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레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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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 = 혁명적 이론 없이는 혁명적 운동도 있을 수 없다. | |명언 = 혁명적 이론 없이는 혁명적 운동도 있을 수 없다. | ||
|출생일 = 1870년 4월 22일 | |출생일 = 1870년 4월 22일 |
2022년 3월 10일 (목) 23:56 판
러시아 혁명 기획편 ▼ |
개요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 혁명가, 변호사, 정치가, 사상가.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Владимир Ильич Ульянов)'이며, 흔히 알려진 '레닌(Ленин)'은 1902년경부터 사용한 필명 겸 가명이다. '니콜라이 레닌(Николай Ленин)'으로도 알려져 있다.
생애
초기 이력
1870년 러시아제국의 심비르스크에서 교육 관리였던 하급귀족의 자제로 태어난다. 아버지 일리야는 농노의 아들로서 결혼도 안하고 학비를 댄 형님의 희생으로 고등교육까지 마쳐 관리의 길에 들어섰으며, 어머니 마리아는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원래 유대인 집안이었으나, 기독교로 개종했다. 레닌은 6남매중 2남으로 태어났다.
레닌의 집안은 비교적 유복했으며, 그 어머니의 적극적인 관심으로 어릴때부터 많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리하여 모어 러시아어 뿐만 아니라 당시 러시아귀족의 공용어였던 프랑스어에도 능하게 되었다. 레닌과 형 알렉산드르와 높은 학업성적을 보였고, 알렉산드르는 당시 러시아 최고 명문대인 상트페테르스부르크 대학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알렉산드르는 곧 학생운동에 가담하게 되고, 차르(황제) 암살음모를 꾸미다가 체포되어 1887년 21세의 나이로 사형에 처해졌다. 이때문에 17세였던 레닌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레닌은 카잔 대학에 입학해서 법률을 전공으로 택하지만, 혁명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곧 제적되었다. 이때 그는 자본을 비롯한 마르크스 서적을 읽으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레닌은 대학 재입학은 허가가 되지 않았으나, 18890년 상트페테르스부르크 대학의 청강은 허용되었고, 1891년 사법시험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그는 이것으로 변호사 자격을 얻고 한동안 변호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변호사로 일하면서 본업보다는 마르크스 서적을 읽고 이를 연구하는데 더 집중했고, 차르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혁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본격적인 혁명활동에 뛰어든다.
레닌은 변호사로 일하면서 틈틈히 노동자들에게 마르크스주의를 퍼뜨리면서 서서히 운동가로서 날개짓을 했다. 그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를 처음 도입한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의 이론을 받아들여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였다. 이때 줄리우스 마르토프 등과 동지가 되었다. 1895년 그는 차르체제를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추방형을 받았다. 이때 그의 연인이었던 나데즈다 크룹스카야가 유형지에 동행했고, 1898년 둘은 결혼했다.
1차 망명 및 볼셰비키-멘셰비키 분당
1900년 유형지에서 형기를 마친 레닌은 석방되었고, 레닌은 러시아에서 혁명운동을 하다가 운신의 폭이 좁았음을 느끼고 해외로 망명한다.
당시 러시아의 마르크스 정당으로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지도부는 해외 망명 중이었고, 레닌도 이들과 합류한다. 그는 독일 뮌헨으로 가서 플레하노프, 옛동지 마르토프와 재회하고, 당기관지 이스크라의 필진으로 합류한다. 여기에는 또한 폴란드계 유대인 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도 참여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레닌은 울리아노프라는 본명 대신 레닌이라는 가명을 쓰게 된다. 하지만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지도부는 대부분 이론가들이었기 때문에 혁명활동에 대해서 통일된 견해를 보이지 못하고 당기관지 이스크라에서 이론상의 문제로 자주 논쟁을 벌였다. 레닌과 다른 혁명가들은 점점 견해차를 보이기 시작했고, 1902년 레닌이 소책자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발표했을 떄 극대화되었다.
한편 러시아 비밀경찰은 혁명운동을 계속 추적하고 있었고, 망명국 독일도 러시아 혁명운동의 불길이 자국으로 옮겨붙을 것을 우려하여 이들을 탄압했고, 러시아 혁명가들은 계속 망명지를 바꾸었다. 레닌도 결국 영국 런던을 거쳐 최종적으로 스위스 제네바를 망명한다. 레닌은 런던 시절, 마찬가지로 망명해온 트로츠키와 알게 되었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당대회가 열렸으나, 레닌과 다른 혁명가, 특히 동지나 친구이기도 했던 줄리우스 마르토프와의 견해 차이는 좁힐 수 없었다. 레닌은 직업적 혁명가들로만 조직된 전위정당론을 부르짖은데 반해, 마르토프는 광범위한 민중이 참여하는 대중정당을 선호하였다. 이 둘의 견해차는 좁힐 수가 없었고, 이념대립은 감정대립으로 번져 더이상 혁명운동을 함께 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분당되었고, 레닌은 자신의 파를 다수파라는 의미의 볼셰비키, 자신의 반대파였던 마르토프파를 소수파라는 의미로 멘셰비키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대로 고유명칭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두 계파의 세력은 레닌의 명명법과는 달리 비슷했다. 레닌은 자신을 추종하는 분파인 볼셰비키를 지도하며 마르토프가 지도하는 멘셰비키와는 별도의 혁명운동을 펼쳤다. 이때 레닌은 그루지야 출신 볼셰비키 당원인 이오시프 스탈린을 알게 되었는데, 레닌은 카프카스 지역에서 당의 자금조달을 위해 은행강도까지 마다 않던 그의 당성 및 성실성을 높이 사서 점점 중책을 맡기게 된다.
1905년 혁명 및 2차 망명
레닌의 볼셰비키파와 마르토프의 멘셰비키파가 대립하고 있던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1890년대부터 러시아 제국과 일본은 조선에서의 패권다툼을 두고 갈등이 있었는데, 그게 1904년 러일전쟁으로 번진 것이다. 그 해 5월 당내 갈등이 심해지자 레닌은 이스크라 신문의 편집진과 당회의에서 사직했다. 레닌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당내 분쟁의 역사를 정리한 책자 <일보 전진 이보 후퇴>를 집필한다.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은 영국과 프랑스가 일본을 도왔기에, 발트해에 있던 러시아 발틱함대는 지구 절반을 돌아 일본으로 향했고, 대마도 근처에서 일본 해군에게 패배했다. 러일전쟁은 1905년 10월에 끝이 났는데, 그로부터 9개월 전인 1905년 1월엔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차르 체제에 맞선 봉기가 일어났었다. 그 봉기가 바로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피의 일요일 사건' 당시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는 발포를 명령했고, 시위에 참가한 대중들이 많이 사망했다. 니콜라이 2세의 명령을 받은 군대는 코사크 기병 부대까지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하는 모습을 보였다.
니콜라이 2세의 발포 명령에 따라 많은 봉기들이 진압되고 난 이후, 차르 체제는 민중에게 두마(의회)라고 하여 투표권을 부여했다. 동시에 정당과 노동조합을 합법화 됐다. 그러나 말이 좋아 합법화지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은 지속되었고, 비밀경찰은 소위 좌파들을 검거했다. 이에 따라 레닌 또한 해외 망명의 길에 다시 오르게 된다. 1908년 레닌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책을 발표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옹호하는 주장을 하기도 했으며, 2차 망명 이후에는 주로 유럽에서 활동했다. 1912년 레닌은 체코 프라하에서 볼셰비키만 당대회를 소집하면서 대립구도에 있던 멘셰비키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볼셰비키당을 창설했다. 그리고 폴란드로 이동하여 볼셰비키의 이름으로 신문기간지인 '프라우다'를 창설하고 대외선전에 힘을 썼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레닌은 중립국인 스위스에 있었다. 스위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레닌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의 좌파들이 제국주의자들 간의 전쟁에 자국 방어라는 개념을 앞세워 지지하는 행태에 매우 실망했고, 이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해온다. 이러한 레닌의 비판은 1916년 그가 쓴 <제2 인터내셔널의 붕괴>에 잘 나와 있으며, 소위 사회민주당의 반혁명적 배신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보여준다.
레닌은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때부터, 제국주의자들 간에 전쟁을 비판했으며, 이와같은 자신의 입장에서 단 한번의 양보도 보이지 않았다.
2월 혁명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제국도 전쟁에 참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현대화된 무기가 동원된 전쟁이었고,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 낙후된 러시아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 러시아는 4년이라는 기간 동안 거의 50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거기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민중의 생활이 궁핍해지자, 1917년 3월 8일(러시아 구력으로는 2월)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차르 타도를 목표로 건 혁명이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2월 혁명이다. 2월 혁명으로 차르는 물러났고, 멘셰비키가 참여하는 임시정부 내각이 설립됐다.
2월 혁명의 소식을 들은 레닌은 러시아로 귀국하고자 했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독일은 레닌이 귀국하도록 도왔다. 1917년 4월 레닌은 페트로그라드로 귀국했고, 크세신스카야 저택에 가서 이른바 '4월 테제'의 근간이 될 얘기를 하고, 4월 테제를 선포한다. 4월 테제의 핵심적 구호는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와 '빵, 토지, 평화'였다. 한편 케렌스키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내각은 1917년 6월 전선에서 총공세를 가하지만 20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실패했다. 2월 혁명을 한 목표중 하나가 전쟁 중단이었는데, 그것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고, 민중은 다시 임시정부 내각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게 7월 봉기다.
7월 봉기는 임시정부가 진압하면서 실패로 끝났고, 또 다른 검거를 피해 레닌은 핀란드로 망명한다. 다음 달인 8월 코르닐로프가 주도하는 반혁명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진보적인 민중과 병사들에 의해 진압됐고, 10월에 러시아로 돌아온 레닌은 다시 혁명을 준비했으며, 실천한다. 그게 바로 11월 7일(러시아 구력으로는 10월)에 일어난 10월 혁명이다. 10월 혁명에 앞섰던 병사들은 크론슈타트 수병을 포함한 진보적인 러시아 군대와 민중이었고, 10월 혁명이 성공함에 따라 임시정부 내각은 무너진다. 레닌은 사회주의 국가를 곧바로 선포했고, 여러 진보적인 정책들을 펼쳐나갔다. 의회선거에 도전했고 사회혁명당에게 밀려 2등을 했다. 물론 볼셰비키에게 있어 의회선거는 그저 부르주아지들의 대표적인 정치적 산물이라 생각하기에 나중에 해산시켰다. 확실히 선거에서 2위를 차지한 볼셰비키들은 노동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득표를 얻었으며, 이것은 볼셰비키가 그만큼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적백내전과 소비에트 연방공화국 선포
10월 혁명 성공 이후 혁명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행동에 착수했다. 당시 독일 측과 회담을 하기 위해 레닌은 트로츠키를 대표로 보냈는데, 회담 과정에서 "전쟁도 없고, 평화도 없다"는 그의 발언으로 양측간의 위기도 있었지만, 1918년 3월 이른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빠진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빠지기가 무섭게 1918년 5월 부터는 이른바 차르를 복귀시키려는 반혁명 세력들과 이를 지원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으로 인해 적백내전이 일어난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이 이 전쟁에서 반혁명 세력을 도왔고, 반혁명 세력들은 이들의 지원을 받으며 끔찍한 백색테러를 자행한다. 이에 맡서 볼셰비키는 새로운 경찰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체카다. 즉 체카는 백색테러에 맞서기 위한 안티테제의 역할로써 이에 대응하는 식이었다. 실제로 1918년 레닌은 사회혁명당의 한 암살범이 쏜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을 뻔했다. 적백내전에서 군대를 지휘한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그리고 그외의 볼셰비키 등은 적군을 창설하고 그 군대의 규모를 늘렸으며, 군대의 규모는 내전이 끝날 무렵 500만으로 늘어난다. 적백내전에서 볼셰비키는 말 그대로 블라디보스토크와 캄차카 반도 쪽 부터 아르헨겔스크와 폴란드까지 혁명 러시아 전역에서 전투를 치렀다. 1920년 쯤 적백내전은 사실상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났다.
적백내전은 끝났지만, 혁명 러시아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산업 기반 초토화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경제 붕괴다. 적백내전으로 모든 기반이 파괴되자, 혁명 러시아에선 기근이 발생하여 수백만이 아사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한때 혁명 동지였던 크론슈타트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레닌은 체카를 포함한 적군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했다. 당시 볼셰비키 입장에서는 반란 진압이 필수적인 조치였다. 크론슈타트를 진압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레닌은 이른바 신경제정책이라 하여 NEP를 진행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의 복귀를 뜻하기도 하지만, 사회주의를 향한 단기간의 후퇴였다. 신경제정책으로 소련의 경제는 조금씩 회복세를 보였고, 1926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수준의 경제를 회복했다. 적백내전을 종식시키고 신경제정책을 진행한 레닌은 1922년 이른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즉, 소련이라는 국가를 세우게 된다.
그와 동시에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 전파를 위해 1919년 제3 인터내셔널, 즉, 코민테른을 창설했다. 코민테른 창설로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그외의 식민지 지배국가들이 제3 인터내셔널의 노선을 따라 활동했다. 이때 레닌이 창설한 코민테른은 레닌 사후 전세계의 사회주의 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코민테른은 일제 식민지배에 있던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1918년 한인사회당 그 이후 고려공산당 그리고 조선공산당까지 큰 영향을 준다. 베트남의 호치민, 중국의 저우언라이 인도의 마나벤드라 나트 로이 조선의 이동휘등도 제3 인터내셔널의 영향을 받았으며 거기서 활동했었다.
사망
1922년 뇌일혈 발작으로 와병하였다. 최후의 1년은 실어증까지 겹쳐 병상에서 지냈다. 1924년 1월 21일 저녁 6시 50분, 54세의 나이로 고르키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6일 후 1월 27일에 거행됐다. 유언에 따르면 어머니 곁에 묻어야 했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의 유언을 무시하고, 그를 방부처리하여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영묘를 만들었다. 그의 시신은 지금까지도 관람객들을 위해 공개되고 있다.
영향
성공한 혁명
레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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