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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3일 (토) 20:02 판

제목: 사회주의혁명과 민족자결권
부제: 테제
저자: V.I.레닌
주제: 마르크스-레닌주의
발표시기: 1916년 1월~2월
출처: 혁공동님 페이스북


사회주의혁명과 민족자결권
테제

저자: V.I.레닌



1. 제국주의 · 사회주의 · 피억압 민족의 해방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고 발전 단계다. 선진국들에서 자본은 민족국가의 범위를 훌쩍 넘어 성장하여 경쟁을 독점으로 대체해버렸고, 그리하여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한 모든 객관적 조건을 창출했다. 따라서 서유럽과 미국에서는 자본가정부 타도와 부르주아지 수탈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투쟁이 일정에 올라 있다. 제국주의는 계급 적대를 무한히 격화시키고, 경제적으로도 (트러스트, 물가폭등), 정치적으로도 (군국주의의 성장, 빈번한 전쟁, 반동의 강화, 민족 억압 및 식민지 약탈의 확대 강화) 대중의 상태를 악화시킴으로써 대중을 이러한 투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승리한 사회주의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하며, 따라서 민족들의 완전한 평등을 가져와야 할 뿐만 아니라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 즉 자유로운 정치적 분리의 권리를 실시해야 한다. 사회주의당이 예속 민족들을 해방시키고 그들과의 관계를 자유로운 동맹 — 자유로운 동맹은 분리의 권리가 없다면 거짓 문구에 불과하다 — 에 기초하여 확립할 것이라는 것을 지금, 즉 혁명 중과 혁명 승리 후에 뿐만 아니라 지금부터 자신의 모든 활동에 의해 입증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러한 당은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행위를 저지르는 것이 될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 역시 국가의 한 형태고 국가가 소멸할 때 민주주의도 소멸할 수밖에 없지만, 이렇게 되는 것은 오직 사회주의가 완전히 승리해서 공고화되고 그로부터 완전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만일 것이다.

2. 사회주의 혁명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사회주의혁명은 한 차례의 행동, 한 전선에서의 한 번의 전투가 아니라, 격렬한 계급 충돌의 한 시대 전체이고 모든 전선에서의, 즉 경제·정치상의 모든 문제를 둘러싼 전투, 부르주아지에 대한 수탈로써만 비로소 끝날 수 있는 전투의 긴 연속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주의혁명으로부터 이탈시키거나 또는 사회주의혁명을 흐리고 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인 오류일 것이다. 반대로 완전한 민주주의를 도입하지 않는 한 사회주의가 승리할 수 없는 것처럼, 민주주의를 위한 전면적이고 일관된 혁명적 투쟁을 수행하지 않는 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대한 승리를 준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민주주의 강령 조항들 가운데 어느 한 조항을, 예를 들어 민족자결 조항을 제국주의 하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다’거나 ‘환상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삭제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은 오류일 것이다. 민족자결권이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는 실현될 수 없다는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절대적, 경제적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겠고, 아니면 관례적, 정치적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겠는데, 둘 중 어느 한 경우일 것이다.

첫 번째 경우에 그 주장은 이론상 근본적으로 틀렸다. 첫째로 자본주의하에서 그런 의미로 실현될 수 없는 것은, 예컨대 노동화폐라든가 공황의 근절 같은 것들이다. 민족자결도 그와 같은 식으로 실현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틀렸다. 둘째로 그런 의미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논박하는 데는, 1905년에 노르웨이가 스웨덴으로부터 분리된 예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셋째로, 예컨대 독일과 영국의 정치적•전략적 관계에서 약간의 변화가 생기는 것으로 금세 폴란드, 인도 등, 새로운 국가의 형성이 완전히 ‘실현 가능’해질 것을 부인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다. 넷째로, 금융자본은 그 팽창을 향한 갈구 속에서, 아무리 ‘독립된’ 나라라 할지라도 그 나라의 가장 자유로운, 가장 민주주의적이고 공화제적인 정부와 선출된 관리들을 ‘자유롭게’ 매수할 것이다. 금융자본의 지배는 자본 일반의 지배와 같이, 정치적 민주주의 영역에서의 어떠한 개혁으로도 철폐될 수 없다. 자결도 전적으로, 그리고 배타적으로 이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자본의 지배는 보다 자유롭고 보다 광범위하며 보다 뚜렷한 계급억압 및 계급투쟁 형태로서의 정치적 민주주의의 의의를 조금도 파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본주의하에서 정치적 민주주의 요구 중 하나에 대해 경제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고 하는 모든 주장들은 결국 자본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 일반의 기본적 관계를 이론적으로 그릇되게 규정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두 번째 경우에 그 주장은 불완전하며 부정확하다. 왜냐하면 민족자결권뿐만 아니라 정치적 민주주의의 모든 근본적 요구들은 제국주의 하에서는 단지 불완전한, 훼손된 형태로만 ‘실현 가능’하며, 그것도 드문 예외로서만 (예를 들어, 1905년에 스웨덴으로부터 노르웨이의 분리처럼) 실현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가 제기하고 있는 바의, 식민지의 즉각적 해방에 대한 요구 역시 일련의 혁명이 없이는 자본주의 하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로부터 사회민주주의가 이러한 모든 요구를 위한 즉각적이고 가장 단호한 투쟁을 수행하길 삼가야 한다는 — 그 경우 부르주아지와 반동에게만 유리할 뿐이다 —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 모든 요구들을 개량주의적 방식이 아니라 혁명적 방식으로 정식화하여 제출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즉 부르주아적 합법성의 틀 내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뚫어냄으로써, 의회 연설과 구두상의 항의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실제 행동으로 끌어냄으로써, 모든 근본적인 민주주의적 요구 하나 하나를 위한 투쟁을 확대 강화하여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직접적인 공격, 즉 부르주아지를 수탈하는 사회주의혁명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회주의혁명은 대규모 파업이나 가두시위, 기근에 의한 폭동, 군대 내 항명, 식민지 반란 등의 결과로 발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드레퓌스 재판[1]이나 차베른 사건[2] 같은 어떤 정치적 위기의 결과로, 또는 피억압 민족의 분리 문제에 대한 국민투표와 관련해서도 발발할 수 있다.

제국주의 하에서 민족적 억압의 강도가 더욱 더 높아짐으로써 사회민주주의에게 제기되는 임무는 무엇인가? 부르주아지가 ‘공상적’이라고 하는, 민족들의 분리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방기해야 할 것인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이러한 지반 위에서 발생하는 층돌 역시 대중행동과 부르주아지에 대한 혁명적 공격을 불러일으킬 기회로 이용하기 위해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자결권의 의의와 연방제에 대한 자결권의 관계

민족자결은 단지 정치적 의미에서의 독립의 권리, 억압 민족으로부터 자유롭게 정치적으로 분리할 권리를 의미할 뿐이다. 구체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한 이 요구는 분리 찬성을 선동할 완전한 자유와, 그리고 분리하려는 민족이 국민투표로 분리 문제를 결정할 자유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요구는 결코 분리 요구, 세분화 요구, 소국가 형성 요구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모든 형태의 민족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의 논리적 표현일 따름이다. 민주주의적 국가체제가 분리를 위한 완전한 자유에 근접하면 할수록 분리에 대한 지향은 실제로는 더욱 더 희박해지고 약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경제적 진보의 관점에서나 대중의 이익의 관점에서나 어느 모로나 대(大)국가의 이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더욱이 이러한 이점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더욱 증가하기 때문이다.

자결에 대한 인정이 곧 연방제를 하나의 원칙으로 인정하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 연방제 원칙을 단호하게 반대하고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를 옹호하면서도, 그럼에도 완전한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로 가는 유일한 방도로서 민족적 불평등보다 연방제를 택할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마르크스는 중앙집권주의자이면서도 아일랜드가 영국에 강제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것보다 영국과 연방제로 있는 것이 낫다고 본 것이다.[3]

사회주의의 목적은 현재와 같은 소국가로의 인류의 세분화와 모든 형태의 민족적 고립을 폐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의 접근과 융합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편으로 레너와 오토 바우어의 이른바 “문화적-민족적 자치”[4]라는 사상의 반동성을 대중에게 설명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 일반적, 막연한 문구나 공허한 열변으로가 아니라, 사회주의가 확립될 때까지 문제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 민족 사회주의자들의 위선과 비겁을 특별히 고려에 넣는 명확하고 정확하게 정식화된 정치 강령으로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요구해야만 한다. 인류가 피억압 계급의 독재라는 과도기를 거쳐야 비로소 계급의 폐지에 이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는 모든 피억압 민족의 완전한 해방, 즉 분리의 자유라는 과도기를 거쳐야만 민족들의 필연적인 융합에 이를 수 있다.

4. 민족자결 문제의 프롤레타리아적-혁명적 제기 방식

소부르주아지는 민족자결 요구뿐만 아니라 우리의 민주주의 최소강령의 모든 조항들을 우리에 앞서 오래 전인 17세기와 18세기에 제기했다.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이 모든 요구를 공상적인 방식으로 제기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평화로운’ 자본주의를 믿는 그들의 눈에는 계급투쟁이 보이지 않고, 또 민주주의 하에서 계급투쟁이 격화되었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카우츠키주의자들이 인민을 기만하며 내걸고 있는 제국주의 하에서의 평등한 민족들의 평화로운 동맹이라는 사상의 본질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런 속물적, 기회주의적 공상과는 반대로 사회민주주의의 강령은, 제국주의 하에서는 억압 민족과 피억압 민족으로의 분리가 기본적인 사실이며 가장 중요하고 불가피한 사실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억압 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병합에 반대하고 모든 민족의 동등한 권리에 찬성한다는, 일반적이고 틀에 박힌 문구에 자신을 한정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문구는 평화주의적 부르주아도 받아 안을 수 있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족 억압에 근거하고 있는 국경이라는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에게 특히 ‘불유쾌한’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해당 국가의 국경 내에 피억압 민족을 강제적으로 억류하는 것에 반대하여 투쟁해야만 하는데,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결권을 위해 투쟁해야 함을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 민족에 의해 억압받는 민족 및 식민지의 정치적 분리에 대한 자유를 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의미 없는 문구로 남게 될 것이고, 피억압 민족과 억압 민족의 노동자들 사이에 신뢰도, 계급 연대도 불가능할 것이며, 또한 ‘자’ 민족에 의해 억압받고 ‘자’국 안에 강제적으로 묶여있어야 하는 민족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면서 자결권을 내거는 개량주의자와 카우츠키주의자의 위선은 폭로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 피억압 민족의 사회주의자들은 특히 피억압 민족 노동자들과 억압 민족 노동자들 간의 완전하고 무조건적 통일단결(조직적 통일단결도 포함하는)을 위해 싸우고 그것을 견지해야 한다. 이 같은 통일단결 없이는 부르주아지의 모든 간계, 배신, 속임수 앞에서 독립적인 프롤레타리아 정치 및 타국 프롤레타리아트와의 계급 연대를 옹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억압 민족의 부르주아지는 언제나 민족해방 슬로건을 노동자들을 속이는 수단으로 바꿔놓는다. 즉 국내정치에서 저들은 이 슬로건을 지배 민족 부르주아지와의 반동적 협정을 체결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며(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에 있는 폴란드인들은 유대인과 우크라이나인을 억압하기 위해 반동들과 협약을 맺는다), 대외정치 영역에서는 자신의 약탈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경쟁하는 제국주의 열강 중의 하나와 협정을 맺으려고 애를 쓴다 (발칸반도 소 국가들의 정치).

부르주아지가 정치적 기만과 금융적 약탈을 위해 공화제 슬로건을 이용한다고 해서 (예를 들어 라틴계 나라들에서) 사회민주주의자가 공화제를 거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제국주의 강대국에 대항하는 민족해방 투쟁이 일정한 조건하에서 다른 강대국에 의해 동일하게 제국주의적인 목적에 이용될 수 있다고 해서 사회민주주의자가 민족자결권 인정을 거부할 수는 없다.[5]

5. 민족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와 프루동주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는 대조적으로, 마르크스는 민주주의 요구들 모두를 예외 없이 다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부르주아지가 이끈, 인민 대중의 봉건제에 대항하는 투쟁의 역사적 표현으로 간주했을 따름이다. 이러한 민주주의 요구들 가운데 일정 조건하에서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들을 기만하기 위한 도구로 쓰일 수 없었던, 그리고 쓰이지 않았던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점에서 정치적 민주주의 요구들 가운데 하나, 특히 민족자결을 따로 떼어내어 그것을 나머지 요구들과 대립시키는 것은 이론상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 프롤레타리아트는 공화제 요구를 포함하여 모든 민주주의 요구 투쟁을 부르주아지 타도를 위한 혁명적 투쟁에 종속시키는 한에서만 자신의 독자성을 견지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사회혁명이란 명목으로’ 민족 문제를 ‘부인’했던 프루동주의자와는 대조적으로 마르크스는 선진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이익을 무엇보다도 먼저 고려하면서, 국제주의와 사회주의의 근본 원칙 — 즉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원칙 — 을 전면에 내세웠다.[6] 바로 독일 노동자들의 혁명적 운동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1848년에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승리한 민주주의가 독일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는 민족들의 자유를 선포하고 실시하도록 요구했던 것이다.[7]

1869년에 마르크스는 영국 노동자들의 혁명적 투쟁의 관점에서 영국으로부터 아일랜드의 분리를 요구하고, “비록 분리 후에 연방제가 된다 하더라도”라는 말을 덧붙였던 것이다.[8] 오직 이러한 요구를 제기함으로써만 마르크스는 실제로 영국 노동자들을 국제주의 정신으로 교육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직 이러한 방법으로써만 마르크스는 —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아일랜드 ‘개혁’을 수행하지 않은 — 기회주의자들 및 부르주아 개량주의에다 이 역사적 문제의 혁명적 해결을 대립시킬 수 있었다. 오직 이러한 방법으로써만 마르크스는, 소민족의 분리의 자유가 공상적이고 실현될 수 없는 것이며 경제적 집중뿐만 아니라 정치적 집중도 진보적이라고 소리치는 자본의 변호론자들과는 달리 이 집중이 비제국주의적일 때 진보적임을, 그리고 민족들은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유로운 동맹에 의해서 접근할 것을 주장할 수 있었다. 오직 이러한 방법으로써만 마르크스는 민족 문제를 해결할 때에도 역시 민족의 평등과 자결을 말로만, 위선적으로만 인정하는 것에 반대하여 대중의 혁명적 행동을 옹호할 수 있었다. 1914〜16년의 제국주의 전쟁과 이로 인해 폭로된 기회주의자들과 카우츠키주의자들의 위선의 ‘아우기아스의 마굿간’ [매우 더럽고 어지러운 곳 一 옮긴이]은 마르크스 정책의 올바름을 눈에 띄게 확인해 주었다. 마르크스의 정책이 모든 선진국들에게 모델로 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들 나라 모두가 지금 다른 민족들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9]

6. 세 유형의 나라들 – 민족자결과 관련하여

이러한 측면에서 나라들을 세 유형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첫째, 서유럽과 미국 등 선진자본주의 나라들. 이 나라들에서는 진보적 부르주아 민족운동이 오래 전에 종결되었다. 이 ‘강대한’ 민족들은 모두 식민지와 국내의 타 민족들을 억압하고 있다. 이러한 지배 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는 아일랜드에 관한 19세기 영국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와 같다.[10]

둘째, 동유럽, 즉 오스트리아, 발칸 제국, 그리고 특히 러시아. 여기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민족운동이 특히 발전하고 민족 투쟁이 격화되었던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였다. 이들 나라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개혁을 완수할 때나 다른 나라들에서의 사회주의혁명을 지지할 때나 민족자결권을 옹호하지 않고서는 수행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임무는 억압 민족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을 피억압 민족 노동자들의 계급투쟁과 융합시키는 것이다.

셋째, 인구가 도합 10억에 달하는 중국, 페르시아, 터키와 같은 반(半)식민지 나라들과 모든 식민지 나라들. 이 나라들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이 이제 겨우 시작되었거나, 전혀 완성되지 않았다. 사회주의자들은 무배상의 즉각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식민지 해방을 요구해야 — 그리고 이 요구는 그것의 정치적 표현에서 자결권의 인정 이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 할 뿐 아니라, 이 나라들에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민족해방 운동의 보다 혁명적인 분자들에게 단호한 지지를 보내야 하며, 그들을 억압하는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여 그들의 반란을 — 그리고, 필요하다면 혁명 전쟁을 一 지지해야 한다.

7. 사회배외주의와 민족자결

제국주의 시대와 1914〜16년의 전쟁은 특히 선진국들의 배외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해 투쟁할 임무를 제기했다. 전쟁에 대해 ‘조국 방어’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그것의 제국주의적, 반동적 본질을 은폐시키는 사회배외주의자들, 즉 기회주의자들과 카우츠키주의자들 가운데에는 민족자결권에 대한 두 가지 주요 경향이 있다.

한편에는 제국주의와 정치적 집중이 진보적이라는 핑계로 병합을 옹호하고 민족자결권을 공상적, 환상적, 소부르주아적이라고 하면서 부정하는 부르주아지의 아주 노골적인 시종이 있다. 여기에는 쿠노, 파르부스와 독일의 극단적 기회주의자들, 영국의 페비언 파와 노동조합 지도 자들, 러시아의 기회주의자들 — 셈코프스키, 리프만, 유르케비치 등 — 이 속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카우츠키주의자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반데르벨데, 르노델, 영국·프랑스의 평화주의자 등이 있다. 그들은 전자와의 통일단결을 선호하며 실제로 그들과 완전히 동일하다. 즉 그들은 민족자결권을 위선적으로 말로만 찬성한다. 그들은 자유로운 정치적 분리에 대한 요구가 “과도하다” (카우츠키, <<노이에 차이트>> 1915년 5월 21일자)고 생각하며, 특히 억압 민족의 사회주의자들이 혁명적 전술을 필요로 함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혁명적 의무를 애매하게 하고, 그들의 기회주의를 정당화하며, 그들이 인민을 기만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고,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한 민족들을 자국 내에 강압적으로 복속시키고 있는 국가의 국경이라는 바로 그 문제를 회피한다.

두 그룹 모두 마르크스주의를 능멸하는 기회주의자다. 그들은 마르크스가 아일랜드를 예로 들면서 설명했던 전술의 이론적 의의와 실천적 긴급성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전부 상실했다.

병합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 문제는 전쟁으로 인해 특히 긴급한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병합이 무엇인가! 분명하다. 병합에 대해 항의한다는 것은 민족자결권을 인정한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그 항의가 평화주의 문구 ㅡ 현상유지를 옹호하며 혁명적 폭력을 포함한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ㅡ 에 기초한 것이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한 문구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마르크스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8. 당면한 미래에 프롤레타리아트의 구체적 임무

매우 가까운 미래에 사회주의혁명이 시작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장악하고 은행을 몰수하며 그 밖의 독재적 조치를 도입하는 등의 당면 임무에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부르주아지는 — 그리고 특히 페비언 파 및 카우츠키주의자 같은 지식인들은 — 혁명을 교란 와해시키고, 혁명을 제한된 민주주의적 목적에 한정 지으려고 애를 쓸 것이다. 모든 순 민주주의 요구들은 — 프롤레타리아가 이미 부르주아 권력의 보루를 쳐들어가기 시작한 시점에는 — 어떤 의미에선 혁명의 방해물로 작용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모든 피억압 민족들에게 자유 (즉 그들의 민족자결권)를 선포하고 부여할 필요성은, 예를 들어 1848년의 독일에서 또는 1905년의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승리를 위해 절실했던 것만큼이나 사회주의 혁명에서도 절실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이 시작되기까지는 5년, 10년, 심지어는 그 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사회주의적 배외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이 노동자 당에 속하여 1914〜16년의 경우와 비슷하게 승리를 거두는 것이 가능하지 않도록 혁명적 정신으로 대중을 교육하는 것이 과제일 것이다. [진실된] 사회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야바위] 사회주의자들을 폭로하고 대중에게 다음을 설명해야 한다. 식민지와 아일랜드를 위해 분리의 자유를 요구하길 거부하는 영국의 사회주의자들, 식민지와 알자스인, 덴마크인, 폴란드인을 위해 분리의 자유를 요구하길 거부하는 독일의 사회주의자들, 직접적인 혁명적 선전과 혁명적 대중행동을 민족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의 장에까지 끌어오길 거부하는 독일의 사회주의자들, 차베른 사태와 같은 사건들을 억압 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 속에서 광범한 비합법 선전을 수행하고 가두시위와 혁명적 대중행동을 조직하는 데 이용하길 거부하는 독일의 사회주의자들, 핀란드, 폴란드, 우크라이나를 위한 분리의 자유를 요구하길 거부하는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 등등 — 이러한 사회주의자들이 배외주의자로 행동하고 있고, 피와 오물로 얼룩진 제국주의 군주정 및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의 시종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대중에게 설명해야만 한다.

9. 자결에 대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와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의 태도, 그리고 제2인터내셔널의 태도

민족자결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 간의 차이는 일찍이 1903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강령이 채택된 당 대회에서 수면 위로 나타났다. 강령에는 폴란드 사회민주당 대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족자결권을 인정하는 제9항이 채택되었다. 그 이후로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들 당의 이름으로 우리 강령 9항을 삭제하자거나 또는 다른 정식화로 대체하자는 제안을 다시 한 적이 없다.

러시아 一 피억압 민족들이 인구의 57%로, 1억 명 이상이나 되고 주로 변경 지역에 거주하며 그 일부는 대러시아인보다 훨씬 개화되었으며, 그리고 정치체제가 특히 중세적이고 야만적인 성격으로 두드러지며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아직 완료되지 않은 곳인 러시아 — 에서 차리즘에 억압 받는 민족들이 러시아로부터 자유롭게 분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민주주의 과제와 사회주의 과제를 해결해야 할 사회민주주의자에게는 절대적인 의무다. 1912년 1월에 재건된 우리 당은 1913년에 민족자결권을 재확인하고 위와 같은 구체적인 의미로 정확하게 설명한 결의안을 채택했다.[11] 1914〜16년 부르주아지와 기회주의적 사회주의자들(루바노비치, 플레하노프, <<나셰 델로>> 등) 속에서 대러시아 배외주의(쇼비니즘)가 널리 퍼졌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 같은 요구를 주장하고, 또 그것을 부정하는 자들을 대러시아 배외주의와 차리즘의 실질적인 지지자로 간주할 수 있는 훨씬 더 많은 이유를 갖게 되었다. 우리 당은 자결권에 반대하는 그러한 행동에 대해 일절 책임지길 가장 단호하게 거부한다고 선언한다.

민족 문제에 대한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가장 최근의 정식화 (치머발트 회의에서의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선언)는 다음과 같은 생각들을 담고 있다.

선언은 독일 및 그 밖의 정부들이 “폴란드 지역”을 다가올 배상협상에서 볼모로 간주하고 “폴란드 인민에게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을 비난한다.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온 나라를 분할하여 나누어 갖는 것에 단호히 그리고 준엄하게 반대한다.” ……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피억압 인민의 해방”을 호엔촐레른 가(家)에 미루는 사회주의자들을 규탄한다.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다가올 국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참가하는 것만이 “민족 억압의 족쇄를 깨부수고 모든 형태의 외국 지배를 철폐하며, 폴란드 인민에게 국제연맹의 동등한 성원으로서 자유롭고 전면적인 발전 가능성을 보장할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한다. 선언은 “폴란드인에게 전쟁은 이중적으로 동족상잔”임을 인정한다. (<<국제사회주의위원회 회보>> 2호, 1915년 9월 27일, 15쪽. 러시아어 번역은 심포지움 <<인터내셔널과 전쟁>>, 97쪽.)

이러한 명제들과 민족자결권 인정, 그 둘 사이에는 내용 상 아무 차이가 없다.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정치적 정식화가 제2인터내셔널의 강령과 결의 대부분에 비해 훨씬 장황하고 모호하다는 점을 빼고는 말이다. 이러한 생각들을 정확한 정치 정식들로 표현하려고 시도할 경우,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적용되는가 아니면 사회주의 체제에만 적용되는가를 결정하려고 시도할 경우 여지없이,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민족자결을 부정하는 데서 범한 오류가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민족자결을 인정한 1896년의 런던 국제사회주의자대회의 결정은 위의 명제들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은 언급으로 보충되어야 한다.

1) 제국주의 하에서는 이러한 요구가 특히 긴요하다는 것

2) 현재 토론 중인 것도 포함하여 모든 정치적 민주주의 요구의 정치적으로 조건적인 성격과 계급적 내용

3) 억압 민족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구체적 임무와 피억압 민족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구체적 임무를 구별 지을 필요가 있다는 것

4) 기회주의자와 카우츠키주의자들의 자결에 대한 인정은 불철저하고 순 말뿐이며, 따라서 그것은 정치적 의미에서 볼 때 위선적이라는 것

5) ‘자’ 민족에 의해 억압 받는 식민지들과 민족들의 분리의 자유를 옹호하길 거부하는, 특히 강대국들 (대러시아인, 앵글로 아메리카인, 독일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일본인 등)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실제로 배외주의자와 동일하다는 것,

6) 현재 토론 중인 요구 및 모든 기본적인 정치적 민주주의 요구를 위한 투쟁을 부르주아 정부의 타도와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한 당면한 혁명적 대중투쟁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것.

몇몇 소민족의 관점, 특히 민족주의 슬로건으로 인민을 기만하고 있는 폴란드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자결에 대한 부당한 거부로 잘못 나아간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관점을 인터내셔널에 이식하는 것은 이론상의 오류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를 프루동주의로 바꿔치기하는 것이며, 실제로 강대국 민족들의 가장 위험한 배외주외와 기회주의에 아무 생각 없이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결과할 것이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기관지 <<사회민주주의자>> 편집국

추신

막 발행된 《노이에 차이트》 1916년 3월 3일자에서 카우츠키는 가장 추잡한 독일 배외주의의 대표자인 아우스터리츠(Austerlitz)에게 기독교적인 화해의 손을 공공연하게 내밀었다. 이는 힌덴부르크와 빌헬름 2세에게 바치는 비굴한 봉사로서, 합스부르크 왕가 오스트리아의 피억압 민족들에게는 분리의 자유를 부정하면서 러시아령 폴란드에 대해서는 분리의 자유를 인정한다. 어느 누구도 이보다 더 나은 카우츠키주의의 자기 폭로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각주

  1. 드레퓌스 재판 - 간첩행위와 대역죄로 무고하게 기소된 참모본부의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를 상대로, 프랑스 군국주의자들 중의 반동적인 왕당파 집단이 제기한 1894년의 조작된 재판. 군법회의는 그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사건의 재심을 요구하는 대중운동이 공화주의자와 왕당파 간의 맹렬한 투쟁이라는 형태로 일어났고, 결국 1906년에 그는 석방되었다. 레닌은 드레퓌스 사건이 “반동적인 군사적 특권계급이 저지른 수천의 기만적인 속임수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2. 차베른(Zabern) 사건 - 이 사건은 1913년 11월에 알자스의 자베른에서 알자스 인에 대한 한 프러시아 장교의 야만적 행위로 말미암아 일어났고, 지역주민들, 주로 프랑스인들이 프로이센 군국주의자들에 대해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레닌, <자베른>, 레닌 전집, Vol. 19, pp. 513〜515를 보라.)
  3. 1867년 11월 2일자 및 11월 30일자로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마르크스 · 엥겔스, <<선집>>, 모스크바, 1955년, 234-237쪽)
  4. ‘문화적-민족적 자치’라는 레너와 바우어의 반동적 사상에 대한 비판에 관해서는 레닌의 <문화적-민족적 자치>와 <민족 문제에 대한 논평>을 보시오.
  5. 레닌 주: 민족자결권을, 그것이 논리적으로 ‘조국 방어’를 의미한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어리석은 짓이다. 1914〜16년에 사회배외주의자들은 똑같은 논리로, 즉 똑같은 경박함으로, ‘조국 방어’를 정당화하기 위해 모든 민주주의 요구 (예를 들어 공화제)와 민족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의 모든 정식화에 이 논거를 적용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예를 들면 유럽에서 프랑스 대혁명기의 전쟁 및 가리발디 전쟁에서의 조국 방어 인정과, 1914〜16년의 제국주의 전쟁에서의 조국 방어 부인을, 개개의 각 전쟁의 특수 역사적 상황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도출하지, 결코 어떠한 ‘일반 원칙’이나 강령의 어떤 한 조항으로부터 도출하지 않는다.
  6. 마르크스, <믿을 만한 보고>(“Konfidentielle Mitteilung”).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설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의 문서보관소에 소장된 초고에서 인용함.
  7. [7] 엥겔스, <프라하 봉기>, <<신라인신문>>, 18호, 1848년 6월 18일.
  8. [8] 아일랜드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의 입장은 1869년 11월 29일자 쿠겔만(Kugelmann)에게 보낸 편지와 그 해 12월 10일자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마르크스 · 엥겔스, Selected Correspondence, pp. 276〜278과 pp. 279〜281)에 언급되어 있다. 레닌은 1867년 11월 2일자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했다.
  9. [9] 예를 들어 1848년 체코의 민족운동에 대한 반대와 같은, 어떤 민족들의 민족운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반대는 마르크스주의적 견지에서 민족자결권을 인정할 필요성을 반박하는 증거라고는 주장 — 예를 들면 최근 <<종(鐘)>> 8호 및 9호에서 독일의 배외주의자 렌쉬가 한 주장 — 이 왕왕 제기된다. 그러나 이것은 틀렸다. 왜냐하면 1848년에는 ‘반동적’ 민족과 혁명적-민주주의적 민족을 구별할 만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전자를 비난하고 후자를 옹호한 것은 옳았다. 민족자결권은 민주주의의 일반적 이익에 당연히 종속되어야 하는 민주주의 요구 가운데 하나다. 1848년과 그 이후의 몇 년간 이러한 일반적 이익은 일차적으로 차리즘과 싸우는 데 있었다.
  10. [10] 1914〜16년의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던 몇몇 작은 나라들 — 예를 들어, 네덜란드, 스위스 — 에서 부르주아지는 제국주의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자결’ 구호를 광범위하게 이용한다. 이것이 그러한 나라들의 사회민주주의자들로 하여금 자결을 거부하도록 하는 동기다. 제국주의 전쟁에서의 ‘조국 방어’ 거부라는 올바른 프롤레타리아 정책을 옹호하는 데 잘못된 논거들이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의 왜곡을 결과하며, 실천적으로는 특유한 소민족적 편협함과 ‘지배적’ 민족들에 의해 노예화된 민족의 수십억 인민들에 대한 무시로 귀결된다. 호르터 동지는 그의 훌륭한 소책자 <<제국주의와 전쟁과 사회민주주의>>에서 민족자결의 원칙을 부당하게 부정하고 있지만, 그가 네덜란드령 인도에 ‘정치적 • 민족적 독립’을 즉각적으로 부여할 것을 요구하고, 그리고 이 요구를 제출하고 그것을 위해 싸우기를 거부하는 네덜란드 기회주의자를 폭로할 때에는 그것을 올바르게 적용하고 있다.
  11. 결의안은 민족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레닌이 썼고, 1913년 10월 6〜13일까지 크라코프 근방의 포로닌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채택되었다. 보안상의 이유로 그 회의는 ‘여름’회의 또는 ‘8월’회의로 알려졌다. 결의안의 원문에 대해서는 레닌 전집 19권, 427〜429쪽을 보라.