총체가 아니라 우리의 감각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의 지각은 이러한 외부의 존재의 이미지에 다름 아님을 강조했다. 그는 세계는 인간이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단순한 사실이 마흐주의자들의 관념론을 논박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유물론이 건전한 보통 사람의 소박한 믿음에 근거한다고 강조했다. 레닌은 이 책을 쓰기 위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은 물론 푸앙카레, 오스트발트, 랑제빈, J.J. 톰슨, 리기, 헤르츠, 볼츠만, 로지와 같은 당시 과학자들의 저서와 논문을 찾아 읽었고, 당시 물리학의 발전이 물질이 소멸했다는 관념론이 아니라 변증법적 유물론을 지지한다고 설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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